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크라운 산도를 아시나요? 1961년에 나온 크라운 제과에서 만든 비스켓 과자인데 두 쪽 비스켓 사이에 달콤한 크림이 들어있는 과자입니다. 저는 우리 형님을 생각하면 크라운 산도가 떠오릅니다.
우리 형님은 제일 큰 아버지의 장남이십니다.
과거를 떠올리기 싫어하신 어른들께 자세한 얘기를 듣지 못했지만 큰 아버님 내외는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형님은 우리 집에서 지내시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태어나기 전 부터지요. 저는 젖이 없는 엄마에게서 태어나 암죽을 먹고 컸다는데 먹는 것이 시원찮았는지 뼈만 앙상한 애기였고 기관지가 약해 숨 쉬는 것이 억새풀을 스치는 마파람 소리가 났었다지요.
한번은 큰 이모가 저희 집에 다니러 왔다가 타작이 끝난 논바닥을 아이들과 뛰노는 형님을 봤는데 저를 포대기로 둘러업고 어찌나 들뛰는지 앙상한 목이 달랑거려 떨어질 것 같아 소릴 질렀답니다.
아마도 형님은 바로 위 누님과 저를 거의 도 맡아 키웠을 것입니다. 워낙 빈한한 농촌이었고 한 사람의 손도 아쉬웠을 테니까요.
언젠가 어머니가 저에게 아버지와 형님이 갈대밭을 개간해 논을 만들었다고 얘기하곤 했습니다.
참으로 고달픈 어린 시절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형님은 제가 자라는 동안 동네아이들로부터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이태 전에 형님은 서울로 떠났습니다.
명절 때에 한두 번 오셔서 서울 얘기를 해주시는데 들판에서 자란 저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다만 형님이 말쑥해진 모습을 보고는 서울이 굉장한 곳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뒤 따라 우리도 곧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단 칸 방의 샛방 살이었지만 형님은 자주 오셨습니다.
손에 크라운 산도 한 박스를 들고요. 단맛과 군것질에 목마르던 시절 크라운 산도의 맛은 환상적이었습니다.
고소한 비스켓에 달짝지근한 크림, 형님은 제 어린 시절을 즐겁게 해 주셨습니다.
휴일엔 촌놈인 저를 데리고 서울 구경을 시켜 주었습니다.
경복궁에서 열린 산업 박람회에 데리고 가 뺑뺑이를 태워주어 고속으로 회전해 뵈는 것이 여러 색으로 흘러가는 환상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양복을 짓고 남은 천으로 멋진 반 반지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요.
감성적인 이 씨 집안의 내력으로 형님은 눈물도 많았습니다.
중학생 때 형님의 직장으로 제가 찾아 간 적이 있었는데 다짜고짜 형님은 저를 부여잡고 우셨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저도 누선이 자극되어 형제는 한 동안 얼싸안고 펑펑 울었지요.
옆 사람들도 울지 않고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습니다.
한참을 울고 난 뒤 그 이유를 알았는데 집에 다니러 오셨다가 제가 신문을 돌리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아팠던 모양입니다.
고교 시절부터 형님은 집에 돌아와 저와 한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낙방하던 날 형님은 술을 잔뜩 드시고 와 또 한 번 우셨습니다. 친구들에게도 동생 자랑을 하셨다는데 몹시 속상했던 것 같았습니다.
동거 시절 우리의 방은 어머니와 누나가 방문을 열기를 꺼려하는 방 이었습니다. 술과 담배와 총각의 쾨쾨함으로 찌들어 역겨운 냄새 때문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황천에 갈 뻔 했지요.
저도 술 취했고 형님도 술을 드시고 와 우리는 사이좋게 스며든 연탄가스도 같이 마셨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늘 그러려니 하며 방문을 열지 않은 덕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옆에서 형님이 날 부르며 "강선아! 문 좀 열어보라." 하는 말을 듣고 대답은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도 기척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긴 누나가 문을 열어 우리는 살 수 있었습니다.
형님이 어느 날 저 더러 직장 근처로 나오라 하더군요. 저녁을 사주며 형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곧 결혼 할 거라며....
형수님을 처음 뵙고 차분하고 선한 모습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두 분은 셋방에 보금자리를 꾸렸습니다. 신혼집이 학교와 가까워 찾은 적이 있었지요.
그때가 첫 딸 재현이가 태어나 꼼지락 거릴 때였습니다. 잠깐 애기를 봐 달라고 하시더니 장을 봐 와 저녁을 산해진미로 맛있게 차려 주셨습니다.
형수님의 정성에 감동하고 미안한 마음에 유치한 시 한 편을 드렸었지요.
여러 번의 이사로 사당동에 누나 네와 영선이 형님이 아울려 아이들을 외롭지 않게키우며 그렇게 아이들은 활달하게 컸습니다.
저도 가정을 갖게 되자 서로 분주한 삶에 이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형님과 형수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삶을 살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형님이 고희를 맞이했습니다.
형님의 고희는 형수님의 깊고 고단한 삶도 배어있습니다.
이제 형님과 아울러 형수님의 여생이 고소한 비스켓에 달콤한 크림이 사이에 있는 크라운 산도 같으리라 확신합니다.
고희를 맞이하신 형님께 그동안 이 동생이 한 번 도 표현치 않아 쑥스럽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형님 사랑합니다.
2011. 4. 16.
항상 형님의 보살핌을 받은 동생 강선이가
서울 가든 호텔에서 형님의 고희연이 열렸던 자리에 발표했던 글입니다. 형님은 자식 농사를 잘 지어서 시집안간 딸은 롯테 쇼핑센터의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아들은 이공계 박사로 고려대 교수로 재직 하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