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마지막주일인 어제 저녁, EIDF(교육방송 국제단편영화제)에 출품된 '노래하는 황새깃털'편에서 쿠르드족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부상당한 황새를 돌보고 또 산골마을 남자들이 황새들의 귀환을 축하하는 멋진 황새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수년 전에 학춤에 대해 쓴 글을 다시 올려봅니다.^^
멋진 학춤을 추려면...
십자가를 안테나로!
금주 KBS-1TV의 환경스페셜에서는 ‘두루미(학), 구미습지를 날다’편을 방영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구미습지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루미의 월동지인 일본의 이즈미, 쿠시로 습지 못지않는 훌륭한 습지이므로 우리도 그곳을 잘 가꾸어 앞으로 많은 두루미들이 날고 춤을 추는 곳을 만들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학의 아름다운 비상도 멋이 있었지만 특히 우아한 학춤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부부의 연을 한 번 맺으면 죽을 때까지 평생을 함께 한다는 정절과 지조의 새, 두루미부부가 벌이는 이른바 이 학춤은 전세계의 8,600여종의 조류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구애행위이며 이는 각 나라의 고유한 민속춤으로 발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울산학춤, 동래학춤등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런 학의 비상, 춤에 비유한다면 우선 학이 많이 모여들 수 있는 습지 즉 좋은 환경과 또 학이 날고 춤추는 것을 잘 가르치고 배우는 것 즉 교육환경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참고로 이런 학을 영적성숙의 관점에서 고찰한 친구 고 민성기(요셉,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신부님의 묵상글인 ‘학마을’을 소개합니다. 가브리엘통신
<학마을 / 민성기신부>
천주교 안동교구 설정 25주년을 기념하여 안동교구 신자들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농은수련원에 머물던 1999년 7월 21일 나는 수련원을 운영하는 노틀담수녀회 수녀님들로부터 학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적 성숙과 학을 연관시켜 묵상하던 나는 다짜고짜 학마을로 안내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렇게 학마을을 찾았습니다.
학마을로 가는 길은 너무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농은수련원을 나와 안동 쪽으로 나가다가 오른쪽으로 돌아 수확하여 덩그러니 비어있는 수박밭과 저만큼 보이는 소나무 숲을 지나 자귀나무와 캔터키미모사 나무의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한 길을 따라 갑니다. 왼쪽으로 부용대와 하회마을을 바라보면서 샅재로 올랐습니다. 샅재를 넘어 안동과 의성의 경계를 지나 경상북도 의성군 신평면 중률리, 속칭 학마을로 들어섰습니다.
이외수 선생님의 「벽오금학도」에서나 만날 수 있는 학마을에는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학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일을 하다 잠깐 쉬는 시간에 참으로 마시던 동동주를 다정스럽게 건네주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학마을에 사는 학의 무리는 무려 구천 마리라고도 하고 만 마리가 넘는다고도 하였습니다. 학이 언제부터 이 마을에 살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중률리에 사는 아흔 살이 넘으신 할아버지가 태어나셨을 때도 학들이 학마을에 모여 살았다고 하였고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태어났을 때에도 학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먼 남쪽나라 태국으로 떠났다가 어김없이 음력 2월이면 마을로 돌아오는 학마을의 학들, 수녀님들과 함께 학마을을 찾았을 때가 오전 10시경인지라 많은 학들이 오전 일을 위하여 일터로 나가있을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많은 학들이 모여 사는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부산 근교의 일광해수욕장 옆 마을, 한국유리 맞은편 마을 이름 역시 학마을인데 그곳을 찾았을 때는 학을 한 마리도 볼 수 없었는데, 중률리의 학마을에는 정말 그 이름에 맞게 학이 많았습니다. 예전에는 죽리(竹里)라고 불렀던 중률리 학마을에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색깔이 검은 현학(玄鶴)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지난 여름에 학마을에서 백학(白鶴)과 어우러져 사는 현학을 만났습니다. 현학을 만난 것이 지난 여름에 내가 찾았던 일상의 신화였습니다.
정화 - 조명 - 일치의 단계를 살아가는 영적 성숙의 관점에서 학의 유형을 말한다면 백학(白鶴) - 현학(玄鶴) - 금학(金鶴)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백학은 우리가 만날 수 있고 쉽게 볼 수 있는 학입니다. 그러나 현학(玄鶴)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도 의성군 신평면 중률리 학마을에서 처음으로 현학을 보았습니다. 흔히 볼 수 없는 학이기에 현학은 백학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사는 학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성숙의 과정에서 정화를 거쳐 조명의 단계에 이른 사람을 현학으로 비유합니다. 물론 도시에서 백학을 본다는 것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그만큼 영적 성숙의 과정의 첫 단계인 정화의 단계조차도 사실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힘든 영적 성숙의 길을 걷기 위하여 묵상과 기도생활에 맛들이며 살아가는 백학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을 하거나 성직생활을 한다고 해서 다 영적 성숙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백학으로서의 정화의 단계를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물며 백학으로 이야기되는 정화의 단계를 거쳐 현학의 단계인 조명의 단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그 많지 않은 현학을 어떻게 하면 볼 수 있겠습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현학의 삶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어둔 밤'이라고 일컬었던 조명의 단계를 사는 사람만이 현학을 넘어 금학(金鶴)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금학이라? 세속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금학, 아니 우리 주변에 살고 있으면서도 전혀 눈에 띠지 않는 신비의 학인 금학, 결국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사람만이 금학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영적 성숙의 길에서 하느님과의 합일, 즉 일치의 삶을 사는 사람을 일컬어 금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출처; 고 민성기신부님의 ‘일상의 신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