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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의 소명 (눅19:1-10절)
죽음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삭개오를 만나 그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푼 본 사건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도중에도 죄인의 영적 궁핍을 묵과하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자상하신 사랑과 사람의 조롱과 멸시를 무릅쓰고라도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죄인의 간절하고 뜨거운 심정을 느끼게 합니다. 십자가상의 한 강도가 회개한 사건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 일어난 사건인 반면에 삭개오가 회심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일어난 마지막 회심 사건입니다. 수난의 장소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해 상경의 길을 재촉하시던 주님께서 여리고 성에 가까이 와서 한 가난한 사람인 눈먼 거지 소경 바디메오의 눈을 치유하시고 이어서 부자이면서도 동족으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하던 세리장 삭개오를 만나 구원을 허락하는 영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리고 성은 구원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도시였습니다. 저 유명한 기생 라합이 무너지는 여리고 성에서 창가에 메달아 놓은 붉은 줄의 계약에 의하여 구원을 받은 곳입니다. 여호수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여리고 성의 재건축을 시도한 히엘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 의해서 여리고 성의 수원에 소금을 쳐서 악한 물을 고쳐 풍성한 토산의 열매를 맺게 하였던 이적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리고 성으로 들어오시는 주님 앞에는 나뭇가지를 들고 환호하는 무리도 없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외치는 아이들의 노래도 없습니다. 다만 뒤따르는 많은 군중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앞서서 가시는 주님의 굳은 의지만이 확연할 뿐입니다. 본문 1절에 “지나가시더라” 라는 말은 여리고를 통과하여 지나가셨다는 말로 삭개오를 만나시기 전까지는 여리고에 머물 계획이 없으신 듯합니다. 주님께서 삭개오를 만나신 이 날은 수난주간 전 목요일쯤으로 이제 일주일 후면 십자가의 수난을 받아야 하는 절박한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성중의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 뜻밖에 한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집에서 하루를 유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눅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은 죄인을 향한 구세주의 부르심이요, 잃어버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부르심의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의 복음은 부름의 복음이요 소명의 복음입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신 소명(召命)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부름의 객관적 소명입니다.
*눅17: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오직 예수를 보고자 하는 일념으로 인간적인 난관에 굴하지 않고 수치를 무릅쓰면서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의 열심은 과히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는 여리고 성의 세무서 서장이었습니다. 그가 그의 사회적 체면을 생각했더라면 어떻게 철없는 어린아이들처럼 뽕나무 위에 올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삭개오의 이러한 모습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무수한 군중의 틈바구니를 뚫고 예수의 옷 가에 손을 댄 행동과 흡사합니다.
삭개오가 이렇듯 기를 쓰고 예수를 보려고 했던 동기에 대하여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세관의 관리장으로 많은 부를 누리기는 하였으나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으며 강한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나아가 물질 중심의 가치관만으로 인생의 근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다른 랍비들과 달리 세리나 창기,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사회적으로 적대시 받고 냉대받는 자들을 영접해 주시고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 오셨을 때에 만나보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보고자 한 가장 큰 이유는 호기심이었습니다.
*눅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사람이 많아 앞을 가려 볼 수가 없었고 거기다 자신의 키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기 위하여 뽕나무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들어 삭개오의 열심 있는 믿음이 예수를 만난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삭개오 편에서 먼저 예수를 찾아 뽕나무 위로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2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 결과로 일어난 반응입니다.
*눅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눅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말은 참으로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의 복음은 내 편이 아닌 하나님 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름의 복음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요, 인본주의적 자율의 산물이 아니라 신본주의적 타율의 산물입니다. 인류가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 아담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아담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창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그 결과 아담에게 복음이 주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아브라함을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찾아주시고 나를 부르셨다고 하는 이것은 참으로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보다 지위가 높고 인격이 훌륭하고 이름을 떨치는 사람에게 초청을 받으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또 그것을 오래 기억하고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영원한 생명과 진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 즉 부름을 받은 것은 자신에게 있어 무한한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이 세상에서 결코 어떤 사람이나 신들도 인생을 부른 사람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지금 삭개오는 엄청난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2. 부름의 인격적 소명입니다.
*눅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라는 헬라어 ‘잨카이오스’ 는 전통적 유대인의 이름으로서 본래의 뜻은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 입니다. 누가의 소개에 따르면 삭개오는 세리장의 직책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세리장이란 세관장을 말하는데 여리고는 베레아 지방으로부터 요단강을 건너가는 통상인들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세관이 있었고 그 세관에서는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유입되는 향유 등 상품의 통관세를 징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세리장은 로마의 막강한 공권력을 이용하여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고 자기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그를 부자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된 자는 그 백성들에게 일종의 저주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금을 징수하는 저들을 로마 정부의 꼭두각시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을 착취하는 종교적 배신자로 규정했습니다. 그 결과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대상으로, 민족적으로는 매국노로, 도덕적으로는 창기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유대인의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삭개오는 불결과 불의로 가득 찬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백성에게 분노와 저주의 대상이며 공인된 변절자로 업신여김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삭개오를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눅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원했던 것은 그저 예수님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곧이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삭개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시며 그의 집에서 하루를 유하고 가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매우 적극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방향을 보고 그 위로 뻗은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성경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였습니다.
*렘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그러나 두 사람의 개인적인 만남을 미리 준비한 사람은 삭개오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라는 말씀은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초대받지 않았는데 먼저 손님으로 그 집에 가시고 유하시겠다는 유일한 경우로서 삭개오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 대단한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자신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며 열정적으로 자신을 만나기를 소원하는 삭개오의 마음을 아시고 그의 집에 하루를 유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적 초청에 대한 삭개오의 응답은 전격적이었습니다. 그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즐거워했습니다.’ ‘영접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예수님의 제안을 더할나위 없이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구세주를 만난 인간의 기쁨을 이 이상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 중에 삭개오 만큼 기뻐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적인 부르심과 삭개오의 전격적인 영접은 구원의 눈부신 장면이요, 하나님과 인간의 황홀한 만남의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3. 부름의 화급한 소명입니다.
*눅19:5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여리고 성내는 수많은 인파로 붐볐습니다. 그리고 뽕나무 위에는 삭개오 뿐만 아니라 호기심에 가득한 많은 사람들이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도성을 지나시던 주님은 그곳에 이르사 “삭개오야” 하며 삭개오만 지명하여 불렀습니다.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주님께서 삭개오만 지목하고 부르시는 주권적 선택의 소명입니다. 주님께서 삭개오를 아시고 부르시는 예정된 부르심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삭개오를 구별시키는 분리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죄인 중에서 의인을 갈라놓는 심판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부르심은 화급을 요합니다.
“속히 내려오라”
여기서 ‘속히 내려오라’ 라는 말은 동시적 행동을 요구하는 명령사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순간 지체없이 내려와야 하는 행동을 요구하는 명령사입니다. 지체하거나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수 없는 화급한 결과만을 요구하는 명령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행동의 기회를 촉구하는 명령입니다. 바로 여기에 부름의 복음의 특색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에게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유월절을 먹을 때 급히 먹은 경우와 같습니다.
*출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기독교의 복음! 곧 부름의 복음은 속히 나오라는 것입니다. 지체 말고 예수께로 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는 멸망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날을 바라보고 백성들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계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합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는 삭개오의 회심의 고백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의 가진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겠다고 자원하는 삭개오의 모습은 얼마 전에 자기의 완전한 율법적 생활을 내세우며 영생을 얻고자 주님을 찾아왔던 부자 관원이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는 주님의 말씀에 근심하여 결국 영생을 포기하고 예수를 떠나갔던 사실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삭개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경멸받던 세리였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기쁨의 대가로 자기를 비난하고 욕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평생의 힘을 다하여 모은 재산의 절반을 그 자리에서 선뜻 내어 놓은 반면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그 관원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받았는데도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한 푼의 재산도 내어 놓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의 변화된 모습은 그의 회개의 행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도적질한 것을 고백하면 그의 원주인에게 불법적으로 취한 액수에다 1/5을 더하여 보상하면 됩니다.
*민5:7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그러나 도적질한 것이 탄로 나고 여러 사람 앞에서 도적으로 인정되었을 때는 2배 내지 4배로 갚아야 합니다.
*출22:1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삭개오는 주님 앞에서 세리장이라는 직책을 남용하여 남의 재산을 부당한 방법으로 강탈한 것이 있으면 스스로 사배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회개가 율법에 치우치지 않고 철저한 것과 불의를 확실하게 뉘우치는 행동임을 보여줍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어떠한 말씀도 듣기 전에 먼저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실천적 행동을 한 것입니다. 삭개오의 이러한 선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 역시 즉각적이었습니다.
*눅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조금 전까지도 죄인 취급을 받았던 죄인에게 구원을 선언한 것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배타적인 대접을 받아온 삭개오를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게 한 형제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하심으로 삭개오의 참믿음을 인정해 주신 주님은 그 선언에 대한 신적인 권위도 부여하셨습니다.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저 유명한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뮐러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16살 되던 해에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갔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술과 여자 노름 등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뮐러가 20세 되던 해에 성경 속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삶에는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예배와 기도와 헌신의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고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13만 5천 달러의 모든 재산을 불쌍한 고아를 돕는 일에 사용하였고 한평생을 고아를 돕는 일에 헌신하여 수많은 기적과 축복을 체험하였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러한 주님의 음성이 이 땅에 들려올 때에는 인류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이 부름은 인생을 영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이러한 부름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이러한 부름을 받은 우리는 즉각적인 응답을 하기를 소원합니다. 영광의 주님을 영접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구원이 온 집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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