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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망봉! 비운의 왕을 그리던 어린 왕비의 애통함이 절절하구나
2023년 12월 서울학교는 <사연 많은, 미아리고개에서 창신동봉제거리까지>
송구영신!
12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98강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년)가 단종과 애절한 이별을 하고 평민 송씨로 신산스러운 삶을 살다간 역사의 현장인 동망봉(東望峰, 95m) 자락의 유적과 개운산이 품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 그리고 한양의 성돌과 일제강점기의 중요 건물의 석재를 채취한 창신동 채석장터 일대를 둘러보며 얽힌 사연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애절한 삶이 서려 있는 동망봉과 동망정Ⓒ서울학교
서울학교 제98강(제6기 제8강)은 2023년 12월 10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시 성북구 돈암1동 미아리고개 구름다리 위에서 모입니다[서울지하철4호선 또는 우이신설경전철 성신여대역 1번출구에서 버스를 갈아타든가, 걸어서 10분(약 720m). 걸으려면 출구에서 나온 방향(미아리고개 방향)으로 직진, 점집이 모여있는 점성촌을 지나 오르막으로 계속 직진하면 미아리고개 구름다리가 나옴, 버스는 100, 102, 103, 104, 106, 107, 108, 109, 140, 142, 143, 150, 151, 152, 160, 171, 172, 710번 타고 한 정거장 후 미아리고개·미아리예술극장에서 하차].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아리고개구름다리-개운산(대원암/보타사/개운사)-인명원터-보제원터-선농단-안감교-성북천-청계천-영도교-동묘-여인시장터-점심식사 겸 뒤풀이-동망봉(동망정/숭인재)-청룡사(정업원구기)-비우당-자지동천-안양암-창신동채석장터-창신동봉제거리-동대문역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12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와 독감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2월 <사연 많은, 미아리고개에서 창신동봉제거리까지>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미아리고개는 미아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이 서쪽으로 산줄기를 이어오다가 영봉에서 본줄기는 서쪽으로 이어져 서해로 숨어들고, 한줄기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삼각산을 일구고 계속해서 용암봉, 시단봉, 보현봉, 형제봉, 보토현을 지나 하늘마루(328m)에 이르러 서남쪽의 북악 산줄기와 동남쪽의 미아리고개 산줄기로 갈리는데, 동남쪽 산줄기는 정릉을 끼고 돌아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를 넘어 개운산(134m)을 일구고 마침내 청계천에서 그 뻗음을 마감합니다.
미아리고개는 미아제7동 불당골에 미아사(彌阿寺)라는 절이 있어 미아동의 동명이 생겼고, 이 고개가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원래는 되너미고개[胡踰峴]라 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되놈[胡人]들이 넘어왔다가 넘어갔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달리 돈암동고개라고도 합니다. 한국전쟁 때는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 간의 교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인민군이 후퇴할 때, 함께 데려간 사람들의 가족들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배웅했는데 그 사연이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대중가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표현 양식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흡사하다.Ⓒ서울학교
개운산은 개운사, 대원암, 보타사 등 유서 깊은 사찰을 품고 있습니다.
개운산(開運山, 134m)은 안암산(安岩山), 진석산(陳石山)이라고도 합니다.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의 개운사 절이 있어 ‘개운산’, 안암동에 있어 ‘안암산’, 진씨(陳氏) 성을 가진 사람의 채석장이 있어 ‘진석산’이라 했습니다. 이곳에는 개운사, 보타사, 대원암 등 유서 깊은 사찰들과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인명원, 사학의 요람 고려대학교가 깃들어 있습니다.
개운사(開運寺)는 1396년(태조 5) 무학이 창건하였으며 처음에는 지금의 고려대학교 이공대 부근에 짓고 이름을 영도사(永導寺)라 하였습니다. 1779년(정조 3)에는 원빈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 부근에 묘소를 정했는데, 절이 원묘에서 가깝다고 인파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개운사라 개명하였습니다. 1873년(고종 10) 명부전을, 1880년 벽송이 대웅전을 중건하였습니다. 1912년 일제의 사찰령 시행에 따라 봉은사의 수반말사로 지정되었고 현암이 제1대 주지로 부임하였습니다.
대원암(大圓庵)은 개운사의 산내 암자로 1845년(헌종 11)에 지봉우기(智峰祐祈)가 창건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불교계의 강백인 영호정호(映湖鼎鎬)가 이곳에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석학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그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의 강사를 시작으로 ‘불교고등강숙’ 숙장을 거쳐 ‘중앙학림’ 교장과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및 ‘혜화전문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하였습니다. 또한 조선불교의 교정과 대한불교의 교정을 지냈습니다.
영호가 주석하던 당시 대원암은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대표적 인물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는데 이곳에는 운허, 고봉, 청담, 성능, 철운, 운성, 운기, 청우, 남곡, 경보 등의 출가 제자와 석정 신석정, 미당 서정주 등의 재가 제자, 그리고 벽초 홍명희,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을 비롯하여 백화 양건식, 산강 변영만, 가람 이병기, 위당 정인보, 범부 김정설, 지훈 조동탁 등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영호의 입적 이후 1970년대는 탄허택성이 주석하면서 이통현 장자의 <신화엄합론>의 역경 사업을 하였습니다.
보타사(普陀寺)는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대웅전 뒤편 암벽에 조각된 마애보살좌상의 조성 시기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타사 금동보살좌상(보물)은 보관을 쓰고 유희좌(遊戱坐)로 편안히 앉아 정병을 들고 있는 불상으로, 보타낙가산의 수월관음상의 도상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꽃잎 모양으로 겹쳐 만든 동판에 투각한 당초문과 화염문 등을 붙여 제작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의 중앙에는 동판으로 만든 아미타 화불을 부착하여 관음보살임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세련되고 간결한 선묘, 늘씬하면서도 균형 잡힌 비례, 그리고 단아한 상호에서 뛰어난 조형성을 느낄 수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조선 전기 불교 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보물)은 불신에는 백의관음을 연상시키듯 하얗게 호분을 발랐고, 어깨 위로는 검은 보발이 길게 드리워져 있으며 머리에는 삼면 절첩형의 보관을 썼고, 보관의 좌우에는 뿔 모양의 관대가 수평으로 뻗어 있습니다. 관대의 아래에는 타원형의 영락 장식이 무겁게 달려 있는데, 전반적인 표현 양상은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흡사합니다.
제작과 관련하여 전하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양식상 여말선초에 조성된 불상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데 특히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도상과 양식적 특징이 거의 같습니다. 이 마애보살좌상은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쌍벽을 이루는 마애보살상으로, 고려 말 조선 초 불교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인명원은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무덤입니다.
인명원(仁明園)은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무덤으로 ‘애기릉’으로도 부릅니다. 원빈 홍씨는 정조의 후궁으로, 호조 참판 홍낙춘의 딸이며 홍국영의 누이입니다. 1778년(정조 2)에 빈으로 간택되어 창덕궁 정전에서 가례를 올렸는데 갑자기 1779년 5월 7일에 14세의 나이로 창덕궁 양심합에서 죽었습니다. 이때 시호를 인숙, 궁호를 효휘, 원호를 인명이라 하였습니다.
정조는 원빈의 행장을 직접 지었는데, 그것이 장서각 소장의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입니다. 그러나 홍국영이 죽은 이후, 궁원의 호칭이 예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따라 ‘원빈 묘’로 강등되었습니다. 인명원은 흥인문을 나가 관왕묘를 거쳐서 도착할 수 있는 동부 온수동의 해좌사향(亥坐巳向)에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의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고려대박물관에는 국보인 화문태호, 혼천시계, 동궐도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본관은 1934년에 세워진 고려대학교 내의 건물로, 설계자는 한국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박동진이고 시공자는 후지타 고지로입니다. 박동진은 평북 정주 출생으로 1910년 정주의 오산학교를 졸업했으며 1919년 3ㆍ1운동에 참가하여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의 건축부서에서 근무했습니다. 박동진은 고려대 본관 건물의 설계를 계동에 있는 김성수의 자택 2층에서 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대학의 설립 주체는 크게 선교사학, 일제관학, 민족사학 등이었는데 민족사학을 대표하는 보성전문 캠퍼스는 선교사학인 연희전문과 이화여자전문 그리고 일제관학인 경성제국대학 캠퍼스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규모와 수준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본관 후문 돌기둥에 그려진 무궁화 한 쌍을 일제가 문제 삼자 설계자 박동진은 벚꽃이라고 속였다고 합니다. 박동진은 한민족의 자부심을 고려대 본관 건물에 불어 넣었던 것 같습니다.
고려대학교박물관은 1934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도서관 내의 참고품부(參考品部)로 출발하였습니다. 보성전문학교 교장 김성수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민속품을 출연하고 일본 동양문고 사서 출신의 손진태를 도서관 사서로 임명해 참고품의 수집과 정리를 맡겼습니다. 설립 이후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각처에서 유물 기증이 이어졌고 안함평 여사가 출연한 거액의 희사금을 토대로 다수의 유물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소장품 규모는 개관 초기인 1942년 무렵 이미 3,000여 점에 달했으며 한국전쟁으로 상당수의 유물이 소실되었으나 지속적인 발굴과 유물 수집을 통해 고고, 역사, 민속, 서화, 도자, 현대미술에 걸쳐 총 10만 2,5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분청사기인화문태호(국보), 혼천시계(국보), 동궐도(국보)와 국가지정기록물 제1호(유진오 제헌헌법 초고)와 제2호(안재홍 미군정 자료)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울학교가 열리는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관리들의 지방 출장의 편의를 위해 역원제가 실시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도로와 함께 역원제(驛院制)가 동시에 발달하였습니다. 역(驛)은 서울에서 각 지방에 이르는 30리마다 도로변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공문 전달, 관물과 공세의 수송, 관료 행차 시 마필과 숙식 제공 등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원(院)은 공용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대강 100리마다 요로에 설치되었는데 역과 같은 장소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합하여 역원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파발제(擺撥制)가 시행되어 파발의 참마다 참점(站店)이 설치되었는데 이 참점은 후에 주점이나 주막으로 발전되어 원은 그 행적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서울 인근의 원으로는 서대문 밖의 홍제원, 동대문 밖의 보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광희문 밖의 전관원 등이 있었는데 홍제원과 이태원은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제원(普濟院)은 흥인문 밖 3리 지점(현재 안암동 로터리)에 있었는데 한성에서 동북 방향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었습니다. 보제원은 태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숙식 제공 외에도 구료사업도 벌였습니다. 보제원은 주로 도성 내 병자의 구료를 주 업무로 하였으나 때로는 무의탁자를 수용하고 행려병자의 구료나 사망 시 매장까지 해주는 등 구휼기관 역할도 하였습니다.
동망봉! 비운의 왕을 그리던 어린 왕비의 애통함이 절절하구나
2023년 12월 서울학교는 <사연 많은, 미아리고개에서 창신동봉제거리까지>
송구영신!
12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98강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년)가 단종과 애절한 이별을 하고 평민 송씨로 신산스러운 삶을 살다간 역사의 현장인 동망봉(東望峰, 95m) 자락의 유적과 개운산이 품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 그리고 한양의 성돌과 일제강점기의 중요 건물의 석재를 채취한 창신동 채석장터 일대를 둘러보며 얽힌 사연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애절한 삶이 서려 있는 동망봉과 동망정Ⓒ서울학교
서울학교 제98강(제6기 제8강)은 2023년 12월 10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시 성북구 돈암1동 미아리고개 구름다리 위에서 모입니다[서울지하철4호선 또는 우이신설경전철 성신여대역 1번출구에서 버스를 갈아타든가, 걸어서 10분(약 720m). 걸으려면 출구에서 나온 방향(미아리고개 방향)으로 직진, 점집이 모여있는 점성촌을 지나 오르막으로 계속 직진하면 미아리고개 구름다리가 나옴, 버스는 100, 102, 103, 104, 106, 107, 108, 109, 140, 142, 143, 150, 151, 152, 160, 171, 172, 710번 타고 한 정거장 후 미아리고개·미아리예술극장에서 하차].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아리고개구름다리-개운산(대원암/보타사/개운사)-인명원터-보제원터-선농단-안감교-성북천-청계천-영도교-동묘-여인시장터-점심식사 겸 뒤풀이-동망봉(동망정/숭인재)-청룡사(정업원구기)-비우당-자지동천-안양암-창신동채석장터-창신동봉제거리-동대문역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12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와 독감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2월 <사연 많은, 미아리고개에서 창신동봉제거리까지>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미아리고개는 미아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이 서쪽으로 산줄기를 이어오다가 영봉에서 본줄기는 서쪽으로 이어져 서해로 숨어들고, 한줄기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삼각산을 일구고 계속해서 용암봉, 시단봉, 보현봉, 형제봉, 보토현을 지나 하늘마루(328m)에 이르러 서남쪽의 북악 산줄기와 동남쪽의 미아리고개 산줄기로 갈리는데, 동남쪽 산줄기는 정릉을 끼고 돌아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를 넘어 개운산(134m)을 일구고 마침내 청계천에서 그 뻗음을 마감합니다.
미아리고개는 미아제7동 불당골에 미아사(彌阿寺)라는 절이 있어 미아동의 동명이 생겼고, 이 고개가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원래는 되너미고개[胡踰峴]라 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되놈[胡人]들이 넘어왔다가 넘어갔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달리 돈암동고개라고도 합니다. 한국전쟁 때는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 간의 교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인민군이 후퇴할 때, 함께 데려간 사람들의 가족들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배웅했는데 그 사연이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대중가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표현 양식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흡사하다.Ⓒ서울학교
개운산은 개운사, 대원암, 보타사 등 유서 깊은 사찰을 품고 있습니다.
개운산(開運山, 134m)은 안암산(安岩山), 진석산(陳石山)이라고도 합니다.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의 개운사 절이 있어 ‘개운산’, 안암동에 있어 ‘안암산’, 진씨(陳氏) 성을 가진 사람의 채석장이 있어 ‘진석산’이라 했습니다. 이곳에는 개운사, 보타사, 대원암 등 유서 깊은 사찰들과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인명원, 사학의 요람 고려대학교가 깃들어 있습니다.
개운사(開運寺)는 1396년(태조 5) 무학이 창건하였으며 처음에는 지금의 고려대학교 이공대 부근에 짓고 이름을 영도사(永導寺)라 하였습니다. 1779년(정조 3)에는 원빈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 부근에 묘소를 정했는데, 절이 원묘에서 가깝다고 인파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개운사라 개명하였습니다. 1873년(고종 10) 명부전을, 1880년 벽송이 대웅전을 중건하였습니다. 1912년 일제의 사찰령 시행에 따라 봉은사의 수반말사로 지정되었고 현암이 제1대 주지로 부임하였습니다.
대원암(大圓庵)은 개운사의 산내 암자로 1845년(헌종 11)에 지봉우기(智峰祐祈)가 창건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불교계의 강백인 영호정호(映湖鼎鎬)가 이곳에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석학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그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의 강사를 시작으로 ‘불교고등강숙’ 숙장을 거쳐 ‘중앙학림’ 교장과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및 ‘혜화전문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하였습니다. 또한 조선불교의 교정과 대한불교의 교정을 지냈습니다.
영호가 주석하던 당시 대원암은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대표적 인물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는데 이곳에는 운허, 고봉, 청담, 성능, 철운, 운성, 운기, 청우, 남곡, 경보 등의 출가 제자와 석정 신석정, 미당 서정주 등의 재가 제자, 그리고 벽초 홍명희,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을 비롯하여 백화 양건식, 산강 변영만, 가람 이병기, 위당 정인보, 범부 김정설, 지훈 조동탁 등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영호의 입적 이후 1970년대는 탄허택성이 주석하면서 이통현 장자의 <신화엄합론>의 역경 사업을 하였습니다.
보타사(普陀寺)는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대웅전 뒤편 암벽에 조각된 마애보살좌상의 조성 시기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타사 금동보살좌상(보물)은 보관을 쓰고 유희좌(遊戱坐)로 편안히 앉아 정병을 들고 있는 불상으로, 보타낙가산의 수월관음상의 도상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꽃잎 모양으로 겹쳐 만든 동판에 투각한 당초문과 화염문 등을 붙여 제작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의 중앙에는 동판으로 만든 아미타 화불을 부착하여 관음보살임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세련되고 간결한 선묘, 늘씬하면서도 균형 잡힌 비례, 그리고 단아한 상호에서 뛰어난 조형성을 느낄 수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조선 전기 불교 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보물)은 불신에는 백의관음을 연상시키듯 하얗게 호분을 발랐고, 어깨 위로는 검은 보발이 길게 드리워져 있으며 머리에는 삼면 절첩형의 보관을 썼고, 보관의 좌우에는 뿔 모양의 관대가 수평으로 뻗어 있습니다. 관대의 아래에는 타원형의 영락 장식이 무겁게 달려 있는데, 전반적인 표현 양상은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흡사합니다.
제작과 관련하여 전하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양식상 여말선초에 조성된 불상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데 특히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도상과 양식적 특징이 거의 같습니다. 이 마애보살좌상은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쌍벽을 이루는 마애보살상으로, 고려 말 조선 초 불교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인명원은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무덤입니다.
인명원(仁明園)은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무덤으로 ‘애기릉’으로도 부릅니다. 원빈 홍씨는 정조의 후궁으로, 호조 참판 홍낙춘의 딸이며 홍국영의 누이입니다. 1778년(정조 2)에 빈으로 간택되어 창덕궁 정전에서 가례를 올렸는데 갑자기 1779년 5월 7일에 14세의 나이로 창덕궁 양심합에서 죽었습니다. 이때 시호를 인숙, 궁호를 효휘, 원호를 인명이라 하였습니다.
정조는 원빈의 행장을 직접 지었는데, 그것이 장서각 소장의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입니다. 그러나 홍국영이 죽은 이후, 궁원의 호칭이 예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따라 ‘원빈 묘’로 강등되었습니다. 인명원은 흥인문을 나가 관왕묘를 거쳐서 도착할 수 있는 동부 온수동의 해좌사향(亥坐巳向)에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의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고려대박물관에는 국보인 화문태호, 혼천시계, 동궐도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본관은 1934년에 세워진 고려대학교 내의 건물로, 설계자는 한국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박동진이고 시공자는 후지타 고지로입니다. 박동진은 평북 정주 출생으로 1910년 정주의 오산학교를 졸업했으며 1919년 3ㆍ1운동에 참가하여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의 건축부서에서 근무했습니다. 박동진은 고려대 본관 건물의 설계를 계동에 있는 김성수의 자택 2층에서 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대학의 설립 주체는 크게 선교사학, 일제관학, 민족사학 등이었는데 민족사학을 대표하는 보성전문 캠퍼스는 선교사학인 연희전문과 이화여자전문 그리고 일제관학인 경성제국대학 캠퍼스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규모와 수준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본관 후문 돌기둥에 그려진 무궁화 한 쌍을 일제가 문제 삼자 설계자 박동진은 벚꽃이라고 속였다고 합니다. 박동진은 한민족의 자부심을 고려대 본관 건물에 불어 넣었던 것 같습니다.
고려대학교박물관은 1934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도서관 내의 참고품부(參考品部)로 출발하였습니다. 보성전문학교 교장 김성수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민속품을 출연하고 일본 동양문고 사서 출신의 손진태를 도서관 사서로 임명해 참고품의 수집과 정리를 맡겼습니다. 설립 이후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각처에서 유물 기증이 이어졌고 안함평 여사가 출연한 거액의 희사금을 토대로 다수의 유물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소장품 규모는 개관 초기인 1942년 무렵 이미 3,000여 점에 달했으며 한국전쟁으로 상당수의 유물이 소실되었으나 지속적인 발굴과 유물 수집을 통해 고고, 역사, 민속, 서화, 도자, 현대미술에 걸쳐 총 10만 2,5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분청사기인화문태호(국보), 혼천시계(국보), 동궐도(국보)와 국가지정기록물 제1호(유진오 제헌헌법 초고)와 제2호(안재홍 미군정 자료)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울학교가 열리는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관리들의 지방 출장의 편의를 위해 역원제가 실시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도로와 함께 역원제(驛院制)가 동시에 발달하였습니다. 역(驛)은 서울에서 각 지방에 이르는 30리마다 도로변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공문 전달, 관물과 공세의 수송, 관료 행차 시 마필과 숙식 제공 등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원(院)은 공용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대강 100리마다 요로에 설치되었는데 역과 같은 장소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합하여 역원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파발제(擺撥制)가 시행되어 파발의 참마다 참점(站店)이 설치되었는데 이 참점은 후에 주점이나 주막으로 발전되어 원은 그 행적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서울 인근의 원으로는 서대문 밖의 홍제원, 동대문 밖의 보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광희문 밖의 전관원 등이 있었는데 홍제원과 이태원은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제원(普濟院)은 흥인문 밖 3리 지점(현재 안암동 로터리)에 있었는데 한성에서 동북 방향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었습니다. 보제원은 태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숙식 제공 외에도 구료사업도 벌였습니다. 보제원은 주로 도성 내 병자의 구료를 주 업무로 하였으나 때로는 무의탁자를 수용하고 행려병자의 구료나 사망 시 매장까지 해주는 등 구휼기관 역할도 하였습니다.
동망봉! 비운의 왕을 그리던 어린 왕비의 애통함이 절절하구나
2023년 12월 서울학교는 <사연 많은, 미아리고개에서 창신동봉제거리까지>
송구영신!
12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98강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년)가 단종과 애절한 이별을 하고 평민 송씨로 신산스러운 삶을 살다간 역사의 현장인 동망봉(東望峰, 95m) 자락의 유적과 개운산이 품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 그리고 한양의 성돌과 일제강점기의 중요 건물의 석재를 채취한 창신동 채석장터 일대를 둘러보며 얽힌 사연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애절한 삶이 서려 있는 동망봉과 동망정Ⓒ서울학교
서울학교 제98강(제6기 제8강)은 2023년 12월 10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시 성북구 돈암1동 미아리고개 구름다리 위에서 모입니다[서울지하철4호선 또는 우이신설경전철 성신여대역 1번출구에서 버스를 갈아타든가, 걸어서 10분(약 720m). 걸으려면 출구에서 나온 방향(미아리고개 방향)으로 직진, 점집이 모여있는 점성촌을 지나 오르막으로 계속 직진하면 미아리고개 구름다리가 나옴, 버스는 100, 102, 103, 104, 106, 107, 108, 109, 140, 142, 143, 150, 151, 152, 160, 171, 172, 710번 타고 한 정거장 후 미아리고개·미아리예술극장에서 하차].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아리고개구름다리-개운산(대원암/보타사/개운사)-인명원터-보제원터-선농단-안감교-성북천-청계천-영도교-동묘-여인시장터-점심식사 겸 뒤풀이-동망봉(동망정/숭인재)-청룡사(정업원구기)-비우당-자지동천-안양암-창신동채석장터-창신동봉제거리-동대문역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12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와 독감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2월 <사연 많은, 미아리고개에서 창신동봉제거리까지>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미아리고개는 미아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이 서쪽으로 산줄기를 이어오다가 영봉에서 본줄기는 서쪽으로 이어져 서해로 숨어들고, 한줄기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삼각산을 일구고 계속해서 용암봉, 시단봉, 보현봉, 형제봉, 보토현을 지나 하늘마루(328m)에 이르러 서남쪽의 북악 산줄기와 동남쪽의 미아리고개 산줄기로 갈리는데, 동남쪽 산줄기는 정릉을 끼고 돌아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를 넘어 개운산(134m)을 일구고 마침내 청계천에서 그 뻗음을 마감합니다.
미아리고개는 미아제7동 불당골에 미아사(彌阿寺)라는 절이 있어 미아동의 동명이 생겼고, 이 고개가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원래는 되너미고개[胡踰峴]라 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되놈[胡人]들이 넘어왔다가 넘어갔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달리 돈암동고개라고도 합니다. 한국전쟁 때는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 간의 교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인민군이 후퇴할 때, 함께 데려간 사람들의 가족들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배웅했는데 그 사연이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대중가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표현 양식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흡사하다.Ⓒ서울학교
개운산은 개운사, 대원암, 보타사 등 유서 깊은 사찰을 품고 있습니다.
개운산(開運山, 134m)은 안암산(安岩山), 진석산(陳石山)이라고도 합니다.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의 개운사 절이 있어 ‘개운산’, 안암동에 있어 ‘안암산’, 진씨(陳氏) 성을 가진 사람의 채석장이 있어 ‘진석산’이라 했습니다. 이곳에는 개운사, 보타사, 대원암 등 유서 깊은 사찰들과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인명원, 사학의 요람 고려대학교가 깃들어 있습니다.
개운사(開運寺)는 1396년(태조 5) 무학이 창건하였으며 처음에는 지금의 고려대학교 이공대 부근에 짓고 이름을 영도사(永導寺)라 하였습니다. 1779년(정조 3)에는 원빈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 부근에 묘소를 정했는데, 절이 원묘에서 가깝다고 인파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개운사라 개명하였습니다. 1873년(고종 10) 명부전을, 1880년 벽송이 대웅전을 중건하였습니다. 1912년 일제의 사찰령 시행에 따라 봉은사의 수반말사로 지정되었고 현암이 제1대 주지로 부임하였습니다.
대원암(大圓庵)은 개운사의 산내 암자로 1845년(헌종 11)에 지봉우기(智峰祐祈)가 창건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불교계의 강백인 영호정호(映湖鼎鎬)가 이곳에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석학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그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의 강사를 시작으로 ‘불교고등강숙’ 숙장을 거쳐 ‘중앙학림’ 교장과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및 ‘혜화전문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하였습니다. 또한 조선불교의 교정과 대한불교의 교정을 지냈습니다.
영호가 주석하던 당시 대원암은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대표적 인물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는데 이곳에는 운허, 고봉, 청담, 성능, 철운, 운성, 운기, 청우, 남곡, 경보 등의 출가 제자와 석정 신석정, 미당 서정주 등의 재가 제자, 그리고 벽초 홍명희,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을 비롯하여 백화 양건식, 산강 변영만, 가람 이병기, 위당 정인보, 범부 김정설, 지훈 조동탁 등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영호의 입적 이후 1970년대는 탄허택성이 주석하면서 이통현 장자의 <신화엄합론>의 역경 사업을 하였습니다.
보타사(普陀寺)는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대웅전 뒤편 암벽에 조각된 마애보살좌상의 조성 시기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타사 금동보살좌상(보물)은 보관을 쓰고 유희좌(遊戱坐)로 편안히 앉아 정병을 들고 있는 불상으로, 보타낙가산의 수월관음상의 도상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꽃잎 모양으로 겹쳐 만든 동판에 투각한 당초문과 화염문 등을 붙여 제작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의 중앙에는 동판으로 만든 아미타 화불을 부착하여 관음보살임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세련되고 간결한 선묘, 늘씬하면서도 균형 잡힌 비례, 그리고 단아한 상호에서 뛰어난 조형성을 느낄 수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조선 전기 불교 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보물)은 불신에는 백의관음을 연상시키듯 하얗게 호분을 발랐고, 어깨 위로는 검은 보발이 길게 드리워져 있으며 머리에는 삼면 절첩형의 보관을 썼고, 보관의 좌우에는 뿔 모양의 관대가 수평으로 뻗어 있습니다. 관대의 아래에는 타원형의 영락 장식이 무겁게 달려 있는데, 전반적인 표현 양상은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흡사합니다.
제작과 관련하여 전하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양식상 여말선초에 조성된 불상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데 특히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도상과 양식적 특징이 거의 같습니다. 이 마애보살좌상은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쌍벽을 이루는 마애보살상으로, 고려 말 조선 초 불교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인명원은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무덤입니다.
인명원(仁明園)은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무덤으로 ‘애기릉’으로도 부릅니다. 원빈 홍씨는 정조의 후궁으로, 호조 참판 홍낙춘의 딸이며 홍국영의 누이입니다. 1778년(정조 2)에 빈으로 간택되어 창덕궁 정전에서 가례를 올렸는데 갑자기 1779년 5월 7일에 14세의 나이로 창덕궁 양심합에서 죽었습니다. 이때 시호를 인숙, 궁호를 효휘, 원호를 인명이라 하였습니다.
정조는 원빈의 행장을 직접 지었는데, 그것이 장서각 소장의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입니다. 그러나 홍국영이 죽은 이후, 궁원의 호칭이 예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따라 ‘원빈 묘’로 강등되었습니다. 인명원은 흥인문을 나가 관왕묘를 거쳐서 도착할 수 있는 동부 온수동의 해좌사향(亥坐巳向)에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의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고려대박물관에는 국보인 화문태호, 혼천시계, 동궐도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본관은 1934년에 세워진 고려대학교 내의 건물로, 설계자는 한국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박동진이고 시공자는 후지타 고지로입니다. 박동진은 평북 정주 출생으로 1910년 정주의 오산학교를 졸업했으며 1919년 3ㆍ1운동에 참가하여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의 건축부서에서 근무했습니다. 박동진은 고려대 본관 건물의 설계를 계동에 있는 김성수의 자택 2층에서 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대학의 설립 주체는 크게 선교사학, 일제관학, 민족사학 등이었는데 민족사학을 대표하는 보성전문 캠퍼스는 선교사학인 연희전문과 이화여자전문 그리고 일제관학인 경성제국대학 캠퍼스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규모와 수준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본관 후문 돌기둥에 그려진 무궁화 한 쌍을 일제가 문제 삼자 설계자 박동진은 벚꽃이라고 속였다고 합니다. 박동진은 한민족의 자부심을 고려대 본관 건물에 불어 넣었던 것 같습니다.
고려대학교박물관은 1934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도서관 내의 참고품부(參考品部)로 출발하였습니다. 보성전문학교 교장 김성수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민속품을 출연하고 일본 동양문고 사서 출신의 손진태를 도서관 사서로 임명해 참고품의 수집과 정리를 맡겼습니다. 설립 이후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각처에서 유물 기증이 이어졌고 안함평 여사가 출연한 거액의 희사금을 토대로 다수의 유물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소장품 규모는 개관 초기인 1942년 무렵 이미 3,000여 점에 달했으며 한국전쟁으로 상당수의 유물이 소실되었으나 지속적인 발굴과 유물 수집을 통해 고고, 역사, 민속, 서화, 도자, 현대미술에 걸쳐 총 10만 2,5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분청사기인화문태호(국보), 혼천시계(국보), 동궐도(국보)와 국가지정기록물 제1호(유진오 제헌헌법 초고)와 제2호(안재홍 미군정 자료)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울학교가 열리는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관리들의 지방 출장의 편의를 위해 역원제가 실시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도로와 함께 역원제(驛院制)가 동시에 발달하였습니다. 역(驛)은 서울에서 각 지방에 이르는 30리마다 도로변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공문 전달, 관물과 공세의 수송, 관료 행차 시 마필과 숙식 제공 등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원(院)은 공용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대강 100리마다 요로에 설치되었는데 역과 같은 장소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합하여 역원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파발제(擺撥制)가 시행되어 파발의 참마다 참점(站店)이 설치되었는데 이 참점은 후에 주점이나 주막으로 발전되어 원은 그 행적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서울 인근의 원으로는 서대문 밖의 홍제원, 동대문 밖의 보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광희문 밖의 전관원 등이 있었는데 홍제원과 이태원은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제원(普濟院)은 흥인문 밖 3리 지점(현재 안암동 로터리)에 있었는데 한성에서 동북 방향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었습니다. 보제원은 태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숙식 제공 외에도 구료사업도 벌였습니다. 보제원은 주로 도성 내 병자의 구료를 주 업무로 하였으나 때로는 무의탁자를 수용하고 행려병자의 구료나 사망 시 매장까지 해주는 등 구휼기관 역할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