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사상과 카타르시스, 그리고 사도마조히즘 / 마광수
‘카타르시스’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6장에서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을 통하여 감정을 카타르시스(catharsis)시킨다”고 말했다. 이 때 카타르시스는 정화(淨化) 또는 배설을 의미하며, 비극 또는 문학이 독자에게 주는 효용을 설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비극이 쓸데없이 인간의 감정을 고양시켜 이성적 생활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던 그의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 생활에서의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감정을 적절히 배설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이에 그는 이열치열식의 방법을 주장해 비극이 인간의 감정을 자극시킴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감정들을 진정, 해소시키고 쾌적한 균형감과 안정감으로 인도하는 심리적 효과를 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상 카타르시스는 의학적인 뜻이 더욱 강한 말이기도 하며, 우리 몸 안의 찌꺼기를 사하시켜 병을 치료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생리학에 관심이 깊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용어를 정서생활에 적용시킨 것이다. 즉 카타르시스라는 말은 도덕적 의미로서의 순화(purificatio)라는 뜻과 종교적 의미로서의 깨끗게 함(lustratio) 또는 속죄(expiatio), 그리고 의학적 의미로서의 배설(purgatio)이라는 뜻이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8권 「음악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술이 주는 효용을 우선 의학적인 의미의 카타르시스 효과에 있다고 본 것 같다. 즉 일종의 ‘정서적 요법’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카타르시스의 의미에 대해서, 서양인들은 플라톤의 이성주의적 세계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속에서 이를 ‘억압된 욕구의 대리적 배설’로만 보지 않으려는 시도를 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카타르시스는 비극적 고통 저 너머의 어떤 지혜나 직관에 도달하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고 보는 입장이다. 르네상스에서 고전주의 시대까지는 많은 문학이론가들이 카타르시스의 의미를 교훈주의적 효용론에서 해석해 비극이 실제로 겪게 될 불행에 일종의 면역효과를 주어서 인내의 정신을 길러준다거나, 주인공의 격렬한 감정이 비극을 초래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열정을 순화, 억제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였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카타르시스를 ‘신비로운 쾌감’을 얻는 효과로 보아, 우주적인 비극의 숭엄함과 장엄함에 압도되어 세속적인 공포와 연민을 잊는 것, 그리고 그 앞에서 그저 승복하고 마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결국 여태껏 카타르시스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배설을 통한 심리적 쾌감’이나 ‘작품을 통해서 얻어내는 지혜, 또는 도덕적 순화나 새로운 인식의 체험’의 범주 안에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심미적 측면의 해석이 있으나 이 또한 쾌감의 측면에 해당한다.
먼저 우리는 카타르시스의 일차적 의미인 배설의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람의 신진대사는 먹는 것과 배설하는 것 두 가지로 이뤄지는데, 먹을 걱정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대에 있어 오히려 중요한 것은 싸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배설행위를 즐거운 일로 보느냐 더러운 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시대의 문화풍토가 달라질 수 있다. 대체로 정신주의적 풍토가 강하면 배설을 더러운 일로 여기고 기피하게 되며, 역으로 배설이 제대로 안 되면 정신주의 풍토가 이뤄지기도 한다. 반대로 배설을 즐겁고 당연한 일로 여기는 환경에서는 육체중심의 문화풍토, 나아가서는 정신과 육체를 일원론적으로 파악하는 문화풍토가 이룩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인간·육체·쾌락 중심의 문화풍토가 이뤄졌었다. 그가 연극의 목적을 자연스레 배설에 둔 것도 이러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세 이후 서구사회가 점차 금욕주의적 정신주의 풍토로 변해가면서 육체와 배설행위는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에 변소가 없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따라서 당시의 지독한 변비증은 여러 신체적·정신적 증상을 통해 그 시대의 모든 문화형태를 도착적인 것으로 굴절시켜 버렸다. 이처럼 배설 기피로 인한 히스테리나 우울증, 이중적 자기은폐나 자기기만 등이 프로이트 식의 설명에 따르면 초자아가 본능을 과도하게 억압하게 되면서 결국 광신적 신앙이나 편집광적 금욕주의, 전체주의적 국가주의 같은 것들을 낳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유럽의 병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프로이트 이론은 따라서 자연히 배설의 문제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든 성인들의 병적 심리현상이 유아기 때의 거세공포와 구강성욕의 불만족, 배변을 통한 항문성욕의 불만족 등에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배설물 자체에 대해 유아는 어른과는 달리 그것을 자기 신체의 일부처럼 여기지만, 어른들에 의해 배설이 천한 것임을 교육받는 경우 각종 콤플렉스를 안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극동문화권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요강과 타구가 비치되어 있었고 중국에서는 예쁜 변기가 혼수품이었을 만큼 배설의 문제를 중시해왔다. 특히 한방의학 이론은 의학적으로도 배설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뤄왔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배설을 중시하였으나, 이는 정신과 육체를 일원론적으로 파악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동양에서는 기(氣)의 개념을 통해 정신이 육체의 병을 초래해도 거꾸로 육체를 치료해 정신을 고치는 일원론적 치병철학을 발전시켜 왔고, 바로 이 기(氣)의 개념을 통해 카타르시스의 의미와 연결점을 갖게 된다.
특히나 육체적인 울체와는 달리 정신적인 울화 또는 욕구는 대리배설을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직접적 행동에 의한 대리배설과 스포츠, 예술 등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이 있는데 역사적으로 그리스 극은 표면 - 이면 주제의 괴리를 통해 은폐된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왔고, 로마 극은 좀 더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인 방식을 사용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카타르시스는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을 그 조건으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13장에서 “연민은 주인공이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생기고, 공포는 우리와 비슷한 주인공이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생긴다”고 말했다. 즉 연민과 공포는 비극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근본적인 감정의 두 가지 양태인데, 연민은 ‘남’이 불행에 빠지는 것에 대한 감정이라면 공포는 마치 ‘내’가 그 불행에 빠진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느끼는 감정인 것이다. 이에 대해 레싱 등은 연민을 공포에 비해 훨씬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개념으로 해석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연민과 공포는 모두 남의 고통을 볼 때 느끼는 심리적 쾌감이며, 굳이 주종관계를 따진다고 하더라도 공포가 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연민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훈련된 인간만이 느끼는 당위적인 감정이라면 공포는 동물이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민은 강자가 약자에게 느끼는 순간적인 감정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연민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관객은 일종의 사디스트에 속하는 셈이라면 공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관객은 일종의 마조히스트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디즘과 마조히즘 역시 서로 표리관계를 맺는 유사한 감정이기 때문에, 관객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연민과 공포는 사도마조히즘적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표현은 사회적으로 큰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한 정상적인 형태로 간주되어야 하며, 단순한 변태심리가 아닌 서로 상보적(相補的) 관계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실존의 형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다른 감정도 아닌 연민을 수반하는 공포만이 우리의 정서를 대리배설하는 걸까? 이는 한방의학의 인간관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한방의학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희(喜), 노(怒), 우(憂), 사(思), 비(悲), 공(恐), 경(驚)으로 파악하며, 정신과 육체의 일원론적 입장에서 이러한 칠정(七情)이 각각 오장에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희는 심장에, 노는 간에, 우와 사는 비장에, 비는 폐에, 공과 경은 신장에 속하게 되고 이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에서 말하는 공포의 감정은 한의학에서 말하는 공경의 감정에 해당하게 되고, 따라서 카타르시스 효과는 바로 신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신장은 대소변의 배변기능뿐만 아니라 생식기능까지 맡고 있다. 따라서 공포의 카타르시스적 효과는 ‘성욕’의 대리적 충족이나 배설이 되고 이러한 적당한 자극을 통해 생식력을 왕성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포가 단순한 공포가 아닌 ‘죽음에의 공포’라고 볼 때, 모든 동식물이 자신은 죽더라도 씨를 남겨놓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죽음에의 공포가 오히려 성욕의 배설로 이어진다는 것을 더욱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포와 연민을 통해 관객들은 정서적 안정감 또는 균형감을 얻게 되는데, 기존 서구의 이론에서는 이를 서로 모순관계에 있는 두 감정이 평형과 조화를 이루는 정서적 중용을 통해 카타르시스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보았으나, 한의학에서는 기와 칠정의 관계에 착안해 ‘공포심을 느끼면 기가 가라앉는다(恐則氣下)’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비극적인 장면을 보며 느끼는 공포심이 신장의 기능에 작용해 정서를 안정시키고 성욕을 대리적으로 충족한다는 것이다.
한방의학은 음양사상을 적용시킨 것으로 인체의 생명활동이 진음(眞陰)을 관장하는 신장과 원양(元陽)을 관장하는 심장이 서로를 견제하며 건강이 유지되는 것으로 본다. 이 때 음의 상징은 물이며 양의 상징은 불인데, 한의학에서는 음을 양보다 중시하고 물을 모든 생명력의 근원으로 본다. 또한 신장은 기를 관장하고 심장은 혈을 주관하기도 하는데, 이에 보음(補陰)을 중시하는 한의학은 ‘신수기(腎水氣)’를 보(補)하는 것을 중시한다. 이 때 신장의 생식욕은 식욕을 지배한다. 모든 음식물들이 성욕의 결과물이며, 경락의 분포에 있어서도 생식에 관계된 것이 거의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결국 카타르시스의 작용이 바로 신수기(腎水氣) 즉 진음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면, 이는 단지 성욕의 대리배설이나 대리충족을 넘어 인간 생명활동 전반에 작용하게 된다. 그런데 이 때 성욕이 음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죽음에의 욕구이기 때문에, 카타르시스 효과는 결국 우리가 잠재의식 속에 갖고 있는 죽음에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성욕은 이를 전제로 해 부수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초기에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 내지 충동을 ‘자기보존의 본능’(자아충동)과 ‘종족보존의 본능’(리비도)으로 구분했으나, 이후 성의 유아적 표현이 문제가 되어 생과 사,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이분법을 도입하게 된다. 여기서 성충동은 에로스에 속하는 것으로 리비도는 생명의 본능이 사용하는 에너지를 의미하게 되고, 이에 ‘성적(性的)’이라는 말은 사람 속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것과 관련되는 본능의 에너지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이에 반해 타나토스는 죽음을 지향하는 본능으로 궁극적으로는 무기물이 되어 불변성에 복귀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파괴성과 공격성을 특징으로 하는 죽음의 본능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심리와 연결되어 설명되기도 한다.
이 때 프로이트의 타나토스 개념과 음양이론의 음 개념은 거의 일치하게 되는데, ‘에로스’ 개념에서 문제가 일게 된다. 프로이트의 에로스는 단순한 생에의 욕망이 아닌 성욕의 개념을 포함하는 것이며, 이는 성욕과 죽음의 욕구를 진음(眞陰)으로 취급해 이를 신장이 동시에 관장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한의학의 음양사상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따라서 이들이 이야기하는 양은 에로스에서 성욕을 뺀 부분인 식욕만을 다스리는 셈이다.
파괴의 욕구는 곧 죽음에의 욕구이며 사디즘과 통하고, 성욕은 사디즘의 변형이다. 죽음에의 욕구는 불변성에 대한 욕구인데, 이 때 자궁은 무덤과 무척 닮아있어 죽음에의 욕구는 곧 자궁회귀에의 욕구와 상통하게 된다. 특히 순환론적 시간관에서 죽음은 다시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는 성욕을 통해 ‘죽음 같은 쾌감’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국 무화에의 의지는 무아지경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성욕은 죽음에의 욕구에 영원한 삶에의 욕구와 자궁회귀 욕구가 복합된 것이다. 이러한 자궁회귀본능과 무시무시한 것과의 상징적 결합의 대표적 모티프로는 ‘동굴 모티프’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때 자궁회귀본능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원망 형태이자, 유아에게 있어서는 사디스틱한 파괴욕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초자아의 억압이 아직은 미비하기 때문이다.
(마광수 저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