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30
7월26일[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XpoFWVuB6E
[수원교구 한용희 대건안드레아(광북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군가의 부모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복인지?>
혈육의 부모로 살지는 않았지만, 수도자들과 교우들의 영적 아버지 역할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부모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기쁨인지?반대로 부모 역할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노고와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가 아플때 부모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자녀가 방황할때 부모 역시 산란한 마음을 어찌할바 몰라 잠못 이룹니다. 자녀가 환하게 웃을때 부모도 덩달아 행복합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의 마음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그 결과 동정 잉태라는 놀라운 초대를 받았을 때, 두분의 마음도 함께 설레고 뛰놀았을 것입니다.
동시에 피앗! 이라고 외침과 동시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의 생애 앞에 펼쳐진 통상적이지 않은 수많은 사건들을 바라보며 안나와 요아킴의 마음은 바짝바짝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주님 말씀에 충실했던 마리아의 부모답게 요아킴과 안나 역시 주님 말씀을 씹고 곱씹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주님 말씀이 자신 안에 이루어지도록 열렬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의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님 말씀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살았던 안나와 요아킴의 생애는 이 세상 어떤 밭보다 기름지고 풍요로웠던 토양이었습니다. 그 비옥한 토양 위에 성장한 한 그루 아름다운 나무가 바로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였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04-GT52OQwo
++++++++++++++++++
<무엇이든 끝까지 이루어내는 사람의 비밀>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농부 비유의 해설입니다. 예수님은 길은 말씀을 듣고도 깨달으려 하지 않는 교만한 마음, 그리고 돌밭은 육체적 기분에 따라 사는 사람, 가시밭은 돈에 대한 욕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들 안에서는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많은 열매를 맺으려는 영웅적인 의지입니다.
영화 ‘박하사탕’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었지만, 교만과 음란함, 그리고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 사람의 일생을 담았습니다. 반면 세상에서 자수성가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이 세속-육신-마귀를 이깁니다. 이것을 이기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교만함을 어떻게 이길까요? 자기 처지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이깁니다. 1990년대 CIA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말단 직원 ‘카멘’이라는 여성은 매우 능력자였습니다. CIA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일의 효율이 오르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를 찾아냅니다. 그래서 하루 3시간 정도는 부처마다 실시간 정보 공유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이 주장은 무시당하였습니다. 정보 유출 위험이 크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카멘이 그럼에도 계속 그러한 주장을 하자 친구들까지도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극소수의 사람들은 아직 때가 아니니 힘을 키우고 능력을 보여주며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위치에 먼저 서는 게 중요하다고 간언하였습니다.
3년이 지나자 인정받는 직위에 오르고 능력을 인정받은 다음 그녀는 다시 그러한 제안을 하였고 결국 사내 내부자용 ‘인텔리피디아’를 만들어냅니다.
자기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교만한 상황에서는 금방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처지를 깨닫고 나니 기다릴 줄 알게 되었고 그동안 자기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재정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자수성가하는 사람들이 저절로 겸손해지는 이유입니다.
그다음은 육체적 욕망에 따라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기러기는 혼자서는 40,000킬로미터를 날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라면 가능합니다.
혼자 성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뜻을 함께 이뤄줄 공동체를 찾습니다. 그 공동체에 있으면 혼자서는 포기하고 싶어도 그들을 보아서라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나약함을 안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가게 만들 시스템에 자신을 몰아넣습니다. 이는 마치 열쇠공이 잠긴 문을 여는 과정과 같습니다. 수많은 열쇠를 꽂지만 지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것 하나는 맞을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는 공동체와 함께라면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탐욕이라는 가시밭을 벗어나야 합니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일한다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실패했을 때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잠깐만 게임을 못 하게 하거나 한 끼만 굶겨도 죽을 듯이 고통스러워합니다.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충분히 이겨나갈 고통도 못 살겠다며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만약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큰 꿈이 있다면 어떨까요? 나의 손해는 큰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참아나갈 수 있습니다. 아이보다 부모가 더 잘 참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나 자신만의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닌 자녀를 키워내야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모든 사람은 다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모든 실패를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서 적용되는 법칙이 이 세상의 성공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결국 마귀-육신-세속의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깨닫고 이 세상에서도 원하는 것을 이뤄내고 천국에도 들어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라엘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 중에 ‘아이언 돔(Iron Dome)'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국을 향해서 날아오는 로켓포와 미사일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아이언 돔을 개발하였습니다. 실전에 배치된 아이언 돔은 이스라엘을 향해 날아오는 로켓포와 미사일을 요격하는 성능을 보여주었습니다. 2023년 10월에 하마스는 수천 발의 로켓포를 이스라엘 영공을 향해 발사했고, 아이언 돔은 모두 막아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언 돔을 개발하는 것보다, 가자지구에 평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아이언 돔에서 발사되는 미사일 하나의 가격은 일억 원이 넘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야 2, 4) 우리는 남과 북에서도 슬픈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남한의 탈북단체들은 북한이 싫어하는 전단을 만들어 풍선으로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북한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오물을 담은 풍선을 남쪽으로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검색의 시대에 웃지 못 할 슬픈 자화상입니다. 전단과 오물을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남한의 기술을 북으로 보내고, 북한의 인력을 남으로 보내면 좋겠습니다. 개성 공단을 재개하고, 금강산 관광도 다시 열면 좋겠습니다. 남과 북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가 개통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전단과 오물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암입니다. 암은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우리의 몸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아이언 돔처럼 우리의 몸에 들어온 암세포를 막아내는 방어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것은 면역체계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몸에 들어온 독성 물질을 막아내고 있습니다. CT와 MRI로 찾아낼 수 있는 암세포의 크기는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아주 작은 암세포는 그런 검사로 찾아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암세포를 찾아서 막아낸다면 우리는 암세포가 있다고 할지라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면역체계는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선천적인 요소와 환경적인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선천적으로 좋은 면역체계를 물려받았다고 해도, 후천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암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반면에 선천적인 면역체계는 부족할지라도 후천적으로 노력하면 건강한 몸을 유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이웃에 대한 헌신은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도파민은 우리의 면역체계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적당한 운동과 균형 잡힌 식사는 우리의 면역체계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한국인에게 발생 빈도가 높아지는 암 중에 ‘대장암’이 있다고 합니다. 육류위주의 식사 대신에 우리의 전통적인 식사를 하기만 해도 대장암 발병률을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콩을 사용한 단백질 섭취와 나물과 해초를 곁들인 식단이 좋다고 합니다.
세례는 악의 세력을 막아낼 수 있는 신앙의 면역체계입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척적인 면역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100% 악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렵습니다. 후천적인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 신앙의 면역체계를 증진시키는 커다란 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 신앙의 면역체계를 높이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 신앙의 면역체계는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기도, 말씀, 실천’은 어떠한 악의 유혹도 물리칠 수 있는 ‘Faith Dome'입니다. 이런 신앙의 면역체계를 가진 사람은 유혹에 약한 이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초 한 자루가 캄캄한 밤을 밝힐 수 있듯이, 신앙의 면역체계가 강한 사람은 공동체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18-23: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이 마치 씨앗처럼 모든 이의 마음의 밭에 뿌려지지만, 그가 내는 결실은 그 마음 토양이 어떠냐에 따라 모두 다르다고 하신다. 즉,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다 받았지만, 그 말씀이 잘 성장하고 결실을 볼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어떻게 가꾸느냐는 각자의 바탕과 노력과 열의와 능력에 달린 것이다. 여기서 결실을 보지 못하는 나쁜 땅은 길, 돌밭,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이 있고, 좋은 땅도 백 배를 내는 곳, 예순 배를 내는 곳, 서른 배를 내는 곳이 있다.
길에 뿌려졌다는 것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의미이며,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19절)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인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신다.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지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절) 쾌락과 세상의 걱정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거룩한 빵과 참된 양식을 가시덤불 가운데서 먹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 걱정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씨앗이 그렇게 잘 자라기 위해서는 비옥한 땅과 물과 빛과 기후와 환경 조건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길바닥이나 돌밭에서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서 곡식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농사를 짓더라도 그러한 곳에서 결실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곳에 씨를 뿌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마음의 밭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 잘 싹트고 잘 자라서, 많고 좋은 결실을 낼 수 있도록 그 바탕과 여건을 갖추고 있는가? 아니면 길바닥이나 돌밭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받아들이고 곧 외면하고 마는지? 아니면 들을 때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가시덤불 속에 빠져 하느님 말씀을 숨도 못 쉬게 가두고 뒷전으로 미뤄 놓는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씀의 씨앗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것으로, 조금씩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바로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을 큰 결실을 낼 수 있도록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닮는 큰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때때로 많은 신자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말씀이 삶에서 무엇을 포기하거나 바꾸도록 요구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만일 의사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살려면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것을 포기하여야 하고, 몸에 밴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말입니다. 그때 의사의 말을 듣고 그저 가만히만 있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곰곰이 되뇌며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바꾸도록 애쓰겠지요. 왜일까요? 바로 ‘살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 나라를 준비시키는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어떤 힘을 일으키나요? 예수님의 비유를 살펴봅시다.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으로 비유된 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좋은 땅을 가진 사람은 들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길, 돌밭, 가시덤불이 가지지 못한 아주 특별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깨달음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들음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생각과 삶이 변화되는 열매를 맺습니다.
과연 무엇에 대한 깨달음일까요? 바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삶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깨달음입니다. 말씀으로 자신의 ‘구원’을 바라보게 되고, ‘살고자’, ‘생명을 얻고자’ 아무리 어렵고 힘든 말씀도 기어코 열매로 맺어 냅니다. 마치 환자가 ‘생명을 얻고자’ 의사의 아무리 어려운 지시 사항도 모두 해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 복음이 알려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악마는 어떻게든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 말씀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악마에게 하느님 말씀을 빼앗긴 이들은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전혀 떠올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믿음은 오로지 현세적인 것만을 얻으려는 도구로 쓸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신앙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구원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여 보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외면하며 살아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지, 하느님 말씀이 내 안에서 싹 사라져 버린 삶이 참으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고 있는 삶인지 성체 앞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여 보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깨달음’을 일으켜 말씀이 열매를 맺는 은총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아멘.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과 생활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18-23)
1) 여기서 “깨닫는다.”라는 말은, “말씀을 듣고, 믿고, 마음에 새기고, 온 삶으로 실천한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혼동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은, “누구든지 ‘삶으로’ 실천하지 않으면”입니다. 이 말씀에는, 처음부터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포함되고, 그리고 들었으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듣고 믿었지만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포함됩니다.
2)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라는 말씀은,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악마 편에 서는 자다.”라는 뜻입니다. ‘빼앗아 간다.’라는 표현 때문에 은총을 빼앗기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실제로는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복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악마가 유혹하는 말에만 귀를 기울이면, 또는 세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 그것은 말씀대로 살았을 때 얻게 될 은총을 잃는 일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닌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고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스스로 은총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악마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빼앗긴다.’ 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길’이라는 장소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길’은 누구나 지나다니는 곳, 그래서 온갖 소리가 들리는 곳을 상징하는데, 여기서는 세속의 모든 잡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요즘에 인터넷과 휴대 전화기 때문에 세속의 온갖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들어야 할 말씀은 안 듣고, 듣지 말아야 할 소리들만 듣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됩니다.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씀은, 그리고 온 삶으로 실천해야 할 말씀은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3)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는,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6-27) 그래서 ‘뿌리’가 없다는 말은, “실천하지 않는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않은 상태다.” 라는 뜻입니다. <인내와 끈기와 신념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는 “처음에 말씀을 들을 때에는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믿고 기뻐한다.”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기뻐하긴 했는데, 그냥 그것으로 그치고 ‘삶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즉 믿는다고 생각만 하고 신앙인으로 생활하지 않으면, 그것은 뿌리가 없는 것이고, 집을 모래 위에 짓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4) ‘가시덤불’은 말씀을 듣고, 믿고, 실천은 하는데, 인생에서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신앙생활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을 가시덤불의 경우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실제로 재물을 섬기는 것은 아니더라도, 마음이 자꾸만 재물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면, 결국에는 하느님을 등지게 되고, 그래서 재물을 섬기는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은 너무 먼 일이고 막연하게만 생각되는 일인데, 먹고사는 일은 당장 눈앞의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재물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무엇을 얻기를 원하고 무엇을 위해서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
[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님]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행복의 열쇠>
이웃사람이 땅바닥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열쇠를 찾는다는 말에 함께 쭈그리고 앉아 찾아보았습니다. 도무지 찾을 수 없어 열쇠를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를 물으니 집에서 잃어버렸다고 대답합니다. 어이가 없어 왜 여기서 찾고 있느냐고 물으니 더 밝아서 그랬답니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재화를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싶습니다. 물론 최소한의 것도 못 가졌다면 행복해지기가 쉽지 않겠지만, 최소한의 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행복은 그것으로부터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복이란 외적인 상황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만족에서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위해서 많은 재화를 얻는 데에 온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마치 바깥이 더 밝으니 집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그곳에서 찾겠다는 생각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자식들을 위하거나 노후대책을 장만한다는 등의 이유로, 그리고 심지어는 가난한 사람을 효과적으로 돕겠다는 이유로 쉽게 재물의 유혹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 역시 엉뚱한 곳에서 열쇠를 찾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부족한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믿음에 부합하는 사랑을 실질적으로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을 어디서 찾고 있습니까?
=====================
[대구대교구 박윤조 안토니오 신부님]
<주님 말씀을 사랑하세요>
어릴 적의 친구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는 괴물은 아니지만 두 개의 머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200 더하기 500”이 얼마인지는 잘 몰라도 “200원 더하기 500원” 하면 금방 “700원!” 이라고 알아 맞추는 친구입니다.
숫자 뒤에 단지 “원” 이라고 하는 말 한마디가 더 붙어있을 뿐인데, “원” 이라고 하는 그 말이 친구의 머리를 갑자기 영리하게 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산수 문제를 푸는 머리만이 아니라 인생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도 사람들은 두 개의 머리를 지니고 사는 것 같습니다.
사업을 운영해 나가는 데는 우등생 머리를 지닌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는 데는 형편없는 낙제생 아버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녀의 아이큐를 높이는 데는 관심과 능력이 탁월한 머리를 지닌 어머니가 자녀의 영성을 높이는 데는 너무 무관심하고 어리석은 머리를 지닐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신학의 대상으로 여기며 말씀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설령 성서학 박사 학위를 얻는다 할지라도 말씀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만나는 데에도 박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은 신학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고백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깨닫게 해주는 열쇠는 오직 사랑뿐입니다. 저의 어릴 적 친구가 단지 “원” 이라는 말 한마디를 덧붙이기만 하면 풀기 어려운 산수 문제도 쉽게 풀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도 “사랑”의 마음 하나 깊이 품고 묵상하노라면 마침내 그 비밀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말씀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알리라!”는 가르침이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어떤 대학에 “사랑학 개론”을 가르치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그 교수만큼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그 누구나 “아하~, 사랑이 그런 것이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며 감탄할 정도로 사랑에 대하여 도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가 가르치는 사랑학 개론을 결코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그 교수의 부인이었습니다. 그 부인이 자기 남편에게 충고하는 말이 오히려 사랑이 무엇인지 잘 가르쳐주는 것 같습니다.
그 부인은 늘 교수 남편에게 이렇게 충고하였습니다. “사랑을 연구하지 마십시오!” 사랑을 학문적으로 아무리 연구해본들 곁에 있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연구는 어리석은 지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읽은 글입니다. “임을 만난 사람은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 법이다. 말한다 하더라도 더듬거릴 뿐이다.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떨리고 가슴이 달아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정작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은 말이 없는데, 학자들은 장광설을 늘어놓는다.”(한상봉,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여러분, 말씀을 듣고 깨닫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서 옆에 주해서를 두거나, 성서를 분석하려 들지 마십시오. 먼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하나 가슴 깊이 품고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성서는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고백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으로 말씀을 깊이 품을 때 비로소 말씀이 우리 안에서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열매는 무릎을 탁 치는 지적인 만족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을 치며 뉘우치는 영적인 회개입니다.
말씀의 열매는 고개만 끄떡이는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말씀을 실천하는 봉헌의 삶입니다.
사랑을 연구하지 마십시오! 임을 만난 사람은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 법입니다. 다만 주님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마태 13,23)
=====================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비유말씀을 설명해 주시는 이유>
예수님을 직접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나라에 관한 현실감을 좀처럼 체감하기 어려웠던 마태오복음공동체나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비유설교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마지막 도구(道具, instrument)요, 상징(象徵, symbol)라고 했다.
하느님나라의 신비는 곧 하느님 존재의 신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바로 그 자리에서 그분을 직접 보는 눈과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는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16절)
이는 갈수록 어떤 신비스러운 것으로부터 이탈해가고, 심오한 것을 마치 미신으로 여기듯 하는 현대의 우리들이 참으로 부러워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일곱 개의 비유 중에서 그 첫 번째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이미 말씀해 주셨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까지 밝혀주신 예수께서 오늘은 그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사실은 비유설교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겠으나 설명해 주시는 이유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
우선 씨앗은 하늘나라의 복음(福音)이다. 그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복음선포자이다. 그 씨앗이 뿌려지는 곳은 네 곳으로 언급된 바 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토양으로서 선포되는 복음말씀을 듣는 청중과 그 청중의 내적 조건을 의미한다.
① 길바닥에 떨어진 씨는 새의 밥이 된다고 했다. 길바닥이란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경우를 말하며, 이 때 그 씨앗을 먹어치우는 새는 악한 자, 즉 사탄을 의미한다.
결국 길바닥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곳으로서 이는 청자의 마음 밭이 세속적인 지식이나 교훈, 과학이나 철학이념으로 다져져 있어 복음을 받아들여 싹을 피울 수 있는 어떤 마음의 바탕도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들이 씨를 쪼아 먹는 새에 비유된 사탄인 셈이다. 사탄은 곧 인간 스스로의 마음에 살고 있는 교만이나 자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② 씨앗의 싹을 피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토양만을 제공하는 돌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조건이다. 강한 햇볕 속에서 피운 싹을 부지하기란 불가능한 조건인 것이다.
이런 돌밭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기는 했지만 그 뿌리가 마음속에 내리지 않아 그 말씀 때문에 닥쳐오는 환난이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말라죽는 경우이다. 복음말씀과 신앙 때문에 손해를 견디지 못하는 것도 같은 경우일 것이다.
③ 가시덤불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도 말씀을 듣고 깨닫기는 했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복음말씀을 받아들이고 깨달았다고 하여 걱정과 유혹거리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더 크고 심각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이런 장애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신앙의 성장을 도모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신앙인은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의 것을 향유하면서도 집착과 과욕을 제어하고 천상의 것에 대한 감각을 늘 유지하고 성장시켜나가야 한다.
④ 예수께서 바라시는 것은 좋은 토양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다. 좋은 토양은 복음말씀을 잘 듣고 깨닫는 사람의 마음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씨앗이 길바닥에 떨어진 경우를 제외하고,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이나 좋은 땅에 떨어진 경우는 모두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경우를 의미한다.
깨달았다는 말은 씨앗이 발아(發芽)하여 싹이 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그 뿌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견디어 내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돌밭과 가시덤불 속의 씨앗은 뿌리는 내리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진다고 해서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햇볕과 알맞은 수분이 토양과 더불어 훌륭한 가실(佳實)을 이루어낸다. 그렇다고 좋은 땅이 아닌 곳에 떨어진 씨앗이 결코 열매를 맺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물론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이 비유 속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나 비유의 설명 속에서는 얼마든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들과 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암층의 절벽에서뿐만 아니라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이 있지 않는가.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비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는 이유이다.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켜 고정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고, 환난과 핍박과 박해의 온갖 어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으며, 세속의 온갖 걱정과 유혹거리도 극복해 나갈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복음의 뜻을 따라 기도하고 묵상하며, 사랑하고 선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 신앙에 항구하고 지구(持久)하는 것이다.
신앙의 지구력, 그것은 결실을 위한 하느님 성령의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열매를 맺는 일에는 깨달음을 행동으로 수행하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13,23 참조)
예전 청주 척산리 수련소에서 생활할 때, 밭일을 좋아하는 수련자 덕분에 밭농사 짓는 것을 유심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죠. 그때 알게 된 것은 새로운 밭을 일구는 것보다 묵정밭을 일구는 게 힘이 더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지난 수요일 복음에 대한 해설판인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13,19)으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해설이 무겁게 마음을 짓누릅니다. 처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어쩌면 새 밭처럼 작은 사랑과 은총으로도 쉽게 마음을 열어 말씀을 듣고 깨닫지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은 묵정밭과 같이 말씀을 빨리 듣기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무뎌지고 굳어져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혹여 지금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마음의 밭이 묵정밭과 같은 상태가 아닌지 깊이 숙고해 볼 일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무수한 말씀의 씨앗이 내 마음에 뿌려졌지만, 그 무수한 씨앗들이 죽어버린 것이 우리 마음의 경직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마음의 잡식성이나 편식성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닐까 반성해 봐야 합니다.
사실 신앙생활, 영적 생활하면서 느끼지만,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가장 위대하고 성스러운 점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信望愛적인 응답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인간은 '주님, 당신 종이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십시오.'라고 듣습니다. 그분이 문을 두드리시면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문을 엽니다. 그분이 씨를 뿌리시면 '겸손한 마음'으로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의 씨는 사막과 같이 척박해진 인간 마음의 정원을 에덴과 같은 동산으로 복원하시려는 게 하느님의 구원 의도이며 섭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에 대한 인간의 가장 바람직한 응답은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고서 말씀을 듣고, 문을 열며, 씨를 받아들이는 겸손에 달려 있습니다. 겸손이 인간 응답의 최상의 몫입니다.
가난한 마음, 깨끗한 마음,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들은 철저하게 낮아지고 부서진 영혼들이며 그러기에 오롯이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내어 맡긴 존재들입니다.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것도 겸손이며, 받아들인 말씀의 씨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결실 맺게 하는 것도 바로 겸손입니다. 비유에 언급이 없지마는 씨와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의 밭, 그리고 씨가 발아를 위해 필요한 수분과 같은 성령의 작용에 민감하게 응답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도 바로 겸손입니다. 씨인 말씀과 수분인 성령은 시초부터 떨어질 수 없는 한 짝으로 함께 일해 왔으며 특히 인간의 영혼 안에서 말씀의 씨가 발아하고 성장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서로 협력하는 관계입니다. 마음의 밭에서 씨가 발아하기 위해 성령께서 활동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는 바로 낮춤과 부서짐으로 비운 겸손보다 더 나은 상태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영혼의 밭에 좋은 씨가 뿌려질 경우, 성령의 도움인 수분을 공급받아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과 열매를 수확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씨 뿌리신 예수님을 통해 말씀의 씨를 뿌리고 수분인 성령을 통해 좋은 땅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이며 계획하신 뜻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루8,15 참조)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외국 아이가 생양파를 먹는 영상을 봤습니다. 생양파가 과연 맛있을까요? 아이가 먹기에는 너무 맵지 않을까요? 사실 이 아이는 엄마가 양파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과’라고 우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어디 한번 먹어보라고 하자, 정말로 맛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생양파를 먹었던 것이지요. 문제는 이 과정에서 너무 우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떻게 생양파가 사과처럼 맛있겠습니까? 아이는 처절하게 생양파를 사과처럼 먹었습니다. 터져 나오는 콧물, 그렁그렁 맺힌 눈물, 새빨개진 얼굴. 그러나 자기가 사과라고 했던 말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지 최대한 아삭아삭 맛나게 생양파를 씹어 먹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아이 엄마도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아이가 힘들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해보라 하고 또 여유 있게 영상까지 찍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부모는 이 순간 무조건 말리지 않을까요? 직접 체험하고 한 입 정도는 허락할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의 경우처럼 끝까지 기다리는 부모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아이는 더는 양파를 사과라고 우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기가 결정했고, 자기가 선택했으며, 자기가 행동하고, 그래서 자기가 책임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깨달았겠지요. ‘양파는 사과가 아니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래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더라도 간섭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면서 당신께로 나아가길 원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은 모두 주님께 책임을 떠맡기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며칠 전에 나왔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설명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보통 농부가 길가에 그냥 씨를 뿌리고 할 일 다했다고 할까요? 또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는 농부도 없습니다. 농부는 보통 좋은 땅을 만들고 그곳에 씨를 뿌리는 것이지요. 바로 복음에 등장하는 땅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길가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이 오래가지 못하는 돌밭의 마음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시덤불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에도 당신의 말씀이라는 씨앗을 뿌리십니다. 우리가 직접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그래서 좋은 땅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사랑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나쁜 마음을 좋은 마음으로, 그래서 주님과 언제나 함께 많은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관리인입니다>
몇 개의 화분을 작은 바구니에 담았는데 물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싫어하는 화초가 있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한 바구니에 담았더니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화초가 있어 물을 주고 강한 햇빛을 가려 주면 옆에 있는 화초가 힘들어합니다. 옆에 있는 화초를 위해 햇빛에 내놓으면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룬 겉모양은 아름답고 좋은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곧 죽을 것같이 보인 거실의 화초가 거짓말처럼 생기를 찾는 것을 보고 물 한 모금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같지 않아서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편하게 내 방법을 선택하면 상대방이 그만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요, 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겉모양은 모두가 멋진데 속을 보면 멀미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좋은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예순 배, 서른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밭이 다 좋은 땅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힘써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하고 말했습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 거저 얻으려 하니 부끄럽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수고와 땀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한 모금의 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도원 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금 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13,8) 하였듯이 다른 이에게 거름을 주는 포도원 지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길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 하는 태도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함을 말합니다. 이사 날짜를 잡으러 점집을 간다든지, 혼사를 앞두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한 편으로 가시덤불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 걱정, 과거의 상처와 모욕으로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조금 더>
마태오 13,18-2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조금 더>
“길에 뿌려진 씨”
“돌밭에 뿌려진 씨”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좋은 땅에 뿌려진 씨”
말씀이 몸소
내게 오십니다
몸소 오시는 말씀을
귀로 듣습니다
조금 더
몸소 오시는 말씀을
머리에 담습니다
조금 더
몸소 오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조금 더
몸소 오시는 말씀을
손발로 나눕니다
조금 더
몸소 오시는 말씀을
삶으로 이룹니다
내가 몸소
말씀이 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심의 생활화>
-누구나 좋은 땅의 마음 밭이 될 수 있다!-
“행복하여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카 8,15)
오늘 복음 환호송 성구가 은혜롭습니다. 오늘은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입니다. 두 분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가 되는 분입니다.
두분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일체 없고, 위경인 <야고보 원복음서>가 마리아의 부모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분들에 대한 기념은 성모 마리아의 축일과 함께 생겼고 많은 교부들이 즐겨 <야고보 원복음서>를 인용하였습니다.
어제 자료에서 읽은 전설같은 일화를 그대로 소개합니다.
‘요아킴은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부유한 인물이었고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이었으며 둘의 걱정은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요아킴은 단식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고자 광야로 갔고, 안나는 집에 홀로 남아 역시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마침내 응답을 받는다. 한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낳을 아이는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 예고하자 안나는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기로 약속했고,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비슷한 환시를 보고 기뻐한다. 때가 되어 안나는 딸을 낳았고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세 살이 되자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한다.’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결과 하느님께 선물로 받은 아이가 바로 마리아 성모님으로, 이런 기적같은 일화는 주변에서도 간혹 듣기도 합니다.
아마도 요아킴과 안나는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해석에서 네 번째 부류의 ‘좋은 땅’의 부부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기념일 전례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봅니다. 이분들을 기념하는 전례는 그 아득한 옛날인 6세기 동방교회에서 시작되어, 8세기 이후 서방교회에 도입됩니다.
안나는 13세기 이후 7월26일로 축일을 지냈고, 요아킴에 대한 신심은 15세기후이후 발전하여 1913년에 9월16일로 지내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이분들의 축일은 함께 7월26일 오늘로 확정되어 지내게 됩니다.
성 요아킴에 대한 신심은 안나보다 못하지만, 두분에 대한 신심은 가정에 대한 존경을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가 됨으로, 요아킴과 안나 부부는 교회의 특별한 공경을 받는 성인들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보고 배운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마리아 성모님도 이런 신심깊은 부모를 보고 배웠을 것이며 예수님 역시 이런 외조부모의 삶을 통해 보고 배웠을 것이라는 유쾌한 상상도 해봅니다.
오늘날은 거의 드물지만 제 어릴적 대가족제도 시절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 역시 할머니에 대한 따뜻한 추억은 지금도 많고 생생합니다.
할머님계신 큰집에 가서 할머니와 잔적도 많았고, 겨울철 할머니는 벽장에서 홍시 감을 꺼내 주시기도 했습니다. 당시 겨울철 몸은 추웠지만 마음은 따뜻했습니다. 예전 할머니들의 권위는 대단했고 손주들에 대한 애정은 참 각별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에 대한 해석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늘 비유에 대한 해설을 초대교회의 산물로 보고 있지만 예수님의 생각도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씨가 아니라 말씀의 씨가 뿌려지는 토양의 밭에 있습니다. 씨가 아무리 좋아도 땅이 척박하면 제대로 열매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참된 농부는 기름진 밭을 만들기 위해 온갖 거름을 주며 최선을 다해 땅을 돌봅니다. 과연 내 마음 밭은 어디에 해당되는지요?
첫째, 길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는 하늘 나라의 비유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했을 때 악한 자가 즉시 회수해 가는 것을 지칭합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 부재가 문제입니다.
둘째, 돌밭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나 그 사람 안에는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니,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걸려 넘어집니다.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함이 문제입니다.
셋째,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는 말씀을 듣기는 하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문제입니다.
세 경우 모두가 시공을 초월한 인간 현실입니다. 이런 마음 밭은 고정불변의 현실일까요? 과연 나는 어디에 해당될까요? 제1독서 예레미아 예언자 말씀이 희망적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라.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볼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주님의 계약 궤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마음에 떠올리거나 기억하거나 찾지 않을 것이다.”
메시아 도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 그대로 오늘 목자들중의 목자이신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게 하며 참 좋은 수행 덕목을 선택, 훈련, 습관화 하도록 해줍니다.
고정불변처럼 생각되는 앞서의 세 유형의 부정적 마음 밭에서 벗어날 희망이 보입니다. 진짜 영적 농부는 마음밭을 탓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온갖 유익한 수행의 훈련에 전념합니다. 옛 어른이 말씀도 생각납니다.
“변하지 않는 인간을 변하게 만드는 유일한 기회가 있다. 바로 후회다.”<다산>
저는 후회를 회개나 회심으로 바꿔 읽습니다. 한두 번도 아닌 끊임없는 회심이 좋은 마음밭으로 변모시킴은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도 잘못이 있을 수 없다. 성인과 광인의 구별은 오직 뉘위침에 있다.”<다산의 여유당 전서> 역시 뉘우침은 회개나 회심으로 바꿔 읽고 싶습니다.
하느님께 불가능은 없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일하는’ 진인사대천명의 간절한 삶이 좋은땅의 마음밭으로 변모시킵니다. 마침내 모두가 선망하고 희망하는 네 번째 유형의 인간입니다.
넷째,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를 낼 정도로 사람마다 다양합니다. 그대로 렉시오디비나, 성독의 사람을 지칭합니다.
한결같이 “듣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관상하고, 실행하고”의 렉시오디비나의 수행에, 영적훈련에 매진할 때,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제 아무리 박토같은 마음 밭도 옥토의 마음밭으로 변모됩니다.
새삼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수도원 일과표에 따른 삶이 좋은 땅의 마음 밭에 얼마나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는지 깨닫습니다. ‘회개의 일상화’를, ‘회심의 생활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도와 노동과 성독이 조화된 수도원 일과표에 따른 영적훈련이, 무엇보다 시편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의 영적훈련이 얼마나 좋은땅의 마음밭으로 변모시키는지 역시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역시 타고난 것들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입니다. 바로 타고난 것들에, 나쁜 환경에 절망하는 것, 이것이 악마의 유혹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항구한 노력이 사주팔자 운명론을, 나쁜 환경을 돌파해 버립니다.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을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으로 변모시킵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루시는 일입니다.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예레 31,10ㄹ)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귀는 있지만 마음이 없는>
듣기 싫은 말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립니다. 귀로 들은 말이 마음에까지 가야 듣는 것인데 마음에까지 가지 않도록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관심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에까지 오면 마음이 괴로우니까 관심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심은 존재건 말이건 일이건 그것들을 마음에까지 끌어당기고, 무관심은 그런 것들을 마음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관심에 두 가지 관심이 있습니다. 사랑의 관심과 욕심의 관심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관심과 욕심의 관심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관심은 유익의 관심이고, 욕심의 관심은 이익의 관심이라고.
우리는 일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고, 존재의 유익을 위한 일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까 일은 사랑하면서 존재는 사랑하지 않거나 일에 관한 관심은 있지만 사람에 관한 관심이 없다면 그 일은 자기만족을 위한 일이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여자와 비교해 남자가 자주 범하는 잘못이 바로 이것입니다. 연애할 때는 환심을 사기 위해 너를 위한 일을 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가족을 위해 일한다면서 실제로는 사업 욕심 때문에 사랑한다는 가족을 놓치고는 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기념일이나 아내와 자녀의 생일을 놓치고, 아내나 자녀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관심하게 듣고 마음에 남겨두지 않으며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편리하게 잊어버립니다. 아무튼 욕심은 사랑의 관심을 마음에서 밀어내고 꺼버립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러니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일에 사랑하지 않는 핑계를 대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일에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고 오래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있었던 일이나 추억도 잊지 않습니다.
아무튼 말이건 존재건 그것을 마음에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사랑의 관심이고, 욕심의 관심은 욕심부리는 것만 소유하고 소유한 뒤에는 그만이며, 말도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기 싫은 것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림으로써 말이 마음에 와닿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말씀을 새겨들으라 하시는데 어디다 새기라는 말씀입니까? 명심(銘心) 곧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귀는 있지만 새길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찌 새기고 어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13,16)
<뿌리!>
오늘은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 묵상은 고유 기념일의 독서(집회 44,1.10-15/'조상들에 대한 칭송')와 복음(마태 13,16-17)에 대한 묵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6-17)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이신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를 기억하면서, '뿌리'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뿌리'는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입니다. 그리고 육의 뿌리를 뛰어넘는 그 '근본 뿌리인 제1원인(causa prima)'은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늘 볼 수 있었고, 그분의 말씀을 늘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고,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뵈올 수 있을까?
저는 영이 맑고 깨끗하고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든 것의 첫 번째 원인'(causa prima)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뵈올 수 있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태계의 주보 성인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영이 맑고 깨끗하고 순수했기 때문에 모든 것 안에서 창조주 하느님을 뵈올 수 있었고, 말씀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육의 뿌리이신 부모님과 근본 뿌리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러 봅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마태 13, 23)
말씀의 시간을
살아가셨던
소중한 분들을
기억합니다.
말씀의 마음이
끝내 열매를
맺게되는 믿음의
마음입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깨닫고
믿음으로 말씀을
일깨워줍니다.
말씀의 관계가
요아킴과 안나
마리아의
관계였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씀이
다 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위해
헌신하고 우리를 위해
낮아지고 우리를 위해
먼 길을 함께 걸어갑니다.
말씀이
사랑의 마음임을
믿습니다.
말씀으로 사는 것이
성가정의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말씀으로 가르치고
말씀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되셨던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