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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끝나면 학교 근처에 있는 영어학원에 가야 한다. 영어학원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온다. 집에 오면 오후 4시 가까이 된다. 마트에 일하러 간 엄마는 5시 반에 집에 온다.
소은이는 영어학원 말고 연기학원에 보내달라고 했지만, 엄마는 돈이 없는 건지 비전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수강료 비싼 연기학원을 무척 탐탁지 않아 했다. 할 수 없이 소은이는 거울을 보면서 혼자 스스로 연기 연습을 한다. 엄마 오기 전 잠깐씩 짬을 내서.
초등학교 4학년 소은이는 자신의 몸에 연예인의 기질이 흐른다고 항상 생각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누가 자기를 캐스팅해서 아역을 맡긴다면 자신은 예전의 김유정, 김소현 만큼 멋들어지게 연기를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소은이는 엄마와 드라마 보다가 그 드라마에 나온 한 아역의 연기를 비판하면서 저런 연기는 이렇게 하는 거라며 엄마에게 자신의 연기로 직접 그 연기를 보여주었다. 엄마는 입을 쩝쩝거리며 말했다.
“연기는 꿈도 꾸지 마!”
연기지망생 소은이가 요즘 가장 즐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매주 수요일 오후 4시에서 5시까지 케이블 TV 채널 43번에서 방영해 주는 미국드라마, 이른바 미드다. 제목은 [해결사가족]. 요즘 소은이는 그 드라마에 푹 빠져 있는 중이다.
[해결사가족]은 미국의 어느 전원 마을에 살고 있는 가족 이야기인데,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네 남매로 이루어진 가족이 그 마을에서 벌어지는 도난사건 등 여러 종류의 범죄, 그 밖에 마을사람들과의 갈등을 한 주에 한 건씩 솔로몬처럼 해결해 주는 내용의 드라마다.
소은이는 해결사 가족 중 제일 막내로 나오는 아이를 가장 좋아한다. 자신과 나이가 같기도 했지만, 생각과 행동도 비슷했고, 자신과 뭔가 통하는 데가 있는 아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뭣보다 연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잘 한다. 소은이가 많이 닮고 싶은 아이다.
그 아이의 극중 이름은 레이첼이고, 실제 그 아역배우의 이름도 레이첼 데이비스였다. 드라마 끝날 때 자막으로 보여주는 등장인물의 이름과 그 옆에 나란히 붙은 배우 이름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드라마의 레이첼은 해결사가족 중 막내인데,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게 취미다. 쿠키와 오믈렛, 닭수프를 잘 만들고 생과일로 주스 만들기도 일품이었다.
오늘도 레이첼은 가족을 위해 간식을 준비한다. 손수 만든 삶은 콩에 소스를 뿌려 가족들에게 한 접시씩 나눠주는 레이첼의 작은 손이 무척이나 야무지다고 소은이는 생각했다. 레이첼은 음식솜씨 뿐 아니라 말하는 것도 너무 야무지고 귀엽다. 비록 성우의 목소리가 더빙되어 들리는 말이었지만, 소은이는 더빙된 성우목소리 속에서 레이첼 본래의 목소리를 캐낼 줄 아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어, 언제나 레이첼의 목소리를 그대로 자신의 귀가 듣는 거라고 여겨졌다.
“난 우리 같은 조그만 아이들도 참정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어른들은 키가 크기 때문에 세상을 낮은 눈으로 보기 어렵거든. 조그만 아이들인 우리 편이 돼 줄 정치가가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거 아니겠어?”
레이첼이 동네 아이들 앞에서 부르짖는 외침에 소은이 가슴은 뿌듯하고 든든해지곤 했다. 레이첼은 자신의 오빠에게 이런 말도 했다.
“오빠, 우주에 있는 블랙홀처럼 지구의 넓은 바다 어딘가에도 그런 게 있는 것 같다는 생각 안 들어? 가끔가다 배나 비행기가 실종됐다는 얘기 들리잖아. 바다에 있는 블랙홀이 배와 비행기를 먹어버린 거라구.”
생각이 독특한 레이첼은 자신과 마인드와 기질이 비슷해서 만일 레이첼을 실제로 만난다면 그 애와 자신은 말이 아주 잘 통할 거라고 소은이는 그렇게 믿었다.
[해결사가족]의 열혈시청자 소은이는 어느 날 드라마를 보면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이 TV 속이 아닌 정말 자신의 곁에서 실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소은이가 드라마에 너무 몰입해서 보기 때문에 문득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지 싶었다. 혹은 소은이네 TV가 UHD의 초고해상도 화질을 제공하는 품질 좋은 제품에다 화면 크기도 48인치로 실감나게 아주 컸기 때문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드라마에 몰입을 하고 아무리 TV가 그렇게 스펙이 높은 좋은 제품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TV를 통해 방영되는 드라마라는 한계는 있게 마련인 것일 터인데.
어느 날 소은이는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경우를 만나게 되었다. 드라마 속에서 해결사가족들이 아침식사가 끝나고 집 거실에 모여앉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후 제각기 직장이나 학교에 가기 위해 하나 둘 거실을 나가고 맨 끝에 레이첼만 남게 되었다. 레이첼은 가족들이 탁자 위에 놓고 간 찻잔들을 챙기다가 문득 고개 들어 이쪽을 바라보는데, 순간 소은이는 흠칫 놀랐다. 레이첼이 꼭 실제로 소은이 자신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레이첼은 그저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응시했을 것이고 연출자는 무슨 이유가 있어서 레이첼에게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출자가 그렇게 지시한 이유는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소은이로서는 레이첼의 그런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TV속의 레이첼은 잔들을 모아 커다란 둥근 접시에 담아 주방으로 가지고 갔다. 수돗물을 틀고 컵들을 닦던 레이첼은 순간 다시 고개를 돌려 카메라 쪽을 쳐다보았다. 소은이는 다시 흠칫했다. 소은이의 놀란 얼굴이 재미있는 듯 레이첼은 슬쩍 미소를 짓고는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 컵들을 닦기 시작했다. 드라마는 장면이 바뀌어 레이첼의 오빠 패트릭의 고등학교로 옮겨갔다.
레이첼은 정말 자신을 본 것일까. 잔을 닦다가 왜 갑자기 뒤를 돌아봤을까. 그게 드라마상에서 무슨 의미였을까.
소은이와 같은 반에 미나라는 아이가 있다. 소은이는 반에서 미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데, 그건 미나 역시 [해결사가족]을 즐겨보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해결사가족]을 시청하는 아이는 소은이와 미나 말고는 더 이상 없는 것 같다. 그 재미있는 드라마를 안 보고 대체 뭣들 하는 건지 소은이는 다른 아이들이 이해가 안 됐다.
[해결사가족]을 보고 난 다음 날 늘 그랬듯이, 학교에 온 소은이는 미나 자리부터 찾았다.
“어제 봤어?”
“봤지.”
“레이첼 친구 리나라는 아이 말야, 걔 너무 얄밉지 않아?”
“난 리나 좋은데. 나하고 이름이 비슷해서.”
“리나 친구 낸시도 좀 덜떨어진 아이 같아.”
“난 낸시도 좋아. 우리엄마가 그 애 보더니 나하고 닮았다고 했어.”
소은이와 미나는 목요일에 학교에서 오면 틈만 나면 붙어 앉아 어제 보았던 “해결사가족”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어제 나 좀 이상한 거 느꼈어.”
소은이는 정색을 하고 미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뭔데?”
“어제 해결사가족네 집 거실에서 가족들이 차를 마시고 다들 나간 후 레이첼 혼자만 남았었잖아.”
“어!”
“레이첼이 가족들이 탁자에 놓고 간 찻잔을 챙기면서 문득 카메라는 왜 봤을까?”
“카메라를 보다니?”
“주방에서 찻잔을 씻다가 뒤돌아서 또 카메라를 봤어. 그러니까 시청자인 우리 쪽을 본 거겠지.”
미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소은이를 쳐다봤다.
“얘,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도 그 장면은 생생하게 생각나는데, 레이첼이 카메라를 쳐다봤다고? 난 그걸 본 기억이 없어. 레이첼이 주방에서 찻잔을 씻는 장면도 못 봤어. 그냥 해결사가족들이 아침식사 후에 거실에서 차 한 잔씩 마시면서 얘기 나누다가 장면이 바뀌었던 거 아냐?”
“무슨 소리야? 너 제대로 본 거 맞아?”
“난 그 드라마 볼 때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눈 한번 깜짝 안 하고 봐. 너야말로 제대로 본 거 맞니?”
소은이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미나는 거짓말이나 헛소리를 할 아이는 아니었다. 미나는 소은이보다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고 매사 진지하고, 평소 하는 행동이나 말이 올바른 우등생이었기 때문에 미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소은이다. 아무래도 소은이 자신이 뭔가 헛것을 보았거나 꿈을 꾼 것을 현실로 착각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자신한테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한 주가 지나고 다시 수요일이 되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영어학원을 끝내고 4시 즈음에 집에 온 소은이는 책가방을 소파 위에 집어던지고 자신도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아 리모컨을 집어 들어 TV를 켰다. [해결사가족]이 막 시작하고 있었다.
동네에서 한 아이가 없어졌다. 아이의 부모가 해결사가족네를 찾아와 자신의 4살 아이가 보이지 않은 시간이 벌써 6시간째라고 제발 찾아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레이첼 아빠는 어떤 단서를 찾기 위해 아이 부모에게 이것저것 물었고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없어진 정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아이의 부모가 돌아간 후 해결사가족들도 일의 진행을 위하여 필요한 물건을 챙겨 모두 밖으로 나갔다. 평상시처럼 레이첼만이 집에 남게 되었다. 레이첼은 일을 해결하고 돌아올 가족들을 위해 간식을 만들겠다며 주방으로 갔다.
레이첼은 버터와 설탕을 섞고 거기에 계란을 몇 개 풀어 잘 섞어 크림화를 한 다음 적당량의 쿠키가루를 넣어 반죽했다. 반죽을 쿠키밀대로 넓게 편 레이첼은 쿠키커터로 정성스럽게 쿠키모양을 찍어내다가 지난주에 그랬던 것처럼 카메라 쪽을 슬쩍 보았다. 소은이는 다시 한 번 흠칫 놀랐다. 쟤 또 저러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레이첼은 시선을 거두지 않고 계속 카메라 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은이에게는 레이첼이 계속 자기를 쳐다보는 것으로 보이게 말이다. 레이첼은 씩 웃기까지 했다. 소은이도 그 모습이 신기하여 씩 웃음을 지었다. 그 다음 순간 소은이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레이첼이 자신을 보며 말했던 것이다.
“너 소은이지?”
뒤로 나자빠진 소은이는 가까스로 일어나 놀란 얼굴로 TV화면을 보았다. 레이첼은 여전히 소은이를 보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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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남친분실] 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다가
독립영화감독으로부터 시나리오 부탁을 받아 연재를 중단했던 통나무입니다.
작업 끝나는대로 바로 와서 연재 이어가려고 했는데
어찌하다보니 텀이 너무 길어져 버렸네요.
다시 쓰자니 감각이 너무 끊어진 느낌이라 어쩔수 없이
새 소설로 다시 올리고자 합니다.
소설은 쓰다보니 확실히 시나리오와는 또다른 매력이 느껴집니다.
시나리오는 내 의도가 왜곡되게 연출되면 감독과 갈등이 빚어지지만
소설은 온전히 작가 스스로의 연출이라 맘이 편하거든요.
암튼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첫댓글 통나무님 돌아오셨네요><저 은콩이에유ㅡ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즐겨찾기해놓구기다리고 있었는데 쓰시던 시나리오는 다쓰셨어용? 레이첼이 소은이를 보다니 소은이가 영어를 알아들었나봐요ㅎㅎ 남친분실도 기다리는 팬분들(저도그중 한명)이 많으니 다시 이어가주세요ㅠ
아 은콩이님 이렇게 기쁠데가..즐겨찾기까지 해놓으셨다니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가 뭐라고...;;그동안 잘 지내셨죠? 이름을 바꾸셨군요...^^ 시나리오는 그동안 감독부탁으로 수차례 수정을 했는데 제작비에 차질이 생겨 계획했던것보다 훨씬 늦게 촬영할것 같습니다. 영화는 제 소관이 아니니 자세한 사정이야 알수없지만 시나리오 쓰느라 흘려보낸 시간 생각하면 좀 답답한 심정이긴 하네요. 그리고 남친분실을 좋게 봐주신것 넘 감사드립니다. 애초에 구상한 플롯대로 이어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 한참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보니 머릿속에 들어있는 플롯에 무리가 있다는걸 발견했어요. 아무래도 이어 쓰려면 다시 스토리를
조정해야될 것 같아 막막한 심정에 일단 다른 소설을 시작했어요. 이 소설 끝내고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늘예솔님 다시 감사드려요~
아 그러셨구나 ㅎㅎ 저는 닉넴을 좀잘바꿔요ㅠㅋㅋ 어쨌든 돌아오셔서 너무 좋네요!! 이소설은 완결까지 가주세요 화이팅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뒤늦게 님의 댓글을 보았네요^^ 관심가져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실망 드리지 않도록 열심히 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