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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되자 회사가 바빠졌다. 12월 24일 시크릿 파티 때문이었다. 장소를 알아보고, 파티 플래너를 고용해서 내
부 장식에서부터 작은 포크까지 세세하게 준비를 했다. 그리고 시크릿 파티에 참석할 회원들을 알아보고 초대장
을 찍기 시작했다.
“고 실장님~. 전화요.”
“응~. 고민영 실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장혜주예요.>
민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안녕하셨어요. 이번 파티에 오신다는 연락은 받았습니다.”
<아. 네. 그런데 혹시 차재현 사장님도 오시나요?>
“아니요. 못 오신다고 연락 받았습니다.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초대장을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차재현 사장님은 결혼에 관심이 없으셔서 안 오신다고 하시겠지만 제가 뵙고 싶어서요. 부탁 좀 드릴게요.>
‘싫어. 내가 왜?’
민영이 턱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고 실장님만 믿어요. 저.. 이번엔 정말 제대로 잘 해보고 싶거든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꼭 참석하실 수 있도록 힘 좀 써 주세요.>
“네. 노력해 보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대표 이사인 희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혜주?”
“네. 차재현 사장님에게 초대장 보내라고요. 이번 파티에 꼭 올 수 있게 힘 좀 써 달라고 하네요.”
“진짜 몸이 달았구나?”
민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희진을 바라보았다.
“뭐야. 자기 못 들었어? 천하의 장혜주가 차재현 사장한테 푹 빠졌다는 얘기야. 만나달라고 그렇게 전화를 해도
안 받고, 찾아가도 5분도 채 못 본다고. 차재현은 아닌데 장혜주가 목매고 있는 거라더라. 왜 아니겠어. 다들 탐내
는 남자인데. 그래서.. 어쩔 건데? 오라고 할 거야?”
“해야죠. 그게 제가 할 일인데.”
“자기. 지금 얼굴이 어떤 줄 알아? 웃고 있는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야. 사실은 안 괜찮은 거잖아. 그렇지?”
“죄송해요. 이번 파티.. 참석 못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힘들어?”
민영이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물고 고개를 숙이자 희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도대체 어떤 사랑인 거니? 지독하다. 10년이 넘었으면 그만 할 때도 됐잖아? 뭘 그렇게 애달프게 사랑을 하고 그래. 편하고 좋기만 한 사랑도 넘쳐나는 세상에서.”
민영이 눈물을 툭.. 흘렸다.
*****
<오늘은 늦어?>
“미안. 언니가 조카들 보러 오래서. 저녁만 먹고 금방 갈게.”
<천천히 와. 오래 만에 만나는 건데 서두르지 말고.>
“응. 이따가 봐요~.”
<응.>
민영이 떨리는 숨을 내쉬고 언니 집으로 들어갔다. 조카들과 놀아주고 난 후 언니가 재우러 들어가자 형부가 그녀에게 와인을 들고 다가와 앞에 앉았다.
“술이 필요할 것 같은데 내가 다른 술은 못 해서.”
“황송하옵니다.”
“받으시게.”
민영은 와인 잔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았다. 승주가 미소를 짓자 민영도 피식 웃었다.
“무슨 일 있지? 지난번에 장모님 뵙고 와서는 윤진이가 엄청 울었거든. 물어도 대답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는 중이었어. 분명히 네 일인 것 같은데. 너랑 재현이 일이야?”
“네. 그래서 형부.. 도움을 받았으면 해서 왔어요.”
“무슨?”
“12월 31일자로 여행을 갈까 해요.”
“어디로?”
“일단.. 영국으로 가려고요. 미술관에 가서 거기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직접 보려고요. 그 후로는 발길 닿는 대로..”
“언제 들어온다는 기약도 없이 간다는 거야?”
“네. 돈은 제가 알아서 하는데요. 엄마 좀.. 부탁드립니다. 쌤..”
“민영아. 차라리 재현이랑..”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알아요. 제가 바보 같고, 비겁하다는 걸. 하지만 저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이 쪽 세계를 너무 많이 알아버려서 조금.. 질린 것 같아요.”
“네가 사라진다고 해도 재현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할 것 같아?”
“만약.. 우리들이 나이가 들어서 다시 만났을 때.. 그 때도 둘 다 혼자 살면.. 그 땐 같이 살래요. 하지만 지금은..
저 때문에 가족을 버리라는 말.. 못 하겠어요. 장 회장님 손녀 딸인 장혜주씨가 많이 좋아하나 봐요.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런 여자랑 결혼했겠지 싶어요.”
“민영아.”
“쌤 만나고 눈물이 많아진 언니가 보기 좋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걱정이 돼서.. 언니랑 엄마 좀.. 부탁드릴게요.”
승주가 손을 들어 민영의 손등을 토닥였다.
“여행 잘 하고 돌아와. 두 사람 걱정은 하지 말고. 올 때 내 선물 사 와.”
“에? 형부. 우리 귀염둥이 주나, 주희, 주원, 주혁이의 선물이 아니고 형부 선물을 사오란 말씀이십니까?”
“오야. 나도 선물을 아~주 좋아하느니라.”
민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방 안에서 아이들의 가슴을 토닥이던 윤진이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민영이 가고 나서 승주가 조용히 윤진을 품에 안았다.
“마음이 너무 아파요..”
“괜찮을 거야. 스스로 길을 잘 찾을 수 있는 녀석이니까.”
승주가 윤진의 머리를 쓰다듬고 머리 위에 입술을 눌렀다.
*****
민영은 재현의 다리를 베고 누워 얼굴에 팩을 붙이고 있었다. 재현의 얼굴에 붙은 팩이 떨어지려고 하자 민영이 손을 들어 다시 붙여주었다.
“고개를 뒤로 하라니까?”
“이걸 왜 해야 하는데. 나 피부 좋아~.”
“웃겨. 거울 안 보나봐~. 완전 칙칙하거든요?”
“그래? 그래서 보기 싫어?”
“뭘 또 농담을 그렇게 받으시나~. 완전 잘생겼지, 내 남친.”
그가 미소를 짓자 팩이 떨어져 그녀의 얼굴 위에 붙었다.
“오빠!”
그가 웃으며 자신의 팩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던졌다.
“난 그만 할래. 너는 계속 해. 촉촉한 피부를 위해서.”
그녀가 쿡쿡 웃었다.
“언니랑 네가 좋아하는 쌤이랑 조카들 보고 오니까 좋아?”
“좋아. 그런데 내가 승주 쌤을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알았어?”
“친하게 지내서. 네가 친하게 지내는 남자들은 많지만 바라보면서 눈빛이 반짝이는 남자는 흔하지 않잖아.”
“멋지잖아. 우리 언니가 저런 남자랑 결혼하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된 거야.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상상이 간다. 네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보고 싶다..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지난 시간 속에 놓친 너의 모습들을 보고 싶거든. 되돌려 보고, 또 되돌려보고, 또.. 계속 그랬으면 좋겠어.”
“난 싫은데.. 지금이 좋아.”
“나도 그렇지만.. 만약 과거로 돌아가면 재민이보다 내가 먼저 널 발견할 거야.”
“그럼 난 도망갈 거야.”
“진짜?”
“응. 아니면 더 오래 전으로 가서 조선시대로 가던지.”
“음.. 더 어렵지 않나? 난 양반인데 넌 평민이잖아. 더 어려워. 차라리 지금이 낫지.”
“전생이잖아. 어떻게 알아? 난 마님이고 오빤 마당쇠일지. 마님~ 해봐.”
“마님~. 부르셨습니까?”
“다리가 아프구나. 좀 주물러 보거라.”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목에 걸었다.
“도대체 무슨 사극을 본 거야.”
“야한 거?”
그가 쿡쿡 웃으며 팔을 풀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해야 해?”
“더 하라며~.”
“얼굴 만지고 싶은데 못하니까 힘들다. 키스하기도 좀 그렇고.”
그녀가 쿡쿡 웃었다.
*****
민영은 대표이사 실에 들어갔다.
“응?”
“컨셉을 조금 수정했어요.”
민영이 서류파일을 희진 앞에 내려놓았다. 서류를 바라보던 희진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12월 31일까지 근무하고 조금.. 쉴게요.”
“얼마나?”
“소문이 잠잠해 질.. 쯤이요? 제가 돌아온대도 다시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서요..”
민영이 사직서를 내밀었다.
“자기야.”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설마 나 몰래 다른 회사 차리려는 거 아니지?”
“만약 다시 이 일을 하게 된다면 이사님이랑 함께 하고 싶어요.”
희진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비밀이고?”
“네.”
“좋아. 나도 좀.. 보고 싶어졌어.”
희진이 윙크를 했다.
****
시크릿 파티 초대장이 발송되었다. 다들 봉투를 열어 바라보았다. 날짜와 시간, 장소는 기본이었다.
“드레스 코드가.. 이거라고?”
“뭐?”
다들 놀란 숨을 멈추었다. 여자들은 재빨리 외출 준비를 하면서 유명한 드레스 샵으로 달라가며 전화를 걸었다.
“최고로 예쁜 건 아무한테도 주지 마.”
“뭐? 벌서 예약을 했다고?”
“벌써 줘 버리면 어떻게 해~.”
남자들은 난감한 표정과 호기심에 어린 표정으로 함께 배달 된 가면을 바라보았다.
*****
집에 들어가자 재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건 뭐야?”
“이번 시크릿 파티 초대장이랑 가면이네. 어울린다. 우리 오빠는 뭐든 다 잘 어울린다니까?”
“나보고 여길 가라는 거야? 민영아..”
“혜주씨 부탁이기도 하지만 내 부탁이기도 해. 난 오빠가 최고로 멋진 모습으로 그 곳에 있었으면 좋겠어. 최고의 커플은 사진도 찍는대.”
재현이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심이야?”
“응~. 진심이지 그럼~. 나도 갈 거야.”
“나보고.. 다른 여자랑 이렇게 하고 놀라는 거야?”
“평생에 한 번.. 이렇게 놀고 싶지 않아? 그 동안 오빤 너무 금욕적이고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았잖아. 여성 회원들은 난리가 났을 거야.”
민영이 미소를 짓자 그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 가. 그 날은 너랑 단 둘이 보낼 거야.”
“못 해. 난 꼭 가야 한다고. 내가 진행 담당자란 말이야. 끝나고 여행가자. 내가 벌써 예약을 끝냈지롱~.”
그녀가 마카오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과 호텔 예약이 된 프린트를 그의 앞에서 흔들자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불안해. 아주 불안하다고. 왜 이래?”
“나랑 여행가기 싫어? 우리나라에서는 돌아다니긴 힘들잖아. 마카오에서 1박 2일만 보내고 다시 돌아와야 하지만
난 좋은데.”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야? 단지 나랑 여행을 가고 싶은 것 뿐이야?”
“그렇다니까?”
“하필 왜 컨셉이 웨딩이야?”
“오빠 턱시도 입은 모습 보고 싶어서. 진짜 멋질 것 같단 말이야. 개인 사진기 가져가야지~.”
“그래도 불안한데.. 다들 날 보고 반해도 책임 안 진다.”
“다른 여자들이 반해도 뭐.. 여긴 나만 있을 거잖아. 어차피 내 남자인데 다른 여자들은 침이나 흘리라고 하지?”
그녀가 그의 가슴을 검지로 콕콕 가볍게 찌르자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너도 드레스 입어?”
“진행자는 정장입어. 그리고 내가 회원들보다 예쁘면 되겠어?”
“아쉽다. 나도 너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 보고 싶은데.”
“나중에 보여줄게.”
“진짜지?”
“응.”
그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가기 싫은데..”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를 살짝 쓸었다. 민영이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여행 가방을 그의 차에 실었다.
“난 회사에 갔다가 가야 하니까 이따 봐요~.”
“응. 지겨운 시간이 끝나면 너랑 함께 여행가니까 견뎌 보지, 뭐.”
그가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자 그녀가 미소를 짓고 몸을 돌려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턱이 가볍게 떨렸다.
*****
“이사님. 고실장님은 안 오세요?”
“응. 몸이 안 좋대.”
“어머.. 많이 안 좋으세요?”
“응. 이따가 최고 커플 사진 촬영해 줄 기사 분 왔어? 확인해 봐.”
“네.”
유정이 종종 뛰어 가자 희진이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
웨딩드레스를 입고 눈 주변을 가린 화려한 가면을 쓴 여성들이 고급 차량에서 내려 걸음을 옮겼다. 턱시도를 입고
역시 눈 주변만 가린 화려한 가면을 쓴 남성들도 고급 차량에서 내려 걸음을 옮겼다. 파티장은 영국 귀족들의 파
티처럼 꾸며졌다.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마음에 드는 남성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이야기를 했다. 위에서 지켜
보고 있던 민영은 마치 영국 어느 미술관 한쪽 구석에 전시 되어 있는 명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
다. 입구가 열리며 재현이 들어왔다. 그를 알아본 여성 회원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
였다. 민영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는 눈으로 그녀를 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간
사람은 혜주였다.
“차재현 씨.”
“장혜주 양.”
두 사람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저 어때요?”
“아름다우십니다.”
혜주가 활짝 미소를 지었지만 재현의 시선은 민영을 찾고 있었다.
“누굴 찾으세요?”
“네.”
“누구요?”
“개인적인 질문에는 노코멘트 한다고 말씀 드렸는데요.”
혜주가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입술을 살짝 물었다. 진행자가 파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재벌들의 자제분들은 어려
서부터 사교춤을 배웠다. 가벼운 왈츠나 탱고 같은 춤 말이다. 여성은 안 쪽에 남성은 바깥 쪽에 서서 춤을 추고
여성이 오른쪽으로 돌아 다른 남성과 춤을 추는 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물론 춤을 추면서 가벼운 대화를 할 수 있
는 정도의 힘들지 않고 가벼운 춤이었다. 재현은 무리에 끼지 않고 한 쪽에 앉아 준비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춤 추지 않을래요?”
용기를 낸 한 여성이 재현의 앞에 서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춤을 못 춥니다.”
여성은 부끄러워하며 춤을 추는 곳으로 종종 걸어갔다.
“멋있어..”
희진이 그녀의 귓속에 들어간 이어폰으로 말했다.
<뒤쪽으로 내려와. 네가 등장해야 할 것 같아.>
“네..”
그녀는 몸을 돌려 뒤쪽으로 내려갔다.
*****
재현은 민영도 찾을 수 없어서 점점 견디기 어려웠다. 남은 와인을 입에 털어 넣으려고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
다. 그 때 문이 열리면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눈 주변을 가린 가면을 쓴 여자가 들어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여자에게 갔다.
“누구야?”
“어느 그룹 딸이야?”
“모르겠는데?”
여자가 안으로 들어가 고개를 돌려 재현을 바라보았다. 재현은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춤을 추시겠습니까?”
“좋죠.”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무대로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이 비켜 주었다. 두 사람은 왈츠의 자세를 잡고 춤을 추기 시
작했다.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영국 왕실에서 입는 옷인
듯 목에서 소매까지는 피부가 은은하게 비치는 소재였고, 목의 중반까지 올라온 부분이나 소매는 반짝이는 장식
이 들어갔다. 가슴부터 허리까지는 날씬한 그녀의 몸매가 돋보이도록 화려하지만 은은한 은빛 장식으로 탑이 완
성되었다. 허리 아래로는 풍성한 겹겹의 치마가 펼쳐졌고, 치마 끝단은 조명을 받으면 마치 별가루가 떨어지듯 반
짝였다. 살짝살짝 드러나는 그녀의 구두역시 완벽했다.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 어때요?”
“예뻐. 너무..”
“여기에서 오빠가 젤 멋있어요. 내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
그녀가 눈을 찡긋하며 속삭이듯 말하자 그가 고개를 조금 뒤로 젖히며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여성회원들은 재현
의 미소에 가슴이 설렜고,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여자를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품에 안겨 춤을 마친 민
영의 가슴은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남자들의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오자 여성 회원들도 마지못해 박수를 쳤다.
*****
민영과 재현은 웨딩촬영을 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다음은 마주 보고 한 컷 찍을게요.”
두 사람이 마주보았다. 민영이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 자기 쪽으로 당
겼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의 가면을 벗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녀가 눈을
감자 플래쉬가 터졌다.
*****
사람들 몰래 뒤로 빠져나간 민영이 재현의 차에 올라 있었다.
“잘 다녀 와.”
“고마워요, 언니.”
희진이 미소를 짓고 문을 닫았다. 그들이 탄 차가 멀어져갔다. 유정이 밖으로 나왔다.
“이사님~. 어떻게 해요? 여성 회원분들이 다 집에 가신대요.”
“가라고 해. 파티는 끝났으니까.”
“네?”
희진이 고개를 돌려 유정을 바라보았다.
“정리하자고.”
희진이 걸음을 옮기자 유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며 희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차를 타고 가면서 민영은 재현의 가슴에 안겼다. 재현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녀의 머리에 입술을 눌렀다.
“아름다운 나의 신부님. 신혼여행 가실까요?”
“네.. 서방님..”
그녀의 말에 그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민영은 눈물을 삼켰다.
*****
시간차이를 두고 재현과 민영은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서도 두 사람은 다른 곳에 앉았다. 3시간 정도의 비행
을 마치고 마카오에 도착했다. 여느 커플들처럼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산책하듯 마카오를 즐겼다. 사진도 많이 찍
었다. 특히 민영이 재현의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런 민영을 재현도 찍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호텔에 들어왔
다. 부끄럽지만 민영은 그와 욕실에 함께 들어갔다. 거품목욕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몸을 돌리고
그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굴을 붉히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뜨겁게 반응했다. 그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날 행복하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오빠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한 거야.”
그녀가 붉어진 얼굴을 들어 그의 턱에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그보다 먼저 일어난 그
녀는 시트 한 장을 살며시 걷어 몸에 두르고 잠자고 있는 그의 사진을 찍었다.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살짝 떴
다.
“도둑촬영이냐?”
그녀가 셔터를 계속 누르자 그가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간질이자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옆으로 쓰러졌다.
그가 카메라를 한 손으로 들고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을 찍자 민영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
의 볼에 입맞춤하는 사진도 찍고, 두 사람이 키스하는 모습도 찍었다. 하지만 이내 카메라는 내버려두고 그가 그
녀의 맨 살을 안아들자 그녀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
여행은 늘 그렇게 아쉽고도 빠르게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 각자의 집에서 짐을 풀었다. 민영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짐 정리를 하고 손가락에 끼운 반지를 바라보았다. 힘겹게 일어난 그녀가 욕실로 들어갔다.
****
샤워를 마치고 재현의 집을 찾은 민영은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피곤하지? 자자.”
“응.”
두 사람은 그의 침실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자 그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안았다.
“잘 자.”
“잘 자요.”
민영은 그의 옆에서 눈을 감았다. 피곤했는지 그가 새근새근 소리를 내자 그녀가 일어나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그를 위한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출근 안 해?”
“해야지~. 그런데 다들 파티 후라서 조금 늦게 가도 돼요.”
“나도 출근 늦게 할까?”
“불량 사장님이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치고 출근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와 여러 번의 입맞춤을 하고 그가 엘리베이터
안에 탔다. 그녀가 손을 들어 인사를 하자 그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문이 닫히자 그녀는 한 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출근을 하지 않은 민영은 엄마의 꽃집을 찾아갔다.
“얘기 들었어. 여행 간다고?”
“응. 엄마랑 같이 가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잘 다녀 와.”
“응.”
“짧게 끝내는 이유가 있어?”
민영이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피식 웃으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충분해. 충분히 느꼈어요.”
“어떤 사람이야?”
“평생.. 다른 여자한테 뺏기고 싶지 않은 남자? 하지만 내가 욕심낼 수 없는 남자.”
엄마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자 민영이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조심해서 잘 다녀 와.”
“응..”
엄마의 품에 안겨 민영이 훌쩍였다.
*****
정리하기 하루 전에 승주를 찾아갔다.
“짐은 벌써 옮겼어요. 오피스텔 정리 좀 해 주세요.”
민영이 열쇠랑 계약서를 승주에게 건넸다.
“영국으로 간다는 건 이야기 해?”
“음.. 아니요. 하루만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잖아요.”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오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여기가 밤인지, 낮인지 신경쓰지 말고.”
“형부밖에 없어요.”
민영이 미소를 짓자 승주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하나밖에 없는 처제가 이리도 마음을 쓰게 할 줄 몰랐지.”
“죄송합니다. 대신 흡족하실 만한 선물을 들고 오겠습니다.”
“오냐. 기대하마.”
승주가 환전된 봉투를 그녀에게 건넸다.
“형부..”
“그 안에 카드도 있어. 그러니까 아무데서나 자고 그러지 마. 싼데 말고 비싼데서 자라고. 안 그러면 가서 데리고 올 거야.”
“그럼 편히 사용하겠사옵니다.”
“그리 하거라.”
민영이 미소를 짓자 승주가 한 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이사장 실에 앉아 희진과 마지막으로 차를 마셨다.
“난리도 아니었다? 누구냐고, 항의전화가 막~. 꼴 좋더라? 명품 웨딩드레스 서로 먼저 입겠다고 싸우고.. 자기들
이 주인공인 줄 알았겠지. 하지만 재벌이든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든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땐 모두 주인공들인데
말이야.”
“죄송해요. 시끄럽게 해서.”
희진이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살짝 쳤다.
“사이다 마신 느낌이었어. 사진은 어떻게 할까?”
“나중에 제가 주소 보낼게요. 거기로 보내주세요.”
“그럴게. 조심해서 갔다 여기로 와.”
“네.”
희진과 인사를 하고 제은을 찾아갔다. 제은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밀로 재현선배랑 연애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떠난다고?”
“준성오빠한테 말하면 가만 안 둬.”
“어디로 갈 건데?”
“넌 금방 불 것 같아서 비밀. 다녀와서 이야기 해 줄게.”
“민영아..”
“행복했어. 정말로. 다음 생이 있다면 그 땐 비슷한 가정환경에 바로 옆집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 내가 마구 들이댈 수 있게.”
제은이 눈물을 흘리자 민영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건강해라.”
“금방 올 거지?”
“그래. 그러니까 그만 울어.”
“민영아~.”
제은이 그녀를 안고 울자 민영이 코를 찡긋하고는 훌쩍였다.
*****
그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엄마 꽃집에 들러 꽃을 사들고 들어갔다. 그리고 꽃꽂이를 해서 집안을 장식했다. 그가 들어오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님 만나고 왔어?”
“응. 향기 너무 세지 않아?”
“응. 딱 좋네. 씻고 올게.”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방으로 향하자 민영은 턱에 힘을 주고 심호흡을 했다.
샤워를 하고 나온 그와 저녁식사를 했다.
“힘들지 않았어? 저녁도 준비하고.”
“맛있어?”
“응. 맛있어. 내일도 먹게 해 주면 좋겠는데.”
민영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웃겨. 오빠가 매일 맛있는 거 먹게 해 준다며~. 뭐야. 잡은 고기다 이거야?”
“아니. 내가 해 줄게. 대신 아이들이 태어나면 아이들 밥은 네가 해 주면 좋겠어. 난 아이들은 엄마가 만들어 준 밥 먹게 하고 싶거든.”
“응.”
“아이는 몇 명이 좋아? 난 넷은 너무 한가 싶었는데 키울 만 한 가봐.”
“오빠가 키워? 낳으면 내가 키워야지. 언니 보니까 바짝 마르더라.”
“그래? 그럼 둘만.. 아니 셋만 키우자.”
“왜?”
“중간에 사고로 잃으면 한 명이 외롭잖아.”
민영이 숨을 멈추었다.
“난 둘이 남았어도 외로웠지만. 아니다. 모르겠다. 넷 낳자.”
붉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자.”
“울보.”
“피..”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자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쪽 뽀뽀를 했다. 그가 간지러운 듯 웃자 그녀도 미소를 지었다.
양치질을 하고 그의 침대에 누웠다.
“넷 낳으려면 지금부터 노력해도.. 몇 년이야? 난 8년은 임신하고 낳고를 반복해야하는 거야? 못 하겠어.”
“하면 한 다니까? 내가 열심히 노력할게.”
“됐거든~?”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를 그가 품에 안았다.
“오늘 너무 웃는다. 보기 좋은데 한편으론 불안해.”
“뭘 불안해하고 그래? 아직도 멀었는데. 내 생일 선물은 뭐 해 줄거야?”
“아직 멀었잖아.”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지. 아무거나 막 사 줄 거야?”
“안 쓰던 떼도 쓰고~?”
“나 백 사줘. 명품 백 갖고 싶어.”
“뭐?”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갖고 싶어?”
“아니. 그냥 해 본 거야.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서. 어떤 기분이길래 여자들은 남자친구나 남편에게 백 사 달라, 구두 사 달라 그럴까 싶어서. 필요도 없고만.”
“사 줄게. 백이든 구두든. 말만해. 다~ 사 줄게.”
“오빠, 진짜?”
그녀가 두 손을 모으고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이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래서 사주나? 애교부리는 거 보려고?”
“그러자고 500, 600씩 쓰는 건 바보라고 봐.”
“뭐든 좋은 걸 줄게. 필요하면 말 해.”
그녀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오빠면 돼.”
그가 그녀를 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래. 너만 있으면 돼.”
그녀가 떨리는 손을 내려 시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몸을 어루만졌다.
“지금.. 유혹하는 건가?”
“유혹하는 겁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응해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최고의 만족으로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쿡쿡 웃자 그가 그녀의 볼을 감싸듯 쥐고 진한 키스를 전했다.
*****
그가 잠에서 깨지 않았을 때 모든 준비를 마친 그녀가 그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누워있던 자리에 하얀 수국을 내려
놓고 몸을 돌려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그녀의 턱이 떨렸다. 1층에서 내린 그녀가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른 아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건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침 일찍 어디가세요?”
“네?”
고개를 든 민영의 눈가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가 살짝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여행이요. 그럼.”
그녀가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를 하고 눈물을 닦으며 걸음을 옮겼다. 건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잠에서 깬 재현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손끝에 꽃이 만져지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하얀 수국이 놓여 있었다. 그가 수국을 들어 코끝에 대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
*****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민영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목도리를 두른 채 조용히 훌쩍이고 있었다. 간간히 티슈로 눈물을 닦았다. 그녀의 발 앞에 검은 구두가 멈추어 섰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오.. 오빠..”
재현이 완벽한 수트 차림으로 뒷짐을 지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행가면 간다고.. 말 하고 가야지.”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물어 흐느낌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게 했다.
“잘 다녀 와. 여행가서 다른 남자 만나도 돼. 하지만 딱 저녁 7시까지만 만나. 그 사람 집에도 가지 말고, 네가 묵는 호텔로 오지 못하게 해. 쪼끄매서 누가 엎어 가면 어쩌려고.”
그가 주머니에서 호루라기를 꺼내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다시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와. 내 옆자린 네가 올 때까지 더 따뜻하게, 예쁘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
민영의 턱이 떨리더니 그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냈
다. 그가 상자를 열자 예물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자신의 반지를 끼고 그녀의 반지를 꺼내 그녀의 손가락
에 끼워주었다.
“진짜 비싼 반지야. 다른 남자가 다가오면 보여줘. 내 남자친구는 어마어마한 부자라고. 그리고 이건..”
그가 자신의 시계를 풀어 그녀의 왼쪽 손목에 채워주었다.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내 생각 하라는 부적. 그리고 네가 내 옆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 시간은 멈춰져 있을 거라는 의미. 뭐.. 부담가지라고 하는 말이니까 새겨듣고.”
그가 손을 들어 울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건강하게, 즐겁게.. 좋은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 많이 먹고.. 여행 잘 하고 와라, 고민영. 그리고 돌아오면.. 또 연애하자, 고마담.”
그녀는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응. 응..”
그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
그녀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던 재현이 몸을 돌려 차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도 민영은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행복하겠어요. 그런 남자친구를 둬서.”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말씀하시자 민영은 대답은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다.
******
민영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꽃집으로 들어간 재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머님.”
민영의 엄마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인사 잘 했어요?”
“네. 썬글라스도 쓰고, 목도리도 어찌나 칭칭 감았는지.. 얼굴은 제대로 못 봤지만 잘 다녀오라고 인사 했습니다.”
민영의 엄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꽃다발을 완성했다.
“회사로 가요?”
“네.”
“그럼 가지고 가요. 기분 전환이 좀 될 거예요.”
“고맙습니다.”
“또 와요.”
“네. 오늘도 수고하세요.”
“재현군도 수고해요.”
재현이 나가자 민영의 엄마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숨을 내쉬었다.
****
며칠 전, 출근을 하지 않은 민영은 엄마의 꽃집을 찾아왔을 때였다.
“얘기 들었어. 여행 간다고?”
“응. 엄마랑 같이 가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잘 다녀 와.”
“응.”
“짧게 끝내는 이유가 있어?”
민영이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피식 웃으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충분해. 충분히 느꼈어요.”
“어떤 사람이야?”
“평생.. 다른 여자한테 뺏기고 싶지 않은 남자? 하지만 내가 욕심낼 수 없는 남자.”
엄마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자 민영이 주륵 눈물을 흘렸다.
“조심해서 잘 다녀 와.”
“응..”
엄마의 품에 안겨 민영이 훌쩍였다. 그렇게 민영을 보내고 민영의 엄마 고정혜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영아, 나야.”
<어머. 정혜야. 어쩐 일이야?>
지영이 반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정혜가 주먹을 꼭 쥐고 마른 침을 삼켰다.
“한규오빠.. 전화번호 좀. 알려주라.”
정혜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
잠시 후에 정혜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내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혜야. 무슨 일 있어?>
“오빠..”
<응, 말해.>
정혜의 눈에 눈물이 고였고, 그녀의 몸은 가볍게 떨렸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돈.. 줘요. 우리 아이들에게 주려고 했던 돈. 주세요.”
<정혜야...>
“필요해졌어. 오빠도 아이들에게 책임을 지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도와주면 좋겠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래서 염치없지만..”
<내가 한국으로 들어갈게.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있어.>
전화를 끊은 정혜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
정혜가 재현을 불렀다.
“말씀하세요, 어머님.”
“우리 민영이가..”
“네.”
“12월 31일 오전에 영국으로 떠나요.”
재현이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정혜를 바라보았다.
“막을 겁니다.”
“나는.. 보내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저는 민영이와 헤어지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6개월이 지나면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맞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연애만 할 거예요?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내 딸이 아무리 재현군을 좋아해도 그렇게 사는 거.. 싫어요.”
“하지만 민영이가 없으면.. 제가 안 돼요. 제가.. 살 수가 없어서..”
“나를 믿고 민영이를 기다려주면 안 되겠어요?”
“어머님..”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기다려주지 않을 거예요? 다른 여자랑 결혼 할 생각이라면..”
“아닙니다. 민영이 말고는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고마워요.”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는 정혜를 바라보며 재현이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
영국에 도착한 민영은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내셔널 갤러리를 갔다. 건물 자체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안
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가슴이 벅차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보티첼리, 베첼리오, 틴토레토, 루벤스.. 거장들의
명작들을 바라보는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책으로만 보던 그림을 실물 크기로 보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
다. 그 후로 며칠 동안 그녀는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외출 준비를 해서 런던 곳곳을 누비며 관람을 했다.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는 넬슨의 초상화 옆에 걸린 한 미모의 여성 초상화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조지 롬니가
그린 엠마 해밀턴의 초상화였다.
“미인이네.. 부럽다..”
하지만 해설을 읽어보니 넬슨의 부인이 아닌 넬슨의 애인이었다. 18세기판 세기의 로맨스라고 불리는 이야기를 읽으며 그녀는 다시 그녀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역시 미인은 괴로워.. 인가?”
코톨드 갤러리에서는 관람객이 많지 않아 조금 여유롭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어도 좋았다. 그녀는 미켈란젤로, 윌리엄 터너, 고갱, 고흐의 그림도 좋았지만 모네의 <꽃병> 앞에
서는 한동안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서서 그림을 바라보았다. 테이튼 브리튼에서 드디어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
린 <오필리아> 그림을 보고는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강물과 꽃의 치밀한 묘사가 감동을 전해주죠. 실제로 밀레이는 하루에 열 시간씩 햄릿에 등장하는 꽃을 스케치했다고 해요. 자연 그대로를 그리려는 치밀함. 그게 커다란 감동을 주는 게 아닌가 싶어요.”
민영이 고개를 돌려 그림을 바라보며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윤진후라고 합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가볍게 그의 손을 잡았다.
“아.. 도슨트(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세요?”
“아니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아..”
그녀가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려고 하자 그가 조금 힘주어 잡았다가 놓았다. 그녀는 손을 옷으로 닦고 싶은 충동을 참으려고 주먹을 쥐었다.
“요즘 뜨는 화가로 J. Hoo 라는 작가를 아시는지?”
“아~. 네.”
“그림이 별로죠? 어딘가 조잡하고..”
“글쎄요.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서 그 분의 작품을 좋아하는데요. 아는 분의 추천으로 몇 점 구매도 했고요. 다른 분에게 선물로 드린 적도 있어요.”
“그림에 투자를 하시는 걸 보니.. 혹시 재벌 2세?”
그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동행이 있나요?”
그녀가 대답대신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제 작업실을 보여드리면 어떨까 싶어서요.”
“고마운 제의이긴 한데요. 사양할게요. 그럼.”
그녀가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를 하고 다른 그림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저의 어머니가 함께 오셨는데 영국을 별로 안 좋아하셔서요. 우리나라 분을 만나시면 우울함이 사라지실 것 같은데..”
“저는 별로..”
“어머니.”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부르자 민영은 답답함이 찾아왔다.
“제가 이곳에서 우리나라 분을 만났어요. 소개시켜 드릴게요.”
민영은 할 수 없이 예의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윤 여사님..”
“이런 데서 만나다니.. 반갑네. 난 영국이 싫어요. 괜히 우울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니까? 고실장은 안 그래요?”
민영이 반가움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영국엔 어쩐 일이세요?”
“아들이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기도 하고 예술가랍시고 나쁜 짓은 안 하나 불쑥 찾아오기도 해요. 고실장은 어쩐 일이에요?”
“그냥.. 여행 왔어요.”
윤 여사가 그녀를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보았다.
*****
저녁 식사는 진후의 집에서 하게 되었다. 그가 J. Hoo 라는 것을 안 민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칭찬 고마웠어요.”
진후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윙크를 하자 그녀는 윤 여사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네가 아무리 추파를 보내도 고실장은 꿈쩍도 하지 않을 거니까 그만 해. 보고 있는 엄마가 민망하구나.”
“왜요? 설마.. 결혼했어요?”
“안 했어요.”
“그럼 애인이 있어요?”
“네.”
“아하~. 안타깝네요. 민영씨가 딱 제 스타일인데.”
“네가 스타일이라는 게 어딨어? 지난 번 이 집에서 만난 여자는 고실장과 전혀 다르던데.”
윤 여사가 눈을 흘기며 말하자 진후가 배시시 웃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민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치고 진후는 작업실에 들어가고 민영은 윤 여사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실은 고실장한테 할 말이 있어서 만나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민영이 윤 여사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차재현 사장이랑 헤어졌어요?”
민영이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멈추었다.
‘벌써.. 소문이 난거야?’
사색이 되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윤 여사가 말했다.
“난 고실장을 현명하고 당찬 여성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는 형편이 다르다는 건 사랑만으로 극복하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게 참 현실적이구나 생각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우리 때 보다 감정표현이 자유롭잖아요. 그래서
저러다가 변할 수도 있겠지.. 싶었어요.”
민영이 고개를 숙이고 찻잔을 손가락으로 조금 어루만졌다.
“내가 누군지 어머니께 듣지 못했나봐요. 난 처음 봤을 때 알아봤는데.”
“네?”
“고실장 어머니는 내 고등학교 친구예요.”
민영이 놀란 표정으로 윤 여사를 바라보았다.
“우리 오빠가 민영 양의 아버지예요.”
민영은 손에 쥐고 있는 찻잔이 흔들리자 차를 쏟을 것 같아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오빠가 정혜를 많이 사랑했는데.. 아까 말했듯이 사랑만으로 상황이 극복되지 않았어요. 정혜의 처음 남자
는 윤진 양이 있었지만 책임감도 없고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정혜를 오빠가 보
듬어 주려고 했지만 돌아가신 할머니와 어머니가 결사 반대를 하셔서 두 사람은 헤어질 수 밖에 없었어요. 민영
양이 태어난 사실도 모르고 오빠는 할머니와 부모님이 정해주신 사람과 결혼을 했어요. 나중에 민영 양이 태어났
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지만 정혜가 거절해서.. 뭐.. 우리들의 이야기는 그랬어요. 처음으로 민영양을 만났을
때 정혜가 참 잘 키웠다고 생각했어요. 착하고 바르게.. 윤진 양이 좋은 댁으로 시집가는 것을 보고 다행이다 싶었
는데 민영양이 힘들어 하는 걸 보고는 어찌 해야 하나.. 그러던 차에 정혜가 나한테 전화를 했어요. 그렇게 모질게
연락을 끊은 정혜가 민영 양을 위해서.”
민영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오빠와 새언니 사이에서는 아이가 없어요. 우리는 몸이 약한 새언니가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할머니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 언니는 우리 오빠와 이혼하고 다른 사람이랑 다시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어요. 오빠는 새 언니랑 아
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러니.. 잘못을 미워하되 정혜를 사랑했던 오빠의 마음까지는 미워하지 않았
으면 해요. 지금의 민영양이라면 조금은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쉽지 않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
유는. 오빠가 여기로 오고 있어요. 민영양을 도와주기 위해서.”
“저는.. 도움받기를 원하지 않아요..”
울음으로 목소리가 흔들리는 민영의 손을 윤 여사가 잡았다.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차재현 사장이랑 이렇게 헤어지지 말아요. 정혜랑 우리 오빠처럼 30 여년을 힘들게 보내
지 말고. 물론 차재현 사장은 몰라도 조 여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 집으로 시집가는 건 반대하고 싶지만. 사랑한
다면 잡아요. 기회가 있을 때. 그게 현명한 여자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현관문이 열리고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5살 이었을 때 대문을 열고 들어오던 남자가 오버랩 되었다. 그가 사뭇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민영을 바라보자 민영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바.. 반가워요..”
민영이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다가와 그가 손을 내밀었다.
“윤 한규라고 해요.”
시선을 조금 든 그녀의 눈에 가볍게 떨리는 그의 손이 보였다. 민영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녀가 여러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울
먹이며 말했다.
“고민영입니다.”
그가 눈가를 붉히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
서은준범입니당~~. ^^
어찌하다보니 내일 결말이네요.
보너스로 고마담의 언니 윤진과 승주 쌤의 이야기도 짧게 올릴거예요.
요즘 이상하게 글이 안 써지네요. 앞 부분만 써 놓은 것만 수두룩이고..
그래도 노력중이니까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오늘도 춥더라고요. 어딘가는 비가 온다고도 하고.. 따뜻하고 건강하게 오늘 하루도 힘 내세요.
늘 그렇듯.. 애정합니다~~. ^^
첫댓글 헉! 출생의 비밀...울 고마담 예쁜사랑할수 있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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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가는줄 모르고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다음편이 너무 기대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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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중에 일은 안하고 너무 열심히 봤네요 살짝 쿵 눈물도 찍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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힝힝ㅠ오늘도잘보고가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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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결말이라니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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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담을 응원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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