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9. 큐티
히브리서 11:17 ~ 22
믿음의 선진 –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관찰 :
1)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
- 17절a. “아브라함은 시험 받을 때에” =>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우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았다. 그리고 그 시험을 은혜로 통과했다. 이 시험의 핵심은 믿음의 시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들어가는 자는 또한 동일하게 믿음의 시험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 17절b.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드리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주실 것을 약속받은 것이 성취되어 100세에 얻은 아들일지라도 하나님의 요구에 내어드리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하나뿐이고 전부인 아들을 드린 것이다. 여기에 사라의 믿음도 포함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린 아들 이삭을 데리고 새벽에 떠나는 남편 아브라함을 사라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그렇게 순순히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일 것이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고, 사라는 밤새 울며불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도리어 사라가 아브라함을 독려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라고 믿음을 드러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믿음의 고백으로서 이들은 자신들의 독생자를 드린 것이다. 독생자는 아브라함에게는 아니다. 이스마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에게 있어서 이삭이 독생자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믿음의 시험이고 연단이라고 보아야 옳은 것이다.
- 18절.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 하나님의 이 말씀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이끌어내는 마중물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냥 이삭을 죽이라고 하신 것에 감정이 메마른 채 자신이 더 복 받기 위해 몰렉 신에게 제사드리는 이방인들과 같이 이삭을 죽이려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 부부의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독생자 이삭을 드려도 이삭을 통해서만 그 자손이 하늘의 별들, 바다의 모래들 같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믿는 믿음이 존재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 19절a.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 하나님이 말씀하신 18절의 언약을 믿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이 죽어도 분명히 살 것이라는 너무나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그랬기에 부부싸움을 하지 않고도 그 독생자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합의하고 새벽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하인들을 대동하여 모리아 산을 향하여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 19절b.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부연 설명하는 내용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진짜로 이삭을 죽이려했다. 왜냐하면 이삭을 죽여 그 가슴을 열어 심장을 꺼내 피를 짜내더라도 그것을 명하신 하나님이 분명히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 이들의 믿음은 실제로 이삭을 죽인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이고 다시 살리나, 죽이지 않고 이삭을 다시 살리나 그것은 동일한 가치가 되는 일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에 오르기 조금 전에 수양 한 마리를 이끌어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곳으로 끌어오셨고, 수풀 속에 감추시고 입을 막아서 그 존재를 아브라함과 이삭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시고 있으셨다. 아마도 천사가 이 일을 대행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삭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그 부모에게 되돌려진 것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이고 핵심이다. 결국 이삭의 존재 자체를 모두 드린 아브라함이었기에 이삭의 혼인에 대해서도 주변의 유력한 가문과 혼인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과 혼인시키고자 또 다른 믿음의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된다.
2) 이삭의 믿음의 절정
- 20절a. “믿음으로 이삭은” => 이삭은 순종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이삭도 부모의 신앙으로만 신앙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다. 그리고 믿음의 절정을 이루어 낸다.
- 20절b.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이삭은 믿음으로 성신(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다. 그가 눈이 어둡고 판단력이 흐려져 야곱을 에서인줄로 알고 축복했지만, 그렇다고 그 축복이 에서에게 가야할 축복이 야곱에게 간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믿음의 축복이 된 것이기에 에서가 먼저 와서 축복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에서에게는 에서에게 돌아갈 축복이 임하게 되었을 것이고, 야곱에게는 야곱이 받아야 할 축복이 돌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삭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인정하고 있고, 그 말은 에서와 야곱이 받은 축복의 핵심이 이렇듯 믿음으로 말미암은 결과이지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인 댓가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 히브리서 기자는 이삭의 믿음의 절정을 장차 오는 일에 대해서 믿음으로 본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이삭은 아들 에서를 더 아끼고 사랑했지만, 하나님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잇는 그 역사가 아들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됨을 믿음으로 선언하게 된 것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3) 야곱의 믿음의 절정
- 21절a. “믿음으로 야곱은” => 그 이름의 의미가 ‘발뒤꿈치를 붙잡는 자’, ‘지렁이보다 못한 자’ 야곱일지라도 그 또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가 형과 아버지를 속인 속임은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행위의 결과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야곱의 부족함에도 그의 믿음을 연단시키시고 궁극적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키워내신 것이다.
- 21절b.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 야곱의 믿음은 죽을 때에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의 험악한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절정으로 피워내신 것이다. 그리고 요셉을 다시 만나고 그의 두 아들을 축복한다. 그런데 그 두 아들을 축복할 뿐만 아니라 열 두 아들 모두를 축복하는데,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이고, 애굽 총리의 아들들이라고 더 많이 축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다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드러내게 된다. 그렇게 야곱은 믿음의 사람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 21절c.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 환도뼈가 위골된 야곱은 그렇게 죽기까지 평생 다리를 절었기에 지팡이를 짚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목자들 같이 길쭉한 막대기가 아니라 끝이 뭉뚝해서 손으로 감아 쥐고 몸의 무게를 지팡이에 분산시키는 그런 지팡이를 쥐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야곱의 믿음을 촉발시키는 근거가 된 것이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근거가 된 것이기에 그는 그 지팡이를 짚고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즐거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지팡이에 의지하여 경배하는 것이 야곱의 믿음의 절정이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평가하는 것이다.
- 자신의 핸디캡을 통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경배하는 믿음. 야곱의 믿음은 다른 족장들의 믿음보다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영역에까지 믿음이 확산되어진 것으로 드러내고 있다.
4) 요셉의 믿음의 절정
- 22절a. “믿음으로 요셉은” =>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받았고, 그 꿈 때문에 정말 엄청 고생(개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고, 하나님이 주신 꿈은 성취되었다.
- 22절b.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 요셉의 믿음의 절정은 그의 꿈이 이루어져서 이집트의 총리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셉의 믿음의 절정은 그가 죽을 때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것을 믿음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신의 유골을 출애굽시에 들고 나갈 것을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신신당부하고 맹세하게 했다. 그리고 실제로 모세는 출애굽시에 그 급박한 상황속에서도 요셉의 유골을 들고 떠나게 된다.
- 요셉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였기에 자신의 육체를 미이라로 만들어버리고, 그 유골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으로 내어가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요셉의 믿음의 절정이다.
가르침 :
1) 사라의 믿음과 더 나은 본향을 찾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의 본질을 설명한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믿음의 절정에 대하여 그 핵심을 요약한다.
2)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믿음의 절정은 이삭이 죽어도 살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긴 데 있다.
3) 이삭의 믿음의 절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신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과 상관없이 야곱을 축복했다는데 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데에 있다.
4) 야곱의 믿음의 절정은 자식들을 축복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까지 바라보았다는 것과 환도뼈가 위골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경배하는 기쁨을 누리는 존재가 된 것에 있다.
5) 요셉의 믿음의 절정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아니라 출애굽 하실 하나님의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해골이라도 그 땅에 들어가기를 소원한 것에 있다.
적용 :
1)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하는 믿음의 절정들! 과연 향후에 김태수의 믿음의 절정은 어디에서 드러나게 될 것인가? 내가 내 인생을 통틀어서 하나님 앞에 믿음의 행위를 드러내는 절정은 무엇으로 드러나게 될 것인가? 이것을 의식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행위를 그렇기 때문에 쉽게 엎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에 더욱 민감하게 집중하고, 그 뜻을 좇아가야 할 것이다.
2)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 그리고 이어지는 선진들의 믿음은 획일적이지 않으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로 이어져 내려간다.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본향을 떠난 디아스포라가 더 나은 본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데 있다. 나의 믿음은 나의 형편과 상황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미얀마에서 겪는 일들의 과정에서 주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고 있다. 나 역시 하나님의 다루심으로 믿음의 전진을 이루어 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앞으로 더욱 굳건하고 견고한 믿음을 채워주실 것을 간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