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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문화탐방
►탐방 일자 : 2025. 11. 08 (토)
►탐방 고궁 :
창덕궁. 창경궁. 종묘
►날씨 : 흐림
►참가자 :
경우가족 7부부 등 15명
►문화탐방 코스
안국역 3번출구→창덕궁 매표소
→창덕궁(돈화문-구선원전-인정전-
선정전-대조전-낙선재)→창경궁
(양화정-풍기대-춘당지-대온실-
영춘전-양화당-명정전)→종묘
북신문→종묘 영녕전→
종로3가역
►탐방시간
09:30~13:00 (3시간 30분)
►고궁 문화탐방 스케치
이번주는 건강 트레킹으로
산행대신 가을 단풍 나들이로
기획했다. 서울에서 아름다운
단풍 나들이 지역 남산 북측
순환로는 아직 단풍 절정이
일러 단풍 나들이 & 고궁
문화탐방으로 결정했다
이날 09:30분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앞에 모인
경우 가족은 7부부 등 15명...
고궁을 찾은 시민들이
상당하다
이날 흐린 날씨였지만
깨끗한 창공. 남산이 손에
잡힐듯 한 넓은 시야. 조망권이
깨끗하여 되레 나들이에 좋은
날씨였다
안국역 3번출구에서 도보
340m 거리 돈화문 창덕궁
매표소에 도착하자
짙은 노란 물감을 칠한 듯 한
화려한 은행나무가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警友가족님들
어서오세요~~~
반갑게 인사하는 것 같다
노오란 은행잎.
눈을 즐겁게 하는 찬란한 미소
바라만 봐도 저절로 웃음꽃이
피어나는 즐거운 하루가
시작된다~~~
창덕궁 매표소 지나자 마자
빙~~~ 둘러서서 이날 참석한
사모 7님을 비롯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모들~~~
역시 부부는 그 자체만으로
보기도 좋고 든든하고
바라만 봐도 멋지고 아름답다~~~
인사를 마치고 고궁 관람이
시작되었다. 창덕궁 인정전을
비롯한 고궁을 감싸고 있는
형형색색 아름다운 고목들이
색동저고리를 마구 흔들며
환영한다
창덕궁 단풍은
50% 정도 물들었지만
1주일 후 쯤 단풍 절정기땐
고목들이 색동저고리를 모두
벗어던져 앙상한 가지만
보인다는 점에서...
수북히 쌓인 낙엽 적당히 물든
단풍 지금이 고풍스러운
가을 정취를 음미하는
가장 좋은 시기가 아닐까??
창덕궁에서 구선원전. 인정전.
선정전. 대조전. 그리고 조선왕족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가
마지막으로 기거했던 낙선재를
차례로 탐방하고 창경궁으로
건너갔다
창경궁은
입구에서부터 붉게 물든 단풍이
반갑게 맞이한다.
옛날 시골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으레 방문하는 창경원과 남산...
창경원=동물원 인식했던 한때의
시절도 역사의 흐름이다~~
그 당시 춘당지 연못 위
높이 설치된 그물망 그 안에서
크고 작은 각종 새들이 훨훨~~
날으던 연못에는 천둥오리
3마리가 유유히 유영하고 있어
자유와 평화 상징처럼 다가온다
창경궁 양화정-풍기대-춘당지-
대온실-영춘전-양화당-명정전을
차례로 탐방하면서 형형색색
아름다운 숲. 적당히 물든 단풍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하면서
하하호호~~
웃음꽃이 만발한다~~~
여기 저기에서도
웃음꽃이 만발한 단체 관람
시민들이 상당하다
창경궁 탐방을 마치고
종묘를 연결하는 북신문을 지나
종묘로 건너갔다
종묘 영녕전을 감싸고 있는
영롱하고 오색찬란한 아름드리
숲에서 수북한 낙엽 밟으며
고즈넉하게 깊어가는 가을 맘껏
즐기고 13:00경 종묘 외대 문을
나와 종로3가 마산아구찜
식당으로 이동 뒷풀이 하고
해산했습니다~~
서울 중심지에
자유와 평화. 여유로움.
현대와 고풍이 어우러진. 시대
초월한 공간적 배경 고궁에서
좋은 사람들과 건강 트레킹을
가미한 문화탐방은 즐겁고
행복한 시간 행복의 감각기능을
강화 시켜준 즐거운 하루
였습니다
이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고궁 문화탐방~~~~
즐거운 시간. 행복한 시간
맘껏 힐링하는 멋진 하루
추억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소중한 순간 순간들~~~
정말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산행은
서울양천재향경우회 산악회
17차 산행으로
2025. 11. 29.(토) 09:30분
지하철5호선 신금호역에서
만나 금호산. 매봉산. 남산으로
이어지는 단풍 나들이 산행
입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2025. 11. 10. (월) 오전
서울양천재향경우회 산악회
회장 최폴리........
[창덕궁]
조선의 법궁(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예법에 따라
딱딱하게 지어진 탓에 실제
거주는 주로 창덕궁에서 하였고
이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완전히 소실된 이후부터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는 1867년까지,
경복궁을 대신하여 창덕궁이
조선의 정궁 역할을 대신
수행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정사의 대부분
이 창덕궁에서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대한민국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2월 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개최된
제21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4세기~16세기
태조는 조선 건국 3년차인
1394년(태조 3년)에 한양으로
천도해 정궁(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지만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이 1399년(정종 1년)
고려의 옛 수도 개성으로
환도했다. 그러나 정종의 후임
태종이 한양 재환도를 결정했다.
재환도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태종은 향교동에 이궁(移宮)
건설을 명해 1404년(태종 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405년(태종 5년)에 완공했다.
그 궁이 바로 창덕궁이다.
그러나 한양에 이미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새 이궁을 짓는 것은
태종이 경복궁에서 머물기 싫다는
의미였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이러한 양궐 체제(兩闕體制)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거주한 경우가 많았다.
태종은
창덕궁을 완공하기 직전에
개경을 떠나 한양에 도착하는
그 길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1405년(태종 5년)
한양으로 돌아온 이래 태종은
1418년(태종 18년)에 아들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태종은
자신이 제1차 왕자의 난이라는
피바람을 일으킨 곳이라 그런지
죄책감 때문에 경복궁을 기피했다.
다만 커다란 국가 중요행사들은
주로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에서 열었다.
1405년(태종 5년) 창건 당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였다.
궁궐로 기능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들은 일단 다 갖춘
상태였지만, 일단 완공한 이후에도
창덕궁 증축 공사를 계속 했다.
1412년(태종 12년)에는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세웠다.
일단 궁궐의 필수 건물을
완공한 후 1406년(태종 6년)부터
태종은 창덕궁의 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종은
후원을 자주 이용하면서 애착을
보였다.
창덕궁은 처음에 작은 규모로
지은 데다 대부분 주거 및
편전 등 실용적으로 필요한
건물들 위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의례를 위한 건물인
정전을 비롯한 외전(外殿) 역시
매우 조촐했다. 처음 완공 당시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고작 3칸 규모였다. 때문에
태종은 1418년(태종 18년)에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한 직후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 정전 일대를 개축하는
공사를 단행했다.
공사를 하면 백성들이 힘들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태종은 "힘든 일이기에 더더욱
내가 안고 해야겠다"면서
태종과 세종 시대에 많은 공사를
감독했던 박자청에게 공사를
명했다. 이 공사를 세종이
즉위하고 난 후까지 지속했는데,
이 때 인정전이 5칸으로 규모가
커졌고 정전 일대가 정비되어
비로소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세종이 집권 후반기에 줄곧
경복궁에 머무르면서 창덕궁의
비중이 줄어드는 듯했으나
문종 이후 조선 전기 동안
여러 왕들은 창덕궁을 애용했다.
우선 세종 이후 바로 단종 대에
인정전 및 그 일대를 다시 한 번
증개축했다. 또한 세조는
후원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벌이면서 민가 73채를 철거했다.
세조 대를 거치면서
창덕궁 후원 규모는 태종 때보다
규모가 3배 더 커졌다.
성종 때는 창덕궁 옆에 있던
수강궁(壽康宮)을 개축하여
창경궁이라 명했다.
왕들이 창덕궁을 애용한 것은
경복궁보다 구조, 입지,
심미안적으로 거주지로서 더
걸맞아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두 궁을 다 가보면 건축을
모르는 사람이 느끼기에도
녹음이 있는 창덕궁이 거주에
더 좋아 보인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경복궁은
내부에 지금처럼 녹지와 나무가
있지 않았고, 거의 흰색 모래나
돌판이 깔려 있었으며 건물도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명청시대의 황제들은 예법을
철저히 준수해서 지어진 엄격한
자금성을 부담스러워해 많이
머물지 않았다. 그 대신 자금성
옆에 위치해 있는, 호수와
정원이 갖추어져 있어 한결
여유로운 중난하이에 많이
머물렀다. 또한 경복궁에서
제1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 등의 피비린내 날
사건이 많았었기 때문에 꺼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16세기~19세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초기에 선조가
한성을 떠나 파천하면서
궁을 버리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모두 불탔다.
1593년(선조 26년)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수한
정릉동 행궁에 기거했다.
전란이 끝난 후 선조는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과 물자가 소모될 것으로
예측되자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죽기 3년 전인
1605년(선조 38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를 시작했다.
창덕궁 중건 공사는
광해군 즉위 후인 1609년
(광해군 1년)에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중건 직후 광해군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고 보수 공사를
명했으며, 1년 후인 1610년
(광해군 2년)에야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창덕궁을 법궁으로
선포했다. 이렇게 버려져 있던
시기, 불 타 폐허가 된
창덕궁과 버려진 후원은
경복궁과 함께 범들이 낮 동안
몸을 은거하던 장소였다.
이에 창덕궁과 창경궁은
곧 재건되었으나 흥선대원군
집권 이전까지 재건되지 못한
경복궁은 2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표범들의 서식지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은
인정전을 제외하고 상당부분,
특히 서쪽 궁역이 완전히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창경궁은
비교적 무사했으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역시
내전 구역이 완전히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인조 치세의 창덕궁
중건 공사는 매우 서서히
진행되어 1647년(인조 25년)에야
공사가 끝났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지나치게 궁궐 공사를 벌여
민생을 파탄에 빠뜨렸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광해군이 남기고 간
인경궁과 경희궁이 기존의
창덕궁과 창경궁보다 더 큰
규모였기 때문에 인조는 이들
새 궁전을 이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 경희궁에 주로
거처했다.
비록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의 궁궐병이었지만,
재위 초기 창덕궁과 창경궁의
가치와 권위로 인해 이들
궁궐을 복원하는 것 자체에 대
해서는 당시에도 큰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쪽 대신들은
자신들의 반정 명분을 위해서
인경궁과 경희궁을 다시
헐어낼 것을 주장했고, 다른
대신들은 실리적인 견지에서
애써 지은 인경궁과 경희궁을
사용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차후에 복구하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인조가 인경궁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인경궁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인조는 1632년
(인조 10년)에 소성대비
(인목왕후)가 연루된 저주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신하들 반대를
무릅쓰고 어떻게든 인경궁을
써보자는 입장이었다.
인경궁의 처리 및 창덕궁,
창경궁을 중건을 놓고
조정에서도 오랜 정쟁이
있었지만,
1632년(인조 10년)에 소성대비
(인목왕후)가 엮인 저주사건이
터진 이후 인조는 인경궁을 헐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도록
지시했다. 이미 지어놓은 궁궐을
굳이 헐고 그 자재를 옮겨다
새로 짓는 것도 생각보다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다수의 대신들이 그냥
인경궁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인조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면서 인경궁은 해체되었고,
남은 전각들도 모두 헐렸다.
광해군 이후 창덕궁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조선 후기 내내
정궁 역할을 담당했으며,
조선 후기 대부분 정치적 사건의
배경이 창덕궁이었다.
한마디로 창덕궁은 조선왕조
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의 주
거처로 쓰인 궁궐이다.
그렇기에 조선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궁궐이다.
고증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던
과거에는 경복궁에게
그 입지를 많이 빼앗겼다.
순조 시절 대화재로
창덕궁 상당 부분이 다시 한 번
전소되었다. 불타기 전
창덕궁 건물 대부분은 인조가
인경궁을 헐어다가 중건한
것이었기 때문에 청기와 건물도
많고 화려했다고 전해지나
순조 때 화재로 청기와 건물은
선정전을 제외하고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19세기 말
(흥선대원군 섭정기) 이후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중건하면서 창덕궁은
정궁(법궁)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고종과 왕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거주하는 등 여전히 창덕궁을
중요한 궁으로 인식하고
활용했다.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당시에는 청군의
공격으로 전쟁터가 됐다.
그러다 1897년(건양 2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환궁한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 경운궁(덕수궁)을
황궁으로 사용했으나
1907년(융희 원년) 순종이
즉위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39년 만에 정궁이자
황궁으로 돌아왔다.
단순히 임금이 머문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1894년(고종 31년) 이후
13년 만이다.
1910년(융희 4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구 대한제국
황실이 창덕궁을 소유하여
거주했다. 전 황제였던 순종은
이왕(李王)으로 강등당했고,
창덕궁은 순종의 궁호로도
쓰였다. 1912년 일제는
후원 및 인정전 등 창덕궁
주요 전각을 일반에 공개했다.
1917년의 화재로 내전 일곽이
전소해 조선총독부에서 경
복궁의 전각을 옮겨와 재건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경운궁)
못지 않게 근대화 시기의 영향을
받았던 궁궐 중 하나이다.
궐 내부에 덕수궁 석조전 같은
양관이 세워지지는 않았지만
여러 전각에 서양 문물의
영향이 배어 있다. 주요 전각들의
내부는 서양식 형태이며,
정전인 인정전이나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생활 공간인
희정당과 대조전 내부에
전구가 달려 있다.
특히 희정당의 현관에는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진입로가 마련되어 있다. 한편,
이완용은 고종이 승하한 뒤,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에게 새로운
별궁을 짓는데 시간이 걸리니
순종을 덕수궁으로 보내고
창덕궁을 일본 왕실의 별궁으로
사용하잔 의견을 두 번이나
건의했으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단
이유로 모두 기각당했다고 한다.
일제가 패망한 후
1947년에는 미군정에서 몰수하여
정부 소유가 되었다.
그후 대한민국 정부(국가유산청)의
소유가 되었지만, 정부의 배려로
1960년대 이후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덕혜옹주 등
구 황실 일족이 일부
전각(창덕궁 낙선재)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1989년 4월에
이방자 여사의 별세를 끝으로
창덕궁은 주거공간으로서 역할을
상실했다.
창덕궁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0세기 후반까지 구
대한제국 황족(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덕혜옹주)들이
거주했다. 즉,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구 황족들의
거처 역할을 했다.
[창경궁]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을 때에
창덕궁 옆인 이곳에 별궁을 지어
거처로 삼았고, 이름을
수강궁(壽康宮)이라 했다.
이것이 창경궁의 시작이었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 후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쫓겨난 곳
이기도 하다.
성종 15년(1484)에 할머니
자성대왕대비 윤씨, 어머니
인수왕대비 한씨, 숙모 인혜왕대비
한씨를 모시기 위해 궁의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고 궁을 크게
증축 확장했다.
성종 때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녕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다.
광해군 7년(1615년)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해 이듬해
11월 마무리됐다.
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정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창덕궁보다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조선 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됐다.
창경궁은 인조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있었다. 이후
조선 왕조가 기울고 순종 즉위 후
급속히 변형돼 일제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됐다.
특히 1909년에는
한국통감부의 주도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전각들을 헐고,
일본식 건물을 세워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드는 등 유원지로
조성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꿨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
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1911년에는 자경전 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시켰으며,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일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끊어
도로계획까지 했으나(현 율곡로),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해 건설이 미뤄져 순종 사망 후인
1932년에 도로가 났다.
현재 해당 도로는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의 종묘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2022년 율곡터널로
지하화 되었다.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결정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했다.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궁으로
환원되었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했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복원해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했다.
1992년에는 일본식 건물인
장서각이 철거됐다.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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