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동선
학교에서도 한 해가 마무리되어 간다. 정기고사를 끝내고 1·2학년 학생들은 동아리 발표와 축제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오전에 태학사에 펴낸 소동파 산문선 ‘마음속의 대나무’를 읽었다. 북송시대 소동파가 남긴 산문을 김병애가 옮겨 편집한 책이었다. 천 년 전 비록 관직에서는 시대와 불화를 겪었지만 꼿꼿하고 맑은 영혼으로 시서화에서 최고봉에 이른 그가 돋보이고 존경스러웠다.
전후 ‘적벽부’야 익히 알려진 명문이었지만 아주 짧은 ‘서사계(書四戒)’가 새롭게 와 닿았다. 역자는 ‘내가 경계할 것’이라는 제목으로 뽑았다. “수레나 가마를 타고 다님은 다리가 약해질 조짐이다. 골방이나 다락방은 감기 걸리기 십상이다. 어여쁜 여인은 건강을 해치는 도끼다. 맛난 음식은 창자를 썩게 만드는 독약이다” 그는 이 네 가지 32자를 문, 대야, 허리띠에 새겨놓고 지냈단다.
동파는 일찍이 과거를 거쳐 관직에 나아갔으나 왕안석의 신법에 맞서서 오랜 세월을 남방 유배지에서 보냈다. 우리의 제주도에 해당하는 해남도도 그의 적소였다. 어쩜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그의 예술과 인품을 더 성숙시킨 경우와 같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몸을 움직여 많이 걷고, 방 안에서만 지내지 말고, 여색을 멀리하고, 기름진 음식은 가리는 그의 정신은 본받을만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급식소로 갔다. 동지를 맞아 팥죽이 나와 반가웠다. 나는 어릴 적 어머님이 끓이시던 동짓날 팥죽을 잊을 수 없다. 그 팥죽은 맛이 뛰어나서라기보다 그 의식이 너무 거룩하고 숭엄해서였다. 어머님은 양곡이 귀한 시절임에도 동짓날이면 팥죽을 넉넉히 끓여 부엌 조왕신이나 장독대에도 바쳤다. 뒤주나 외양간 기둥에도 붉은 팥죽을 훠이 휘이 뿌리는 행위예술을 펼쳤다.
그 시절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던 벽촌에서 악귀를 멀리 쫓아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건강하도록 빌어주셨다. 지나간 가을걷이에 감사드리고 다가오는 새해도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셨다. 당시로서는 예배당이나 절간을 찾아가서 절대자에게 구원을 의탁할 처지도 못 되었다. 무속으로 비칠지도 모르고 미신적 요인이 없지 않았으나 이런 소박한 의식 말고는 달리 어떻게 기댈 언덕이 없었다.
팥죽을 곁들인 점심을 먹고 난 뒤 학교 바깥으로 산책을 나섰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봉림사가 있다. 신라하대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옛 봉림사 터에 못 미친 산자락에 새로 들어선 절이다. 동짓날이면 여느 절간에서나 부처님 오신 날 버금하여 큰 법회가 열리고 대중공양이 있는 것으로 안다. 절간을 오르는 언덕길에는 법회와 공양을 마친 보살들이 삼삼오오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절간 신도가 아닌 주제 점심시간 잠시 산책을 나선 걸음이었다. 언젠가는 조용한 법당에 들어 부처님을 참배하고 나온 적 있다. 절간 진입로 갓길엔 신도들이 타고 온 차량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내가 들리지 않아도 너른 법당 안에는 많은 불자들이 움집해서 예를 올려 희원하는 의식이 있을 것이다. 법당 앞에 이르니 법문하는 스님의 목소리가 스피커에 울려퍼져 나왔다.
법당 추녀 매달린 풍경에서는 가볍게 스치는 바람에 뎅그렁 뎅그렁 맑은 쇳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법당에 들어가지 않고 뜰에서 서성이다가 절간을 빠져나왔다. 솔숲에서 엘지전자 사원 숙소 곁으로 내려섰다. 겨울 햇살에 볕바른 잔디를 밟으며 창원컨트리클럽으로 드는 길 못 미쳐 봉곡동 주택가로 들었다. 거리 은행나무 가로수는 노란 단풍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나목이 되어 있었다.
내친 김에 봉곡시장까지 걸었다. 한낮이라 그런지 골목은 한산했다. 아까 학교 급식소에서 점심을 넉넉하게 먹었음에도 어느 찌개 밥집으로 들었다. 점심 차림에 팥죽과 함께 나왔던 도토리묵무침이 떠올랐다. 그 묵무침은 반찬으로보다 곡차 안주로 제격이었다. 몇몇 일꾼들에게 점심상을 차려낸 아주머니한데 곡차만 한 병 시켰다. 묵무침과 순서를 바뀌었지만 곡차를 느긋하게 들고 일어섰다. 2015.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