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픽으로 뽑힌 뒤 루디 톰자노비치 감독과 함께
오늘은 휴스턴의 [걸어다니는 만리장성] 야오밍에 대해서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2002년 아시아인으로써는 최초로 NBA 드래프트 1번으로 지명된 야오밍은 데뷔시즌부터 센세이션한
활약을 펼치면서 굉장히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국대차출과 너무나 큰 몸을 이기지 못한 부상이 잇따르면서 지난시즌이 끝난뒤에 , 그는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229cm의 키만큼이나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야오밍의 NBA입성부터 은퇴후 모습까지 , 짧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 Yao Ming in China *
상하이 샤크 시절 왕즈즈와 매치업을 가지며..
야오밍은 1980년 9월 12일에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Yao Zhiyuan 는 키가 2미터 1, 어머니인 Fang Fengdi 는 190cm 의 장신이었으며, 모두 중국 국가대표 출신이었습니다. 큰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야오밍은 10살때 키가 이미 165cm에 달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농구가 국가적인 스포츠로, 키가 큰 아이들은 일찌감치 정부에서 관리하는것으로 유명합니다. 야오밍은 당시 조사에 의하면 7피트 3까지 클 것으로 예측되었고, 특별 관리에 들어갈 정도로 일찌감치 중국농구의 미래로 기대받기도 했습니다.
13살때 샹하이샼스의 주니어팀에 들어가면서 야오밍은 본격적으로 농구커리어를 시작하게 됩니다.
17살이 되었을때 샹하이샼스 프로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첫해 17세에도 불구하고 10점-8.3리바운드를 기록한 야오밍은, 이듬해에 큰 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시합도중 발이 골절되는 부상을 겪게되고, 이로 인해 야오밍은 점프력이 꽤나 줄게됩니다 (10~15cm정도가 줄었다네요)
하지만 이듬해 성공적으로 복귀하고, 00-01과, 01-02시즌에서는 명실상부한 CBA최고의 선수로 거듭납니다. 00-01시즌 왕즈즈의 바이로켓츠에게 챔피언을 내준 야오밍은 왕즈즈가 NBA로 진출한 이듬해, 마침내 처음으로 CBA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 챔피언 결정전에서 야오의 성적은 평균 38.9점, 20.2리바운드. 그리고 76.6%였습니다. 이때 야오밍의 나이 약관 21세.
밑의 표는 야오밍이 중국리그에서 기록한 기록입니다
* " Welcome To NBA, Yao " *
2002년 드래프트 1번으로 뽑힌 야오 밍
야오밍 이전에 숀 브래들리(7피트 6인치), 게오르그 뮤레산(7피트 7인치) 마누트 볼(7피트 7인치) 같이 큰 선수들이 없던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선수 모두 키에 비해 웨이트가 약했고, 그리고 키만 큰 멀대의 이미지만 남겨줬던것이 사실입니다. 야오밍이 드래프트 될 때에도 이러한 우려가 많았었고, 당시 로켓츠의 스타 플레이어인 스티프 프랜시스도 이에 대해 우려를 표했습니다. (하지만 야오밍의 팀 합류후에는 반갑게 맞이해주며 절친으로 거듭났죠)
야오밍은 큰 키와 전체 1순위라는 그 화제성 하나만으로도 NBA의 많은 팬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후 (한국에게 져 은메달) 02-03시즌부터 커리어를 시작한 야오밍은 NBA드래프트까지의 길도 험난했습니다.
야오밍은 99년도에 이미 NBA진출을 하려고 했으나, 당시 evergreen sports와의 계약관계에서 난항을 겪으면서 실패한후 , 2002년에 다시 진출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야오밍은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중국정부가 관여된 선수였고 중국정부는 야오밍을 "중국인이 많은 도시가 있는 팀으로 입단할것", "국가대표 경기가 있으면 무조건 참석할것" 등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운채로 드래프트에 참여했습니다. 이에 몇몇 전문가들은 야오밍을 뽑기란 굉장히 고민될것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휴스턴 로켓츠가 이러한 요구조건을 모두 수용하며 야오밍을 뽑게됩니다.
인디애나와의 역사적인 데뷔전을 가진 야오밍은, 그러나 무득점에 그치면서 높은 NBA의 벽을 맛봅니다. 첫 6경기에서 단 20점에 그친 야오밍을 두고, 찰스 바클리는 "야오밍이 올시즌 19점 이상 기록하면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를하겠다"라는 조롱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야오밍은 다다음 경기인 레이커스전에서 9/9의 야투율로 20점을 기록하면서 바클리의 코를 납짝하게 만듭니다. 야오밍은 시즌 7번째경기부터 11경기째까지 5경기동안 36/43의 야투를 기록했는데. 이것은 NBA기록이기도 했습니다.
댈러스전에서 무려 30점에 12리바운드를 기록한 야오밍은, 팀던컨-데이비드로빈슨의 트윈타워를 상대로 27점에 1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NBA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립니다. 2003년 1월 17일 샼과의 첫 맞대결로 많은 화제를 낳았던 야오밍은, 샼의 첫 2번의 필드골을 블록하는등 10점 10리바운드 6블록으로 굉장히 호성적을 거두면서 또한 인정을 받게 됩니다.
* 프랜시스부터 맥그레이디까지 *
휴스턴은 80년대 모제스말론과 엘빈헤이즈, 그리고 90년대에는 올라주원,바클리,드렉슬러등 굉장히 많은 스타가 지나간 인기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올라주원의 노쇠화와 이적으로 암흑기를 보내던 휴스턴은 스티프 브랜시스와 야오밍을 데려오는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번 부흥기를 노립니다.
하지만 03-04시즌 플레이오프1라운드에서 탈락을 하면서 한계를 느낀 휴스턴 수뇌부는 올랜도와의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당시 최고의 스타이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를 데리고 오는데 성공합니다.
맥그레디, 주완하워드, 타이론 루, 리스 게인스 <---> 프랜시스, 쿠티노 모블리, 켈빈 케이토
당시 야오밍과 굉장히 궁합이 잘 맞던 케이토를 내보낸것은 아쉬웠지만,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득점기계였던 맥그레이디와 베테랑 플레이어 주완 하워드를 영입하면서 휴스턴은 단숨에 우승후보이자 리그 최고의 인기팀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맥그레이디와의 첫 시즌에 휴스턴은 댈러스와 만나지만 4-3으로 아쉽게 지고 맙니다. 당시에 상당히 석연치 않은 콜이 많았는데, 후에 이 경기에 심판조작이 있었다는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 뒤에도 트레이드를 통한 베티에 영입, 스콜라, 아테스트 영입등으로 휴스턴은 지속적으로 대권을 노리지만 그때마다 야오밍과 티맥이 번갈아 부상을 당하면서 결국 2라운드 진출 한번으로 끝나고, 티맥은 09-10시즌에 뉴욕으로 트레이드 되었고, 야오밍은 10-11시즌이 끝난 후 은퇴를 발표하면서 맥밍 듀오는 그렇게 끝이나게 됩니다.
* 부상과 함께 얼룩진 NBA 커리어, 그리고 국제대회 *
야오밍은 첫 NBA 3시즌동안 단지 2게임에만 결장할 정도로 우수한 내구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05-06시즌부터 시작된 부상악령은, 그칠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맥그레이디 또한 계속되는 부상을 당했었죠
05-06시즌 : 왼쪽 엄지발가락 골수염으로 21경기 결장
왼쪽 발 골절 (유타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06-07시즌 : 오른쪽 무릎 부상으로 34경기 결장
07-08시즌 : 피로골절로 27경기 결장
08-09시즌 : 왼쪽 발 골절 (LAL과의 플레이오프 2라운드 3차전)
09-10시즌 : 왼쪽발 골절 재활로 인해 한시즌 전체 시즌아웃
10-11시즌 : 왼쪽 발목 피로골절로 시즌아웃 (5경기 출전)
이처럼 05-06시즌이 시작되고, 야오는 매시즌마다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나마 정규시즌 77경기를 뛰었던 08-09시즌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포틀랜드를 꺾고 96-97시즌 이후 12년만에 2라운드 진출이라는 좋은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이 시리즈에서 야오밍은 큰 부상을 당하면서 결국, 이 뒤로 야오밍은 2년동안 5경기에만 나오는데 그쳤습니다.
야오밍이 이렇게 부상을 많이 당하게 된 이유에는, 그의 큰 체격과 더불어 굉장히 바빳던 오프시즌, 즉 국제대회참가가 있었기 떄문입니다. 야오밍은 하체가 NBA선수중에서 가장 좋은 선수였었고, 체격 밸런스도 좋았지만 기본적으로 229센티에 150kg가까이 나가는 선수였기때문에 관리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엄청나게 힘든 NBA시즌과, 중국 국가대표팀까지 활동을 하기에는 야오밍의 몸이 견디질 못했습니다
2004년 올림픽에서 중국선수단의 기수를 맡았던야오
다음은 야오밍이 참가한 국제대회입니다.
올림픽 : 2000년, 2004년. 2008년
아시안컵 : 2001(우승), 2003(우승), 2005(우승)
아시안게임: 2002(준우승)
세계선수권 : 2002, 2006
보시다시피 , 야오는 중국의 거의 모든 국제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심지어 05-06시즌 큰 부상을 당한 이후에도 2006년 세계선수권에 참가했으며, 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시즌아웃이 되는 큰 부상을 당했지만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아시아권에서는 불세출의 스타였으며, 어쩔 수 없는 행보이기도 했습니다. 굳이 쉬워도 될 상황에서도 의지를 불태우면서 나가기도 했었지요. (2008년이 가장 큰 예입니다)
결국, 야오는 충분히 쉬어야하고 남보다 더 쉬어야할때, 계속해서 국제대회에 참가했으며, 그것은 가드포지션이 아닌 센터포지션의 선수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은퇴식에서 눈물을 보였던 야오밍
결국 야오밍은 10-11시즌이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2011.7.20)
2002년부터 시작해서 채 10년도 채우지 못했고, 그 절반은 부상으로 못나왔던 아쉬운 커리어였습니다.
아직 야오밍의 나이 32살. 정상적이라면 최소 5년은 더 뛸 수 있었던 그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습니다.
* 야오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올스타 : 8차례 (02,03,04,05,06,07,08,09,11) <--- 07,11 불참
ALL-NBA 세컨드 팀 : 2회
ALL-NBA 서드 팀 : 3회
ALL-NBA 루키 퍼스트팀 1회
<국제대회성적 >
2001,2003,2005 아시아 챔피언쉽대회 우승
2001,2003,2005 아시아 챔피언쉽대회 MVP
2002년 세계선수권 All- Tournamen Team 선정
통산 486경기에 출장, 32분 30초동안 19.0득점 9.3리바운드를 기록했습니다. 어찌보면 경기수가 참 초라해보이네요. 82경기로 따지면 6시즌도 채 못뛰었으니까요. 하지만 야오밍은 굉장히 큰 임팩트를 남겼습니다. 229센티미터의 큰 키에도 불구하고 코스트 - 투 - 코스트를 할만큼 기동력을 갖췄으며, 센터로써는 굉장히 뛰어난 중거리슛을 갖췄으며, 역대 어느 센터보다 자유투가 정확했습니다(통산 83.3%)
또한 야오밍의 훅슛은 NBA에서 가장 확률높은 무기중 하나였기도 했습니다. 229센티의 키에서 나오는 훅슛, 상상만 해도 무섭지 않나요?
하지만 야오는 동시에 굉장히 많은 불이익을 거두었습니다. 워낙 덩치가 커서 파울이 잘 불려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엄한 파울도 많이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야오가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부당한 콜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중국이 국제대회에서 번번이 토너먼트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야오밍의 선전이 컸습니다. (04년,08년 올림픽 8강, 2002,2006년 세계선수권 16강 )
샤킬오닐은 "야오밍은 최고의 센터였다. 그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기도 했다, 그가 그리울 것이다"라는 언급을 하였으며 야오밍을 직접 지도했던 전 휴스턴감독 제프 벤 건디는 "야오밍은 나에게 최고의 선수다. 그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만 하다. 건강한 야오밍은 정말 위대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제프 벤 건디에 이어 지휘봉을 잡은 릭 아델만 감독은 "사람들은 야오밍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훌륭한 공격능력과 큰 키를 활용한 효율적인 수비능력을 고루 갖춘 훌륭한 선수였다"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야오밍은 "애 하나 더 낳고 싶어요"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ㅋㅋㅋ
2007년에 열렬한 구애 끝에 예리와 결혼에 성공!!
(부인도 중국 여자 국가대표입니다)
* After Retirement ...... *
와인사업을 시작한 야오밍
야오밍은 은퇴 이후에 상하이 자오통대학에서 새내기 대학 생활을 시작했으며, 휴스턴에 레스토랑을 만들었고, 와인사업에도 뛰어들면서 분주한날을 보냈습니다.
최근에는 상하이 정협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걷고 있기도 합니다.
* 글을 마치며..... *
저는 야오밍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NBA를 본격적으로 접하던 시기가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 야오밍에게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받은 이후였으니까요. 자연스레 야오밍을 따라 응원하게 되었고, 그것이 휴스턴을 응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인으로 들어와 입성 3년차에 최고의 센터중 하나로 발돋움했지만, 잇단 부상으로 인해 티맥과의 시너지효과를 낸 경기가 많지 않다는것은 정말로 아쉬운 일입니다.
맥밍 듀오는 가장 뛰어난 2-5번 조합이었지만,가장 부상이 많은 조합이기도 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07-08시즌이 가장 생각이 나네요.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기다리면서, 어떤 선수를 보강할 것인가에 대해 굉장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야오밍의 피로골절 소식이 나오면서 굉장히 허탈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만사 아무도 모른다고, 그 이야기가 딱 어울렸었죠.
동양인이라서 더 응원했었고, 그러기에 좀 더 오래 뛰어주고 잘해주길 빌었지만, 아쉽게도 야오의 농구선수로써의 커리어는 끝이 났습니다.
우리에게 수많은 짤방으로 웃음을 주고, 그리고 같은 동양인이라 자부심을 느끼게 해줬던 그를 이제 더이상 코트에서 볼 수 없다는것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아직도 휴스턴을 응원하면 야오가 어디선가 앉아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앞으로, 아시아인이 전체 1번으로 뽑히는 날이 또 올 수 있을까요?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겠죠. 앞으로 많은 아시아인들이 NBA에 등장하기를 기대해봅니다.
이제, 그의 제 2의 또다른 인생이 좋은 길로 가기를 진심이로 기원합니다. ^^
그가 진심으로 그리울 것 같네요.. ㅠ.ㅠ
그의 기쁨과 애환이 모두 담겨져 있는 믹스
Good Bye, Yao
첫댓글 좋은내용 감사합니다 ㅎㅎ
아! 저 마지막 짤이 야오밍이였군요..
저의 no.1 센터
잘 읽었습니다~ 처음 드래프트 되고, 오닐,던컨,로빈슨 등을 상대로 선전하는 모습을 보고 팬이 되었는데..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저도 맥밍 조합에 반해 로켓단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맥밍듀오 결성 첫시즌이 참 기억에 많이 남네요. 시작부터 두녀석이 서로를 에이스라면서 치켜주더니 결국 시즌초반 리더없이 표류하는 로켓단이었죠. 결국 티매기가 샌안전에서 사고를 치면서 티매기를 중심으로 팀이 점점 하나가 되어가고, 밴건디 감독의 탄탄한 수비전술이 더해지면서 로켓단은 리그내 몇안되는 끈끈한 팀으로 변모했습니다. 이렇게 팀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본 팬이라면 누구나 로켓단의 매력에 빠져 여지껏 헤어나오질 못할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배드엔딩에 애매모호한 팀이 되어 버렸지만 제가 아직도 이팀에 빠져있게된 계기는 티맥과 야오겠죠?
그 둘의 앞날에 밝은 일만 가득하길 빕니다. 아, 로켓단도 화이팅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