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은 미타굴이고 망망대해는 적멸궁이다. 물상과 마음 어디에도 걸리지 않으려면 송정에 앉은 학의 붉은 벼슬을 자세히 보라.
사실 이 선시만큼 승속에 많이 알려진 게송은 없다. 그래서 장엄염불 첫머리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선시의 주인공은 아직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일설에는 나옹대사 선시라고 하지마는 그것은 다만 억측일 뿐이다.
나옹스님은 고려 말기 스님으로 인도의 지공스님 제자이면서 무학 대사의 스승이다. 그분의 당호가 매우 이색적이다. 나옹이라는 이름은 늙은 문둥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게송은 여느 선시처럼 사구로 되어 있다.
첫째 줄의 청산첩첩미타굴은 제법의 현상을 뜻한다.
청산첩첩은 겹겹이 겹쳐진 중생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산을 넘으면 중생이 있고 또 그 산 너머에 또 중생들이 살고 있기에 그렇다. 중생세계는 굴곡이 있고 그 굴곡을 높고 낮은 청산으로 에둘러 읊었다.
그 청산 사이 중생이 사는 곳마다 자성미타가 보이지 않게 그들을 정화하고 있다는 뜻에서 굴이라는 글을 썼다.
두 번째 줄은 제법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망망은 아득하고 끝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속에는 굴곡과 가변이 없다는 뜻을 함유한다. 그런 곳은 천지에 적멸인 열반밖에 없다. 열반은 상태적으로 움직임이 정지되어 있고 작용적으로 거울처럼 평면으로 우주를 그대로 담고 있다.
궁은 굴과 달리 복덕과 지혜가 충만한 곳이다. 그래서 완성의 뜻으로 궁을 썼다. 현상은 협소한 굴로 표현하고 본질은 드넓은 궁으로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세 번째 줄은 본질에서 인연으로 나타난 허상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물물은 모든 물상을 뜻하고 염래는 그 객관적 대상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물질과 마음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어디 하나에도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마음에 물상은 걸림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기 때문이다.
마음도 결국 실체가 없기에 걸림이 없다. 그런데 범부는 물상에도 걸리고 마음에도 걸려 고통을 만든다. 어떻게 하면 인연으로 나타난 물심의 허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마지막 줄에서 해답을 내어 놓는다.
네 번째 줄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본각을 말하고 있다.
기간은 자세히 보라는 뜻이다. 기幾 자를 몇으로 보면 뜻이 나오지 않는다. 보통 다 그렇게 풀이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 幾는 자세하게 볼 기 字다. 이것은 유서인 예기에도 그렇게 쓰여진 문장이 있다.
송정은 소나무 속의 정자다. 소나무는 사철 언제나 푸르다. 정자는 안락의 장소를 뜻한다. 거기다가 학은 순수를 말하고 머리는 천지를 내다보는 역할을 한다. 그 위의 붉은 벼슬은 정확히 불성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이 게송은 마음의 현상을 먼저 말하고 그 바탕은 적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의 미타는 서방의 극락세계에 계시는 아미타불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성미타를 말하고 있다. 이것을 기신론에서는 대승으로 표현하였다.
현상 속에서 우리 마음은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지만 우리 마음은 이미 본질에 있다고 말하고, 현재의 우리 모습은 본질을 들락거리는 허상이라서 걸림이 없다고 읊고 있다. 그 도리를 알려면 언제나 변함없이 독야청정한 마음의 불성을 자세히 관찰해 보라는 뜻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원효대사의 오도송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뚱딴지같은 소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게송하고 원효성사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오도송이라는 말은 도를 깨달은 내용을 게송으로 읊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원효성사가 도를 깨달으셨던가. 어디에 그분이 도를 깨달았다고 직접 말씀하신 적이 있는가. 그분의 저술 300권을 넘게 다 뒤적여도 그런 말씀은 없다.
도를 깨달았다 안 깨달았다는 말은 조사선에서 하는 말이다. 대승불교하고는 전혀 해당사항이 아니다. 도교에서 말하는 도 닦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스님들께 넌지시 물어보라.
"스님은 무엇하는 분이십니까?" "도 닦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그 스님은 도교수행자거나 조사선 수행자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그러므로 정통불교 수행자라고 말할 수가 없다.
조사선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주로 중국의 마조선사 문하들로부터 유입되어 구산선문이 만들어졌다. 여기서 조사선이 힘차게 부흥되고 그 사상이 크게 드날렸다. 그러니까 원효성사가 열반하신 지 약 200년이 지난 뒤의 일이 된다.
초발심자경문에서 자경문을 쓴 스님이 야운이다. 한때 이 분이 원효성사의 제자가 아닌가 하는 설도 있었지마는 그가 쓴 내용 가운데 조사관이라는 말이 나오는 바람에 고려시대의 스님으로 정리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신라시대 때의 고승들에게서는 오도송이니 열반송이니 하는 그런 것들이 없다. 그래서 자장율사나 의상대사나 할 것 없이 어느 누구도 오도송을 남기지 않았다. 아예 그런 이상한 말조차도 없었다. 그런데 어찌 원효대사가 오도송을 남기셨겠는가. 참 우스운 일도 다 벌어지는 세상이다.
정리하자면 신라의 불교는 순수 대승불교고 고려의 불교는 대승불교에서 한 수 낮아진 조사불교다. 물론 이조불교와 지금의 불교도 조사불교의 맥이다. 그 조사불교의 폭풍같은 교세에 눌려 대승불교는 깊이 묻혀 버렸다.
그런데 이제 조사불교의 선법이 다됐는지 사람들의 선호가 예전 같지 않아 그 교세가 급격히 시들해져가고 있다. 그냥 두었다가는 조사불교의 바탕인 대승불교까지 존치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한물 간 조사불교를 미련없이 버리고 대승불교를 다시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역할을 대승기신론 해동소가 선두에서 잘 이끌어줄 거라고 확신하고 그 바람막이로 먼저 혈맥기를 천지에 내어 놓은 것이다.
첫댓글 헐~
백부논주라 불리며 지금까지 밝혀진 저서만 해도 240권이 넘는 원효성사가 오도송이 없다고요?!
불교전통강원 대교과 중 유일한 논서 기신론.
깐깐 기신 차돌 능엄이라 불리는 기신론.
기신론 해설서의 넘사벽 해동소.
저같은 일반 재가불자가
혈맥기를 통해 기신론해동소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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