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영혼의 노래를 위해
하루가 다르게 산과 들의 색깔이 변하고 있다. 산동네에 오기 전에는 자연의 세미한 변화의 기미機微를 알지 못했다. 봄이 오면 으레 꽃이 피는 줄 생각했다.
이곳에 온 후 매일 한두 차례 들과 산으로 산책을 즐긴다. 조금씩 자연의 섬세한 움직임과 이치를 알게 되었다. 이른 봄의 꽃들은 무슨 옷으로 갈아입을까. 두껍고 칙칙한 겨울옷을 벗어버리고 화사하고 밝은 옷으로 자연은 봄날의 시를 써가고 있다.
그 옷은 이 땅의 옛 조상들이 좋아하였던 흰색이고 노랑 저고리와 붉은 치마 색이다. 그래서 매화, 목련, 벚꽃, 조팝나무꽃, 이팝나무꽃, 배꽃이 하얗게 들녘을 뒤덮고, 연한 노란색의 산수유를 뒤따라 짙은 색깔의 수선화와 개나리가 등장한다. 물론 매화, 목련과 벚꽃에도 연분홍색의 꽃들도 있지만 그렇게 강한 색은 아니다. 이뿐 아니라 보라색 제비꽃, 노란 민들레, 빨간 꽃잔디 등 이름 모를 들꽃에는 온갖 색깔로 수줍게 향기를 내고 있다.
사월이 오면 산에는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여 복숭아, 살구꽃 등 연분홍색에서부터 영산홍, 자산홍, 철쭉꽃 등 진한 붉은 색깔로 바뀐다. 계절의 여왕인 오월이 오면, 꽃의 여제女帝인 장미가 붉은 색깔로 숱한 꽃들의 아름다움을 누르고, 백화난만百花爛漫을 평정한다. 이처럼 창조주는 섬세하게 꽃들이 피는 시간과 색깔을 디자인하였으므로 자신이 보기에도 심히 좋았을 것이다.
풀과 나무들도 매일 조금씩 색깔이 변한다. 꽃잎이 진 자리에는 새순이 돋아난다. 새순의 색깔도 연한 연두색에서부터 그 진한 초록의 농도가 풀과 나무마다 다르다. 이 연한 새순들이 햇빛에 비칠 때에는 참으로 갓 태어난 아름다운 생명의 모습으로 빛난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이 자연스레 나올 법하다. 나무의 종류에 따라 산山 모습은 수채화 물감을 그 색깔대로 차례로 쏟아부은 듯 연하게, 짙게 조화를 이룬다. 우리말의 색깔에 대한 어휘가 한정되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튀르키예에는 ‘푸르다’라는 말이 칠십여 가지가 있다고 한다.
숲이 짙게 우거지면 검은색으로 보인다. 그래서 독일 남쪽의 울창한 숲 지대를 ‘검은 숲Schwarz Wald’, Black Forest‘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한 면이 있다. 독일에서 울창한 숲을 보다가, 동유럽의 나무와 산들을 보면 어쩐지 자연에서도 궁기窮氣를 느낀다. 나무들도 윤기가 없이 초라하게 보인다. 물론 자연도 국가의 부와 환경정책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이처럼 편견과 선입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한 곳인 잠울지처岑蔚之處를 ‘구우’丘隅라고 한다. ‘언덕 모퉁이’란 말이겠다. 이제 우리 연수年數는 이 언덕 모퉁이에서 잠시 쉬는 중이다. 영어 표현에는 인생의 전성기가 지난, 한물간, 늙음을 ‘언덕 넘어 over the hill’ 이라고 한다. 그 언덕 모퉁이에서 잠시 머물러 지난 일을 회상할 수 있을지라도, 해가 져 어둡기 전에 이제 황급히 언덕을 내려와야 할 때이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떤 색깔로 비추어질까. 서리가 내리기 전 가을의 언덕은 어떤 색깔로 물들어 있을까. 알베르 카뮈는 가을을 “잎이 꽃이 되는 계절”이라고 불렀다. 단풍의 아름다움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봄의 색깔도 모른 채 우물쭈물 세월을 보내다 보니 자신의 색깔이 어떻게 변해있는지도 몰랐다. 혹 이전에 동유럽에서 보았던 윤기 없는 초라한 나무 모습은 아닐까. 잎이 꽃이 되기란 그리 어려운 것일까.
언덕을 내려오는 것이 끝이 아니다. 아직 어렵고 힘든 반전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또 다른 세계로 마지막 항해를 준비해야 한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Sailing to Byzantium 를 황혼에 시도하였듯이 우리도 각자 영혼의 고향인 ’불멸의 지성‘을 찾을 때가 되었다. 그 지성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각자 정신의 여행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예이츠가 그의 시에서 “영혼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선 자신만의 장려한 기념비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하지만 그런 영혼의 노래를 가르쳐줄 노래교습소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난 먼바다를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을 찾아온 것이지”라고 선언했다. 이같이 ’언덕을 내려오는 자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외로운 영혼의 노래일 것이다.
그 영혼의 노래 색깔은 자신의 것이기만 하면 아무래도 좋다. 그 색깔들이 모여 꽃이 되고 화창한 봄날의 들녘이 되어 향기롭고 아름다운 영혼의 화음을 이룰 것이다. 그 화음은 천상에까지 울려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이츠에게 다행한 것은 비잔티움이란 서양문명 성지의 존재였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과 다다라야 할 곳은 과연 어디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가야 할 정신적 고향은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공유할 정신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종교적 구원 외에는 순례할 성지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의 불행일 수도 기회로 여겨지지 않을까 싶다.
그 길의 끝에는 누가 마중 나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