감추어진 삶(The Buried Life)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월든Walden 호숫가 숲속에 통나무집을 짓고 2년간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그가 숲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인생을 의도적으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다.”라고 했다.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이란 무엇을 뜻할까. 그가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를 아는 자기 정체성 찾기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내부에 깊숙이 감추어진, 삶의 궁극적 목적을 끌어내어 이 땅에서 영원을 향해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전도서 기자는, “창조주가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그분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라고 인간의 본성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철학 교수이자, 사역자이며, 세계관 전문가인 데이비드 노글David Naugle은 그의 저서 《세계관》에서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종교를 추구하며 삶의 비밀을 이해하고자 하는 갈증이 있다“라고 했다. 이는 창조주가 설계한 인간 본성 때문일 것이며,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굶주림이 인간의 마음속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의 시, 〈감추어진 삶〉의 시구보다 이런 갈망을 더 효과적으로 표현한 글은 없다고 했다.
매슈 아널드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의 시 〈감추어진 삶〉은 영국 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이 시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겪었던 영적, 종교적 상실감과 자아의 위기를 반영한, 단절된 인간의 조건에 관한 성찰이고, 삶의 의미에 관한 추구이며, 수많은 독자에게 영감을 주어 생각하게 하는 울림이다.
이 장시는 일곱 개의 연(連)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감추어진 삶’을 알고 싶은 욕망이 가장 두드러진 제6연의 첫 번째에서 열째 시행(詩行)에서는 잠재의식 깊숙이 묻힌 인간의 감정과 사고가 언제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소란스러운 싸움터에서도 형언할 수 없는 욕구가 일어나게 된다고 했다. 이런 욕구는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거나 이해되는 것이 아님을 표현하고 있다. 이 욕구는 감추어진 우리의 삶의 지식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며, 탐구의 열정으로 나오는 산물임을 격정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누구나 스스로에 속한 ‘감추어진 삶’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게 되고, 그 경험 깊은 곳으로 탐구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마지막 3개 시행에서 아름답고 명료하게 요약되어 있다.
“우리의 삶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 안에 이토록 사납게, 이토록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이 ‘마음의 신비’를/ 탐구하고자 하는 갈망이 솟구친다.”
지혜의 제왕 솔로몬이《잠언》에서 “지킬만한 모든 것 중에서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라는 경구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저녁노을에 지는 해를 바라보는 연수가 되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인 ‘감추어진 삶을’ 과연 충실히 탐구하며 살아내었는지를 물어보게 된다.
부모님의 자식으로 가장으로 부모로서, 그리고 아내의 남편으로의 관계에서 최선을 다했는지. 공동체와 사회의 구성원인 시민으로, 개인으로서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을 성실히 살아내었는지.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서 보편적 가치를 따라 자신을 구현해 낸 삶을 후회 없이 살았는지. 무엇보다 자기 땅에서 나그네로 살며, 영원을 향한 구도자의 모습으로, ‘신비한 마음’을 지키며 살아왔는지.
매슈 아널드의 시,〈감추어진 삶〉은 우리에게 많은 물음을 던져준다. ‘드러난 삶’에서도 무엇 하나 자신 있게 보여줄 것도, 남길 것 없이 게을렀던 삶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새해엔 잠재의식 속에 감추어진 의미를 하나씩 꺼내어 자유인의 모습으로 여유를 가지며, 남아있는 시간을 정리하며, 항상 그분 앞에 어떻게 설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