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절 일승
1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청컨대 성자의 행상과 일승의 행상을 말씀하여 주소서."
"대혜여, 보살은 모든 가르침에 의하여 분별을 섞는 일이 없다. 홀로 한가한 곳에 머물러 법을 관하여 스스로 깨닫고,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분별의 견을 여의고 위로 향상하여 나아가서, 여래의 경지로 들어간다. 이렇게 닦아 가는 것을 성자의 행상이라고 이름한다.
다음에 일승의 행상이라고 하는 것은, 일승의 도를 깨침을 이르는 것이니, 그것은 주관과 객관의 차별을 여의고, 여실하게 주함을 이르는 것이다.
승이라는 마음이 일어나면 승이 아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멸하여 승도 없고 승자도 없어야만 진실한 일승이 된다.
여러 가지의 승을 설함은 어리석은 자를 인도하기 위해서다. 탐애는 어머니요 무명은 아버지니, 이러한 부모에 의하여 세상이 생긴다. 마음으로 이러한 이치를 요달한 이를 부처라고 이름한다."
2 "부처님이시여,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정각을 이루신 뒤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한 글자도 설하지 아니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뜻이옵니까?"
"대혜여,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첫째는, 자증의 법에 의하여 말한 것이다. 모든 부처가 증득하신 것을 나도 같이 증득한 것이니, 이 증득에 이르러서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다. 그의 지혜는 말을 여의고 분별을 여의고 이름을 여읜 까닭이다.
둘째는, 본래 주한 법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진금이 돌쇠의 광석 가운데 있는 것처럼,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법은 다 그 본성이 상주한 진여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광야로 나갔다가, 평탄한 옛길을 만나 고성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대혜여, 모든 부처의 깨달은 진여를 나도 깨달았으므로 법성이 상주 불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성불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3 "부처님이시여,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을 취하라'는 말씀의 뜻을 가르쳐 주소서."
"대혜여. 언어는 분별과 습기로 인을 삼는다. 목구멍과 혓바닥과 이와 입술 등의 도움에 의하여, 가지가지의 음성을 낸다. 사람과 상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를 닦는 사람은 홀로 고요한 곳에 있어서, 듣고 생각하고 실행하는 지혜로써 깨달음의 길로 향해 간다. 경계를 알아서 번뇌를 없애고 수도의 계단에 대한 상당한 행을 닦는 것을 뜻이라고 한다. 대혜여, 도를 닦는 사람은 말과 뜻은 하나도 아니요, 또 다른 것으로도 보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만일 뜻과 말이 다르다면 말에 의지하여 뜻이 나타나지 않는다. 말에 의하여 뜻을 보는 것은 등불을 가지고 물것을 비추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말의 등불에 의하여 말을 여읜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가야 한다.
대혜여, 불생불멸과 자성ㆍ열반에 대하여, 만일 말과 같이 뜻을 취하려면 상견이나 단견에 떨어질 것이다. 그것은 환을 보고 실물로 생각하는 것으로서, 어리석은 자가 보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뜻과 말이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뜻은 체가 없는 까닭이다'고 이른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말의 자성을 모른다. 따라서 말은 없어질지라도 뜻은 없어지지 않는 것을 모르고 있는 까닭이다.
대혜여, 모든 말은 문자에 걸려 있으나 뜻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유와 무를 여의어서 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체도 없는 것이다. 여래는 문자에 걸리는 법을 설하는 일이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문자에 걸리는 법을 설한다면 그것은 거짓 설하는 것이요 미친 설법이다. 왜 그러냐 하면 모든 법의 자성은 문자를 여의고 있는 것으로서 뜻에 의하지 않으면 설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대혜여, 만일 법을 설하지 않으면 교법은 끊어지고 말 것이다. 교법이 끊어지면 도를 닦는 자도 없고 부처도 없어지는 것이다. 만일 모든 것이 없으면 누가 누구를 위하여 설할 것인가? 그러므로 도를 닦는 자는 문자에 걸리지 않고, 깜냥과 정도에 맞추고 때와 곳에 응하여 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중생의 번뇌와 요해와 소원을 따라서 연설한다. 그리하여, 모든 법을 나의 마음의 보는 대로 나타난 것으로 보게 하고, 바깥의 경계는 없는 것으로 알려 주어서, 유와 무의 분별을 여의어서 심ㆍ의ㆍ식을 전화 시킨다. 이것은 깨달음의 그것을 직접 나타내기 위함은 아니다. 그러면 보살은 뜻을 따르고 문자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자에만 의지하면 악견에 떨어지고, 자기가 좋아하는 데 집착하여, 법의 실상이나 문사나 장구를 깨칠 수가 없어서, 자기도 무너뜨리고 다른 사람도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다.
대혜여, 진실한 법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같은 곳도 없고 다른 곳도 없는 것이다. 모든 무용의 이론은 그 앞에 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도에 뜻하는 자는 말에도 집착하지 않는 거와 같이, 뜻에도 집착하여서는 안 된다. 어째서냐 하면, 진실한 법은 문자를 여의고 있는 까닭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물건을 가리켜 보일 때 어린이들은 손가락을 보고 물건은 보지 못하는 거와 같아서, 어리석은 자들도 부질없이 말의 양식에 집착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손가락을 여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제일의를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혜여, 진실한 뜻은 미묘하고 적정하여 열반의 인이 된다. 언어는 망상과 합하여 생사의 구렁에 휘돌고 있다. 그래서 참다운 뜻은 참다운 말을 많이 들어서 얻게 된다. 많이 듣는다는 것은 뜻을 잘 알라는 것이요, 말을 잘 하라는 것은 아니다. 뜻을 잘 알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일체 외도의 악견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게도 따르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서, 뜻을 많이 듣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뜻을 구하는 자를 친할지언정, 문자에 팔리는 사람은 멀리 여의는 것이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