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기상임무를 다른 나라 군에 이관하고 기상정보를 제공받는 것은 한국공군이 처음입니다.” 예전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한반도의 기상예보 권한은 미군 기상대에 있었다. 2007년 한미 간 기상예보임무 전환이 이뤄지면서 한반도 기상예보 권한이 한국공군73기상전대로 넘어왔다. 미군은 세계 어느 나라에 주둔하든, 전쟁을 하든, 기상예보 권한을 그들이 행사해 왔다. 그런데 세계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가 예보권을 주도적으로 행사하면서 미군에게 기상정보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미국이 73기상전대의 전투기상관측과 정보수집분석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에 기꺼이 예보 권한을 이양할 수 있었다.” 미 공군 기상대대장의 말처럼 한국공군기상전대의 예보 능력은 탁월하다. 이런 탁월함의 밑바탕에는 한국전쟁 때부터 혼신의 힘을 다한 노력을 기울여 온 기상부대 장병들이 있었다. 1949년 10월 1일 20여 대의 경항공기와 1100여 명의 장병으로 공군이 창설됐다. 기상대는 공군본부 기상반으로 창설돼 AT-6(일명 건국기) 10대의 헌납식을 치르는 행사 기상지원을 시작으로 기상부대로의 일보를 내디뎠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전격적으로 남침을 개시했다. 공군기상반도 후퇴하는 공군본부를 따라 대구로 이동했다. 기상반은 공군 후방사령부에서 기상업무를, 또한 김해기지에 창설된 공군비행단에 대한 기상지원도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한국공군 비행단이 서울로 전진하자 공군기상대는 서울비행장에 전진 배치돼 기상지원에 만전을 기했다. 이후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육군과 발맞춰 공군도 평양 미림비행장으로 전진 배치됐다. 공군기상대는 성공적인 항공작전을 위해 예보자료의 생산 및 기상관측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아울러 육군 전술부대에 대한 기상지원 임무도 맡았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이뤄진 공군기상요원의 기상지원은 한국 지상군의 전투력 증강 및 비행안전에 기여해 전세를 호전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유엔군의 참전과 함께 일본 주둔 미 공군으로부터 10대의 무스탕전투기를 도입하면서 한국공군은 세계 전사에서도 보기 드문 놀라운 전투 능력을 발휘했다. 한국공군은 미비한 장비와 적은 조종사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공군 작전수행기록 2위에 달할 정도로 많은 출격을 담당했다. 놀라운 것은 어려운 환경이었음에도 조종사나 기체손실률이 가장 적었다. 이에는 뛰어난 한국공군 조종사들의 역량이 컸지만 이들을 지원한 공군기상부대원의 노력을 빠뜨릴 수 없다. 당시 중국과 소련, 북한의 기상자료를 얻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도 단일지역예보법 등을 활용해 오히려 미공군 기상대보다 예보가 정확하다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6·25전쟁 기간 중에 전문적인 기상인력의 필요성을 깨달은 공군은 1951년 공군기상대의 뼈대를 세운 기상장교들을 대거 배출했다. 후에 서울대 대기과학과 교수로 후학을 가르친 정창희·김성삼 교수가 당시 기상장교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이들은 작전기상지원뿐만 아니라 기상교관으로 조종사에 대한 비행안전교육을 실시했다. 여군 기상대원의 활동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한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인 김경오 여사가 공군기상장교로 활약했다. 공군기상부대의 질적·양적 성장이 이뤄지면서 1951년 11월 7일 현재 공군73기상전대의 전신인 50기상전대가 창설됐다. 장비와 관측과 예보가 어우러진 실질적인 전쟁기상지원능력을 갖춘 기상부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부족했던 기상장비도 1951년 말부터 해외에서 사들이면서 점점 근대식으로 개선돼 나갔다. 12월에는 우량계(ML-17) 외 7종의 기상장비를, 1952년 6월에는 건습구온도계(ML-24) 외 7종의 기상장비를 도입했다. 이어 1953년 6월 30일에는 일본에서 자기기압계(ML-3A) 외 24종의 기상기재를 구입해, 기상지원 효율증진에 기여하게 됐다. 거의 아무것도 없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한국공군 기상요원들은 ‘승리를 담보하는 기상예보 지원’이라는 슬로건 하에 혼연일체가 됐다. 미군기상대와의 긴밀한 협조로 부족한 기상자료를 보강하고 외국의 신기술 기상예보방법을 도입해 업무에 적용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6·25전쟁에서 지상군 전투력 증강 및 성공적인 항공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열악한 조건에서도 최선을 다해 기상지원을 했던 공군기상대는 6·25전쟁 중 뛰어난 기상지원 공로로 김석우 소령 외 무려 27명(장교 7, 사병 20)이 충무 및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 이후 공군기상전대원들은 혼연일체가 돼 군 기상발전에 기여해 왔으며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기상부대로 발전한 것이다. [TIP]미래를 만들어가는 공군73기상전대-기상변조·우주기상에 대한 연구 수행 2008년 여름 기상예보가 계속 틀리면서 많은 국민이 기상청을 불신했다. 이때 많은 언론에서 “공군기상대의 기상예보, 정확해!”라고 보도한 것은 한국공군73기상전대의 기상예보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의 밑바탕에는 한국전쟁에서 기초를 굳건히 세운 자랑스러운 기상예보 선배들이 있었다. 공군기상전대원들은 지금도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던 기상선배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베트남전, 걸프전과 아프가니스탄전, 이라크전 등에 참전한 공군 기상요원들은 공군 및 육군 작전에 대한 성공적인 기상지원을 할 수 있었고, 또 대내외적으로 찬사를 받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었다. 공군73기상대원들은 정확한 예보 적중 향상에도 노력하지만, 미래의 전쟁환경에 대한 연구도 수행하고 있다. 미래 기상인 기상변조와 우주기상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부대원들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 두려워하지 말고 씩씩하게 용기를 갖고 나아가라”라는 롱펠로의 말과 “미래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시몬 베유의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세계 최고의 기상부대를 꿈꾸고 있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