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천로 89에서 본 칠산동
오르막길의 정점인 인생문 앞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고 여유롭게 걷는다고 생각했지만, 마안산의 높은 계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급경사의 계단을 바라보면서 때마침 불어오는 북풍을맞으며 한 발 내딛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손에 코팅된 면장갑을 끼고, 기온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아
한 계단씩 신중하게 올라갔다.
힘들어 올라보니
갈대들이 바람에 날려 서로 엉켜 있었고, 넓은 터에서는 옛 집과 텃밭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 본 칠산동 모습
짙은 회색구름이 드리운 동네는 우울하고
침침한 느낌의 모습 있었다 .
동래구의 구화인 매화를 이미지화하여 수묵화적 느낌을 반영한 작품이다. 나뭇가지로부터 매화가 바람에 흩날리는 시적인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회색빛 축대이지만 햇살이 가득한 장소를 선택하여 복천동 마을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고자 한 작품이다.
복천동의 따뜻한 햇살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구덩식돌덧널무덤·구덩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고본군은 1981년 6월 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3세기대에서 7세기대까지 조영되었으며 4∼5세기가그중심연대이다.
대규모의 고분군이 복천동 일대 대포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나온 그리 높지 않은 구릉 위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이 고분군은 1969년 9월부터 1994년에 이르기까지 6차례에 걸쳐 동아대학교와 부산대학교박물관 및 부산시립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복천박물관은 26~30일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복천동 고분군 출토 보물(금동관, 청동칠두령)을 촬영해 안내데스크에 보이면 금동관·청동칠두령 만들기 체험 교구를 제공하는 ‘전시실에 숨은 보물을 찾아라!’ 행사를 진행한다
성곽의 높이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장관으로, 주변의 산과 그리고 도시의 풍경까지 한눈에 담아내고 있다.
둥근 자연석을 땅 밑으로 부터 점점 지상으로 돌출시켜 나무와 만나고 사람과 만나게 하여 가야시대 왕의 기운을 느끼도록 제작한 작품이다
마안산 기슭에 자리잡은 복천동 골목길 모습들이댜
2016년 건강한 복산동마을 만들기 사업에 노인 복지관에서 그린 벽화들이다
박차정 의사 생가
박차정 의사(1910.5.7.~1944.5.27.)는 1910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민족교육의
전통이 강했던 일신여학교(동래여자고등학교 전신) 재학 중 민족운동에 투신하여 조선소녀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였고, 동래청년동맹의 집행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7년 근우회 동래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민족독립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또한 1929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을 담당하였고, 1930년 1월 서울의 11개 여자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배후에서 지원한 것으로 밝혀져 시위 직후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선생은 1930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뒤 의열단에 가입하고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김원봉과 결혼, 1932년 남경으로 옮긴 뒤에도 김원봉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개설을 준비하였고, 개교 후에는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교육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1935년 남경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그 지원단체로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을 민족독립운동으로 끌어들였으며 1937년 좌익 민족운동세력의 결집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 창설에 동참하였고, 그 산하 무력으로 1938년 한구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을 맡아 무장항일투쟁에 진력하던 중,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으며 1944년 5월 27일, 선생은 부상 후유증으로 35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국가보훈부
의사: 무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
열사: 맨몸으로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신 분
박차정 의사 생가는 1936년에 건립되었으나 원래의 건물은 거의 파손되어 본래의 형태를 찾을 수 없었다
박차정의사숭모회는 1996년부터 지속적으로 복원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부산시에서 부지매립비를, 국가보훈처에서 생가 건립비를, 동래구에서 도로 개설비를 각각 지원받아 박차정 의사 생가를 복원하였다.
그리고 복원한 박차정 의사 생가는 조국 해방에 평생을 바친 박차정의사를 기리기 위해 2005년도부터 시민들에게 개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