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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오선사 유트브로 보기 https://youtu.be/r0lcML1Y784
운문록 상권 상당 대기 29. 무엇이 조계의 정통한 뜻입니까?
[상당하여 말씀하시기를, "제석천(帝釋天)과 석가(釋迦) 부처님이 뜰 안에서 서로 부처니 법(法)이니 하며 시끄럽게 다투는구나" 하더니 법좌(法座)에서 내려왔다.] 오늘의 상당법문은 바로 향상일구(向上一句)를 든지신다. 이 말의 근본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상당법문은 운문선사의 법신의 세계를 나투는 것일 것이다.
그럼 시공(時空)을 벗어난 지금 여기일 것인데 왜 “제석천(帝釋天)과 석가(釋迦) 부처님이 뜰 안에서 서로 부처니 법(法)이니 하며 시끄럽게 다투는구나”라고 하시는 것은 비유법이다. 지금 여기 법석 앞에는 운문선사의 법어를 들어려 사부대중이 다 운집하여 법석을 향하여 옹립하고 있을 것인데 왜 하필이면 범천의 33천의 중심에 있는 “제석천(帝釋天)과 석가(釋迦) 부처님이” 등장을 할까?
지금 여기의 상으로 본다면 사부대중이 모여있다. 그러나 이 상은 오직 운문선사의 마음의 심법계가 나투이는 상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이 사부대중이 바로 마음에서 일으나는 많은 만상은 오직 운문선사의 마음에서 나투이는 상이라는 것이다.
그의 상의 진실여상한 진여(眞如)는 그렇게 보이고 비추일 뿐 그 상은 상이 아니라 운문선사의 마음에서 나투이는 사부 사부대중이 그대로 제석천과 석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지금 여기서 사부대중이 법이 어떻고 하면서 시끄럽게 다투이는 그 형상은 불계에서 불보살들이 나누이는 제석천이나 석존 부처님과 사실 그 마음에서 본다면 같은 마음이고 그 같은 마음에서 나투이는 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이법문이요, 대대법(對對法)이며 상대성 법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밝힌 안목(眼目)에서 본다면 모든 상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안목으로 바라본다면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若見) 제상비상(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하였듯이 무릇 모든 제상은 이것이 모두 허망함이니 만약에 바른 안목으로 본다면 모든 상이 상이 아니게 본다면 그 즉시에 여래를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으로 집합한 사부대중이나 부처나 불보살의 상이 다르지 않으며 모든 상은 다 불성으로 바라본다면 다 부처님이며 보살로 본다면 다 보살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부대중으로 본다면 사부대중이요 축생으로 본다면 다 축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마음이 화현하는 것이지 진실여상한 제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상은 다 자기 마음의 화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운문선사는 자기 마음을 나투이고는 법문을 마치고 내려올려고 하신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 때 한 스님이 나와 앞을 가로 막으며 앞에 끊어 않자서 절을 하며 이렇게 묻습니다.
["무엇이 조계의 정통한 뜻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이 한 스님이 물은 것은 조계종의 종통(宗統)을 물었을 것이라 사료되지만 조계는 육조 혜능선사가 주석한 곳에 조계산이라는 것에 비유하여 조계의 혈통이라고했습니다. 선불교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며 격외도리(格外道理)인 것입니다. 석가모니불의 말씀을 경전이라하여 이 경전을 중심으로 내려온 불교를 현교(顯敎)라하고 석존의 마음법을 전하여 내려온 것은 밀교(密敎)라 하며 서천의 28대 조사와 동양에 심법을 전한 달마대사를 동토의 종조로 삼아 내려 온 것을 처음에는 여래선(如來禪) 능가선(楞伽禪)이라 하였지만 육조 혜능선사 때부터는 사실 조계산을 주축으로 이루어 졌음으로 조계종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한 선법이 바로 조사선(祖師禪)인 것입니다. 조사선의 3대 근본 종지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불입문자(不立文字) 심행처멸(心行處滅)을 종지로 삼습니다.
그런데 운문선사는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나는 성내기를 좋아하지 기뻐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을 하실까요? 선사는 모든 것을 달통한 선지식인데 어찌 삼독심이 성내기를 좋아하지 기뻐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하실까요? 그것은 가르치고 꾸짓고 방편을 제시하는 일은 사부대중이 물으오는 모든 잘못된 전도몽상(轉倒夢想)을 다 부정해 버리기 때문에 친찬과 기쁨은 할 틈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내는 것과 기쁘하는 것이 상대성원리이며 대대법이며 양변인 것입니다. 그러니 순류와 역순으로 본다면 성내는 것과 기쁘하는 것은 다 같은 형상에 불과 한 것이며 다 허망한 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역순으로 말씀을 하였다고 간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스님은 이 말이 양변이라는 것을 회광반조(廻光返照)하지않고 말에 집착하여 이렇게 묻습니다.
["왜 그렇습니까?"]라고 말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 운문선사는 이렇게 비유법을 쎴어 그 답을 가름합니다.
["길에서 검객(劍客)을 만나면 칼을 뽑아야 하고, 시인(詩人)이 아니면 시(詩)를 바치지 않는 법이다."]이라고하십니다.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검은 상이 드러나는 것이니 서로의 검술을 확인하기 위하여 서로 겨누우 검법을 주고 받지만 시인은 시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해 주어야 모르는 것이니 아에 시를 받치지를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스님은 아주 말귀를 알아 듣지도 못한고 자기적 견처도 없으니 또 이렇게 묻습니다.
["두 부처님이 만나서는 무슨 이야기를 나눕니까?"]라고 물었다. 즉 부처님과 부처님이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나눕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이 물을 말이 있습니까? 무애자재하신 부처님이 무엇에 걸리고 막히여 묻고 답하겠습니까? 이 불지에서는 그대로 열반의 경지이니 그 어떤 행도 말도 법도 없습니다. 그래서 운문선사는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결단(決斷)하지 않음이 도(道)이다."]라고 하시어 무위진인(無位眞人)은 결단할 일이 없다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가 다 도이다라고 하십니다. 돌~~!!!!!!!!!!! 그런데도 도져해 안목이 전혀 없는 스님이다.
또 이렇게 묻습니다.
["인간(人間)과 천상(天上)이 서로 만나 사귄다 하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한 스님이 묻고 있는 것은 인간계에는 걸림이 있고 천상계에는 걸림이 없다는 차별심으로 묻고 있다.
천상이나 인간계나 서로 회통하고 보면 다 같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문선사는 이렇게 말후구를 날립니다.
["대중 앞에서 기미를 들키는구나."] 사부대중들 앞에서 선기방편의 기미를 들키는 구나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그런 선기방편으로는 바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선문답을 될수 없음을 발히며 내 쫏아 버립니다. 돌~~!!!!!!!!!!!
오늘은 선수행이 왜 필요하지에 대하여 근대조선의 선지식인 경허스님의 수행론에 대하여 조계종 교육아사리인 문광 스님의 법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홀로 술이 깨어있었던 ‘독성(獨醒)’
20세기 한국선(韓國禪)의 중흥조는 경허 성우(鏡虛 惺牛, 1849~1912)선사이다. 경허가 있었기에 전국의 선원(禪院)들은 오늘날과 같이 문을 열고 유지할 수 있었으며, 간화선의 가풍이 굳건하게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선사에 대한 평가는 이견이 많으나 그의 선시(禪詩) 가운데 가장 경허다운 구절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 구절이 아닐까 한다. “거세혼연아독성(擧世渾然我獨醒)하니 불여임하도잔년(不如林下度殘年)이로다.” 해석하면 “온 세상이 혼미한데 나 홀로 깨어있으니 수풀 아래에서 남은 생을 보내는 것만 같지 못하네”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으니 바로 ‘독성(獨醒)’이라는 두 글자이다. ‘홀로 술이 깨어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법명인 ‘성우(惺牛)’의 ‘성성할 성(惺)’이 아니라 ‘술 깰 성(醒)’을 썼다. 세간에서는 음주라는 무애행을 두고 왈가왈부했지만 정작 경허 자신은 반대로 온 세상이 취해있고 오직 자신만이 술이 깨어있어서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서 여생을 은거해서 살겠다고 읊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경허는 백두산 아래의 함경도 삼수갑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고 경술국치 직후인 1912년에 입적한다.
취(醉)와 성(醒), 광(狂)과 각(覺)의 이중주
1895년 일본의 일련종 승려의 건의로 스님의 도성 출입이 허용되자 종교 침략술의 일환인 줄 모르고 환호하며 천황 송수를 기원하는 당시 스님들의 행태에 대해 경허는 “나에게 서원이 있으니 발이 경성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吾有誓願, 足不踏京城之地)”라는 사자후로 경책을 한다. 실제로 그는 다시는 서울 땅을 밟지 않고 북행(北行)을 실행했으니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신념대로 살다간 인물이었다.
온 세상이 취해있고 자신만이 깨어있다는 말은 마치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의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에서처럼 모든 사람에게 미치광이 소리를 듣는 이가 사실은 홀로 각성한 인물이었던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실제로 그는 “평생의작취광승(平生宜作醉狂僧)”이라는 시를 남겨 “평생을 취하고 미친 승려로 살아야 마땅하다”라며 세상을 비웃고 있었다. 이처럼 경허는 취(醉)와 성(醒), 광(狂)과 각(覺)의 이중주를 온몸으로 보여주면서 말법시대에 망해가는 나라를 살아가는 고독한 각자(覺者)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삶 자체가 온통 알듯 모를 듯한 화두인 셈이다.
간화선법의 알파와 오메가 ‘경허집’을 다시 보자
경허가 어떤 수행을 했으며 어떻게 참선을 지도했는지는 그의 문집인 <경허집>에 상세히 드러나 있다. 그 속에 근·현대 한국 간화선법의 알파와 오메가가 모두 내장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을 쓰며 다시금 <경허집>을 일람하며 느낀 것은 20세기 최고의 선사는 단연코 경허였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일말의 명예욕이나 체면치레가 보이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는 여실히 깨쳤으며 자신을 철저하게 검증했고 보림 이후에는 걸림 없는 대자유인으로 막힘없이 살았다. 그러면서도 세간의 비판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면서 껍데기만 보는 안목에 대해서는 뒤에서 홀로 빙그레 웃으며 관조할 뿐이었다.
문장을 보면 당송팔대가에 못지않다고 했던 통도사 극락암의 명정스님의 말씀이 지당할 정도로 근·현대 선사 가운데 최고의 명문장이었다. 거침없이 선어(禪語)를 뽑아내는 호연(浩然)한 문장력 속에는 천지를 뒤집어엎는 선지(禪旨)의 쾌활자재(快活自在)함이 장착되어 있다. 가히 원효(元曉), 진묵(震)과 함께 한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활달한 무애도인(無道人)이었다고 할 만하다.
“이 법문을 가끔 보고 읽고 남에게 일러주면 팔만대장경을 본 공덕과 같고 그대로 공부하면 일생에 성불할 것”이라고 했던 <중노릇하는 법>과 “이 노래를 깊이 믿어 책상 위에 펴 놓고 시시때때 경책하라”고 강조했던 <참선곡>을 보면 화두 참선법의 골수가 모두 담겨 있다. 오직 화두를 간절히 의심하라는 경책과 함께 역대조사의 진수를 가사체의 한글 노래 안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다.
이와 함께 1899년 해인사 정혜결사의 맹주로 초빙되어 지은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社文)>은 경허 선사상의 골수를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참선지침서이므로 참선 수행자는 누구나 심독(心讀)해야 할 문장이다.
<경허집>은 최고의 선시(禪詩)를 담은 선어록이자 최상의 간화선 수행의 교과서이다. 묵혀둔 <경허집>을 다시 꺼내 읽으며 자자입선(字字入禪)의 자리에서 경허의 진면목을 다시 만나면 참선 수행의 요체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원돈문이 아닌 경절문으로!
경허가 한국 근·현대 선불교를 중흥할 수 있었던 것은 교(敎)와 선(禪)을 완벽하게 관통한 데에 기인한다.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갑자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는 대강백이었던 자신을 돌아보고 생사 해탈을 위한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결심한다. 스승도 없이 공안집을 독파하고 막힌 공안을 찾아 스스로 결택한다. “불법(佛法)의 대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영운(靈雲)선사가 답한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왔도다(驪事未去 馬事到來)”라는 향상구 화두를 간택하여 의심 삼매에 들어 목숨을 건 수행을 거쳐 ‘콧구멍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듣고 확철대오한다. “야인(野人)이 무사태평가(無事太平歌)를 부른다”는 그의 멋들어진 오도송에서 20세기 한국불교는 새롭게 태어났다.
경허의 화두 참선법의 핵심은 제자 만공과의 법거량에서 그 전모가 드러난다. 만법귀일(萬法
歸一) 화두를 타파하고 오도송을 읊은 만공을 본 경허는 “불 속에서 연꽃이 피었구나(火中生蓮)”라고 하며 기뻐한 뒤 다시 점검한다. “토시와 부채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해야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해야 옳으냐?”라는 질문에 만공이 “토시를 부채라고 해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해도 옳습니다”라고 하니 경허는 다비문에 나오는 “눈 있는 돌사람이 눈물을 흘린다(有眼石人涕下淚)”는 구절이 무슨 뜻인지 묻는다. 만공이 답을 못하자 경허는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를 주며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지으라”는 가르침을 준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만공은 이미 한 차례 견처가 있었고 8부의 눈이 열린 상태였다. 하지만 원돈문이 아닌 경절문을 지으라는 경허의 이 가르침이야말로 간화선의 요체인 것이다. 원돈문은 화엄학에서 말하는 법신(法身)의 경지로 선(禪)에서는 ‘법신변사(法身邊事)’라고도 한다.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부처 아님이 없고 진리 아님이 없다는 불이(不二)와 공(空)의 경지를 터득한 것을 말한다. 최근에도 이러한 경지를 경험하고 공부가 끝났다고 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경허는 냉철하게 만공을 다그친다. 향상구(向上句)의 세계가 다시 있으니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 근본지(根本智)를 넘어선 차별삼매(差別三昧)의 세계로 곧장 들어가라는 것이 바로 ‘경절문(徑截門)을 지으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더 깊은 선정의 세계로 곧장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팔만대장경을 모두 외워도 불가한 경지로 오직 화두를 들고 깊고 깊은 의심 삼매에서 투과(透過)해야 하는 최상승선의 세계인 것이다. 만공은 다시 각고의 노력으로 재참하여 화두를 타파하고 경허의 인가를 받기에 이른다. 이 대목이 바로 경허의 선수행론의 요체이자 화두 참선의 지침이 되는 핵심 포인트인 것이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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