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교 8
첫 중국방문을 마친 야마모토 신이치(이케다 선생님)는 함께 소련을 방문하는 멤버에게 말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소련에 가는가.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 제3차 세계대전을 막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중국에 이어 소련에 가고, 그 다음 미국에도 갑니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의 심부름꾼으로서 생명의 존엄과 평화의 철학을 들고
세계평화의 막을 열고자 가는 겁니다.
평화를 위한,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목숨 건 승부가 기다리고 있어요.
대담하게 용기를 갖고 새로운 역사를 열어야 합니다.
겁이 많아서는 투쟁하지 못합니다."
열렬한 결의가 담긴 말이었다.
소련을 방문할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그러나 신이치가 소련을 방문하는데에 찬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조 기요시 부회장 등 학회 최고 간부조차도 반대했다.
도쿄에 있는 어느 절에서는 주지가 부인부 간부에게 비웃듯이 이렇게 말했다.
"야마모토 씨는 신자도 없는, 종교를 부정하는 나라에 왜 가느냐 말이지."
세계평화라는 불법자(佛法者)의 사명을 자각하지 못한 그들이
신이치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또 재계의 어느 중진은 신이치를 걱정해 절절히 말했다.
"공산주의 국가는 점차 정체되고 있습니다.
가까이 대해 봐야 결코 좋은 일은 없을 겁니다. 소련 방문은 그만두는 게 나아요.
그건 그렇고 어째서 소련 같은 곳에 가려고 생각하셨나요."
신이치는 걱정해 주는 마음에 감사해 하면서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곳에 인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간을 만나러 갑니다.
공산주의 국가든, 자본주의 국가든 그곳에 있는 것은 평화를 바라는,
같은 인간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저는 그 인간의 마음과 마음에 다리를 놓아 서로 잇기 위해 가지요.
그것이 평화를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엄한 어조였다.
신이치의 말에 재계 사람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셨습니까. 그 뜻에 감복했습니다.
소련 방문의 대성공을 기원드립니다."
가교 9
야마모토 신이치를 태운 비행기가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한 때는 현지시간으로
9월 8일 오후 3시가 지나서였다.
9월 8일은 1957년에 요코하마 미쓰자와경기장에서 열린 청년부 동(東)일본 체육대회
'젊은이의 제전'에서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제2대 회장이 청년들에게
'첫째 유훈'으로 '원수폭(原水爆)금지선언'을 발표한 날이다.
또 1968년 도쿄 료고쿠에 있는 니혼대학교 대강당에서 개최된 대학부 총회에서
신이치가 '중일(中日) 국교정상화 제언'을 한 날이기도 하다.
그러한 9월 8일에 세계를 둘로 나누는 동서 양 진영의 한쪽 우두머리이자
핵(核) 대국이기도 한 소련에 방문의 첫걸음을 새긴 것이다.
더군다나 제언이 연원(淵源)이 되어 교류의 길이 열린 중국과 소련 간의 가교가 되겠다고
결심한 소련 방문이다. 신이치는 트랩에 서자, 활짝 갠 모스크바 하늘을 우러러보고
도다(戶田)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선생님! 신이치는 이곳 소련에 선생님의 평화사상을, 불법(佛法)의 인간주의 철학을 전해
세계평화의 길을 열겠습니다.'
마음에 스승을 지닌 사람은 강하다.
스승이 바로 용기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트랩 아래에는 신이치 일행을 초대한 R. V. 호프로프 모스크바대학교 총장,
V. I. 토로핀 부총장, L. N. 하류코프 부총장 대리, 통역사인 L. A. 스토리자크 주임 강사 등의
얼굴이 보였다. 더욱이 대문련(소련 대외우호문화교류단체연합회 약칭)과
소일(蘇日)협회 관계자 등도 있었다.
소련 측의 정중한 환영을 표하는 마중 태세였다.
그러나 마중 나온 사람들의 표정에는 어딘가 딱딱하고 긴장된 공기가 감돌았다.
불교 지도자이기도 한 신이치를 마중하는 데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한 분위기를 알아챈 신이치는 모두를 포용하듯이 웃음을 띠며 말을 건넸다.
"마중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노력에 힘입어 제가 동경하던 모스크바에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배우고자 왔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돌아가겠으니 학생이라 여기고 가르쳐 주십시오."
신이치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도 미소의 꽃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