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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5. 묵상글 (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 헌금이 아니라 봉헌, 얼마가 아니라 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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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5.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25 03:39
- 헌금이 아니라 봉헌, 얼마가 아니라 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얼마와 다.
얼마씩 넣는 자와 다 넣는 자.
오늘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이 부자의 봉헌보다 많다고 하십니다.
많은 것이, 많은 것이 아니고, 적은 것이, 적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니
많고 적음과 관련한 하느님의 기준이 우리와 다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100억 가진 사람에게 100만 원은 많은 것이 아니고 껌값이잖아요?
그러나 없는 사람, 예를 들어 1억밖에 없는 사람에게 100만 원은 많은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것은 부자가 더 쩨쩨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선 펑펑 쓰면서도 다른 사람에겐 조금 주는 것도 벌벌 떱니다.
돈은 많은데 사랑이 없기 때문인데 이런 면에서 부자가 더 불쌍하고 불행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더 불쌍하고 불행한 이유는
이런 자기가 불쌍하고 불행하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가 주는 만족보다 사랑이 주는 만족이 더 큼을 모릅니다.
사랑이 주는 만족을 체험한 적 없고 모르니 참 불행합니다.
그리고 돈이 주는 만족은 뺏길 수 있습니다.
돈을 탐내는 사람이 많으니 뺏길 수 있지요.
그러나 사랑이 주는 만족은 뺏거나 뺏기지 않습니다.
사랑은 돈처럼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기에 뺏거나 뺏길 수 없습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의 과부는 헌금이 아니라 봉헌을 한 것이고,
어마어마한 헌금이 아니라 얼마 안 되지만 다 봉헌한 것이며,
의기양양한 헌금이 아니라 겸손한 봉헌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봉헌일 뿐 아니라 앞서 봤듯이 사랑의 봉헌입니다.
얼마 안 되기에 겸손하게 봉헌했지만 다 봉헌했기에 사랑의 봉헌입니다.
그리고 그 봉헌은 하느님의 봉헌을 닮았습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 전부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는데
걷어찬 부자와 달리 과부는 그 사랑을 고맙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며,
그래서 당신 자신 전부를 내어주신 그 사랑을 받아 되돌려 드린 것입니다.
이런 상호 봉헌을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
과부의 헌금에 대한 오늘 나눔을 요약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헌금이 아니라 봉헌이며,
얼마가 아니라 다이고,
겸손+사랑의 봉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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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5.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책에서 미국에 이민하여서 아이들을 잘 키우고, 30년간 부부싸움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노부부의 행복한 결혼 생활 비결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민 오면서 이 부부는 서로 약속했습니다. 남편은 화가 나고 섭섭한 마음이 들면 말없이 산책하러 나가고, 아내는 화가 나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앞치마를 거꾸로 걸쳐서 설거지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상대방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알아채기란 불가능합니다.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척하면 알아야지.”라고 말하지만, 상대방은 또 이렇게 항변하지요. “말해야 알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더구나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다면 더 큰 믿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약한 인간이기에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위 노부부의 노하우를 따르면 어떨까요?
지혜의 삶을 사는 분을 많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 지혜를 볼 수 있고, 그 지혜를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혜를 보려고 하지 않고, 또 보더라도 부러움만을 가지면서 ‘내 배우자는 왜 그럴까?’라며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조금더 관심갖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또 쉽게 단죄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지혜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살라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적은 헌금을 한 이 과부를 우습게 봤을 것입니다. 이 헌금함은 공개되어 있는 곳으로, 주로 부자들만 헌금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정성 어린 마음만을 보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생활비 전체를 넣은 과부의 그날 저녁은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하느님이 먼저였고, 그래서 가지고 있는 모두를 헌금함에 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 인정받습니다.
우리도 이 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삶이 아닌,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여인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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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포기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다(알렉스 퍼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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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5.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심 깊은 가난한 과부를 만납니다. 그는 비록 렙톤 두 닢을 예물로 바쳤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작정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면서도 엘리야에게 바쳤던 사렙다의 과부(1열왕 17,12)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전부를 예물로 바침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내맡김이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바치는 표현이요,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는 표시였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내놓은 그 값진 두 데나리온과 같을 것입니다(루카 10,35).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중히 여기고, 무엇을 앞세워야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곧 봉헌은 자신의 계산에 따라 다 쓰고 남은 조각을 ‘나중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치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딱한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곧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맨 먼저’ 앞세워 바쳤던 것입니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그녀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그것은 소중하고 귀한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주군이신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바로 그러한 분을 만나면,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고는 못 배겨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그 소중하고 귀한 분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 가는지, 혹은 퇴색되거나 변하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전부를 바쳐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가난하면서도 전 재산을 봉헌한 이 “과부”에 대해서,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표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산 제물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 저는 이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하여, 나의 삶이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앞세우는 삶인지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진정,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 혹은 전부를 바치고 있는지를 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봉헌할 수 있을까요? 대체 무엇을 봉헌해야 할까요?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궁핍한 가운데에서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주님!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은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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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5.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분은 전체보다 많을 수 없다
오래전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비교하였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면서 현 임지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은 안 하고 전 임지와 견주었습니다. 추수 감사미사를 봉헌하면서 본당 규모가 큰 것에 비하면, 감사예물과 곡물이 적게 봉헌되었다고 생각하며 서운해한 적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하지 못한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 고, 물질에 마음을 빼앗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를 칭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예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풍족한 데서 일부만을 바쳤습니다. 부자가 바친 예물은 가난한 이의 것에 비하면 훨씬 많은 금액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인생 자체가 담긴 것이라면 가장 많은 돈이 됩니다. 가장 적은 것이라도 보아주시고 그 가치를 알아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먼 훗날 잘 되면 크게 돕겠다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는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보다 정성의 마음이 더 중합니다. 우리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때는, 건축 기금을 모으면서 나름대로 모금 액수를 정하고 아무개는 얼마, 아무개는 이 정도는 해 주겠지! 하며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힘이 들었습니다. 각자에게는 남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 정성을 보고 마음을 보아야 하는데 봉헌금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도 별수 없이 물질에 휘둘렸습니다. 그 후로 저는 더 큰 믿음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물질의 봉헌 이야기를 줄이자! 고 다짐을 했습니다. 억지로 한다면, 아무리 많은 액수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를 선전하고 과시하며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는 헌금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크면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주님의 것이기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의 마음이 솟아날 것입니다.
속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희망합니다. 물질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지혜로 모든 것을 차지하시길 기도합니다. 양적으로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데 익숙한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무엇을 중심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부분은 부분입니다. 전체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모두는 부분보다 큽니다. 먼저 하느님께 바칠 것을 떼어놓고 그다음 나를 위한 계획을 세우면 어떨지요? 물질뿐 아니라 시간이나 공간, 재능, 여행, 모두를 말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큰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인색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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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5.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졸업정원제’를 채택했습니다. 입학 정원보다 더 많은 학생을 선발했습니다. 정부의 방침에 따라서 입학 정원의 30%를 더 선발했습니다. 신학생 정원이 80명이었는데 30%를 더 선발해서 104명이 입학했습니다. 입학 정원에 따랐으면 24명은 신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저를 포함해서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성소(聖召)’가 있었다고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졸업정원제는 문제가 있어서 폐지되었습니다. 졸업정원제가 있는 경우 학생들은 졸업에 필요한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학업에 대한 부담을 가중하고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졸업 여부가 학문적 성취도나 역량보다는 정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 실력과 상관없이 졸업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생길 수 있어 불공정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남학생들은 졸업정원에 해당하지 못하면 군대에 갈 수 있었지만, 여학생들은 졸업정원에 해당하지 못하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신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부담이나, 졸업정원에 들지 못할 걱정은 없었습니다. 신학생들은 다른 이유로 사제 성소를 포기했습니다. 졸업할 때 이미 입학 정원이었던 80명에 미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요한이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입학 정원은 아닐 겁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졸업정원도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이 숫자는 문자 그대로의 인원수를 의미하기보다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144,000은 12(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12(사도들), 그리고 1,000(큰 무리를 의미하는 상징적 숫자)의 곱으로, 구약과 신약의 모든 믿는 자들, 즉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에 걸친 하느님 백성의 완전한 수를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144,000명은 어린양 예수와 함께 서 있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로서, 영적으로 순결하고 하느님께 봉헌된 자들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느님 앞에서 정결하고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4,000명은 우상 숭배와 세속적 유혹에 저항하고, 하느님과 예수님께 충성 약속을 지킨 이들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혼란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킨 자들을 나타냅니다. 144,000명은 문자적인 인원수라기보다 하느님께 선택되고 구원받은 모든 신자의 완전성과 충만함을 상징하는 숫자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과부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과부가 아주 작은 돈이지만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과부를 칭찬하신 겁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예전에 선배 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펴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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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5.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만약 우리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헌금함을 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부자가 헌금하는 모습도 보고 빈곤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도 보았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말할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과부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당신도 살아야지요. 여기 헌금함에 모두 넣어버리면 당신은 무얼 먹고 무얼 입고 살아갑니까! 당신 먼저 생각하세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건 나쁜 것이 아니니까요.’
맞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위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도 언제나 모든 것을 다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의 의미는 돈의 액수가 아닙니다. ‘다 넣었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미래까지 모두 맡겼다.’입니다.
즉 빈곤한 여인은 자신의 미래를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도 그 여인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이런 가사를 가진 성가가 있습니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내 주 앞에 모두 드리네.’ 우리는 이 성가를 봉헌 때 많이 부릅니다. 잠시 묵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모두 드렸을까요? 지금 우리는 지갑 안에 들어있는 지폐를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모두 드렸을까요? 근심, 걱정, 미움, 분노, 불안함, 두려움, 외로움까지 말입니다. 입으로는 모두 드린다고 말해놓고 정작 드린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이 왜 우리의 주님이십니까? 주님이 왜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까? 그분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돌보시기에 우리 주님 아니실까요? 그런데 우리는 정작 주님을 주님으로 보지 않고 믿지 않으며 아무것도 상의하지 않고 있지 않은지요.
오늘 렙톤 두 닢을 넣으세요. 우리가 가진 모든 어둠을 봉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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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
말이 안 통합니다.
사실 안 통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각자의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사실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고
각자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의 꼬리만 물고 있습니다.
사실 꼬리를 무는 것은
그저 지기 싫은 자존심입니다.
이런 대화 중 가장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로
대화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안 통한다고, 못 알아듣는다고, 꼬리만 문다고 대화를 포기하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모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서로를 이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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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5.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상(地上)에서 천상(天上)의 삶을 사는 사람
<존엄한 품위의 가난한 과부>
“주님의 산으로 오를 이 누구인고?
거룩한 그곳에 서 있을 이 누구인고?
그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시편24,3-4ㄱㄴ)
오늘 복음을 묵상하던중 성녀 아빌라 데레사의 기도문을 바탕한 ‘아무것도 너를’이라는,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성가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은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대변한다 싶습니다. 마태복음의 진복팔단을 연상케 하는 참행복한 가난한 과부요 자기를 다 비운 주님을 닮은 분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은 자가 참으로 부자라 하는데 하느님만으로 부유한 가난한 과부가 바로 그러합니다. 동병상련,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해 자신의 비움의 삶을 확인한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가난하나 살아있는 참보물 주님을 모시고 사는 내적으로는 부자요 자유로우며 행복한 과부입니다. 참으로 소유욕의 집착에서 벗어난 초연한 사랑, 초연한 자유의 사람입니다. 마태오의 참행복 선언중 다음 둘에 그대로 해당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진복팔단의 참행복 선언은 예수님의 자화상입니다. 예수님의 삶에 고스란히 적용될 정도로 참행복을 사셨던 예수님이셨고 바로 주님을 닮은 가난한 과부가 그러합니다.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요, 하느님을 볼 것이라 했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도 부요함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한 과부의 내면도 이처럼 풍요로웠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옛 현자 <다산>의 지혜입니다.
“술에 취하는 것은 하룻밤이면 끝나지만, 뜻에 충실하지 않으면 평생을 취해서 산다.”
가난한 과부처럼 초지일관 봉헌의 삶에 충실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맑은 정신으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부자의 내면은 텅빈허무이겠지만 이런 빈자인 가난한 과부의 내면은 텅빈충만의 행복이요 자유로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정한 예수님을 감동케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이런 봉헌이야 말로 주님께 대한 전적 신뢰와 사랑, 그리고 희망의 표현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얼마씩을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한 텅빈충만의 내면임을 봅니다. 놀랍고 반가운 것은 아무도 못보고 모르는 것 같지만 주님은 가난한 과부를 그대로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 121장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
하느님을 너를 지키시는 분,
네 오른쪽의 그늘이시어라.
낮이며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 지켜 모든 액을 막으시고,
당신이 네 영혼을 지켜주시리라.”(시편121,4-7)
바로 이런 가난한 과부의 안식처가 되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치가 참 절묘합니다. 루카복음이 지상에서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다뤘다면 제1독서 묵시록은 ‘어린양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그의 백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대로 미래의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싶습니다.
새삼 가난한 과부가 궁극의 희망을 둔 것은 천상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말그대로 지상에서 천상의 삶을 산, 존엄한 품위의 가난한 과부입니다. 어린양과 함게 서있는 십사만 사천명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하는데 세례성사를 받아 인호를 받은 우리의 미래를 엿보는 듯 합니다. 이들에 대한 묘사가 평생 날마다 제대 주변에서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의 삶에 신선한 자극이 됩니다.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지상에서의 거짓없는, 흠없는 삶을 반영하는 성인들의 천상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며 일편단심 주님을 사랑하여 따랐던 삶을 반영합니다. 이런 천상적 삶에 희망을 뒀던 가난한 과부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천상의 희망을 능가할 수 있는 희망은 없습니다.
바로 이를 노래한,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 근거한 11월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 저녁성무일도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입니다. 위령성월, 희망성월, 성인성월 11월 마다 제가 끊임없이 애송하여 바치는 기도입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 도다.”
어제부터 시작된 연중 마지막 34주간은 성서주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을 사랑하듯 성서를 충실히 공부하며 주님을 잘 따를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마태24,42.44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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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5.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님께 나를 드리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더 가지려는
좁은 마음길을 닫고
더 나누려는
너른 마음길을 엽니다
늘 그러하신 내님처럼
탐스런 것에 앗긴
흐릿한 눈길을 멈추고
보잘것없는 것에게
맑은 눈길을 돌립니다
늘 그러하신 내님처럼
너 없는 나를 향한
모진 손길을 거두고
너와 더불어 나를 이루는
부드러운 손길을 건넵니다
늘 그러하신 내님처럼
밟고서라도 나가려는
거친 발길을 그치고
더디더라도 함께 이루는
고운 발길을 내딛습니다
늘 그러하신 내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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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5.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 21,1-3)
가난한 이를 보살 는 것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
부지인 그대들은 교회에서 선행을 하지 못합니다. 밤의 그늘로 덮여 어두워진 눈에 궁핍하고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돈 많고 부유한 사람들이여, 그대들이 진정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대들은 주님께 바치는 예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희생 제물도 없이 주님의 잔치에 와서는 가난한 이들이 비치는 희생 제사에 끼어듭니다. 복음서에서, 거룩한 명령을 가슴에 품고, 극심한 궁핍으로 시달리는 가운데서도 주님께 예물을 바친 과부를 보십시오. 그는 헌금함에 자신의 전 재산인 렙톤 두 덮을 넣었습니다. … 그 과부야말로 심판 날이 되기도 전에 심판자께 칭찬을 들은 참으로 복되고 영광스러운 여인이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빈약함과 불행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한 가난한 과부가 제대로 예물을 바쳤습니다. 교회에 바쳐진 예물이 모두 고아나 과부들에게 주어진다고는 해도, 받아야 할 사람이 내놓았으니, 이로써 우리는 부자들을 기다리는 형벌이 어떤 것인지 알 만합니다. 이 가르침을 들었으니, 가난한 이들도 마땅히 선행을 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이요, 하느님께서는 선행을 하는 이를 어여삐 여기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하느님 예물’이라 표현하셨고, 과부가 하느님 예물함에 렙톤 두 남을 넣었음을 지적하시며 가난한 사람을 가없이 여기는 이는 하느님을 돕는 사람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키프리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하느님은 모든 풍성함을 하나로서 가지고 계시며, 하느님의 본성은 바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영혼의 복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영혼의 아름다움이자 영예입니다. “초대한 이가 와서 ‘위쪽으로 오르시지요’ 하면 당신은 함께 자리한 모든 이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영혼의 아름다움이자 영예입니다. 하느님은 영혼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마치 하나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행동하십니다. 영혼이 하느님만을 사랑하도록 하느님은 자신을 꾸미십니다. 사람들은 한 가지 것을 먼저 갈망하고, 그런 다음 다른 것을 갈망합니다. 그들은 한때는 지혜를 실천하고, 다른 때는 기능을 연마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을 조금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 전에는 결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영혼의 복락, 영혼의 아름다움, 영혼의 영예입니다. 어떤 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모든 일 속에서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 여기서 “모든 것”은 바로 영혼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은 가장 고귀하고, 가장 깨끗하고, 가장 높은 것이면 무엇이든지 영혼 안으로 부어넣으십니다. 하느님만이 전부이시고 하나이십니다.
“한 분이시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를. 아멘. (284)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1티모 2,1-15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제때에 드러난 증거입니다.
나는 이 증거의 선포자와 사도로,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과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진실을 말할 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예배 자세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얌전하고 정숙하게 단정한 옷차림으로 단장하기를 바랍니다. 높이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이 아니라,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고백하는 여자답게 선행으로 치장하십시오.
여자는 조용히 또 온전히 순종하는 자세로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사실 아담이 먼저 빚어졌고 그다음에 하와가 빚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넘어가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아가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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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5.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루카 21, 4)
오늘 복음과 유사한 내용이 불교의 「현우경」에도 있습니다. 부자가 부처 앞에 바친 만 개의 등燈은 밤중에 기름이 다 되어 꺼졌는데, 가난한 노파가 전 재산을 털어 바친 한 개의 등은 꺼지지 않고 계속 불이 켜져 있었다는 고사에서 『빈자일등貧者一燈, 부자만등富者萬燈』이란 표현이 나왔으며, 이는 곧 봉헌의 액수보다 봉헌하는 이의 마음과 정성의 소중함이 중요하다는 우화입니다.
예전 본당신부를 할 때, 교구 사제들과 만남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주일 헌금액을 올릴 수 있느냐는 대화 중에 어느 신부님께서 이렇게 자신의 체험담(?)을 말하더군요. ‘여러 방법을 다 활용해봤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헌금함 앞에 사제가 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것을 “눈을 들어 보고 계셨다.”(21,1.2참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하는 모습을 바라보신 까닭이야 근본적으로 그 사제가 말한 의도와 전혀 달랐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의도된 행위이든, 의도하지 않은 행위이든 사람들이 헌금함에 예물을 봉헌하신 모습을 보시면서 유독 그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으신 것을 보고 무척 감동하셨던 이유가 무엇일까, 라고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21,3) 예수님께서 그저 가난한 과부가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신 까닭은 바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풍족한 가운데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그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21,4)일 겁니다. 분명 더 많이 넣었다, 는 표현은 헌금액의 액수가 아니라, 그것은 헌금하는 사람이 가진 것에 비례해서 다 넣었다, 는 표현에 담겨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과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는 표현을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그 과부가 많이 넣었다, 는 의미는 그녀가 가진 전부를 다 내어놓았다는 상대적인 액수라고 봅니다.
왜 그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을까? 그 과부의 의향을 알지 못하니, 다만 그녀의 의향을 사렙타 마을의 과부의 상황과 견주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1열17, 8~16) 아무튼 그 과부의 심정은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고 있는 처지에서 자신이 가진 것, 혹 받은 것 전부를 내어놓음에서 그 과부의 처절한 삶의 비장함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내일이 없는,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전부를 온전히 다 봉헌하는 그녀의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봉헌 이후는 오직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매달리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빈 손, 빈 깡통뿐일지라도 말입니다. 온전히 아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그녀의 올인All-in 정신이 부럽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이 과부의 헌금, 봉헌에서 예수님께서 미구에 당신의 모습을 보고 계신 게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아빠 하느님과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봉헌하실 당신 모습을.
오늘 복음을 보면 분명 주님은 과부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부자를 비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상대적으로 정성이 부족하다는 뜻은 담고 있지만 결코 비난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본당에서도 그렇고 연말 이웃돕기 성금도 주로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내지, 정말 부자는 잘 내지 않는다고 봅니다. 물론 대기업이야 성금을 내면 세금 감면이 되기에 내긴 하지만 이는 다 생색이고. 그런데 만일 지갑에 천원밖에 없는 사람이 천원을 다 헌금하는 것과 백억을 가진 사람이 백억 전부를 헌금하는 것 중에서 어느 편이 훨씬 더 쉽겠습니까? 천원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은 액수이기에 내려면 전부 다 넣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백억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일부인 10억 혹 1억만 내도 많이 내는 것입니다. 이는 곧 백억을 가진 사람이 백억 전부를 내는 것보다 천원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가진 천원 전부를 내놓은 것이 상대적으로 자유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가난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고 자유롭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편안한 마음이 있기에 쉽게 자신의 전부를 다 내어놓은 것이 아닐까, 싶어서 한편은 제가 가진 게 짐스럽게 느껴지며, 늘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지 못하고, 전부가 아닌 일부,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살아간다는 게 조금은 불편해집니다.
오늘의 본당 신부님들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는 과부에게 마음을 두시기나 하실까 의문이 듭니다. 헌금 액수가 중요하지, 헌금에 있어서 무슨 질을 따지지는 않을 것이며 그런데 한번 헌금하는 게 아니라 매 주일 헌금을 내야 하는데 이를 어쩌나! 하지만 주일금 혹 교무금이 부담되어 성당에 오시는 것이 불편한 사람이 없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무금 많이 내고 신축금 많이 내는 신자가 대우받는 교회가 아니었으면 솔직히 좋겠습니다. 신축금 납부 현황표(=납입자 이름과 금액)를 성당 게시판이나 주보에 게시하지 않았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오히려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온전히 살고자 하는 신자들을 더 많이 사랑하시는 사제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예전 광주 일곡동 수도원에 살 때, 3년 동안 매주 소화자매원(=여성신심장애인 공동체)의 주일 미사를 집전하러 갈 때마다 그들의 봉헌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지만, 봉헌금 액수와 상관없이 그들의 봉헌하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대부분이 천원 지폐 한장 봉헌하지만 말입니다. 참으로 몸도 마음도 가난하며 소박한 사람들입니다. “주님, 오늘도 가난한 이들의 봉헌에서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시고, 그 모습에서 참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에게 당신께서 축복을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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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5.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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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5.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인간은 자신이 더 많은 정성을 들인 것일수록 더욱 큰 애정을 느낍니다.어떠한 것이든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자원을 많이 들일수록 그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며,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내 것을 더 많이 내놓았을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은 사람만이 그 결과에 만족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결과를 진심으로 칭찬할 수 있습니다.자신의 능력을 얼마간만 사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노력을 과소평가하고, 다른 사람의 업적을 진심으로 칭찬할 줄 모릅니다.성실하게 노력한 사람만이 성실함과 노력의 진가를 알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 참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적은 노력으로 좋은 성과를 내는 효율성을 자랑으로 여기고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노력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진정한 겸손을 알기 어렵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을 때, 많은 은총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기도와 봉사 등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때, 더 많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최선을 다한 신앙인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하고 경탄할 줄 압니다.내가 가진 일부를 봉헌하는 것과 삶 전체를 봉헌하는 것은 그 체험하는 바가 다릅니다.이웃에게 자선을 베풀 때에 남는 것 얼마를 주는 것보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떼어 나누어 줄 때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궁핍한 가운데 모든 것을 봉헌한 과부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예물을 바친 부자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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