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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亂中日記)
목차
1. 개요
2. 내용
2.1. 보기
2.2. 이순신의 체질
2.3. 개인적인 면모와 인물에 대한 평가
2.3.1. 어머니
2.3.2. 자제
3. 위상
3.1. 사료적 가치
3.2. 문학적 가치
3.3. 인기
4. 초서 해독[脫草]
5. 번역
5.1. 노승석 번역
5.2. 이외
6. 도난 사건
7.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7.1. 의의
8. 여담
1. 개요
조선 선조 시기의 무신(武臣)이었던 충무공 이순신이 1592년 ~ 1598년(임란 7년)동안 군중에서 쓴 일기를 말한다. 정확히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개월 전인 1592년(선조 25년) 정월(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선조 31년) 11월 17일(양력 1598년 12월 14일)까지 2,539일간 기록한 일기이다. 현재까지도 이순신이 직접 쓴 일기 초고본 8권 중 7권이 남아서 충남 현충사에 비치되어 있고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 6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난중일기(亂中日記)란 '전란 중에 쓴 일기'라는 뜻으로 원래 이순신이 쓴 초고본에는 난중일기가 아니라 해당 년도의 이름을 붙인 임진일기, 을미일기 등의 제목이 붙어 있었다. 난중일기란 제목은 이순신 사후 200년이 지나고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 때 왕명으로 윤행임 등이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할 때 5~8권에 초고본을 실으면서 붙인 이름이다.
2. 내용
난중일기에는 그 날의 기상 변화, 군무 내용, 진중의 군정 등이 기재되어 있으며, 본가에 대한 걱정, 자식과 아내, 모친에 대한 그리움, 평생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류성룡에 대한 걱정, 원균에 대한 비판 등 이순신 본인의 개인적인 정서도 기록되어 있다. 각각의 일지는 일기답게 대체로 요점만 간략하게 적혀 있으며, 별 일 없었던 날에는 그냥 날씨만 기재된 경우도 있다. 그래서 번역본을 읽다 보면 한두 문장으로 끝나는 날도 있고 정유년(1597) 일기처럼 이순신의 절절하고 애틋한 감정을 숨김없이 적어놓은 부분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반복적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은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는 것, 활 몇 순(1순은 5발)을 쏘았다는 것, 어머니의 안부, 자신의 건강이 나쁘다는 것 등이다.
2.1. 보기
원문 출처는 한국 고전 종합 DB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보기로서 극소수 일부만을 발췌한 것이며 번역은 오역이 있을 수 있다. 또한 번역문을 참고하며, 원문 전체를 읽어보고 싶은 사람은 난중일기를 자체 번역하여 올리는 사람들이 많으니 검색해서 봐도 좋다.
1592년 1월 1일. '난중일기의 첫 일기'
初一日壬戌。 晴。 曉。 舍弟汝弼及姪子菶, 豚薈來話。 但離天只。 再過南中。 不勝懷恨之至。 兵使軍官李敬信。 來納兵使簡及歲物, 長片箭雜物。
초1일 임술.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汝弼)과 조카 봉(菶), 아들 회(薈)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서 다시 남쪽에서 설을 보내니 지극한 회한을 이길 수가 없다. 병마절도사의 군관 이경신이 와서 병마 절도사의 편지와 설날 선물, 장전(長箭)과 편전(片箭)과 그외 여러가지 잡물을 바쳤다.
1592년 1월 16일 일기
十六日丁丑。晴。出東軒公事。各官品官色吏現謁。防踏兵船軍官,色吏。以其兵船不爲修繕决杖。虞候假守。亦不檢飭。至於此極。不勝駭恠。徒事肥己。如是不顧。他日之事。亦可知矣。城底土兵朴夢世。以石手往先生院鎖石浮出處。害及四隣狗子。故决杖八十。
16일 정축.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각 관아의 관리들과 색리들이 알현하러 왔다. 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으므로 장형에 처했다. 우후(虞候)와 가수(假守)들 또한 점검하고 경계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해괴함을 이길 수가 없다. 헛되이 제 한 몸 살찌우기만 일삼고 이리 돌보지 않으니, 다른 날의 일도 알 만한 것이리라. 성 밑의 토박이 병사인 박몽세는 석수로서 선생원(先生院) 쇄석에 쓸 돌 뜨는 곳에 가서 이웃 강아지에 해를 끼친 고로 장형 80대에 처했다.
1592년 2월 4일 일기
初四日乙未。 晴。 出東軒公事後。 上北峯築煙臺處。 築處甚善。 萬無頹落之理。 李鳳壽之勤事。 可知矣。 終日觀望。 當夕下來。 廵視垓坑。
초4일 을미. 맑음.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본 후에 북봉의 연대(煙臺) 지은 곳으로 올라갔다. 지은 곳이 너무 훌륭해서 무너질 리가 만무했다. 이봉수가 정말 부지런히 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루종일 구경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내려왔다. 해자 구덩이를 순시했다.
1592년 2월 19일 일기
十九日庚戌。 晴。 發廵到白也串監牧官處。 則昇平府伯率其弟來待。 妓生亦來。 雨後山花爛開。 景物之勝。 難可形言。 暮到梨木龜尾。 乘船到呂島。 則瀛洲倅與呂島權管出迎。 防備點閱。 興陽以其明日行祭先行。
19일 경술. 맑음. 순시를 떠나 백야곶 감목관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승평 부사가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妓生)도 데려왔다. 비 온후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훌륭한 경치를 가히 형언하기가 어려웠다. 날이 저물어 이목구미에 이른 뒤 배를 타고 여도에 가니 영주 현관과 여도 권관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방비를 검열하였다. 흥양 현감은 명일 제사지내는 것 때문에 먼저 갔다.
1592년 4월 13일 일기. (임란 발발 당일)
十三日壬寅。晴。出東軒公事後。射帿十五廵。
13일 임인.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후 활 십오 순을 쏘았다.
1592년 4월 15일 일기. (임란 발발 및 전황이 이순신에게 최초로 고지됨.)
十五日甲辰。晴。以國忌不坐。修廵使答簡及別錄。卽令驛子馳送。日沒時嶺南右水使傳通內。倭船九十餘出來。釜山前絶影島駐泊。一時又到水使關。倭賊三百五十餘隻。已到釜山浦越邊云。故卽刻馳啓。兼移廵使,兵使,右水使處。嶺南方伯關。亦到如是。
15일 갑진. 맑음. 국기일(國忌日)이므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사(巡使)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을 고친 뒤 즉시 역자(驛子)로 하여금 가게 하였다. 일몰 때 영남 우수사가 보낸 통문을 보니 왜선 구십 여척이 나와 부산 앞 절영도 앞에 정박하였다고 한다. 동시에 온 수사(水使)의 관문(關文)을 보니 왜선 삼백 오십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로 즉각 장계를 써서 보냈고 순사, 병사, 우수사에게도 공문을 돌렸다. 영남 방백의 관문 역시 왔는데 같은 내용이었다.
1592년 4월 16일 일기.
十六日乙巳。二更。嶺南右水使移關。釜山巨鎭。已爲陷城云。不勝憤惋。卽馳啓。又移文三道。
16일 을사. 이경(二更)에 영남 우수사가 관문을 보내왔는데 부산 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한스러움을 이길 수 없다. 즉시 장계를 올렸고 삼도에 공문을 돌렸다.
1592년 5월 29일 사천 해전 일기
二十九日戊戌。晴。右水使不來。獨率諸將。曉發直到露梁。則慶尙右水使來會。問賊所泊處。則賊在泗川船滄云。故直至其處。倭人已爲下陸。結陣峯上。列泊其船于峯下。拒戰甚固。余督令諸將。一時馳突。射矢如雨。放各㨾銃筒。亂如風雷。賊徒畏退。逢箭者不知幾百數。多斬倭頭。焚滅十三隻。軍官羅大用中丸。余亦左肩上中丸。貫于背。不至重傷。
29일 무술. 맑음. 우수사가 오지 않아 홀로 제장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발진하여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 우수사가 와서 합류하였다. 적이 정박한 곳을 물었더니 사천(泗川) 선창에 있다 하여 곧바로 그곳에 이르렀는데 왜인들은 이미 상륙하여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고 산 아래에 전선을 줄지어 대놓았다. 거전(拒戰)이 매우 완강했는데, 나는 제장들을 지휘하여 일시에 돌진하게 하였다. 화살을 비처럼 쏘아댔고 각양의 총통을 쏘아대니 그 대란이 폭풍 우레와 같았다. 적의 무리는 두려워하며 달아났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백인지 부지기수였다. 왜인의 수급을 많이 베었고 적선 십삼 척을 불살랐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을 맞았다. 나 역시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아 등까지 관통했으나 중상에 이르진 않았다.
1592년 6월 2일 당포 해전 일기
初二日庚子。晴。朝發直到唐浦前船滄。則賊船二十餘隻列泊。回擁相戰。大船一隻。大如我國板屋船。船上粧樓。高可二丈。閣上。倭將巍坐不動。以片箭及大中勝字銃筒。如雨亂射。倭將中箭墜落。諸倭一時驚散。諸將卒一時攢射。逢箭顚仆者不知其數。盡殲無餘。俄而。倭大船二十餘隻。自釜山列海入來。望見我師。奔入介島
초2일 경자. 맑음. 아침에 발진하여 곧장 당포(唐浦) 앞 선창에 이르렀다. 적선 이십여 척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둘러싸고 교전하였는데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 나라 판옥선과 같았다. 배 위의 장루(粧樓)는 높이가 이 장(丈)쯤 되었고 누각 위에 왜인 장수가 위엄 있게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편전과 대(大), 중(中) 승자 총통을 비처럼 난사했다. 왜인 장수가 화살을 맞고 추락하니 모든 왜군이 일시에 놀라 흩어졌다. 모든 장졸들이 일시에 집중하여 쏘았다. 화살을 맞고 고꾸라지는 자가 부지기수였고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잠시 후 큰 왜선 이십여 척이 부산으로부터 줄지어 바다로 나오다가 우리 군을 보고는 다투어 개도(介島)로 들어갔다.
1597년 9월 15일 명량해전 전야 일기
十五日癸卯。晴。數小舟師。不可背鳴梁爲陣。故移陣于右水營前洋。招集諸將約束曰。兵法云。必死則生。必生則死。又曰。一夫當逕。足懼千夫。今我之謂矣。爾各諸將。勿以生爲心。小有違令。卽當軍律。再三嚴約。是夜。神人夢告曰。如此則大捷。如此則取敗云。
15일 계묘. 맑음. 소수의 수군으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는 까닭에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제장들을 불러모아 약속하며 말하였다.
"병법에 이르길 '반드시 죽으려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 하면 죽는다.' 하였다. 또 '한 사람이 좁은 길을 지키면 천 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우리를 이르는 것이다. 너희 각 제장들은 살 마음을 먹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즉시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두세 번을 엄히 약속하였다.
이 밤에 신인(神人)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리하면 크게 이길 것이요 저리하면 패할 것이니라." 하셨다.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 일기
十六日甲辰。晴。
早朝、別望進告:「賊船不知其數、直向我船云。」卽令諸船、擧碇出海。賊船百三十餘隻回擁我諸船。諸將自度衆寡不敵、便生回避之計。右水使金億秋、退在渺然之地。余促櫓突前、亂放地玄各㨾銃筒、發如風雷。軍官等簇立船上、如雨亂射。賊徒不能抵當、乍近乍退。然圍之數重、勢將不測。一船之人、相顧失色。余從容諭之曰:「賊雖千隻、莫敵我船!切勿動心!盡力射賊!」
顧見諸將船、則退在遠海、觀望不進欲回船。直泊中軍金應諴船先斬梟示、而我船回頭、則恐諸船次次遠退、賊船漸迫、事勢狼狽。卽令角立中軍令下旗、又立招搖旗。則中軍將彌助項僉使金應諴船漸近我船、巨濟縣令安衛船先至。
余立于船上、親呼安衛曰:「安衛、欲死軍法乎?汝欲死軍法乎?逃生何所耶?」安衛慌忙突入賊船中。又呼金應諴曰:「汝爲中軍而遠避不救大將、罪安可逃!欲爲行刑、則賊勢又急姑令立功。」
兩船直入交鋒之際、賊將指揮其麾下船三隻。一時蟻附安衛船、攀緣爭登。安衛及船上之人、殊死亂擊、幾至力盡。余回船直入、如雨亂射、賊船三隻無遺盡勦。鹿島萬戶宋汝悰、平山浦代將丁應斗船繼至、合力射賊。
降倭俊沙者、乃安骨賊陣投降來者也、在於我船上俯視曰:「着畫文紅錦衣者、乃安骨陣賊將馬多時也!」吾使金石孫鉤上船頭、則俊沙踴躍曰:「是馬多時!」云 故卽令寸斬、賊氣大挫。
諸船一時皷噪齊進、各放地玄字射矢如雨、聲震河岳。賊船三十隻撞破。賊船退走、更不敢近我師。
此實天幸。
水勢極險、勢亦孤危、移陣唐笥島
16일 갑진. 맑음. 이른 아침 별망군이 와서 고하기를 "적선이 부지기수이며 곧바로 우리 배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즉시 전 함대에 명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 서른이 넘는 배가 우리 전 함대를 감쌌다. 제장들은 스스로 중과부적이라고 헤아려 거듭 피하고 도망갈 궁리만 하였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아득한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櫓)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입한 뒤 지자, 현자, 각양의 총통을 폭풍 우레처럼 난사했고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히 서서 비 오듯 난사했다. 적의 무리는 당해내지 못하고 잠깐 다가오다 잠깐 물러나곤 하였는데 우리를 수 겹으로 에워싼 탓에 전세를 예측할 수가 없었고 나와 같은 배의 병사들은 서로 돌아보며 실색(失色)이 되어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르며 말하였다.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를 대적할 순 없으니 결코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전력을 다하여 적을 쏘라"
제장들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바다로 물러나서 관망(觀望)만 할 뿐 나오지 않았으며 배를 돌리고자 하는 눈치였다. 곧장 중군 김응함(金應諴)의 배에 댄 뒤 참수, 효시하고 싶었으나 내 배가 선두를 돌리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러 배들이 차차 멀리 물러날 터이고, 적선이 점차 압박해와서 사세는 낭패가 될 터였다. 즉시 중군영하기(中軍令下旗)를 세우라고 명하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우니 중군장 겸 미조항(彌助項) 첨사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왔는데, 거제 현령 안위(安衛)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였다.
"안위야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 네가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 도망가면 어디서 살 것이냐?"
안위가 황망해 하며 적선 안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말하였다.
"너는 중군(中軍)이 되어 멀리 피하기만 할 뿐 대장(大將)을 구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세가 또한 급하니 일단은 공을 세우라"
두 배가 교전의 틈으로 곧장 돌입하니 적장이 그 휘하 전선 세 척을 지휘하여 일시에 개미떼처럼 안위로 배로 달라붙었고 매달려서는 다투어 안위의 배로 올랐다. 안위와 안위 배 위의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미친 듯이 공격하여 거의 힘이 다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 배를 돌려 곧바로 돌입해 비 오듯 난사했고 적선 세 척을 남김없이 멸하였다. 여도 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속속 이르러 힘을 합쳐 적을 쏘았다. 항왜(降倭) 준사(俊沙)는 안골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이때 내 배 위에 타고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그림 무늬의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안골 진영의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金石孫)[18]으로 하여금 갈고리로 그 자를 선두 위로 끌어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준사(俊沙)가 보곤 뛰면서 말하기를 "이 자가 마다시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로 즉시 참수하게 하였고 이에 적의 사기가 대폭 꺾였다. 전 함대가 일시에 쩌렁쩌렁 북을 치면서 일제히 전진했고 각 지자, 현자 총통을 쏘아대고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니 그 소리가 강산을 진동하게 하였다. 적선 삼십 척을 쳐부수자 적 함대가 물러나 달아났으며 다시는 감히 우리 군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것은 실로 천행(天幸)이었다. 수세(水勢)가 극히 험하고 아군의 세력도 지쳐 위태로웠으므로 당사도(唐笥島)로 진을 옮겼다.
1598년 11월 17일 마지막 일기
十七日。昨日。伏兵將鉢浦萬戶蘇季男,唐津浦萬戶趙孝悅等。倭中船一隻。滿載軍粮。自南海渡海之際。追逐於閑山前洋。則倭賊依岸登陸而走。所捕倭船及軍粮。被奪於唐人。空手來告。
17일. 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은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했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이 일기를 쓴 이틀 후 노량해전이 발발하고 이순신은 전사한다.
2.2. 이순신의 체질
이순신이 체력이 약하다는 설은 이우혁의 왜란종결자에서 기인하였다. 작가가 허구로 지어낸 것은 아니라 난중일기에 근거하여 만든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내용이 매우 많은데 설사병이 심해서 하루종일 뒷간을 다녀오느라 일을 못한 사례도 있고 배탈이 나거나 감기를 앓은 내용도 많다. 그래서 이순신을 허약한 체질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러한 사실들이 정확하다고 해서 이순신 장군의 명장으로서의 재능과 공적들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노환과 정치권의 박대와 신체로 체감하는 물리적인 전쟁을 비롯한 극단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체력 관리 부족이라는 설은 지나친 격하로 곡해될 '수도' 있다. 왜냐면 군인에게 체력은 곧 본질적인 군인의 능력이자 당연한 능력 관리인 것이 사실이기에 만약 체력 관리 부족이라면 군인의 역량 부족으로 치부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초인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며, 만일 정말로 허약했다고 한다면 오히려 그렇기에 지휘관으로서 거둔 성과를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48세로 당시에는 노령기에 진입한 셈이었다. 풍파를 겪으며 신체가 약화되는데도 수군 통제사로서의 격무가 눈 앞에 가득하니 몸이 망가지는 건 당연하다. 특히 정유년 1957년에는 선조에 의하여 국문과 백의종군, 모친상까지 당하면서 받은 정신적인 충격과 병에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으로 인해 무너진 조선 수군을 재건하느라 더더욱 격무에 시달려서 전쟁으로 얻은 피로와 노환을 더욱 부추겼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사천 해전 중에 어깨에 총상을 입었는데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치료가 완벽하지 못해서 후유증도 달고 살았다. 사천 해전이 끝나고 1년이 지나 류성룡에게 보낸 서신에 "어깨 뼈가 많이 상했고 상처에서 항상 진물이 흘러 하루종일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소독한다."라고 서술한다. 이 사천 해전에서 입은 총상도 이순신의 건강을 악화시킨 요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난중일기에도 나오듯이 이순신은 이 스트레스를 주로 부하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풀었는데, 과음 역시 건강을 해친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백의종군을 하기 전에도 며칠에 걸쳐 병을 앓은 기록이 흔하니 청년기에는 강건했다고 단정짓기도 어렵다. 종합하면 이순신의 평상시 건강이 어떤지는 파악할 수 없지만 임진왜란 당시의 이순신은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노장인데 총상과 국문의 후유증과 산적한 격무에 시달리면서 더욱 건강이 악화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왜란 당시의 이순신은 하급 군인이 아니라 전장을 지켜보며 책략을 펼치는 지휘관이어서 칼을 들고 다니며 적을 무찌를 정도로 강건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이순신의 완벽주의에 가까운 성격과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시라는 상황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건강이 망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장성급 장교들을 봐도 전쟁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전쟁이 종료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한 사례가 많았다.
2.3. 개인적인 면모와 인물에 대한 평가
전쟁 중에 일어난 기상의 변화와 전황 외에도 이순신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감정이 많이 서술되었다. 밤에 혼자서 촛불을 켜고 국사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린 내용이나 백의종군 이후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여 원균이 엉망으로 만들고 손을 놓아버린 수군의 처참한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아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등의 번민도 그대로 서술되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대한 분노도 고스란히 서술하였다. 왜군들을 포로로 잡았는데 왜군들이 누가 봐도 거짓인 정보를 말하거나 조선을 우습게 보는 투로 말하면 그 자리에서 처형하였고 아예 능지처참에 처한 적도 2번이다. 1597년에 삼남인 이면이 왜군에게 전사하면서 이순신에게 왜군은 조선과 백성의 원수임은 물론 아들의 원수이다. 물론 이순신은 아군이라도 군율을 어기거나 직무에 태만한 모습을 보이면 가차없이 처벌하여 철저하게 기강을 바로잡았다.
수면 중에 꿈을 꾼 이야기나 그 꿈에 대한 자신의 해석은 물론 일어난 사건을 두고 점을 치는 장면도 나온다. 원균이나 권율처럼 주변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물론 진중에서 작성한 소감도 살펴볼 수 있다. 원균은 난중일기에서 지독하게 혹평받는데 난중일기에 서술된 원균을 향한 험담만 30여개이다. 흉악하고 음험하고 거짓된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거리를 두고 나중엔 원흉으로 부르며 싫어하였다.
고령으로 은퇴하는 병사를 위해 만든 축하식에 참석하며 돼지고기를 구워먹는데 자신도 조금 집어먹는 등 소소한 이야기도 많다. 이순신의 취미와 여가도 상세한데 부관들과 활쏘기를 하거나 승경도를 즐기고 음주 이야기도 많다. 부관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수면을 취한 기록이 많으며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고 건강이 악화된 와중에도 몸이 차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술을 마시다가 오히려 병이 커져서 3일을 앓아 누운 일도 있을 정도. 이를 토대로 주로 (본인이 좋아하는)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2.3.1. 어머니
내가 일찍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했다.
- 다산 정약용, 경세유표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한 구절이 많은데 특히 '어머니께서 무탈하시니 다행이다'라는 서술은 난중일기에서 꽤 자주 등장하는 표현. 이순신이 일기 속에서 가장 걱정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1594년 1월 12일에는 이순신이 잠깐 본가에 왔다가 떠나는데 일기에 자당에 대한 기사가 쓰여 있다.
일기 곳곳에서 어머니를 칭할 때, 어머니(母)라는 말 대신 천지(天只 : 하늘 천 / 다만 지)라는 표현으로 칭하는 부분이 많다. '천지(天只)를 떠나서~', '천지(天只)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다행이고 또 다행이다.' 이런 식인데 이것은, 시경(詩經)의 '모야천지(母也天只)', 즉 '어머니는 하늘이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朝食後 告辭天只前 則敎以好赴 大雪國辱 再三論諭 少無以別意爲歎也。
아침밥을 먹은 후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하교하시길,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거라" 라고 두세 번 타이르시는데 조금도 이별을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1593년 6월 12일 일기를 보면 충무공이 흰 머리를 뽑았다고 기록한 일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적었을 정도였다.
이후 자당께서 돌아가신 날에는 '어찌 하랴, 어찌 하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서 죽느니만 못하구나'(1597년 4월 19일)라고 지극히 슬퍼하고 있다.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 없었다. (...) 일찍 나와서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난중일기>> 1597년 4월 19일
심지어 다음 일기에는 꿈에 죽은 두 형(희신, 요신)이 나타나 함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장례도 함께하지 못했다며 애통함에 서로 붙들고 통곡했다고 한다.
2.3.2. 자제
자식들을 걱정하거나 자식들이 와병중인 것을 걱정하는 내용 역시 적혀 있다. 이순신의 셋째 아들이자 막내 아들인 이면(李葂)은 1597년에 전사하였는데(이순신의 가족을 포로로 잡아 이순신을 협박하기 위해 왜군이 이면을 잡아가려 하였으나 그는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다 죽었다) 그의 죽음을 전하는 편지를 읽은 이순신의 비애 역시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十四日辛未。晴。四更。夢余騎馬行邱上。馬失足落川中而不蹶。末豚葂似有扶抱之形而覺。不知是何兆耶。夕。有人自天安來傳家書。未開封。骨肉先動。心氣慌亂。粗展初封。見䓲書則外面書痛哭二字。知葂戰死。不覺墮膽失聲。痛哭痛哭。天何不仁之如是耶。我死汝生。理之常也。汝死我生。何理之乖也。天地昏黑。白日變色。哀我小子。棄我何歸。英氣脫凡。天不留世耶。余之造罪。禍及汝身耶。今我在世。竟將何依。號慟而已。度夜如年。
14일 신미. 맑음. 사경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던 중 말이 발을 헛디뎌 냇속으로 떨어졌으나 나는 넘어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막내 아들 면(葂)이 나를 껴안는 듯한 형상이 보이는 듯 하더니 잠에서 깼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 천안에서 온 사람이 집의 편지를 전하였는데 열어보지도 않았건만 살과 뼈가 먼저 떨리고 마음이 황란(慌亂)하였다. 겉 봉투를 대강 열어보니 그 겉에 예(䓲)가 쓴 '통곡'이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이내 면(葂)이 전사했다는 걸 알고 나도 모르게 낙담하여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하도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구나.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구나. 나는 세상에 살아 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그후 16일의 일기에는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의 죽음을 들은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1597년 10월 16일) 라는 기록 등 지휘관으로서 휘하 장졸들 앞에서 드러내지 못한 비감을 쓴 바가 많다.
3. 위상
3.1. 사료적 가치
이순신의 면밀한 성품 탓에 사소한 사정까지도 자세히 적혀 있어 그 당시의 전황과 시대상, 역사까지 짚어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이 시기를 다룬 역사 사료로서는 조선 조정 움직임이 높은 평가이나 개인 입장이 강조되어 징비록보다 높으면서 실록 바로 다음가는 위치.
이순신에 관한 기록물 중에서 난중일기만큼 신뢰성이 있으면서도 정작 기록한 본인인 이순신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료가 없다. 즉 징비록, 실록, 일본 측 기록, 중국 측 기록 등 당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전쟁상을 보고 남긴 기록들이 오히려 이순신을 더 찬양하고 숭상했다는 것이다.
3.2. 문학적 가치
여러 대학, 기관에서 권장 도서로 선정되어 읽기를 권하고 있다. 이순신을 다룬 소설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은 문학으로서의 난중일기를 '수식을 배제한 무인다운 글의 전범' 이라고 하며 문체와 내용을 극찬하였다.
"삶과 죽음 오가며 칼을 휘두르는 마음으로 글 쓴다"
3.3. 인기
본디 출판을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이순신 개인의 사적인 일기지만, 국내에서 이순신이 가지는 위상이 엄청난 만큼, 위대한 성웅의 개인사를 알 수 있어서 대중적인 인지도가 매우 높다. 또한 사료로서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4. 초서 해독[脫草]
수많은 고문서들이 그렇듯이 난중일기 역시 한자 초서로 썼다. 거기에 이순신 장군이 개인 필체로 쓴 만큼 일반인이 난중일기 원본을 보면 이게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 또한 연구자들 입장에서도 그 귀한 원본을 접해볼 기회가 매우 드물다. 이러한 이유에서 난중일기 원본의 초서를 알아보기 쉬운 정자로 바꾸는 작업(탈초[脫草])이 몇차례 있었다.
가장 먼저 정자 편집이 이루어진 것은 조선 정조의 어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이다. 1795년 목판본으로 인쇄된 이 전서에 난중일기 정자본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는 편집 기간이 불과 2년에 불과하여 오자나 잘못 정자화한 부분이 상당히 많고 의도적인 내용 누락도 꽤 많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 다음은 1935년 조선총독부의 산하 기관인 조선사편수회가 간행한 '난중일기초(草)'이다. 정확한 명칭은 조선사료총간 제6집 - 난중일기초.임진장초. 조사와 편찬에 총 8년이란 긴 시간을 투자했고 당대의 한학자들이 대거 투입되어 완성도가 상당히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당히 많은 부수가 인쇄 간행되었기에 지금도 꽤 많이 남아 있고 심지어 고서점에도 매물이 등장한다.
다만 당시 일본 총독부 입장에서는 조선을 식민지로 두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자신들의 선조들이 과거부터 조선을 정복하고자 했지만 이런 엄청난 장수가 있어서 실패한 반면 지금의 우리는 당당히 성공했다.' 같은 프로파간다로 써먹기 좋았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도 굳이 이순신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과의 전쟁 중에 '일지'로써 작성된 리얼타임의 기록인데다 조선 주둔 일본군의 동향이나 조선군과 일본군 간의 교전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등 일본 입장에서도 자국의 조선 침략 전쟁을 연구할 역사적인 사료로 간주되었으니 오히려 유용하게 써먹었다. 한국사 연구에서도 중국이나 일본측의 사료를 교차검증하는 용도로 사용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인이 적장인 이순신의 기록을 참고자료로 쓴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고 그것에 대해서 너무 고평가할 필요는 없다.
2005년에는 당시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던 노승석(탈초팀)이 난중일기 정자로 입력한 데이터베이스화를 단기에 완료했다. 임진장초를 포함하여 총 약 13만자 가량을 판독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난중일기 이본인 정조때 해독된 이충무공전서본의 난중일기와 조선사편수회의 난중일기초 내용이 일부 반영되었다.
2017년 9월 12일 '개정판 교감원문[校勘原文] 난중일기(노승석 교감, 도서출판 여해)'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난중일기 친필 초고본과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 1935년의 난중일기초 등 후대의 이본, 국가기록유산의 난중일기 DB본 등을 모두 망라했는데, 중국의 교감학자 진원[陳垣]의 이론으로 원문을 교감하고 종합 정리한 난중일기 원문 책자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난중일기의 초서글씨를 탈초한 원문 책자로서는 가장 완벽한 책이다. 초고본과 함께 10여 년 동안 노승석 교수가 발굴하여 찾아낸 난중일기 이본(일치초, 태촌집, 동포실기 등)의 글자를 모두 포함하면 난중일기 글자는 모두 93,011자이다.
2021년 기존판본의 오류를 모두 수정하고 종합정리한 교감본 난중일기 원문이 수록된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노승석 역주)이 간행되었다.
5. 번역
5.1. 노승석 번역
현재 국내 번역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노승석 교수가 번역한 난중일기가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가 있다. 문팔초이(文八草二)의 방법으로 해독 및 원문을 교감(校勘)하고 기존에 없는 새로운 일기를 발굴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노승석 교수의 번역본은 2005년에 최초로 동아 일보사에서 한국어 완역본으로 출판했다. 그 뒤에 교감을 거쳐서 2010년에 민음사에서 다시 출판했다. 이 번역본에는 새로운 32일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2013년 6월 19일 난중일기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는데, 이때 민음사본이 심의자료로 제출되었다. 또한 그 뒤에도 교감을 거쳐서 2014년에 여해에서 또 다시 출판했다. 이 번역본에는 이순신이 삼국지연의에서 교훈이 되는 내용을 옮겨 적은 내용과 홍기문이 1955년에 최초 한국어로 번역한 난중일기 번역본을 반영했다. 그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2015년에 동일한 출판사에서 또 다시 번역했다. 이번 번역본에서는 갑오년에 쓴 9일치 일기를 추가했다. 거기에다 2016년에는 새로운 일기 35일치와 금토패문 및 문헌고증 내용을 추가하고 새로 해독한 2일치 일기를 포함해 총 200여 곳을 교감하여 개정판을 펴냈다.
2017년 9월 12일 도서출판 여해에서 ≪개정판 교감원문 난중일기(노승석 교감)≫가 간행되었는데, 이는 기존 활자로 된 한문판 난중일기 판본으로, 친필 초고본과 전서본, 이본이 모두 망라되었고, 2005년 국가기록유산 난중일기 DB에 있는 전산 오류와 일부 오타의 수정내용을 모두 반영하였다. 결국 이 책자는 초고본을 비롯한 난중일기 활자본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이 책 이후에 나온 다른 난중일기에는 이 책의 간행 상황과 수정 사실이 누락되었다.
2019년 10월 15일 난중일기 유적편(노승석 역, 도서출판 여해)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난중일기에 나오는 주요 유적지 4백 여 곳을 일일이 고증하여 해당 위치를 찾아 그곳의 사진을 해당 본문에 수록했다. 지금까지 나온 난중일기들이 많지만 이처럼 현장의 사진을 수록한 경우는 이 책이 처음이다. 경기와 충청, 전라, 경상 지역의 수많은 유적지를 수년동안 저자가 고지도를 참고하고 현지의 세거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었다. 특히 이순신의 가족묘, 아산의 자당기거지, 여수의 채석장, 통영의 통영별로와 통제사길 등을 처음 소개했다. 현재의 지번에서 난중일기의 유적지를 모두 찾아낸 전대미문의 역작이라고 평가되었다. 링크.
2019년 11월 18일 도서출판 여해에서 ≪교감완역 난중일기≫ 개정2판(노승석 역)이 출간되었다. 기존 또는 최근에 나온 다른 번역서들은 서로가 완벽하다고 주장하지만 문맥에 맞지 않는 번역과 초서 글자를 오독하는 등 해독상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이번 개정2판은 그간 논란이 많았던 지명의 오류 3백여 곳을 바로잡아 새로운 위치를 비정하고 최근까지 논란이 되었던 내용들과 오역 등을 모두 바로잡았다. 예컨대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러 갔던 합천지역에 대해 새로운 고증을 더했는데, 정유년 6월 4일과 5일 사이에 적힌 모여곡(毛汝谷)을 5일자에 처음 삽입하여 해석을 했다. 이는 전후 상황에 잘 맞는 해석이라는 평가가 있다. 특히 1935년 조선사편수회가 오독한 여진입/삽(女眞卄/卅)과 일맥금전(一脈金錢)을 각각 여진공(女眞共), 일맥금전(一陌金錢)으로 교감하고 이에 대한 고증내용을 상세히 밝혔다.
민음사본을 시작으로 개정 2판까지 10년 간의 전통을 이어온 ≪교감완역 난중일기≫는 홍기문의 번역과 삼국지 인용문, 새로운 일기 35일치를 최초로 수록하고, 지명 3백여 곳을 새롭게 고증하는 등 하나의 발굴 역사를 이룬 것이다. 이 책은 중고교 교과서 27종에 수록되었으며[32], 지금까지 고전 관련한 학계를 비롯하여 국내 및 해외에까지 최고의 학술번역서로 호평을 받았다. 이 책은 2015년 문화관광부 산하의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으로 베트남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2021년 3월 22일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이 출간되었다. <독송사>의 출전과 이순신의 둘째 아들 열의 이름 풀이 8자의 출전, 여진(女眞) 인명(교육부 한국고전번역원 인정), 그외 미상 인물 등을 새롭게 밝혔다. 이 책은 정본화된 원문을 수록하고 방대한 문헌으로 철저한 고증을 거친 정본으로서 고전학계에서 가장 정확한 학술번역서로 평가하였다. 2022년 9월 교감본과 교주본을 바탕으로 읽기 쉽게 편집한 한글판 <쉽게 보는 난중일기 완역본>이 출간되었다.
5.2. 이외
지금까지는 1968년 시인 이은상이 난중일기 초고본과 충무공전서본을 합본해 처음 번역한 것이 첫 한국어 번역본이라고 알려졌지만, 그 이전 1955년 북한 평양에서 간행된 난중일기 한국어 번역본이 최근 입수되었다. 벽초 홍명희의 아들, 국어학자 홍기문이 1955년 11월 30일 평양에서 펴낸 '리순신 장군 전집'에 실은 난중일기 번역본을 찾아낸 것이다. 이 책을 입수한 노승석 교수가 2013년 5월 31일 kbs 9시 뉴스에 처음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2018년 3월 30일, 글항아리에서 펴낸 '난중일기(박종평 역)'는 주석이 본문보다 더 많아 무려 1230페이지에 달한다. 난중일기 외로, 이순신 장군의 친필 편지를 모은 ≪서간첩≫과 장계를 모은 ≪임진장초≫ 등까지 합본된 것이다. 기존 번역의 오류를 많이 수정하여 가장 완벽한 번역판이라고 한다. 문화재청 사이트에 있는 난중일기가 가장 공신력 있는 것이라 할 것인데. 본서에는 문화재청 게재 내용의 글자 누락, 오기 등도 수정하고 있다. 한 예를 들면, 애매한 글자 옆에 붙은 일본어의 카(カ, 일까? 인듯?라는 의문 표시)가 힘力자로 입력되어 있는 등(p.582 주석 참조. 조선사 편수회 일본인 번역을 그대로?) 번역 저본 자체가 의심스러웠는데 문화재청은 2017년 12월 29일, '발견된 오류를 정정하기 위해서'라는 공지와 함께 원문 텍스트를 내려 놓았다.
그런데 이 글항아리 책에서 적시한 일본어는 기존 번역서에서는 전혀 없었고, 이 책에서 적시한 오기는 일부의 오타가 있었지만 실제는 대부분이 다른 판본 활자본(전서본)의 이본(異本) 글자로 확인되었고, 기존의 노승석 교감완역 난중일기(2016년 증쇄본 기준)책에서는 친필 초고본 위주의 내용으로 이미 모두 바르게 수정된 것이 추후 확인되었다.
이 이외에도 난중일기 번역서가 계속 간행되고 있지만, 한국연구재단에 등재된 학술지를 기준으로 최근의 연구상황을 종합해보면 노승석 이외에 교감을 더한 번역서는 보이지 않고 다만 이순신의 정신적 측면, 점법(占法), 리더십 위주의 연구서들이 확인된다. 한편 대중적인 책으로는 쉽게 보는 난중일기가 있는데 2016년 한국출판문화진흥원에서 대학신입생 추천도서로 선정되었다. 그외 1960년 초기 홍기문 등의 번역서가 종종 간행되고 있다.
외국에선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이 완료되었으며, 2015년 올레그 피로젠코 주한 러시아 대사관이 노역(露譯)한 난중일기가 있다.
6. 도난 사건
1967년 12월 31일 난중일기가 도난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난중일기는 당시 현충사의 유물 전시관에 전시되고 있었는데 범인들은 저녁 8시 ~ 10시경에 철문을 부수고 다이얼을 맞추고 침입하여 서간첩, 임진장초, 충무공유사 등 10책을 훔쳤다.
수사를 벌였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지지부진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1월 8일 문화재 도난에 따른 전례 없는 특별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1월 17일까지 난중일기를 찾지 못하면 모든 수사 기관을 총동원하여 범인을 체포하여 엄벌하겠으며, 범인 스스로 뉘우쳐 자수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면 그 죄에 대해서는 일체 불문에 붙이고, 난중일기의 행방을 알려주는 시민에게는 상금을 주겠다."는 강경과 회유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본인부터가 군인 출신인 만큼,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했고, 한민족 성웅 기념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움직였다는 평이 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1968년 1월 9일, 한 어린 시민의 제보로 끝내 범인들이 부산에서 체포되었고, 난중일기는 도난 10일 만에 '일본으로 유출되기 직전' 회수되었다. 검거 당시 난중일기는 비닐에 싸여 고추장 항아리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신고자는 공범의 조카였다고 한다.
주범은 유근필이라는 자로 당시에 37세, 무직자였으며, 이미 1966년에 통도사에서 동은사마법병을 훔쳐내 재벌 이 모씨에게 팔아넘긴 혐의로 9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적이 있는 전과자였다. 당시 그 외 6명을 검거하고 한 명은 수배하였다고 발표했다. 기사를 보면 절도범은 다 잡히고 공범 양씨만이 도주하다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데, 정황상 수배가 내려진 사람이 자살한 양씨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범행 이틀 전에 현충사 전시관을 미리 답사하였고, 난중일기를 일본에 가져가 1천 만 원에 팔아 서로 나누기로 했다고 한다. 소비자 물가 지수를 기준으로 화폐 가치를 환산해 보면 1967년에 1천 만 원은 현재 가치로는 약 3억 정도이다. 즉, 이들은 감히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국보급 중요 사료를 고작 1인당 5천 만 원도 안 되는 돈에 팔아버리려 한 것이다.
여기에 사건 이전인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이나, 그것을 반대한 6.3 항쟁이 1964년에 벌어지는 등 대일 감정이 매우 좋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만일 진짜로 난중일기가 일본에 유출이라도 되었었다면, 범인들은 일본에 맞서 싸운 성웅의 유산을 다른 곳도 아닌 일본에 팔아먹은 매국노로 여겨져 성난 시민들에게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사에 따르면 주범인 유근필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정부에서는 50부의 영인본을 만들어 전국에 보냈고, 원본은 열람이 금지되었다. 실제로 난중일기의 원본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공개하기가 힘들다. 가장 최근에 대중에게 선보인 사례로는 2015년 3월 29일, 1박 2일 시즌 3 당일치기 국보 전국일주편이 있다. 한 멤버의 대형 사건 때문에 VOD가 삭제되어 한동안 다시보기가 불가능했으나, 이후 KBS 깔깔티비 채널을 통해 해당 부분 분량이 재업로드되었다.
이 사건을 다룬 영상 - 대한뉴스 658호
7.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난중일기는 2013년 6월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7.1. 의의
난중일기는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이다. 난중일기는 전시에 지휘관이 직접 작성한 독특한 기록물로, 당시 국제전쟁으로서의 동아시아 전투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뿐만 아니라 당시의 기후, 지형, 서민들의 삶을 상세히 기록한 중요한 연구자료이다. 이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면밀한 성품 탓에 사소한 사정까지도 자세히 적혀 있고, 이 시기를 다룬 다른 역사 사료들보다 한 개인의 입장이 더욱 강조되어 있어 그 당시의 전황과 당시의 생활상과 시대상 등 자세한 역사까지 짚어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8. 여담
-국가 기록 유산 사이트, 고전 번역원에서 난중일기와 이충무공전서를 열람할 수 있다. 번역은 없지만 한문을 읽을 정도의 한자 지식이 있는 사람은 읽어볼 수 있다.
-난중일기에서 가장 내용이 긴 일기는 정유년(1597년) 9월 16일의 일기다. 다름 아닌 명량 해전을 치르던 날의 일기이다. 명량 해전은 이 충무공 역시 일생에서 가장 길었고, 긴박한 시간으로 느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이날 일기 마지막에 '실로 천행한 일이었다.'라고 덧붙였을 정도이니. 난중일기 곳곳에 장군의 감정이나 생각이 잘 드러나는 편이지만, 무엇보다 이순신의 감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일기는 정유년 일기다. 이 해에 워낙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재청에서는 난중일기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기로 하고 2012년에 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하였다. 이후 2013년 6월 18일 세계 기록 유산 국제 자문 위원회(IAC)의 최종 심사를 거쳐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로써 2015년 10월 9일 기준 '특별 생방송 이산 가족을 찾습니다'와 한국의 유교책판이 추가로 등재되면서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한국 기록물은 13개가 되었다. 아시아에서도 독보적인 1위이며 세계구급으로도 상당히 많은 편.(3위)
-난중일기에는 짤막하게 여진(女眞)이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제까지 이순신과 관계한 여인의 이름으로 해석되어 난중일기가 유명해지는데 한 몫 했다. 번역될 때에도 그렇게 번역했지만 최근에 이것이 오독이라는 주장이 있다.
위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듯이 노승석 교수는 1935년에 난중일기를 해독하던 일본인이 女眞共(여진공)을 오독해 女眞卄(여진입), 女眞卅(여진삽)이 되어버렸다는 주장을 했는데, 고전 및 초서 전문가들 다수가 이 의견에 공감했다. 상기한 '공(共)'자는 난중일기 내에서 단순히 함께했다는 뜻으로 사용된 용례가 명확히 있으며, 따라서 女眞共(여진공)을 해석하면 그냥 노비들을 불러 심부름을 시키거나 노가리를 깠다는 뜻이 된다.
노승석 교수는 오죽 오독한 것을 바로잡고 싶었는지 여진공(女眞共)으로 읽고 그냥 함께했다고 해석하는게 맞다는 논문까지 내었다. 논문 내용을 요약하자면,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共을 필기체로 쓴 부분을 비교 및 대조해보면 女眞共(여진공)으로 해독하는 것이 옳고, 共은 함께하다라는 뜻으로 난중일기 여기저기서 나왔기에 여진공(女眞共) 역시 여진이라는 노비가 있었고 이순신과 그냥 함께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내용이다.
이용호 박사는 여진(余陣, 직역하면 내 진영)을 잘못 오독해 여진(女眞)이 되었다는 의견을 냈다. 원문에는 여진 뿐 아니라 여진입(卄. 스물), 여진삽(卅. 서른)이라는 문구도 있는데, 이 역시 이순신 진영의 병사 20, 30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난중일기를 좀 더 뒤져보면 관비 4명과 잤다는 언급도 있는데, 기존의 통설에 따르면 저 문구는 관비 4명과 집단 성교를 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게 좀 황당하기도 하거니와 구체적으로 동침(與)이란 글자가 들어가지도 않아서 그냥 같이 어울리다 돌려보내고 혼자 자러 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여하튼 난중일기에서 여진이라는 여자랑 같이 잤다는 해석이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인데, 2020년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사망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클리앙에서 한 유저가 해당 내용을 언급하면서 박원순 전 시장을 옹호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실제 난중일기는 총 8권이 있어야 한다. 정유년을 다룬 정유년의 일기가 정유일기, 속정유일기 두권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누락된 부분은 1595년 을미년을 다룬 을미일기로 이는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한국사에서 난중일기의 역사적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 '을미일기'가 발견된다면 임진왜란 중 을미년의 내용이 상당히 바뀔 것이라는 평도 존재한다. 다만 기사에 따르면 이미 이충무공전서에 을미일기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어 중요한 부분은 알려졌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기사에선 충무공의 다른 유물들의 허술한 관리 실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으니 관심있으면 읽어보자.
-난중일기 중 임진일기의 한 페이지에는 이순신이 사인을 연습한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 단 사인 연습이 아니라는 설도 있으며 이에 대해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스펀지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소개한 바 있다. 가끔 '50대 공무원의 자필 낙서' 같은 드립의 소재 되기도 한다
-유튜브 채널 Extra Credits에서 이순신 이야기를 시리즈로 연재하였는데. 시리즈 마지막까지 보면 고증 담당자가 나와서 관련 이야기를 하는 영상이 있다. 그런데 그 고증 담당자 왈, 자기가 찾아본 자료 중 난중일기가 제일 이순신에게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타인들은 이순신을 찬양하거나 부풀리기 바빴던 반면 난중일기는 이순신 본인이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적어넣은 것이니 그럴만도.
-가끔 나중에 썼다고 "나중일기"라는 드립이 나오기도 한다. 실제로 "난중"은 전라도, 경상도 등 남부 지방에서 "나중"이라는 뜻의 사투리로 쓰기는 한다.
-인터넷 등지에서는 영남 지역을 비하하기 위해 '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영남 출신 군졸을 폄하했다' 등의 주장이 보이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지정 명칭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이다. 부록으로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 합 9책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白岩里) 현충사(顯忠祠)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역사적 사실과 학술연구 자료로서 높은 가치가 인정될 뿐 아니라, 유례를 찾기 힘든 전쟁 중 지휘관이 직접 기록한 사례인 점을 들어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영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기록, 난중일기 40여전의 해전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백전무패 신화의 주인공,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두려움을 몰랐던 용맹한 장군,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마지막까지 승리만을 생각했던 무신… 우리가 흔히 ‘이순신’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국보 난중일기(亂中日記) 속 드러난 이순신은 영웅 이순신보다는 한 인간 이순신에 더 가까웠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1598년까지, 7년간의 기록이 담긴 총 7권의 일기이다. 7년 전쟁의 불길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인간 이순신을 만날 수 있는 보물, 난중일기는 세계에서도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기도 했다.
난중일기에 담긴 효자 이순신의 사모곡
그렇다면 난중일기는 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정갈하게 오와 열을 맞춘 난중일기의 첫 장, 그 내용은 이렇게 시작한다.
(임진일기) 1592년 1월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설을 쇠니 간절한 회환을 가눌 수 없다.
병사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장전, 편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이 날의 일기만 봐도 이순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 날의 일기에는 설날을 맞아 이순신을 찾아온 병사와 가족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장군은 이를 보며 멀리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이순신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밖에도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일기 속에는 언제나 승리만을 위해 전쟁에만 몰두할 것 같았던 장군 이순신은 없고, 나이든 어머니를 걱정하는 아들만 남아있다.
(계사일기) 1593년 6월 1일
審天只平安 多幸多幸
어머니가 평안하심을 알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마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계사일기) 1593년 6월 12일
朝拔白十餘莖 然 白者何厭 但上有老堂故也
아침에 흰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흰 머리를 꺼리는 것은
위로 늙은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걱정하고 또 아꼈다. 아픈 아들과 심부름 보낸 종마저 걱정했던 이순신은 근심걱정이 많았던 탓인지, 잠 들지 못할 때가 수두룩 했고 심지어는 시름시름 앓기도 했다.
난중일기에는 용맹한 장군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러한 인간 이순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 글자가 바로 웅크릴 축縮이다.
(정유일기) 1597년 9월 3일
雨洒 縮首篷下 懷思如何
비가 뿌렸다.
뜸 아래에서 머리를 웅크리고 있으니,
생각이 어떠하겠는가.
난중일기에는 이 웅크릴 축縮자가 수시로 등장한다. 그는 모두가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한 전쟁에 뛰어들면서, 끝없는 두려움과 싸워야 했지만, 그 또한 고통, 슬픔, 외로움, 두려움 앞에서 한없이 웅크릴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었다. 장군 이순신과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갈등이 한 글자 안에 담겨있는 듯 하다.
이순신, 1597년의 일기를 두 번 쓴 이유는?
1597년 정유년의 일기는 한 권이 아니다.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 66일 동안의 일기를 2번 썼기 때문이다.
(정유일기) 1597년 9월 16일
적선 133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지휘선이 홀로 적선 가운데로 들어가
탄환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발사했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격하지 않아 앞일을 헤아릴 수 없었다.
정유년은 명량해전이 있던 해다. 133척의 왜선과 맞서 싸워야 했던 상황, 그러나 그에게는 단 13척의 배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그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는 그 날의 이야기를 이렇게 쓴다. '이번일은 실로 천행(天幸)이었다'
사실 인간 이순신에게 정유년은 잔인한 해였다. 그는 정유년에 사랑하는 사람을 둘이나 잃었다. 어머니를 여의고,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잃었던 해가 바로 정유년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장군 이순신은 이 때 최고의 공적을 세우게 된다.
이순신이 기록한 임진왜란 7년의 일기는 ‘타고난 영웅은 없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기 위해
이순신 자신도 무던히 마음을 다 잡아욌다‘고 말하는 듯 하다.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고통이 장군 이순신을 만들었음을, 난중일기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 7년(1592년 ~ 1598년) 동안 군중에서 쓴 일기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76호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일기 7책과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까지 총 9권이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3년 6월 18일 광주에서 열린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의 권고를 유네스코가 받아들여,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개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서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수군을 지휘해 한산도, 명량 등지에서 왜병을 격퇴하고 전란의 전세를 조선의 승리로 이끌어, 사후 조선 조정으로부터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받았던 여해(汝諧)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의 2,539일간의 군중에서의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대해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일기이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조선 정조 19년(1795년) 왕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서 처음 붙여졌다. 원래 제목은 연도별로 《임진일기》(壬辰日記), 《계사일기》(癸巳日記) 등으로 일기가 다루는 해의 간지를 붙여 표기하였다. 현존하는 난중일기의 판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친필 원본은 초서로 되어 있으며, 《이충무공전서》 편찬과 함께 원본 일기의 초서를 정자(正字)로 탈서(脫草)한 전서본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전서본은 친필 원본을 탈서편집한 것이나, 원본 일기에 빠진 부분(을미년 일기의 경우 전서본에만 존재)을 담고 있어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전서본과 친필본을 합본하여 《난중일기초》를 간행하였다.
7년 간의 전쟁 동안 출정한 낱, 이순신 본인이 항명죄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있던 시기에는 일기를 쓰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나,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내용은 시취(時趣)에 넘치는 일상생활, 동료 · 친척과의 왕래 교섭, 이순신 본인의 개인적인 집안일은 물론 당시 조선 수군(水軍)의 지휘에 관한 비책(秘策), 국가 및 조정에 대한 충성과 강개, 왜군에 대한 분노의 감정 토로 등이 실려 있으며,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간의 갈등 문제를 비롯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료(史料)이다.
내용
두 개의 정유일기
《난중일기》에서 명량해전이 있었던 해인 정유년(1597년)의 일기는 두 개의 사본이 존재한다. 모두 이순신 본인이 쓴 것으로 정유년 4월 1일부터 10월 28일까지 쓴 제5책(전 27매)와 정유년 8월 5일부터 이듬해 무술년 1월 4일까지의 일을 기록한 제6책(전 20매)의 사본이다. 정유년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의 일기가 중복되어 있는데 양자를 비교하면 제5책에서 간지의 착오가, 제6책에서 기사의 상세한 확충이 확인된다. 김경수는 이에 대해 이순신이 처음 쓴 정유년 일기의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고 시간의 여유를 틈타 이순신이 기억을 더듬어 다시 쓴 것으로 추정하였다. 명량해전을 치르던 날인 9월 16일의 일기는 난중일기 분량 가운데서도 가장 긴 분량의 일기이기도 하다.
왜장 마다시(馬多時)
《정유일기》(丁酉日記) 후권(後券) 음력 9월 16일자에 기록된 명량 해전의 날, 12척의 배를 이끌고 울돌목에서 300여 척에 달하는 일본 함대와 맞닥뜨려 적선의 31척을 부수고 일본 함대를 격퇴하는 전승을 거둔 이순신에게 앞서 안골포 해전 때 조선군에 투항했던 항왜 준사(俊沙)가 바다에 떠다니던 왜장의 시체를 가리켜 "저기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은 놈, 안골진(安骨鎭)의 적장 마다시(馬多時)라는 자입니다."라고 보고했고, 이순신은 사부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마다시를 갈쿠리로 건져올려 재차 준사에게 확인시킨 뒤, 마다시의 시체를 토막내어 적 앞에 보임으로써 적의 기세를 꺾었다고 적고 있다.
안골포에서 항복한 항왜인 준사가 알아보고 이순신에게 가리켜 알렸다는 마다시라는 이름의 왜장에 대해서는, 정유재란 당시 구루시마 수군을 거느리고 참전했으나 울돌목에서 전사한 이요 출신의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라고 알려져 왔으나, 《양국임진실기》(両国壬辰実記)의 찬자 야마자키 히사나가(山崎尚長)는 각주에서 아와지섬을 중심으로 활약한 또 다른 수군 세력인 간 씨(菅氏)의 간 헤이에몬(菅平右衛門)의 자제 가운데 마타시로(又四郎)라는 통칭으로 불렸던 간 마사카게(菅正陰)를 마다시로 거론하고 있다.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 또한 울돌목에서 죽었고 '마타시로'와 '마다시'의 일본어 독음도 서로 같다는 점이 주요 근거로, 《징비록》을 일역하기도 한 재일 사학자인 박종명(朴鐘鳴)도 이 설을 지지하였다. 일본측 자료로 명량 해전 당시 일본 수군 장수의 한 명이었던 도도 다카토라의 행장 기록인 《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에는 "선봉에 섰던 배들이 적선에 당해 부서진 것이 몹시 많았다. 그 와중에 구루시마 이즈모노도노(来島出雲殿)도 전사(討死)하였다."고 적고 있다.
주변 인물들에 대한 평가
이순신은 일기 속에서 자신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남기고 있다.
권율
선조 27년(1594년) 이순신은 전윤으로부터 "수군을 거창으로 잡아왔는데 원수 권율이 방해한다"는 전언을 들었다. 그는 이를 일기에 적고, "예전부터 남의 공을 시기하는 것이 이랬으니 한탄해 뭐하겠는가"[5]라고 권율을 비판했다. 6월에는 광양현감이 두치에서 수군을 옮겨 복병시켰는데, 도원수 권율의 서출 처남인 조대항이 권율에게 무고하는 말만 믿고 광양현감에게 사적인 감정이 있는 게 아니냐고 문책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순신은 이에 대해 "사사로이 행한 것이 이리 심하니 통탄을 비길 데 없다"고 평했다(나중에 권율은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후회). 을미년 일기에서도 이순신은 남해현령 기효근 등을 공초한 권율의 초안을 보고 "근거도 없이 망령되게 고한 말이 몹시 많으니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라며, 원수의 임무를 맡아 행하는 게 괴이하다고 평한다.
김응서
경상우병사로 있던 김응서는 선조 28년(1595년) 5월 1일, 조정의 명도 없이 사사로이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교섭하면서 고니시를 향해 '대인(大人)'이라고 칭하는 등의 일이 문제가 되어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있었다. 김응서에게 비변사낭청 김용이 찾아와 구두로 선조의 유지를 전한 날 일기에 이순신은 "김응서라는 자는 어떤 자인데 스스로 개선하고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는가. 쓸개가 있는 자라면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진주성의 폐허를 함께 둘러보기도 한다. 훗날 고니시 유키나가의 첩자 요시라로부터 전해들은 가토 기요마사의 조선 도해에 대한 거짓 정보를 조정에 보고하고, 조정으로부터 출병해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는 명을 받은 이순신이 정보의 신빙성이 약하다고 출동 명령을 거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직을 내놓게 된다.
류몽인(柳夢寅)
류몽인의 유명한 이야기집 《어우야담》에는 이순신에 관한 일화가 몇 편 등장한다. 류몽인은 선조 28년에 암행어사로 남도에 파견되었는데, 암행어사로써 그는 임실현감 이몽상과 무장현감 이충길, 영암군수 김성헌, 낙안군수 신호를 파면해 내치고, 순천부사를 탐관오리의 으뜸이라고 평하고 담양군수 이경로나 나주목사 이순용, 장성현감 이귀, 창평현감 백유항 등의 악행을 덮어주고 조정에 포상을 요청했는데, 이순신은 이에 대해 "나라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도 않고 남쪽 지방의 억울하다는 변명만 믿고 있다"며, 중국 송의 간신이었던 진회가 무목(武穆)한테 하던 짓이나 다름없다고까지 비난하고 있다.
류성룡(柳成龍)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에 도체찰사를 겸해 군무와 정무를 두루 수습하였던 류성룡은 어린 시절부터 이순신과는 가까운 사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임진년 3월 5일에 이순신은 류성룡(당시 좌의정)으로부터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받았음을 적고, 그 책에 대해 "수륙전과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다"며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저술"이라고 평가하였다. 이후 갑오일기 2월 12일자에 이순신은 한양에서 온 선전관으로부터 영의정(류성룡)의 편지를 전해받고, 다음날 류성룡에게 답신을 썼다. 이때 이순신은 일기에서 "위에서 밤낮으로 애쓰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고맙고 그립기가 끝이 없다"고 소회를 적고 있다. 7월 12일자에 이순신은 "류 정승(柳相)이 죽었다는 부음이 순변사(이일)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는 자신이 들은 소식을 적고(실제 류성룡은 정유재란이 끝나고 9년 뒤인 1607년에 사망) "이는 류 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지어내서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을 이길 수 없다."고 자신의 감상을 적고 있다. 류성룡은 훗날 징비록에서 특별히 이순신의 생애와 전과 등을 비중 있게 언급하였다.
원균(元均)
원균은 이순신의 일기 속에 120회 언급되어 있다. 연도별로 따지면 계사년(49회)과 갑오년(46회)에 집중되어 언급되는데[9] 대부분 원균의 떳떳하지 못하고 치졸한 모습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주를 이룬다. 진도의 지휘선이 왜적에게 포위된 것을 눈앞에서 뻔히 보고도 못본 척 하는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에 대한 비난과 함께 경상수사(원균)를 원망하고 있으며 죽은 왜적의 수급을 거두려고 적이 가득한 섬 사이를 들락거리는 경상수사의 군관과 가덕첨사의 사후선을 잡아 보냈더니 이순신에게 화를 내더라는 기록과, 장계를 거짓으로 꾸며 올리면서 군중을 괜히 동요시키는가 하면 탈영한 격군들을 데리고 자신의 주둔지로 숨은 휘하 포작(어민)들을 숨겨주느라 그들을 잡아 오라고 금모포 만호가 보낸 관리들을 거꾸로 포박하기도 하고 명나라의 경략 송응창이 경상우병사 최경회에게 보낸 1,530대의 불화살을 혼자서 다 쓰려고 계책을 꾸미기도 하고 이순신에게 날 밝는 대로 나가 왜적과 싸우자고 공문을 보내놓고 다음 날 이순신이 왜적을 토벌하는 문제에 대해 공문을 써서 보내자 취기에 정신없다고 핑계를 대며 대답하지 않기도 한다. 이순신에게는 복병을 동시에 보내자고 해놓고 자신이 먼저 보내기도 했다. 이밖에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더라는 등의 비난도 있다. 이순신은 원균에 대해서는 거의 "음험하고 흉악한 품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의논에서 원 수사가 하는 말은 매번 모순이다. 참 가소롭다"라고, 원수 권율의 질책 앞에서 머리도 들지 못하는 원균의 모습을 두고 우습다고 비웃기도 하는 등, 매도에 가까운 비난을 숨기지 않는다. 어머니의 상을 당한 이순신에게 문상을 보냈을 때조차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 조문한다만 이는 원수의 명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원균에 대한 감정의 골은 깊었다.
이원익(李元翼)
이원익은 체찰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던 중이던 1595년 8월에 이순신과 만났다. 8월 22일에 진주에 들어온 이원익은 다음날 이순신과 대면했는데, 이순신은 이원익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그는 백성의 고통을 없애려는 일에 뜻을 둔 것 같다."고 일기에 적었다. 28일까지 체찰사 이원익은 체찰부사 김륵, 종사관을 데리고 이순신과 함께 남해를 돌며 진을 합칠 곳, 왜적과 싸울 만한 곳을 둘러보며 군중을 폐단을 의논하고 헤어졌다. 12월 18일에도 체찰사 이원익은 통제사 이순신과 사천의 보에서 만나 새벽 두 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심문받을 때 이원익은 정탁과 함께 이순신의 구명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정경달(丁景達)
정경달은 임진왜란 당시 선산군수로써 의병을 모아 김성일, 조대곤 등과 함께 금오산에서 왜병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1594년부터 이순신 막하에서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는데, 둔전 경영과 관리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임진일기 마지막 장에 실려 있는 이순신 본인이 쓴 서간의 초안에서 전 관찰사로부터 도주(道主, 관찰사) 외에는 둔전을 계속 경작할 수 없으니 일체 검사하지 말라는 공문에 대해, 종사관 정경달은 이제껏 둔전 감독에 심력을 다하였음을 호소하고 추수하는 동안만이라도 그대로 맡겨둘 수는 없겠느냐고 적은 것이 확인된다. 정경달 또한 전쟁 중에 쓴 일기가 문집 《반곡집》(盤谷集, 1800년 간행)에 실려 전하며, 《반곡집》에 실린 정경달의 일기 또한 '난중일기'라는 편명으로 실려 있다.
정탁(鄭琢)
갑오일기 2월 4일자에는 찬성(贊成) 정탁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정탁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파직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을 때 이원익과 함께 그의 목숨을 구명해 줄 것을 청하는 차자를 올린 사람이었다. 정유년 4월 1일에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났을 때 정탁은 류성룡 등 다른 조신들처럼 사람을 보내 이순신을 위로하였다. 한편 이순신을 구명해 줄 것을 요청한 정탁의 차자는 《신구이순신차초》(伸救李舜臣箚草)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전장에서의 독서
《난중일기》 속에는 이순신이 전쟁 가운데, 혹은 전쟁 전에 읽었던 책에 대한 언급도 있다. 《정유일기》 말미에 이순신은 중국의 역사책 《송사》(宋史)를 읽고 느낀 소감을 적어두었고, 역사 속의 인물의 행적을 되새기며 구국에 대한 충정을 다시금 상기한다. 이순신의 오랜 지우인 류성룡이 보내준 《증손전수방략》(增損戦守方略)에 대해 "수전과 육전, 화공법에 대한 전술을 일일이 설명한 참으로 만고에 뛰어난 이론"이라며 칭찬하고, 한국의 옛 역사를 읽고 개탄스럽게 느낀 자신의 생각을 일기에 적기도 했다.
또한 《갑오일기》말미에서는 '난도(難逃)',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재가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인재가 없으니 배를 더욱 늘리고 무기를 만들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外無匡扶之柱石 內無決策之棟樑 增蓋舟船 繕治器械 令彼不得安 我取其逸)'와 같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속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확인되어, 이순신이 일찍 《삼국지연의》를 접하고 읽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정유일기》에는 백의종군 도중 한산도의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지원하기 위해 마침 남쪽으로 내려온 박천군수(博川郡守) 류해(柳海)로부터, 과천의 좌수(座首) 안홍제(安弘濟)라는 인물이 죄도 없이 억울하게 관에 잡혀가 여러 차례 형장을 맞아 거의 죽을 지경이 다 되었는데 말과 스무 살 된 계집종을 뇌물로 바치고 풀려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라 안팎에서 뇌물의 많고 적음을 갖고 죄의 경중을 정한다고 기가 막혀 하며 "이런 게 '백 전의 돈이 죽은 혼도 살린다'(一陌金錢便返魂)는 것인가?" 라고 한탄하였는데, 이 구절은 명(明)의 구우가 지은 《전등신화》(剪燈新話)에 실린 '영호생명몽록' 중 내용의 부분으로, 이순신이 《전등신화》를 접하고 읽은 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류해는 이순신을 만난 다음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배설 및 가리포첨사에게 보내는 이순신의 문안 편지를 갖고 승평(순천)을 거쳐 한산으로 갔고, 두 달 뒤인 7월 16일 새벽,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거제 앞바다의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난중일기의 사본 및 간본
《난중일기》의 대표적 사본과 간본은 이순신 본인이 초서로 쓴 친필 원본과, 친필본을 토대로 조선 정조대에 초서를 정서하는 작업을 통해 정리한 전서본이 있다. 1932년 원본과 전서본의 내용을 합친 형태의 간본이 조선사편수회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빠졌던 부분과 누락된 부분이 계속해 이후 발견되면서 내용에 대한 추가 연구와 번역이 이루어졌다.
친필본
전서본 일기가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하는 것과 달리 친필본은 5월 1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전문 7권 8책으로 군중에서의 일과를 비롯해 조정에 바치는 장계와 등본, 별책, 부록 등이 초서로 적혀 있다.
임진년에서 계사년, 정유년 일기는 일기의 양이 일정하지 않고, 갑오년에서 병신년의 일기는 비교적 일정하다. 긴박한 상황에서 심하게 흘려 적은 것으로 삭제에 수정을 반복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판독이 어려울 정도로 흘려쓴 초서 글씨들은 전서본 등 후대 활자본에서도 해당 부분의 오독 내지 탈자가 확인되기도 한다. 《난중일기》를 연구한 노승석은 필기 상태가 유난히 심하고 훼손된 부분이 많은 것에서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파직에 투옥, 백의종군에 이어 모친상까지 당하는 악순환 속에 있었던 이순신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런 만큼 이순신의 감정을 가장 자연스럽고 온전한 형태로 전하는 일기로써의 성격을 제대로 간직한 간본이라 할 수 있다.
전서본
조선 정조는 재위 12년(1788년), "우리 나라를 재건하게 한 큰 은혜를 길이 생각하고 충무공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며, 이순신의 사적을 모아 내각에 내려 전서를 편찬하고 활자로 인쇄되는 대로 한 본을 삼도수군통제사 본영이 있던 통영의 충렬사에 간직해두고 제사지낼 것을 명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이순신의 보고서, 진중에서 남긴 7년간의 일기와 시문 등 이순신의 행적과 관련 기록에 정조 본인이 이순신을 추모해 쓴 글이 더해졌다. 간행은 윤행임과 유득공 등이 맡았으며, 초서로 쓰여 있던 친필본 일기의 내용을 정자체로 바꾸고 판각하는 탈초 작업이 이때 처음 이루어졌으며, 흔히 알려진 난중일기라는 제목도 이때 처음 붙여졌다.
《이충무공전서》는 초간본을 비롯해 후대에 이르기까지 총 6차례 간행되었고, 내용은 간본 모두 동일하다. 《이충무공전서》권5에서 권8에 해당하는, 이른바 전서본 《난중일기》의 내용은 날짜면에서 친필본보다 많으며, 총 7년 2,539일의 분량 가운데 1,593일의 기록이 실려 있고 946일은 누락되어 있다. 친필본에 실려있던 내용 상당수가 생략된 한편으로 친필본에 없는 을미년 일기 전문과 임진년 정월 초하루에서 4월 22일, 무술년 10월 8일부터 12일, 11월 8일부터 17일까지의 일기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난중일기》의 정본을 제작하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난중일기초
1935년 12월 20일 경성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판독한 판본을 일본인이 경영하던 지카자와 인쇄부(近澤印刷部)에서 간행된 간본이다. 《조선사료총간》제6에 '난중일기초 임진장초'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는데, 그 이전인 1928년 5월에 이순신에 관한 유물 일체의 촬영은 조선사편수회에서 모두 마친 상태였으며 1934년 연차계획안 속의 사료총간목록 속에서 난중일기 초본과 임진장초(활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친필본과 전서본의 내용을 합치되, 친필본의 형태와 체재를 그대로 살려 날짜별로 나열, 친필본에서 마멸,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미상기호로 처리하였다. 수정된 내용은 오른편에 빠짐없이 표시하고, 관련 내용은 위에, 인명과 지명은 옆에 주석을 달아 놓았다. 후대 연구자들은 이 난중일기초를 가장 대표적 전범으로 삼았으며, 비교적 완벽에 가깝게 편집된 간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이전인 1916년, 조선연구회(朝鮮研究会)의 주간을 맡고 있던 아오야나기 난메이(靑柳南冥)가 전서본 《난중일기》를 토대로 일본어 해석과 함께 《원문화역대조 이순신전집》(原文和譯對照 李舜臣全集)에 수록한 간본이 존재하나, 이는 임진년 정월 초하루부터 을미년 5월 29일까지의 일부 내용만을 실은 발췌본이었다(이듬해 난중일기에 현토를 단 《난중일기장》이 《이순신전집》에 실려 간행됨).
《충무공유사》본 일기초
이순신의 집안인 덕수 이씨 집안에는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라는 이름의 문헌이 전해져 왔다. 저자도 확실하지 않은 이 문헌은 이순신 집안과 관계있는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서 초록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제목이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 알려지기도 했다. 성립 시기는 《재조번방지》가 완성된 숙종 42년(1716년) 이후로 보인다. 친필본 《난중일기》를 옮겨 적은 유일한 판본이자 325일치의 분량 가운데 친필본과 전서본에 누락된 32일치(을미년 30일, 병신년 1일, 무술년 1일치 분량)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1967년 난중일기 도난 사건이 일어나고(후술) 이듬해 3월, 한국의 문화재관리국은 《난중일기》와 함께 《충무공유사》를 영인 발행하였다. 2000년 《정신문화연구》봄호 제23권 1호에 실린 박혜일(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외 3인의 ‘이순신의 일기 일기초의 내용 평가와 친필초본 결손부분에 대한 복원’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충무공유사》의 원문 일기초 내용의 일부가 발표되었으며, 《난중일기》의 훼손된 부분을 복원할 수 있는 판본으로 평가되었다. 분량이 적긴 하지만 친필본의 마모되고 확인불능 글자, 빠진 부분이 정확히 적혀 있으며, 전서본 제작 과정에서 누락된, 상관과 동료에 대한 이순신 본인의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2008년 6월 현충사에서는 《충무공유사》의 번역문과 영인문의 합본을 간행하였다.
난중일기 도난 사건
1967년 12월 31일에 현충사에서 보관되고 있던 《난중일기》가 도난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도난당했던 난중일기는 이듬해 1968년 1월 9일, 사건 발생 10일만에 부산에서 회수되었다.
사건 종결 이후 박정희 당시 대통령 지시로 《난중일기》의 영인본 5백 부가 제작되어 전국 공공도서관 및 박물관으로 보내졌으며 《난중일기》 원본은 열람 자체가 금지되었다.
난중일기의 번역
《난중일기》의 가장 오래된 국역본은 1960년 4월에 이은상이 친필본의 원문교열을 마치고 문교부에서 간행한 《이충무공난중일기》라는 제목의 국역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보다 앞서 1953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언론인 설의식이 수도문화사에서 간행한 《이순신 수록(手錄) 난중일기》의 존재가 알려졌다. 2년 뒤인 1955년 11월 30일에 북한에서 월북문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리순신장군전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평양 소재 국립출판사 주필을 맡고 있던 이상호가 5천 부를 간행하였다.
홍기문의 번역은 신문관본과 통영본, 두 개의 《이충무공전서》 판본을 기초로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난중일기초》를 토대로 하여 번역한 것으로, 《이충무공전서》의 내용 가운데 충무공의 저작이 아닌 것을 삭제하고 번역하였다. 홍기문은 이 번역본에서 "친필본보다 전서본이 간략하게 된 것은 윤행임이 삭제하고 이두문을 임의로 수정한 것이다."라며, 난중일기의 판본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홍기문의 번역은 친필본과 전서본의 최초의 합본 번역이라는 의의가 있지만, 북한에서 발행한 덕분에 북한 사투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친필본 《난중일기》를 확인하지 않은채 활자본만을 토대로 번역해 친필본의 미상, 오독 부분을 밝혀내지는 못했다는 한계도 있었다(이후 중간본이 간행).
이은상은 1960년 난중일기 간행본에서 "공의 초고와 전서 중의 채택되어 있는 난중일기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10월 7일까지만 남아 있던 무술일기의 빠진 부분을 장예초본 별책(《충무공유사》일기초)에서 10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의 친필 일기초 2면을 찾아내 수록했고, "공의 친필초고를 완전 채록했다"고 자부하였다(다만 이은상은 장예초본 별책이 《충무공유사》일기초와 동일한 것임은 몰랐다). 이은상이 《난중일기》를 번역한 1960년 부산대학교에서 총장 윤인구에 의해 충무공연구실이 설치되어, 당시 친필 난중일기 초고 7책 215장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당시 경무대(청와대)와 부산대 도서관, 현충사에 각각 한 부씩 비치했었다.
1968년에 이은상이 번역한, 친필본과 전서본이 합본된 《난중일기》가 현암사에서 크라운판(版)으로 간행되었다. 공교롭게도 지문각에서 이석호가 역주한 《난중일기》도 이은상 번역본과 같은 날(1968년 4월 2일)에 발행되었는데, 이석호 역주본은 갑오년 7월 13일과 병신년 8월 2일, 정유년 7월 2일 등 전체 분량 가운데 126일치가 빠졌고 이순신이 지은 한시가 부록되었고, 가격도 현암사판(8백 원)보다 저렴한 390원이었다. 한편 이은상 번역본 《난중일기》는 원문과 함께 《난중일기》 속 지명과 현대의 지명을 대조해 표로 정리한 것을 부기하였다.
한편 2004년부터 문화재에 대한 디지털 정보화 사업의 일환으로 난중일기 원문과 원본사진이 국가기록유산에 게재되고, 친필본 탈초와 원문 해독을 맡았던 노승석이 10여 곳의 오류를 발견하였다. 노승석은 자신이 발견한 오류의 수정을 반영하여 2005년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동아일보사)을 출간하였고, 《충무공유사》해독 과정에서 찾아낸 32일치를 첨가한 표정교감본 임진일기를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를 통해 2007년 3월에 간행하였다. 5월에 박해일 교수 외 3인이 친필본을 활자로 옮긴 《이순신의 일기초》를 간행하였는데, 원문에 구두를 넣지 않았고 본서 속에 수록된 장계와 서간문의 출처를 밝히고 내용과 형식을 친필본 형태로 상세편집하였다.
문학으로서의 난중일기
5만 명의 조선 군민이 왜병과의 분전 끝에 몰살당한 제 2차 진주성 싸움(1593년)이 있었던 해에 쓴 《계사일기》 7월 2일자에서 이순신은 진주성(晋州城)이 왜병에 포위되어 위태롭다는 소식을 김득룡으로부터 전해 듣고 놀라고 걱정스럽다면서도 그럴 리 없다고 애써 부정하는 투로 적었지만, 7월 6일에 광양으로부터의 보고를 통해 진주성 함락의 소식을 전해듣고, 9일에는 광양과 순천이 왜병에 함락되었다는 비보가 이어지고 난 뒤에 "이 날 밤은 바다의 달이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색을 이루었고,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었다. 홀로 뱃전에 앉아 있었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고 썼다. 소설 《칼의 노래》(2001년 발행)를 발표한 한국의 소설가 김훈은 "홀로 뱃전에 앉아 있었다"는 이 《난중일기》 문장을 두고 「이것은 죽이는 문장입니다. 슬프고 비통하고 곡을 하고 땅을 치고 울고불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혼자 앉아 있었다는 그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이죠. 거기에 무슨 형용사와 수사학을 동원해서 수다를 떨어본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를 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연 수사학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강력한 주어와 동사의 세계죠. 내가 사랑하는 주어와 동사의 세계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에 입각해 있습니다.」라 평했다.
이순신은 또 일기에다, "오늘 어떤 녀석이 군율을 어겼기로 베었다"고 썼습니다. 기막히지요. 군율을 어겼기로 베었다. 그게 목을 베었다는 거지요. 그것이 그가 글을 쓰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완강한 사실에 입각하는 것이죠. 군율을 어겼기로 베었다. 그 머리를 베어서 장대에 끼워서 성 앞에 걸었다. 그래놓고 그 다음 문장을 계속 써요. "저녁 때 바람이 불었다." 해군들은 바람 부는 게 가장 큰 문제죠. 배들을 바닷가에 나란히 자동차 세우듯이 대놓고 있는데 바람이 불면 배들이 서로 흔들려서 배들끼리 부닥칩니다. 바람이 불면 해군은 배를 끌어서 뭍 위로 올려놔야 배가 부숴지지 않죠. "저녁 때 바람이 불었다. 자는 병사들을 깨워서 물가로 내려 보내서 배를 끌어올리라고 지시했다"고 씁니다. 이 부하 놈 하나를 죽였다는 것 그게 뭐 별거 아니라는 듯이 써버립니다. 수사, 형용사, 부사가 하나도 안 나오고 밋밋하고 재미가 없지만, 부하를 죽였다는 문장과 바람이 불었다는 문장 사이에서 그의 문장은 삼엄한 긴장에 도달합니다. 그것은 아주 전압이 높은 문장입니다. 볼트가 높은 고압 전류가 흐르는 문장입니다. 만지면 전기가 올 것처럼 찌르찌르하는 문장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