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12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마르7,14-23)
Jesus summoned the crowd again and said to them, “Hear me, all of you, and understand. Nothing that enters one from outside can defile that person; but the things that come out from within are what defile.”

말씀의 초대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솔로몬을 찾아온다. 그녀는 평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점들을 솔로몬에게 묻는다. 솔로몬은 그때마다 막힘없이 지혜롭게 답변한다.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탄복하며,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신 주님께 찬미를 드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몸 안에 있는 것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형식적인 종교 의식을 비판하시며 정결과 부정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을 내리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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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천주교에서는 죄의 근본에 일곱 가지의 실마리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을 ‘칠죄종’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일곱 가지는 교만, 질투, 인색, 분노, 탐욕, 음욕, 그리고 나태입니다. 교만, 인색, 탐욕, 음욕은 자신의 이익을 지나치게 원함으로써 생기는 죄들입니다. 그리고 질투, 분노, 나태는 자신의 불편을 지나치게 피하려는 데에서 생기는 죄입니다. 이는 모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하여 사랑이 부족한 데에서 생기는 결과이므로, 칠죄종을 극복하는 길은 애덕과 극기의 정신을 기르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이 일곱 가지가 있다면 그것을 치료할 약도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일곱 가지 죄의 실마리를 이겨 내는 일곱 가지 덕목은 무엇일까요? 그 첫째는 남에게 겸손함으로써 교만을 이겨 내는 것이고, 둘째는 남에게 어질고 남을 사랑함으로써 질투를 이겨 내는 것이고, 셋째는 재물을 이웃과 나눔으로써 인색함을 이겨 내는 것이고, 넷째는 참고 견딤으로써 분노를 이겨 내는 것이며, 다섯째는 집착을 없앰으로써 먹고 마시는 것에만 빠져드는 탐욕을 이겨 내는 것이고, 여섯째는 욕망을 끊음으로써 음욕에 빠지는 것을 이겨 내는 것이고, 일곱째는 하느님을 부지런히 섬기고 착한 일을 함으로써 게으름을 이겨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밖에 있는 사물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 사람을 더럽히는 부정의 뿌리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하신 것이지만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들은 우리 마음 안에 잠재해 있습니다. 어떤 것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장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죄의 뿌리는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습니다. 나쁜 생각과 악한 마음은 악마가 우리에게 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릇된 의지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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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음식에 대해 이토록 명확한 답변을 줄 수 있을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음식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신 것입니다. 음식은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 있을 뿐입니다. 먹어서 ‘악이 되는 음식’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먹어서 ‘선이 되는 음식’도 없습니다. ‘기피 음식’이 있는 것은, 그것을 먹고 많은 이들이 혼이 났기 때문입니다. 음식은 그저 음식일 뿐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대하면 모두가 이로운 음식입니다. 예법은 사람 사이에 허물없이 지내자고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예의를 너무 따지면 관계가 오히려 딱딱해집니다. 친밀한 것이 사라집니다. 예법의 노예가 되는 것이지요. 언제라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 예법이 아닙니다. 조상을 섬기라고 제사가 있는 것인데, ‘제사법’이 너무 까다롭다면 제삿날이 귀찮아집니다. 신앙을 도우려는 ‘교회법’인데 신앙생활을 막고 있다면 올바른 법이 아닙니다. 내용은 외면하고 형식만 좇다 보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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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들어가는 것’이 더럽힐 수는 없다는 말씀! 과연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살면서 가장 많이 뱉어 내는 것은 말입니다. 말로써 남을 더럽히고 자신도 더럽히는 경우를 수없이 경험합니다. 그러기에 가끔은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침묵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말을 하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문을 잠그고 방 안에 숨어 지내는 것보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악에 물들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식 자체에 윤리적 잣대를 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먹어서 ‘죄 되는 음식’도 없고 ‘선이 되는 음식’도 없다는 선언입니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아직도 ‘음식 논쟁’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는 것이 ‘힘 자체’는 아닙니다. 아는 것을 실천할 때 힘이 됩니다. 어쭙잖게 알아서 남에게 피해 주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요? 모든 음식은 약입니다.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가끔은 음식을 먹는 자세도 돌아봐야 합니다. 급히 먹기에, 홧김에 먹기에, 분노하면서 먹기에 우리의 언어가 급해지고 분노로 얼룩지는 것은 아닌지요? 건강한 삶은 언제나 절제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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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1,1-47)와 신명기(14,3-21)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이 내용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먹거나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부정한 짐승들이 많이 나열됩니다. 이러한 전통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 이스라엘 국민들만의 음식인 ‘코셔’(Kosher: 돼지고기를 포함한 부정한 음식이 들어 있지 않은 이스라엘의 종교 음식)를 탄생시켰고, 특히 정통 유다인들은 이 규정을 엄격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적인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이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강조하시면서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종교 규정들을 비판하십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화를 내는 것도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화를 내는 것이요, 기쁜 것도 ‘무엇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내가’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한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돌릴 수 있는 마음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연히 텔레비전을 틀었다가 아주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하나 있었습니다. 진행이 너무나도 재미가 있어서 가슴을 졸이며 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끝나면서 다음 주 예고편이 나옵니다. 즉, 이 뒷부분을 보기 위해서는 다음 주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말로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 방송을 이 드라마를 보게 되면 마지막 회가 아니기 때문에 또 다시 다음 주까지 기다리라는 예고편을 또 다시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결말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인터넷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 드라마의 원작인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구입했지요. 그리고 어제 비록 피정 중이지만 짬짬이 시간을 내서 다 읽었습니다.
이번 주부터는 굳이 드라마를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책을 다 읽음으로 인해 결과를 아는 이상, 가슴 졸이면서 또한 결정적인 순간에 드라마가 끝났다며 화를 낼 필요도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드라마가 어떤 현장감을 주기는 하지만, 책에서 주는 그 깊이와 감동에는 쫓아오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오히려 책을 읽게 되어서 더 잘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 성경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성격역시 바로 이러한 이유로 생겨난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당신을 느낄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지만, 또 우리의 삶 전체에서 주님을 느낄 수는 있지만, 성경을 통해 오히려 더 빨리 주님을 느끼고 깨달을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더 빨리 주님의 뜻에 맞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배려를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당신의 그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쉽게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도 어렵고 힘들게 전해주실 때가 많습니다.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이지요.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거룩한데, 당신의 창조물인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 역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성경도 전해주시고, 그밖에 여러 당신의 창조물을 통해 당신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계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창조물이라 사람을 더럽히지 않지만, 하느님의 창조물인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 즉 나쁜 생각,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등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시지요.
거룩한 창조물답게 우리의 마음 역시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거룩해질 때, 세상 전체가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들을 위해 갖은 방법을 쓰고 계시는데, 우리들은 어떤 노력을 과연 하고 있습니까? 내 자신의 마음부터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과거는 생각하기 위해, 현재는 일하기 위해, 미래는 즐거움을 위해 존재한다.(디즈레일리)

공동체, 주님의 선물
-안융 신부-
수도공동체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주님께로 향한 사랑과 열정 하나만으로 함께 모여 살아 계신 말씀을 중심으로 친교를 나누고, 창립자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은사(카리스마)를 삶 안에서 구체화시키며, 순명과 청빈과 정결의 복음 3덕을 지켜 나갑니다. 그러기에 수도공동체는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라는 복음정신이 온전히 녹아 있는 말씀의 학교입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도 인간적인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관계의 어려움에서 오는 긴장이 있고, 서로의 부족함에 대해서 인내하지 못하는 성급함도 있으며, 자신과 타인과의 다름을 다양성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미성숙함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정의 바이러스가 약할 때는 주변의 도움으로 치유될 수 있지만, 그것의 힘이 너무 강하면 자칫 공동체를 와해시키기도 하고 수도생활의 영적 이상을 흐려지게도 합니다. 공동체가 하느님의 선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할 때 그 선물의 가치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쁨과 행복 의 에너지를 유발시킬 수 있는 긍정의 바이러스를 서로 앞다투어 퍼뜨려야 합니 다. 더 많이 웃어 주고, 더 많이 인내해 주고, 더 많이 긍정하고 인정해 주는 긍정의 바이러스를 통해서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즐거움 속에서 주님을 섬기십시오.(필립보 네리)

류해욱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진정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장 소중한 것이 음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 바로 음식이 무엇인지에 따라 깨끗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한테는 정결한 음식과 불결한 음식이 따로 있습니다. 먼지나 흙 등의 더러운 것이 묻었기 때문에 불결한 음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이미 불결한 음식으로 규정해 놓은 것이 있고, 그것을 먹게 되면 정결하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고방식을 지니고 계십니다. 사람을 더립히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아니라, 바로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 바로 마음이지요. 다시 말해 어떤 마음을 지니느냐에 따라 정결한 사람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음식은 당연히 하느님이 창조하신 동식물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니 그것 또한 좋은 것이며 깨끗한 것입니다. 다만 더러운 마음으로 만들면 음식도 더러울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가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며 늘 주의해서 살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바로 마음입니다.

모든 걸 똥으로 만드는 탐욕
-김찬선신부-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내가 누구에 의해 과연 더럽혀지는가? 아니 하느님에 의해 내가 더럽혀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아무도 똥을 먹는 사람 없고, 똥 가운데서 뒹구는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그럴 의지만 있다면 나는 아무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똥을 먹고 자기가 똥을 싸고 자기가 싼 똥 자기가 깔아뭉개고 앉음으로 더럽혀지는 겁니다.
그런데 똥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겠는가? 절대로 그럴 리 없고 좋은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삼키는 것이고, 우리 속담으로 얘기한다면 쇠똥 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는 사람이 뒹구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탐욕의 위가 있고, 좋은 것이라면 다 집어삼키는 위胃가 큰 위대胃大한 사람이 많습니다.
이 탐욕의 위가 좋은 것을 똥으로 만드는데, 그것이 하느님의 것인 줄도 모르고 집어삼키고, 한도 끝도 없이 집어삼키기 때문입니다
창세기가 이것을 잘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따먹지 말라는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으며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따 먹은 것인데 먹고 나니 선과 악을 알게 되고, 따 먹은 것은 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탐스러워서 따먹은 겁니다. 하지만 욕심으로 먹으면 그게 다 똥이 됩니다.
그러나 가난하게 먹으면 먹은 게 다 선이고, 겸손하게 무엇을 먹으면 먹은 게 다 은총이며, 사랑으로 무엇을 먹으면 그것은 단지 선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은 아무래도 관상을 하는 것보다는 묵상을 하는 것이 낫겠네요.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특정한 사건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가르침의 내용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고 계시거나 삶에 대한 가르침을 베풀고 계시는 장면들은 복음관상보다는 묵상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묵상을 한다고 해서 너무 머리를 써서 이것저것 궁리해 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설사 그렇게 해서 나름대로 좋은 생각을 얻었다손 치더라도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기에는 너무나 미흡하니까요. 그 경계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의 지성이 움직이는 부분과 성령께서 움직이시는 부분의 경계 말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것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한 가지 참조할 만한 것은 성령과 더불어 우리의 지성이 움직이고 있다면 생각의 전개가 그렇게 빠르진 않다는 것입니다. 파도가 천천히 백사장으로 밀려 왔다 밀려 나갔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점점 깊은 바다로 나아가는 형상과 비슷합니다. 생각이 좀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되돌아와 머물고 그러곤 다시 앞으로 전개되어 나가곤 할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서 묵상하는데, 우선은 예수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 더 뚜렷하게 더 깊게 알아듣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을 대비시켜 말씀하시는 내용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며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음식과 마음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습니다만, 그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스스로가 사물이나 사건들을 어떤 지평 위에서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좀더 근원적 차원에서 살펴봄도 유익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인천 가톨릭 대학교에서 사제 연피정 중에 있습니다. 강의를 듣고 묵상을 하며 또한 신부님들과 대화를 나누며 많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착각 속에 살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내가 하는 것은 다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만 속에 있었으며, 남들의 내게 대한 부정적인 말들을 듣지 않으려는 편협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용서와 사랑을 말하면서도 정작 내 자신은 용서하지도 또 사랑하지도 못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모든 모습을 볼 때,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이는 빠다킹 신부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지저분한 빠다킹 신부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들은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내 자신을 더럽혔던 것은 주변의 환경이나 남의 탓이 아닌, 내 안에 간직하고 있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마음 때문이었음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나그네가 사막에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가까운 데에 마을이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방향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참을 헤매다가 드디어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곧 마을을 발견할 것이라는 생각에 무척 기뻤지요. 그래서 더욱 더 힘차게 그 발자국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마을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깊게 바라보니, 그는 자기 발자국을 따라 한 곳을 계속해서 맴돌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나그네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하느님!’을 외치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밤하늘에 유난히 밝게 빛나는 북극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북극성을 통해 방향을 알게 된 그는 얼마 후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것들이 나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라는 착각 속에 자주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나를 이끌고 계신 분은 북극성처럼 환하게 길을 알려 주시는 주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철저하게 따르는 우리들이 될 때, 이 세상의 어둠에서 벗어나 밝은 빛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분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다시금 나를 더럽히는 것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나를 더럽히는 것들을 남의 탓, 환경 탓으로만 외쳤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나를 철저히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빛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똑똑한 것 보다는 친절한 것이 오히려 더 낫다.(탈무드)
중독
-김효준신부-
외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술을 즐기고, 도박을 즐기고, 게임을 즐깁니다. 그것이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고,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무참히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감각’을 통해 외부로부터 느낄 수 있는 즐거움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중독’이라는 무거운 짐만이 남을 뿐입니다. 즐거움은 ‘감각’을 통해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 안에 심어주신 신앙의 눈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러니 열악한 환경에서도 순수한 기쁨을 누릴 수 있고, 풍족한 환경에서도 고통에 몸부림칠 수 있습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그를 더럽힌다.” 내 안에 좋은 것이 들어 있으면 좋은 것이 보입니다. 외부의 환경이 아무리 나를 힘들고 지치게 만들지라도 내 눈에 좋게 보이니 그것마저도 좋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내 안에 부정적이고 나쁜 것이 들어 있으면 환경이 아무리 풍족하고 사랑스럽더라도, 나쁜 것만 보입니다. 외적인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영원한 것을 찾으십시오.
나는 누구?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문득 전에 들은 가요가 생각이 나서 인터넷을 통해 그 노래를 찾아냈습니다.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에 물들고 싶어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그대 위해 노래하겠어.
내가 만일 구름이라면 그대 위해 비가 되겠어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위해 되고 싶어”
참 아름다운 가사이고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시인이라면 누군가를 위로하는 노래가 나오고 구름이라면 누군가를 적셔주는 비를 뿌릴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꾼이라면 누군가를 죽이는 독설이 나오고 사기꾼이라면 누군가를 등치는 감언이설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누구는 시인이 되지 못하고 저주꾼이 되고 누구는 구름이 되지 못하고 사기꾼이 되는지?!
그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기주의자도 시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무엇이든 자기 아가리로 집어넣고 쳐 넣기 때문에 감사가 나오고 축복이 나오고 노래가 나올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무도 명쾌히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아가리로 들어간 것은 뒤로 똥이 되어 나올 뿐입니다. 그 똥은 너무도 냄새 지독한 독설과 저주, 중상과 모략입니다.
감사와 축복과 노래는 오직 가난한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의 특전입니다.
원죄의 존재 이유
-전삼용신부-
저는 초등학교 때 축구부를 하였습니다. 시골 학교였음에도 대회에 나가면 꽤 좋은 성과를 거두곤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감독님이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변변한 축구화도 없었던 우리들이 장비가 좋은 도시 아이들을 이기는 길은 그 장비를 갖추고 뛰는 아이들보다 더 잘 뛰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많은 훈련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훈련 때는 어른들의 큰 공으로 연습하였습니다. 공이 매우 커서 세게 차도 발만 아플 뿐 잘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어른들의 공으로 훈련하고 있음을 알았던 것은 첫 대회에 나가서였습니다. 다른 팀들이 연습 공으로 가져온 것들은 저희 공에 비하면 핸드볼 공 같이 작아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큰 공으로만 차다가 작은 공으로 차려면 적응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막상 경기에 들어서니 상황은 달랐습니다. 평상시엔 아무리 세게 차도 굴러다니기만 하던 공이 살짝만 맞아도 많이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그것이 신나서 뻥뻥 내질렀고 무거운 공에 익숙해 있던 저희들이 차는 공은 워낙 빠르게 날아가 상대의 골키퍼가 잘 잡지를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첫 출전한 시합에서 축구화도 신지 않은 채 준우승을 하는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가끔 하느님께서 왜 인간에게 원죄로 인한 죄의 뿌리를 심어놓으시어 교만이나 육체적인 욕망, 또 소유욕 같은 것과 끊임없이 싸우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답은 경기에서 승리하게 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존의 눈물’이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놀란 것 중의 하나가, 그 원주민들이 현대 문명과 접하면서 많이 죽게 되었는데 가장 원주민을 많이 죽게 한 것이 사람들의 총칼이 아니라 ‘감기’와 같은 외부에서 들어온 병균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이태리에 와서 어떤 모기에 물리면 그 가려움이 몇 년이 가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어렸을 때 그 모기에 물려보지 않아서 몸에 항체가 만들어져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감기에 걸려보지 않아 감기 항체가 없는 이들은 단순한 감기만 걸려도 살아남기 힘든 것입니다.
감기는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데 바이러스가 있다고 해서 항상 감기에 걸리는 것은 아니랍니다. 코나 몸 어디에 감기 바이러스는 항상 존재한다고 합니다. 보통 때는 사람이 감기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지만 스트레스나 과로로 체력이 떨어지면 그 때 감기 균이 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감기에 걸리는 것이라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죄라는 종합병균을 우리 몸속에 넣어주신 이유는 비록 지금은 고생을 할지라도 나중에 그런 병균들이 침투할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워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손과 그릇을 씻는 전통을 강조하는 것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안으로 들어오는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은 결국 뒤로 다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자신 안에서 나오는 나쁜 행위들입니다. 나쁜 경향들은 누구나가 원죄의 결과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 나쁜 경향들이 행동으로 밖으로 나올 때 자신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마치 감기 바이러스가 우리 안에 있더라도 체력이 떨어지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원죄의 영향으로 위와 같은 경향들이 있더라도 내 자신이 죄를 짓기를 원치 않으면 그것들이 죄가 되어 나를 더럽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그것을 참아내는 것은 매우 힘들고 큰 훈련입니다.
결국 하늘나라에선 이 원죄로 물든 육체를 버리고 원죄 없는 깨끗한 육체로 살게 될 것인데 그 때에는 지금의 훈련으로 인해 어떠한 유혹도 이겨낼 수 있도록 강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과 같이 다시는 하늘에서 죄를 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내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경향들이 나 자신을 더럽힌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감기 바이러스가 들어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들이 활동을 하지 못하게 자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양식을 매일매일 충분히 먹고 꾸준한 운동을 통하여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자신과 싸워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 예방주사와 같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서 절대로 죄를 짓지 않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훈련을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절대 ‘나는 안 돼!’, 혹은 ‘나는 원래 이래!’하며 자신 안에 있는 경향에 주저앉지 말고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지치지 말고 자신과 싸워나갑시다.

<스님과 술꾼>
-양승국신부-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스님이 술집에 들어가면 그 술집이 절간이 되고, 술꾼이 절간에 들어가면 그 절간이 술집이 된다."
생각할수록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말인 듯 합니다.
우리가 매순간 내쉬는 "숨"과 연결시키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이해됩니다. 숨이라고 해서 다 같은 숨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아래 사는 한 맑은 영혼이 들이마시는 숨은 그 자체로 영혼의 양식이 되며, 내뱉는 숨결은 그 자체로 감미로운 기도가 됩니다. 이런 숨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은 생명의 숨을 쉬는 사람이며, 매 순간 성령을 들이마시는 사람이기에 고통 가운데서도 평화와 기쁨을 누립니다.
반대로 성령을 거슬러 살아가는 한 영혼이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은 그저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호흡일 따름입니다. 거기에 과도한 권력욕이나 극단적인 이기심이 더해지면 그 숨결은 그야말로 죽음의 숨결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숨을 쉬는 사람은 내면적으로 끊임없는 자기 버림, 자기 봉헌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숨을 통해 우리 육체 안에서는 매 순간 생명의 축제가 벌어집니다. 이렇게 진정한 숨은 기도입니다. 진정한 숨은 하느님께 대한 지속적인 봉헌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숨에 대한 의식과 통제는 우리를 기도하는 사람,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므로 보다 자주 자신의 숨결을 의식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매순간의 호흡을 기도화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내쉬는 날숨은 나를 비우고 죽이는 숨입니다. 들이키는 숨은 하느님의 영과 생명을 수용하는 숨입니다. 이런 들숨과 날숨의 반복을 통해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나날이 성령 안에서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를 버리면 버릴수록 하느님의 숨, 성령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드라마가 중독성이 있어서 한 번 보기 시작하면 헤어 나오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몇 년 전에 인기 있었던 드라마에 한번 빠졌다가,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으면서까지 드라마를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얼마 전 저녁에는 동창 신부와 함께 하는 즐거운 만남이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를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드라마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동창 신부 역시 예전에 드라마에 빠졌던 저처럼 그 시간이 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드라마를 꼭 봐야만 하는 중독에 걸린 것이지요.
요즘 이렇게 드라마에 푹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꽃보다 남자, 아내의 유혹, 에덴의 동쪽 등등……. 인기 드라마 보는 재미에 사신다는 분들도 있더라구여.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이 드라마에 사람들은 왜 푹 빠질까?’
그 드라마의 내용이 특별하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드라마의 내용이 우리의 일상 삶과 똑같으면 어떨까요? 별 특별한 일 없이 먹고 자고 일하는 것이 계속해서 똑같이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생활의 연속이라면 이러한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있을까요?
드라마에는 뜻밖의 일들이 많이 일어나며, 교훈적인 내용까지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 뜻밖의 일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특별한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고, 교훈적인 내용까지도 얻을 수 있기에 그 시간만 되면 드라마를 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지요.
문득 우리의 삶도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미운 사람을 더 예뻐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그 삶이 드라마와 같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드라마 같은 내 삶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또 다른 희망을 전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기쁘고 행복한 드라마와 같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그렇게 살기 위해 우리들이 피해야 할 것들을 말씀해주시지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이렇게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들은 모두 잘 나가는 드라마처럼 멋지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드라마에만 관심을 갖고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바로 내가 주인공이 되어 멋진 드라마를 만들도록 합시다.
멋진 드라마는 연말이 되면 상도 많이 받더군요. 내가 주인공이 되어 만들어나가는 이 삶도 심판 날에 주님으로부터 평가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멋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노동이 신체를 굳건하게 하듯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것은 정신을 강하게 한다.(세네카)

얼짱. 몸짱. 맘짱!
- 이재학 신부-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예쁜 사람이 참 많다. 여자만 예쁜 것이 아니라 남자 아이들도 어쩜 그렇게 예쁜지 모르겠다. 원래 남자는 ‘멋있다.’, ‘잘생겼다.’고 했는데, 요즘 아이들에게는 ‘예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다. 아무튼 요즘 사람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얼짱이니, 몸짱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몸짱이 되려고 열심히 운동하는 것이야 뭐라 할 수 없지만, 살을 빼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죽어라 살을 빼는 모습이 안쓰럽다. 생긴 것이야 타고나는 것인데 ‘놀라운 현대 의술’ 덕분에 예뻐지려는 사람도 많다.
“어느 날 하느님이 자매에게 ‘너, 앞으로 40년은 건강하게 살게 해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자매는 기왕 사는 거 예쁘게 살겠다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들여서 싹 뜯어고쳤다. 이제 좀 살아야지 하는데 그만 죽었다. 하느님께 항의를 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무 뜯어고쳐서 못 알아보았다.’” 물론 건강하고 예쁜 것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얼짱·몸짱이 아니라 ‘맘짱’이 아닐까? 마음이 따뜻한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 사랑이 많은 맘짱. 하지만 세상은 맘짱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남들은 어찌되었든 자기만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주님께서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더럽힌다고 하신다. 주변 것들보다 우리들 마음의 더럽고 추한 것을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맘짱인 사람이라면 마음에서 아름답고 좋은 것들이 흘러넘칠 것이다. 그래서 맘짱인 사람들한테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감기는 초기에
-전삼용신부-
요즘 또 환절기라 그런지 주위에 감기에 걸린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감기는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데 바이러스가 있다고 해서 항상 감기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코나 몸 어디든지 감기 바이러스는 항상 존재한다고 합니다. 보통 때는 사람이 감기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지만 스트레스나 과로로 체력이 떨어지면 그 때 감기 균이 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감기에 걸리는 것이라 합니다.
감기에 걸렸더라도 초기감기 때 잡아야지 일단 심하게 들어버리면 장시간 고생하게 되어있습니다. 마치 불이 일단 번지게 되면 스스로 꺼지기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처럼 끌 수 있을 때 끄지 못하면 큰 재난을 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 인생에서의 오랜 시험을 마감하는 의미로 함께 공부하는 사제들과 술을 한 잔 마셨습니다. ‘먹고 죽자~!’라고 외치며 열심히 마시다보니 이제 그만 마셔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동료 신부가 술을 계속 시켰습니다. 뭐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계속 마시고 집에 들어오니 이미 정상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도 역시 술이 깨지 않았습니다. 오전 내내 입에서 술 냄새가 났고 그래서 기분도 안 좋고 죄책감도 들었습니다.
담부턴 다음 날까지 지장 있도록 마셔대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마시기 전부터 그런 결심으로 마셨다면 절제가 되었겠지만 중간에 그만 마셔야겠다고 해 봐야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예 초기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무엇이든 커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를 짓는 순간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뱀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때부터였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을 때는 죄가 완성되는 때이지 그 때가 딱 죄를 짓는 순간은 아닙니다.
제방이 무너질 때 아주 작은 구멍에서부터 물이 새어나와 결국 큰 제방이 무너지는 것처럼 큰 죄를 갑자기 짓는 경우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삶을 반성할 때 일어난 일만 가지고 반성하는 것은 잡초를 뽑되 뿌리는 남기고 보이는 것만 잘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런 죄는 또 짓게 되어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빙산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것처럼 눈에 보이는 죄가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우리도 고해보기 전에 죄를 성찰할 때 그런 죄들이 무엇 때문에 나오게 되었는지 그 뿌리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손과 그릇을 씻는 전통을 강조하는 것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안으로 들어오는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은 결국 뒤로 다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자신 안에서 나오는 나쁜 경향들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외적인 죄들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의도들’이 사람을 벌써 더럽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음탕한 마음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것도 이미 간음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실제로 간음을 하지 않아도 마음 안에서 이미 그 음탕한 의도가 그 사람을 더럽혔다는 의미입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겉보다도 우리 마음에서 어떤 생각들이 나오고 있는지 항상 살펴보아야합니다.
결국 내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경향들이 나 자신을 더럽힌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감기 바이러스가 들어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들이 활동을 하지 못하게 자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양식을 매일매일 충분히 먹어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혹 안 좋은 마음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을 초기에 잡아야합니다. 안 그러면 나쁜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안 좋은 생각들을 계속 하지 말고 항상 조심하며 초기에 뿌리를 뽑는 습관을 기르도록 합시다.
새벽을 열며
저는 지금 인천 가톨릭 대학교에서 피정 중입니다. 그런데 피정이라고 해서 하루 종일 기도만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기도와 묵상도 하겠지만, 낮 시간에는 잠깐 쉼의 시간이 있어서 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지요. 저 역시 이 시간에 운동을 하려고 자전거를 가지고 갔습니다. 사실 제가 있는 간석4동 성당 근처에서는 자전거 탈 곳이 그렇게 마땅하지가 않거든요. 하지만 강화도는 자전거 탈 곳이 너무나 많아서 가지고 간 것이지요.
아무튼 어제 점심 식사 후 저는 복장을 갖추고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두 달 만에 타는 자전거입니다(물론 동네에서 타고 다니기는 했지만, 이렇게 복장을 모두 갖추고 타기는 올해 처음입니다).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코스는 전에 주로 타던 길을 선택했습니다. 적당히 땀을 낼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무리가 되지 않는 길이지요. 두 시간 정도 탈 것을 생각해서 40Km 정도의 거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만에 ‘힘들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더군요. 예전에는 땀도 흘리지 않고 오르던 길이 왜 이렇게 가파르게 느껴지던 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학교에 도착할 때쯤에는 다리에 쥐까지 났다는 것입니다.
전에 강화도에 살 때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왜 어제 일어났을까요? 제 자전거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강화도의 길이 바뀐 것일까요? 아니면 저 자전거 잘 타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까요?
모두 아닙니다. 바로 제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두 달 동안 자전거를 타지 않은 몸이 ‘힘들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나’로부터 시작된 문제점들이 너무나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들은 ‘나’ 아닌 외적인 것에 그 문제점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진짜로 외적인 것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문제점도 전혀 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주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나쁜 생각들과 나쁜 행동들이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던 창조물인 사람을 더럽히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선은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나쁜 생각을 없애고, 내 밖으로 나오는 나쁜 행동들의 수를 줄여 나갈 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보며 “참 좋다.”라는 하느님의 고백을 우리 역시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의 건강을 생각하며 간단한 운동이라도 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빠다킹신
사랑의 소명
-이정호신부-
유다인들의 정결 예식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식이나 사람 등 부정함을 피하는 것은 죄로 물든 세상과 구분되어 오로지 하느님께만 속한 특별한 민족이라는 자각을 심어주었고 그들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인 취급하였으나 이것이 지나쳐 그 본래 의미를 망각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천주교인들은 이러한 폐쇄적인 구분을 넘어 넓은 마음으로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세상에 파묻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는 신앙의 삶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미사참례와 기도, 선행 등의 외적인 실천뿐만이 아니라 그 실천을 이끌어내는 마음속 사랑의 자세가 그것입니다. 마음에 간직된 것은 말로나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선한 지향과 자비로운 사랑을 품고 기쁨의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하느님의 빛이 우리를 통해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이미 개신교인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인구 세 명 중의 한 명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우리 사랑의 소명을 충실히 살아가고자 한다면 세상이 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때
-윤인규 신부-
우화등선(羽化登仙). 그것은 번데기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벌레에서 비롯된 말이다. 벌레는 알에서 깨어나 충이 되고, 번데기가 되고, 날개를 달면 하늘을 난다. 하늘을 나는 빛깔과 춤사위 재주로 보아서는 그것이 땅바닥이나 나뭇가지를 기어다니던 징그러운 벌레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벌레의 변태과정은 시간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한다. 신앙은 시간을 성찰하게 만든다. 교회의 전례력은 신앙인에게 ‘때’를 성찰케 하는 시간표다. 세상과 사람의 처지를 성찰케 하고,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성찰케 한다. 시간에 대한 성찰은 더 본질적이고 더 근본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의 본성이요 하느님 계획이다. 시간에 대한 성찰은 시작과 끝, 과정에 대하여 애정을 갖게 한다. 그리고 시간 때문에 생기는 기쁨이나 괴로움을 멎게 한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게 느껴진다. 즐거운 시간은 짧게 느껴진다. 두 가지 모두 시간 자체를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안에 일어나는 일이나 만남에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시간을 길이나 무게로 느끼지 않는 길은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뿐이다. 유다인의 관습으로 빚어진 논쟁의 핵심은 시간을 성찰하지 않은 전통 때문이다. 손을 씻는 관습은 시간 속에서 생겨나 사라질 수 있는 인습(因習)인데도 본질로 착각한다. 시간에 대한 성찰은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본질로 인도하여 하느님께 이르게 한다.
연중 제5주간 수요일
- 박기흠 신부-
조상들의 지혜와 슬기로 생겨난 전통들이 우리에게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전통을 준수하고 지키는 것은 그 사회를 존중하는 것이며 때로는 이롭다. 그러나 오랜 전통을 지킨다고 해서 스스로 자신을 두고 선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선하다’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우리의 위선과 가면을 성실하게 벗겨 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나아가 그 전통들이 한낱 인습에만 매달려 천륜과 인륜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고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파손된다면 그 전통은 쇄신되거나 부정(否定)되어야 한다고 본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당신 반대편에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인습(1-8), 코르반에 대한 비판(9-13)에 이어 ‘금기 식품’에 대한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전통주장들을 비판하시고,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 14-16)고 하시면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예수께서 밝히신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정결례가 아닌 새로운 윤리를 말씀하시는데,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데, 마음의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7, 20-23)고 하신다.
예수님의 윤리는 양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사실 우리 인간의 행동의 모든 방향과 계획은 양심에서 나온다. 마음의 굴절, 편견, 거짓과 위선적인 사회일수록 사람을 차별하고, 특권층과 소외층, 억압자와 피억압자를 낳는다. 당시 이런 사회는 만연하였지만 새로운 윤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불결해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그런 예수님의 태도는 오히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갈등을 낳는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오류를 인내로 참아주시지만, 거짓과 위선은 가차 없이 단죄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윤리야말로 안전한 윤리이며 겉모습이 아니라 양심을 중요시 여기시며, 마음을 덮고 있는 완고한 가면마저 벗겨 내신다.
예수님의 윤리와 양심 법에 어긋난 시대의 역설들은 우리들 가운데에서 잔재하여 우리들 시야를 어둡고 흐리게 하고 있다. 사람과 건물이 높아졌지만 우리 인격도 그만큼 높아졌는지?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우리의 시야도 그만큼 넓어졌는지? 과거 어느 때보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기쁨도 그만큼 많아졌는지? 학력과 지식은 높아졌지만 상식과 판단력 또한 그만큼 높아졌는지? 전문가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그만큼 세상 문제는 줄어들었고, 약은 많아졌지만 양심은 그만큼 맑아졌는지? 아니면 너무 분별없이 향락에 빠지고 소비는 늘어나지 않았는지, 너무 성급히 화를 내며, 너무 드물게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더 깊게 배우고 넣는 법도 배워 익혀야 한다. 달도 갈 수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 반대편에서 인생길을 외롭게 가는 이웃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선물도 나눠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주를 정복했고,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안의 세계는 더욱더 회복하고 영혼의 오염은 더욱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김병로 신부-
◆오늘 복음은 유다인들의 청결의식에 관한 말씀을 하신 후 군중을 가까이 불러 하신 말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는 비유에 대한 설명이다. 복음은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주님께 그 비유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의 설명은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몸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몸을 더욱 살찌우고 건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나쁜 생각들·불륜·도둑질·살인·간음·탐욕·악의·사기·방탕·시기·중상·교만·어리석음 같은 악한 것들로 이것들이야말로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자명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들 중 과연 주님 마음에 들 정도로 제대로 된 생각·말·행동이 얼마나 될까? 조금이라도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사는 이들이라면 “주님, 저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아름다우며, 존귀하며, 가치있는 것들이기에 사람들을 더욱더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들입니다”라고 응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서면 언제나 내가 남긴 말이나 행동이, 또 그가 남긴 말이나 행동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은 적이 몇 번이나 되는가? 우리 모두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해야 하리라.
아름다운 마음
-강영구신부-
스승 예수님, 당신의 말씀은 천만 번 지당합니다. 정말 세상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것과 사람을 더럽히는 것들은 모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아름답게 가꿀 생각은 하지 않고 겉꾸밈으로 자신을 가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겉꾸밈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예뻐지거나 날씬해지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컬어 명품이라는 물건으로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서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는 일도 합니다. 돈과 권력, 지위와 명예로 자신을 겉꾸미기 위해서 권모술수, 사기, 수뢰, 협박, 공갈, 부정, 야합, 살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토록 처절하게 겉꾸밈 한 결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겉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고 거창합니다. 그러나 속은 썩을 대로 썩어서 온갖 악취가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마치 쓰레기더미나 똥 덩어리를 金으로 포장한 것과 같은 꼴입니다. 쓰레기나 똥 덩어리를 금으로 포장한다고 쓰레기나 똥이 금덩이가 될 리는 없지요. 어리석은 저희들을 굽어 살피소서.
예수님, 저는 가끔 부질없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는 안경이나 투시경이 있다면 이 세상은 천국天國으로 바뀔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 환히 드러나는 속마음을 가꾸려고 너나 할 것 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예쁜 얼굴보다 아름다운 마음, 날씬한 몸매보다 따듯한 마음, 고급 화장품과 갖가지 장신구로 치장한 외모보다 맑고 밝은 마음, 고급 상표의 명품을 걸치기보다 청정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겠지요. 대통령을 뽑을 때도, 국회의원을 뽑을 때도 누가 더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는지 보고 뽑게 되겠지요. 사제나 수도자들도 모두 맑고 밝은 마음(淸淨心) 가꾸기에 여념이 없겠지요.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마음을 품고 함께 어울려 산다면, 거기가 天國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5,3-12) 오늘도 아름다운 마음 가꾸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一明)
진정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에서도 부정(不淨)함과 정(淨)함에 대한 논쟁이 계속된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잣대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제자들의 부정함을 트집잡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29,13)를 인용하여 그들이 율법만큼 중요시하는 조상의 전통을 ’사람의 계명’(7절), ’사람의 전통’(8절)이라고 단언하셨다. 즉 사람들이 만들어낸 관습에 불과한 것을 율사들은 하느님의 계명인 양 내세운 것을 질타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만든 조상의 전통은 하느님을 섬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아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은 행동이 율법상 정결을 깨뜨린 부정함의 행동이 아닌 셈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바리사이와 율사들, 그리고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가까이 불러 모아놓고 정결에 관한 율법을 다시 세워 주시는 대목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더럽히고 진정 하느님 앞에 부정(不淨)함이 되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15절) 이 말씀으로 신약의 새로운 "정함"과 "부정함"의 율법이 세워졌다.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느 것도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 이것으로 구약에 불결하다 하여 금기한 음식들은 (레위 11장; 신명 14,3-21) 모두 폐기된 셈이다. 사실 유다인들에게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들, 정(淨)한 새들과 곤충들, 그리고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들 외에 다른 동물은 거의 부정한 것이어서 식용(食用)이 금지되었다. 그나마 그것도 주검에 닿으면 다 부정한 것이 되어 먹을 수 없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주식으로 삼았던 메뚜기(마태 3,4; 마르 1,6)는 식용으로 허용된 곤충(레위 11,22)이었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모든 금기식품을 단 한마디 말씀으로 폐기해 버리셨다. 자연 그대로의 모든 음식물이 명예를 회복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사람을 더럽히고 하느님 앞에 부정함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15절)이다. 여기까지가 바리사이들, 율사들, 그리고 군중이 들은 말씀이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물러갔을까? 대변(大便)을 생각했을까? 진정으로 더럽히는 것에 대한 설명은 제자들에게만 허용되었다. 어떤 음식이든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음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대변이 되어 배설되고 만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파고들어 사람을 더럽히는 부정(不淨)한 것은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22절) 이는 곧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죄악의 목록이다. 온갖 정결규정을 동원하여 ’껍데기’만 가지고 백성들의 정함과 부정함을 판단하던 율사들은 자신들이 내뱉은 말 때문에 도리어 부정하게 되고 말았다. "정함"과 "부정함"에 대하여 예수께서 새롭게 세우신 규정은 남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이 볼 수 없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는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지 않겠는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서 나오는 가장 먼저의 것은 말이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을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니 한마디의 말이라도 사랑과 깨끗함이 담긴 말이 되어야 하겠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
- 유광수신부-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닫도록 하여라."는 말씀은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도록 노력하여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삶의 근본적인 원리를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그럼 삶의 원리란 무엇인가?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이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창조된 모든 것은 "보시니 참 좋더라!"고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창조해 주신 좋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된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주인이고 창조된 모든 것들은 모두 인간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을 잘 사용하고 잘못 사용하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창조된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좋고 나쁜 것은 창조된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음식 자체도 그렇다. 모든 음식물은 다 배에 들어갔다가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음식은 인간의 말과 행동을 결정하는 마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로써 음식 자체가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 다만 인간이 좋은 음식을 먹으면 좋은 것이고 나쁜 음식을 먹으면 몸에 해를 끼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은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지 음식이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음식이든 음식은 다 배에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럼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인가?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즉 악의 출처는 사람 밖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어느 신체의 일부분이 아니다. 마음이란 지, 정, 의가 만나는 곳이다. 즉 인간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모아지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 중에서 어느 한쪽으로 너무 취우치지 않고 서로 알맞게 균형을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이요, 자기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훈련을 하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훈련을 쌓는다는 것이다.
마음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먼저 지성이 올바라야 한다. 즉 아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마음이 통한다는 말은 서로 아는 것이 같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 같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면 금방 알아듣고 서로 이야기가 된다. 반대로 마음이 갈라진다는 말은 아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아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것을 가지고도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생각이 다르니까 판단도 서로 다르게 하고 행동도 다르게 행하고 갈라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당신이 함께 있겠다는 뜻이다.
그럼 우리의 지성이 올바로 알아야할 것은 무엇인가? 진리이다. 진리란 하느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들은 서로 뜻이 통하고 하느님과도 통하고 서로 이야기가 통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려면 진리를 알아야 한다.
진리란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할 말씀이다. 즉 우리의 지성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이가 하나될 수 있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협력할 수 있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아도 즉 지적으로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감정이 없거나 의지가 약하면 인격자라고 할 수 없다. 또 감정은 풍부한데 아는 것이 없으면 변덕스러운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지성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순간 순간 자기 감정에 따라 생각이 변한다. 즉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성이 없이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성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다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지성인은 자기 감정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먼저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지성적이지 못하면 감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감정에 의존하다보면 순간 순간 마음이 변할 수밖에 없다. 감정은 바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침 저녁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고,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이 예민한 사람이 시를 쓰고 곡을 작곡하고 예술을 한다.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느끼는 감정에서 우러나온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인은 성격이 특별하고 예외적인 행동을 하기가 쉽다. 감정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 감정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본인 자신도 모른다.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이 어려워한다. 어떻게 비위를 맞추어야 할지를 도저히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은 본인 자신도 모른다. 자기 감정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직설적이고 즉흥적이다. 그리고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즉 감정이 가라 앉으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 하는 식이다. 그러니 주위 사람들만 미치고 환장하는 것이다.
의지만 강해도 안 된다. 의지만 강할 때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만 내 세운다. 무엇을 모르니까 자기 생각이 제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고집불통, 요지부동, 옹고집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떤 상황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인격자란 어느 한 가지 기능만 발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발전해서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이 세 가지 기능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인격자라 할 수 없고 균형잡힌 인간이 될 수 없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지, 정, 의의 세 가지 기능을 올바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모순된 행동들이 나오는 가장 큰 원인은 "어리석음"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하느님으로 받들어 섬기거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황해져서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로마 1, 21)
어리석음이란 진리를 모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행동한다. 아무리 자기의 생각으로는 맞는다고 하더라도 진리가 아니라면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진리를 모르면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라는 어제 복음의 말씀에서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주위 환경이 아니라 내가 얼마큼 진리를 올바로 알아들었느냐에 달린 것이다. 내가 어리석으면 더러운 것이 나오고 내가 진리를 알면 진리를 말하고 행동한다. 즉 모든 것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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