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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간도.용정-대성학교기념사업회 원문보기 글쓴이: 간도-용정
20년대 동북지구 조선독립군의 반일무장투쟁 ◇ 안화춘, 리성수 / 역사적인 의미. 신동현
1. 머리말
1919년부터 시작된 무장투쟁을 주도로 하는 동북지구 조선반일독립운동은 30년대초에 기본적으로 결속되였는데 그 발전상황에 따라 크게 세개 단계로 나누어볼수 있다. 즉 제1단계(1919-1921)는 무장투쟁을 위주로 하는 조선민족반일독립운동이 흥기하는 시기이고 제2단계(1922-1925년)는 반일단체들이 점차적으로 참의부,정의부,신민부로 통합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동시에 반일운동의 근거지를 건립하고 근거지내에 자치기구를 건립하여 민족경제,문화,교육을 발전시킨 시기이며 제3단계는 1926년부터 930년까지로서 반일독립운동의 령도를 가강하고 민족주의정당을 건립하는 운동을 진행한 시기이다.
본 론문에서는 동북지구 조선독립군의 투쟁이 진행될수 있은 주,객관적조건 및 독립군의 건립과 무장투쟁 등에 대하여 론술하려 한다.
2. 적극적인 독립운동의 방도-무장독립운동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탐한후 조선민족은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싸웠으며 반일독립운동가들은 여러 가지 구국방안을 제기하였다. 안창호,리승훈 등을 중심으로 한 반일독립운동가들은《교육산업우선론(優先論)》을 주장하면서 조선이 일제에게 멸망되게 된 관건은 조선이 서방과 일본에게 뒤떨어져 있었기때문이라고 지적하고 교육을 발전시켜 민중을 계몽하고 봉건사상을 반대하고 서방의 문화를 학습하여 공상업을 발전시켜국력을 증장하는 것이 독립을 쟁취할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주장하였으며 신채호,리을규,백정기 등 사람들은《무정부주의론》을 창도하면서 군중을 발동하여 제국주의도 반대하고 공산주의운동도 반대하고 공포의 수단을 리용하여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원봉 등은《의렬투쟁론》을 제출하고 경제,군사상에서 절대적인 우세인 일제앞에서《칠암살(七暗殺)》,《다섯가지를 파괴(五破壞)》하는 방법으로 일제와 투쟁하면서 인민대중을 발동하여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리승만,려운형 등은《독립청원외교론》을 내놓아 제국주의세계질서가운데서 오직 외교도경을 통해 미,영,중,불 등 국가의 지지와 승인을 얻어야만이 독립을 쟁취할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때의 력사적환경속에서 민족독립을 쟁취할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길은 세계의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경험이 증명하다싶이 무장투쟁이였다.
여러가지 반일투쟁방략이 대두되고있을 때 일찍 1910년에 조선자산계급단체인《신민회》에서는 독립전쟁전략을 제정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려 하였다. 이 전략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용되고 있다. 첫째, 파쑈적인 통치를 실행하는 정황에 맞서 중국 동북 장백산일대에 독립군기지를 건립하고 많은 애국인사들을 동북에 이주시키며 토지를 구입하고 신민촌을 건립하여 경제상에서 자립을 실행하고 정치상에서 자치를 실행한다. 둘째, 학교와 교회당을 설립하며 독립군골간을 양성할뿐만아니라 애국청년을 모집하여 민단(民團)을 조직하며 일부분 우수한 청년을 북경 등지에 있는 무관학교에 보내여 배양한다. 셋째, 중국에서 배양한 무장력량을 중일,일쏘,미일전쟁이 폭발할 시기를 타서 국내로 들어가 국내인민봉기와 배합하여 조국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①
이 전략방침에 의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동북지구로 들어왔고 동시에 조선에서 활동하고있던 의병진도 동북지구로 퇴각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과 여러 가지 반일활동을 전개하였다.
3. 무장독립투쟁의 주, 객관적조건의 형성
1919년 3월 1일, 중외를 진감한 조선민족독립운동인 3.1독립운동이 폭발된후 동북조선인민의 반일정서는 크게 고조되여 동북지구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할 주, 객관적조건이 이미 형성되였다.
(1) 무장독립운동의 객관적조건의 형성
첫째, 동북지구는 중국, 조선, 쏘련 삼국이 접경해있는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어 전략적지위가 매우 중요하여 일제가《대륙정책》을 실행하는 전초진지였고 또한 《대륙정책》을 추진하는 기지인 조선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지구였다. 일제는 1920년대에 이르러 동북지구 조선민족반일독립운동을 진압하여 조선에서 식민통치를 유지하려 하였다.
한편 동북과 조선은 강을 사이 두고있기에 독립군들이 조선국내로 진공하여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통치를 타격하고 조선국내와 기타 지역의 반일운동을 추동하게 되어 지리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에 아주 유리한 지역이였다. 독립운동가들도 동북지구를 《조선을 광복》하는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또한 동북의 산악지대는 항일유격전을 진행할수 있는 가장 리상적인 지역이기도 하였다. 중조변계일대는 지세가 험악하고 원시삼림이 무성하여 적을 공격하기도 편리하고 또한 퇴각하기도 쉬워 독립군들이 수시로 국내로 출격하여 적을 타격할수 있다.
둘째, 동북지구에는 좋은 군중기초가 있었다. 리조말기이래 봉건통치와 압박에서 벗어나고 망국노가 되기를 원치 않는 조선인민들은 생계와 자유를 위하여 륙속 동북지구로 이주하여 점차 조선인부락을 형성하였으며 특히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후 조선인의 이주가 급증하여 1922년에 이르러 동북의 조선인수는 52만 8,027명에 달하였고 1931년에는 63만 982명에 달하여 조선족사회가 형성되였다. ②동북지구는 해외조선인이 가장 많이 집결된 지역이며 이곳에 집결된 조선인들은 망국노로 되기를 원치 않는 강렬한 반일민족의식을 갖고있어 여러 가지 반일활동에 적극 참가할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들은 반일독립운동의 직접적인 참가자이며 반일독립운동의 인력, 물력, 재력의 직접적인 담당자들이고 독립운동의 주력군이였다.
셋째, 20년대 동북지구는 되어 조선민족반일독립운동에 유리한 국제렬강의 완충지대로 되어 조선민족반일독립운동에 유리한 국제적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1917년 로씨야 10월사회주의 혁명이후 동북에 대한 짜리로씨야의 통제는 기본적으로 결속되였고 동북군벌의 부패무능으로 하여 동북의 일부 지역은 실제상에서 반독립(半獨立) 상태에 있었으며 남만과 북간도지역은 군벌통치가 박약한 지역이였다. 10월혁명이후 중국인민의 반제반봉건의식은 대대적으로 제고되여 조선인민의 반일독립운동을 지지하고 동정하였다 중국 동북지구에 대한 일제의 경제,문화침략이 강화됨에 따라 일제와 동북군벌지간의 모순이 가심화되여 20년대초 동북군벌당국에서는 조선반일독립운동에 대하여 묵인하거나 암암리에 지지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애국관병과 당지 한족군중들은 조선민족반일독립운동을 더욱 지지하였다.
넷째, 제국주의국가들이 쏘련에 대한 무력간섭이 결속된후 조선반일독립군은 쏘련 연해주에서 여러 가지 무기를 쉽게 사들여 자신을 무장할수 있었다.
다섯째, 1910년이후 조선의 반일의병부대들이 동북지구로 이동하여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려 량호한 무장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해 놓았다.
(2) 무장독립운동의 주관적조건의 형성
1906년부터 시작하여 반일민족주의자들은 동북지구에 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하고 적극적인 활동들을 벌리였다. 이리하여 무장독립운동의 주관적조건들이 갖추어졌다.
첫째,동북지구 조선족거주지역에 북간도 간민회,남만지구의 경학사,북만의 신한국민회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반일단체와 자치기관들이 건립되여 조선민족군중을 각성시키고 단합시키였다.
둘째, 조선반일계몽가들에 의한 애국계몽운동은 민족주의근대교육을 진흥시키고 독립운동의 인재를 배양하고 인민들의 민족주의각오를 제고시켜주었다. 1906년 리상설,리동녕 등이 룡정에 설립한《서전서숙》,1907년 김박연,정재면 등이 설립한 명동학교와 리희영, 리시영, 리동녕, 리상룡, 김창환, 주진수 등이 류하현 삼원포에 꾸린 신흥학교 등에서는 폭넓은 반일계몽사상을 학생들에게 전수하여 많은 독립군인재를 배양해내였다.
셋째, 산업을 진흥시키고 민족경제를 발전시키는 운동을 통하여 자치지역내의 조선민족의 생활문제와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게 되었따.
(3) 사관양성소의 설립과 독립군 편성
상술한 무장독립투쟁의 주,객관적 제 조건이 형성되자 동북지구의 여러 반일단체들에서는 분분히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양성에 전력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골간을 배양하는 가장 정규적인 군사학교였다. 1911년 4월 리회영 형제,리상룡,리동녕 등은 류하현 삼원포에 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하고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창립하였다. 리택영, 리상룡, 여준, 리천민이 교장을 담임하고 근대군사과학리론과 실전경험이 있는 리청천이 교성대장을 담임하였으며 성준용,리범석,원병상,김성로 등이 교관을 담임하였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보병,기병,포병,공병,치중병을 포함한 16종의 근대군사과학을 강의하였을뿐만아니라 학원들에게 애국주의,집체주의,민족주의 교육을 진행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3.1운동이 실패한후 많은 애국청년들이 신흥무관학교에서 학습하였는데 한학급에 학생이 가장 많을 때에는 몇백명이 있었다고 한다. 리상룡의《석주유고》에 따르면 3.1운동전후 신흥무관학교에서 재정,교학기재,교사가 엄중히 결핍되는 정황하에서도 천여명의 학원을 배양해내였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 이외에도 북로군정서의 사관련성소,간도국민회에서 설립한 리청배의 군사학교, 신민부에서 창립한 성동사관학교에서도 몇백명에 달하는 무장투쟁골간을 배양하였다.
군자금을 모집하여 무기를 구입하고 병원(兵源)을 조직하는 것도 무장투쟁의 필요한 조건이다. 군자금을 모집하기위하여 한면으로는 조선국내인민과 동북조선족들에게서 모급하고 세금을 징수하였고 다른 한면으로는 독립군소부대를 조선국내에 파견하여 부호와 친일주구들의 집을 습격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방법을 채취하였다.
반일독립운동가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인민대중의 광범위한 지원으로 1920년초에 이르러 반일단체들에서는 상당한 수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는데 대한군무도독부에서 13만원,간도국민회에서 17만원,대한군정서에서 13만원,대한광복군단에서 4만원에 달하는 자금을 모집하였다. 여러 독립군단체에서는 일본군의 봉쇄선을 넘어 쏘련연해주에 가 무기를 구입하여 자신을 무장하였는데 40개의 반일단체와 38개의 무장력량을 조직하여 동북의 독립군은 몇천명에 달하였다. 그중 북로군정서는 600여명의 병력에 기관총 4정,보총 몇백자루,2천여개에 달하는 수류탄을 갖고있었고 대한독립군은 400여명의 병력에 보총 200자루,권총 30자루를 갖고있었고 국민회군은 500명의 병력에 400여자루의 보총을 갖고있었고 의군부는 150여명의 병력,한민회는 200명,광복단은 300명의 병력에 보총 150자루, 권총 200자루를 갖고있었고 의민단은 200명 병력에 200자루 보총을 갖고있었고 신민단은 200명 병력에 보총 160자루,권총 50자루를 갖고있었으며 신민부는 530명의 병력을 갖고있었고 정의부는 7개중대에 700명의 병력,참의부에는 500명의 병력이 있었으며 20년대말의 조선혁명군은 500여명의 병력이 있었다.
4. 독립군의 무장독립투쟁
동북 각 지역에 널려있는 독립군부대들의 처음 가는 임무는 무장투쟁으로 일제와 혈전을 벌려 조국을 광복하는것이였다. 20년대 동북반일부대들이 진행한 무장투쟁의 발전상황과 그 형식으로 볼 때 두 단계로 나눌수 있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는 무장투쟁의 전기로서 그 특점은 조선국내진공전을 위주로 하고 일본정규군, 경비대,헌병,경찰을 주요한 작전대상으로 하였으며 1925년부터 1930년까지는 무장투쟁의 후기로서 그 특점은 동북지구의 독립운동근거지를 보위하고 친일주구를 숙청하며 동북에 있는 일본침략세력을 타격하는 것을 주요한 작전대상으로 하였다. 1931년 9.18사변이후에는 중국반일부대와 협동작전을 벌려 일군과 작전하였다.
무장투쟁의 전반기:
1919년 8월,홍범도 등은 대한독립군을 거느리고 조선 함경북도 혜산진을 습격하여 거기에 주둔하고있던 일본수비대를 소멸하였다. 이는 3.1운동이후 독립군이 처음으로 되는 조선국내진공전이였다. 9월,홍범도의 독립군은 재차 조선 갑산군 금정주재소를 습격하고 10월에는 평안도 강계 만포진을 점령하였으며 자성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일군 70여명을 소멸하는 전과를 올리였다. 1920년 각 독립군은 조선국내 진공전을 성공적으로 벌리였는데 통계자료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6월까지의 사이에 독립군은 58차에 달하는 조선국내 진공전을 벌리여 일본통치기관과 경찰서 34개소를 없애버리고 적지 않은 일본군을 소멸하고 일정한 군자금을 징수하였으며 1920년 전반기 독립군부대들은 1651인차에 걸쳐 중조변경지구에서 일본군을 습격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톡립군이 빈번히 진행한 조선국내진공전은 조선에서의 일제식민통치를 크게 타격하였으며 조선인민의 반일독립운동을 유력하게 추동하였다.
조선반일부대들의 진공에 대처하기 위하여 일본군은 국경일대의 경비를 가강하는 한편 정규군을 중국 동북지방에 침입시켜 독립군에 대한 보복적인《토벌》을 감행하였다. 1920년 6월 4일 남양일본군 수비대장 신미(新美)중위는 일본군 한 개 중대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삼툰자를 습격하여 거기에 있는 독립군을 소멸하려 시도하였지만 결국 격퇴당하고 말았다. 6월 7일,일본군 제19사단의 야스가와(安川)소좌는 월강추격대를 조직하여 왕청현 봉오동에 있는 독립군기지를 진공하였다. 홍범도,안무,최진동의 대한독립군,국민회군,군무도독부는 련합작전을 벌려 몇십명의 일군을 소멸하는 전과를 올리였다. 련속되는 패배를 당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완전히 소멸하고 동북지구에서 반일독립운동을 박멸하기 위하여 이른바《간도지방 불량선인 초토계획》을 제정하고 동북에 있는 조선독립군을《토벌》하는 군사행동을 봉천군벌당국과 교섭하였다.
1920년 10월 2일,일본군은《훈춘사건》을 조작하고 이를 구실로 조선주둔 19사단 전부와 20사단,11사단,14사단의 일부를 출동시켜 관동군의 배합하에 2만 5천명에 달하는《토벌》부대를 동북지방에 출동시키였다.
적들의 대거진공에 직면한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국민회군 등 독립군부대들은 홍범도,김좌진,안무 등의 령솔하에 련합하여 화룡현 청산리,백운평과 어랑촌,천수동,고동하 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걸쳐 천여명의 일본군을 소멸하는 조선반일독립운동사상 가장 큰 승리를 이룩한《청산리대첩》을 거두었다.
1924년 5월 19일,참의부 2중대 1소대는 참의 한웅의 지휘하에 조선총독이 탄 경비순라정을 저격하여 재등실총독이 부득불 국경일대의 시찰을 중지하고 창망히 도주하게 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독립군이 1921년에 일본군과 602차례 전투를 진행하였는데 참가인수가 3,184인차였으며 그중 조선에서 진행한 전투가 87회였고 동북지구에서 진행한 전투가 73회였으며 1922년에 일본군과 교전한 회수는 378회였고 참가인수는 2,127인차에 달하였으며 1924년에 560회에 달하는 국내진공전을 벌리였고 1925년 한해에만도 참의부독립군이 87회에 달하는 국내진공전투를 벌리였다.
무장투쟁의 후반기:
1920년대에 이르러 일제는 조선에서의 통치방법을 원래의《무단통치》를《문화통치》로 개변하여 조선반일운동진영을 분화시키고 인민들의 반일독립의지를 약화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일제는《대륙정책》의 일환인《만몽정책》의 실행을 가속화하기 위하여 한면으로는 동북 각지에 경찰을 증파하고 령사관을 증설하고 많은 친일단체들을 조직하여《조선사람으로 조선사람을 다스리는》정책을 실행하였으며 다른 한면으로는 동북군벌당국에 압력을 가하여《삼시협정》을 체결하여 조선인민의 반일활동을 단속하게 하였다. 한편 독립운동진영도 좌,우로 갈라지고 조선독립운동방략 등에 대한 의견차이로 분렬되여 력량이 분산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2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동북의 반일무장단체에서는 국내진공전을 주요한 전략으로 하던 것을 동북지구의 일본침략세력과 친일주구를 타격하는데로 방향을 바꾸었다. 1925년부터 독립군의 국내진공전의 회수가 점차 줄어들게 되었는데 통계에 의하면 1925년에 270회,1926년에 69회,1927년에 16회였고 1930년에는 3회밖에 되지 않았다.
일제의 친일단체인 상조회,선민부,한교동향회,상응계,천호조,보민회,조선인회 등 단체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며 애국적인 군중을 살해하고 중조인민간의 관계를 리간시키였다. 1925년부터 여러 독립군에서는 친일주구단체를 징벌하는 투쟁을 벌리였는데 신민부에서는《별동대》를 조직하여 해림조선인회 회장 배두산을 처단하고 권농회 회장 한영렬을 쫓아버리였으며 1927년 9월 26일에는 황덕환 등으로 별동대를 조직하여 할빈조선인회 총부를 습격하여 친일주구를 엄벌하고 사무소를 짓부셔버렸다. 정의부에서도 상조계,한교동향회 등 친일단체의 친일주구를 처단하였기에 많은 친일단체의 우두머리들이 겁을 먹고 직무를 사임하고 조선으로 도망하였다.
1929년 국민부에서는 친일단체인 선민부를 타격하는 토벌지휘부를 조직하여 리웅을 사령관,량세봉을 부사령관으로 하고 집안,통화,환인 등지에서 횡행하던 선민부를 위수로 하는 친일단체를 숙청하였는데 몇 개월의 전투를 거쳐 이 지구의 친일단체를 소멸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동북에서의 일본침략세력을 호되게 타격하고 적들의 반동기염을 꺾어놓았고 1930년대초 반일무장투쟁에 경험을 남겨주었다.
5. 맺는말
본문에서 론술한바와 같이 상술한 무장반일투쟁의 국면이 나타나게 된 것은 절대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식민지의 조선에서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려면 반드시 무장투쟁을 진행하여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였고 이런 무장투쟁을 전개할 주,객관적조건이 1920년대 동북지구에 이미 형성되여 있었다. 홍범도,김좌진,조성환 등을 대표로 하는 동북조선민족반일운동가들은 조선 서울의 손병회 등 33인의 평화주의 독립운동가들과도 반일투쟁형식을 달리하였고 려운형 등을 대표로 하는 상해의 외교주의의 독립운동가들과도 사상을 달리하였다. 그들은 강렬한 무장독립사상을 갖고있었다. 미국대통령 월슨이 제기한 민족자결주의원칙이 공담으로 된후 외교독립론이 빠리강화회의에서 실패하였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무장독립론사상을 갖고있던 홍범도 등이 무장독립사상을 실천에 옮기려 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1920년대 조선독립군들이 진행한 무장투쟁은 심원한 력사적의의를 갖고있는바 일본식민통치를 유력하게 타격하였고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의 신심을 북돋아주었고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에 보귀한 경험교훈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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