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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묵상글 (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 잔 것들에 마음 뺏기지 말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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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26 04:01
- 잔 것들에 마음 뺏기지 말라
오늘 잠을 깨니 비가 오고 있습니다.
잠결에도 뭔가 뒤숭숭했는데 비까지 오면서
강론 올리기 위해 늘 하던 묵상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어제저녁도 기도하는데 눈으론 기도하지만, 마음은 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식사 후 같이 사는 형제와 간단히 한잔하며 이 얘기 저 얘기하는데
얘기도 건성이었고 한 마디로 얘기에도 형제에게도 진실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새벽의 제 상태는 이런 저의 연장이었지요.
그래서 오늘 강론이고 뭐고 다 접어두고
감실 없는 경당에 앉아 저를 성찰하니 이유가 나왔습니다.
요 근자에 크고 작은 많은 일과 많은 만남이 있었고,
그러는 가운데 크고 작은 저의 걱정과 사람들의 걱정이,
‘잔걱정’, ‘잔근심’, ‘잔두려움’으로 제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며,
이것들이 하느님 앞에 있어도 하느님 만나는 것을 방해하고,
형제와 얘기하면서도 형제에게 진실하지 못하게 한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반성이 되었습니다.
유리창에 잔 먼지가 많이 쌓여도 잘 보이지 않듯이
제 마음의 창에도 잔걱정과 잔 두려움이 많이 쌓여
하느님도 형제도 잘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진실하지 못했던 겁니다.
크고 짙은 먼지가 유리창에 있었으면 즉각 알아채고 닦아내지만
너무 잔 먼지가 많이 쌓이면 알아채지 못하여 닦아내지 않는 것처럼
제 마음의 유리창 먼지들도 잘아서 잘 알아채지 못하고 닦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제 마음의 저 밑바닥에 잔걱정, 근심,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저의 하느님,
올해 날씨의 하느님은 저를 돕지 않으십니다.
바자회 때도 비 오고,
봉사자 소풍 때도 비 오고,
내일과 모레 김장 때도 비가 온다니 그렇지 않습니까?
전엔 하는 일마다 도와주셔서 작은 기적들을 많이 체험케 해주셨는데
올핸 하는 일마다 왠지 도와주시지 않아 잔걱정 근심에 싸이게 된 것인데
오늘 아침 묵상을 통하여 저 밑바닥에 있는 그 이유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 말씀이 제게 들렸습니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환난이 일어났을 때 속이는 자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고 하시는데
제게는 그까짓 잔걱정이나 근심을 쫓아가지도 그것들에 쫓기지 말라고 하시고,
잔 두려움들이기에 막연한 그런 두려움들에
네 마음 뺏기지 말고 하느님 놓치지 말라고 하시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잔걱정과 막연한 두려움들에 마음을 뺏기고 하느님도 놓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정신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뺏는 잔 것들 알아채고,
그런 것들 가운데서도 놓치지 않기 위해 하느님께 더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은 오늘 복음의 본 묵상보다
이런 하릴없는 묵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양해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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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이스라엘의 한 화물 수송기가 아파트와 충돌해서 주민 39명, 승무원 4명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워낙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연일 이 사건에 대해 보도했지요. 이제 그로부터 10개월 후 무작위로 선택된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심리검사가 있었습니다. 이때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대학생 중 65%가 이 사건과 관련한 유도 질문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사고의 영상을 직접 본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은 우리의 기억이 유도 질문이나 타인의 반응을 통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일어난 것처럼 만들어낸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즉,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 기억은 조작될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겪었는데도 나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입니다. 특히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유리한 기억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 기억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통해 다른 이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기억해야 할 과거가 있었습니다. 바로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 받은 율법이었습니다. 문제는 시대가 흐르면서 이 율법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그 해석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닌 잘못된 길로 이끌었고, 심지어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만 선택된 민족임을 강조합니다.
율법과 함께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이 자기들 안에 있기에 절대로 멸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끝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은 하느님께 맡겨진 시간이기 때문에, 헛된 소문에 빠져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만 율법과 성전을 가지고 있기에 선택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커다란 착각이고, 지금 당장 요구되는 자기의 변화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기준으로 하느님을 재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철저히 지금 당장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여기서 진정한 구원이 가까워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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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당신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당신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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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재건된 제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 왕에 의해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사실, 성전파괴에 대해서는 이미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 예고된 바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루카 21,8)
이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소.” “치유해주고 행복하게 해주겠소.”하고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국, 우상을 따르고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입으로는 주님을 구원자라 고백하지만, 정작 무엇에 목매달고 쫓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재물’이나 ‘능력’ 혹은 ‘세속정신’을 사이비 메시아로 따르고 섬기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또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고약한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녀석입니다. 우리는 곧잘 자신의 욕망과 생각, 자신의 주장과 뜻을 섬기고 추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 4,16)
그렇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
주님!
속이지도 속지도 말게 하소서.
재물에 속지 않고, 세속에 속지 않게 하소서
또한 나의 생각과 견해와 편견, 허영과 탐욕에 속지 말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내 자신과 내 자신의 뜻에 속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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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속임수에 휘둘리지 않는 삶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하였습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가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는데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셨는데도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혼란이 올 때 조심, 또 조심할 것은 혼란을 틈타서 극성을 피우는 속임수입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게, 저렇게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종말은 오늘 여기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왕국도 역시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오늘을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시대를 이미 살고 있고, 아직 그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면서 오늘을 최선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기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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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적에 시력이 좋았는데, 20년 전부터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당시에 캐나다 토론토에 살았는데, 도로 표시판이 잘 안 보여서 시력 검사했더니 안경을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2007년부터는 다초점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안경을 쓰면 멀리 있는 건 잘 보이는데, 가까이 있는 것이 잘 안 보였습니다. 시력 검사했더니 난시와 근시가 같이 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조금 어지럽지만, 다초점 안경을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안경을 보내왔습니다. 지금 안경이 오래되었고, 탈색되어서 맞추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새 안경을 사용하는데 멀리 있는 건 잘 보이는데 가까이 있는 것이 잘 안 보였습니다. 알아보니 렌즈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시 안경을 한국에 보냈고, 새로 와서 지금은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경테가 좋아도, 렌즈가 좋아도 시력에 맞아야 합니다. 초점이 틀리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글을 읽을 때도, 어떤 상황을 만날 때도 맥락을 잘 알면 이해가 쉽습니다. 군대에서 이런 맥락을 잘 모르는 병사를 ‘고문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이 쌓이면서 고문관 소리 듣던 병사도 후임병을 가르치는 똑소리 나는 병사가 됩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은 ‘요한 묵시록’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초대 교회의 박해 상황 속에서 고난받는 신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자 기록되었습니다. 이 책은 상징적 언어와 비유, 환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을 통해 하느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새로운 미래를 드러내는 성경이 아닙니다. 요한 묵시록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지금 현실을 두려워하라는 성경도 아닙니다. 요한 묵시록은 다가올 하느님의 심판을 기다리라는 성경이 아닙니다. 요한 묵시록은 교회의 현실과 동떨어진 세상을 말하는 성경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 묵시록의 맥락은 무엇일까요?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승리와 악의 종말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비록 세상에는 부정과 악이 존재하고 때로는 그 힘이 강해 보이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이 승리한다는 약속을 믿고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확신은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요한 묵시록은 또한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순결한 삶을 유지할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각 교회의 문제점과 장점을 지적하며 신자들에게 회개와 경각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이 내용을 통해 삶의 모습을 돌아보고, 더 나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는 결심을 새롭게 다질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세상과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는 영적 전쟁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신앙인들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하며, 자기의 삶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묵시록이 말하는 신앙인들의 기도와 찬미는 하느님 나라의 힘이 되며, 이러한 영적 훈련을 통해 신자들은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지닐 수 있게 됩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처럼 신앙의 여정에서 겪는 도전과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교훈서입니다. 신자들은 묵시록을 통해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새롭게 다지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확실한 암호’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암호’를 알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한 책입니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께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체험한 걸 꾸밈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감동이 있는 글들입니다.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저마다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암호’를 이웃 안에서, 내면의 부르심 안에서, 때로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찾아내었습니다. 암호를 발견하기 전의 삶은 무의미하고 허망하였지만, 암호를 발현한 후의 삶은 희망과 기쁨이 계속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확실한 암호를 알고 계시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차를 운전하기 전에 성호를 긋고, 기도한다면 그분은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손에 스마트 폰 대신, 묵주를 들고 버스를 타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기보다는 먼저 사랑하려고 하고, 이해받으려 하기보다는 먼저 이해하려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떨어지는 낙엽에서도, 하늘을 날아가는 구름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또한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암호를 참 많은 곳에, 그리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남겨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만나야 할,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 끝에서 하느님과 대면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암호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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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성전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이런 주님의 말씀대로 지금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몇 차례의 파괴를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제 주님께서 오실 것이라는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 파괴 당시에 전쟁도 있었고 하늘에 나타나는 무서운 표징도 있었습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기도 했으며 누군가 나타나서 자신이 기다리던 그리스도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모든 것이 일어났는데도 말입니다.
주님의 때는 언제 올까요? 또 어떻게 올까요? 이런 물음은 우리를 유혹할 만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그때와 그날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정하시는 것이라는 것을요.
성전이 무너졌다고 해서 주님의 날이 오는 것도 아니며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선다고 해서 주님의 날이 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것에 현혹되지 말고 그저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합니다. 주님의 날이 언제인지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어떻게 살아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로써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날은 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주님 오신 날처럼 사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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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어느 시인의 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이란
‘다행인 것이 복이다.’라는 뜻이다.
이 한마디 말에 얹어 생각에 잠겨봅니다.
오늘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있어서
오늘 사랑하는 사람 손을 잡을 수 있어서
오늘 사랑하는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오늘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또한 이렇게 무탈하게 하루를 지낸 것이 바로 ‘행복’이라네.
‘행복’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네요.
오늘도 ‘다행이라는 복’(행복)을 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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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한결같이
“정주의 제자리 삶에 충실합시다”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어느 현자의 충고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이들수록 지혜로워진다는 말 믿지마라. 아니 오히려 어리석어진다. 노력해야 덜 어리석을수 있다. 심신(心身)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있다.” 새삼 연륜과 함께 가는 지혜가 아니라 나이들수록 치열히 겸손히 노력해야 그나마 덜 어리석을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법정 스님의 평생 입밖에 내지 말아야 할 세가지도 생각납니다. 이또한 이웃에 대한 배려의 사랑이자 지혜입니다.
1.사적인 이야기
2.험담
3.남의 비밀
어제 어느 정치가의 일성도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창해일속(滄海一粟), 제가 겪는 어려움이야 큰 바다속 좁쌀 한 개 정도에 불과하지 않겠나. 우리 국민들께서 겪는 어려움에, 그 고통에 비하면 참으로 미미하다고 생각한다.” 새삼 세상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에 비하면 제 수도생활의 어려움은 창해일속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서야 창해일속 고사성어를 배웠습니다. 다음 옛 어른의 지혜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좋든 나쁘든 상황에 휘둘리면 내 마음을 잃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의지할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다산>
더 분명히 ‘하느님 중심의 나 자신뿐이다’ 함이 좋을 것입니다. 이래서 언제나 하느님 중심 자리에 정주하는 삶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만함을 방치하지 말고 욕심대로 행동하지 마라. 뜻을 가득 채우지도, 즐거움이 극에 이르게 하지도 마라.”<소학>
늘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중용의 정도를 걸으라는 소학의 지혜입니다.
어제 만추의 가을날씨도 참 평화롭고 푸근했고 수도원 봉사자매들 일곱분 역시 행복한 피정시간을 가졌습니다. 10년에서 30년에 걸쳐 봉사한 분들로 어제 미사시 분위기도 참 평화로웠고 나눈 덕담도 좋았습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들을 모시고 미사를 봉헌하는 듯 기분이 좋습니다. 삶과 시간을 봉헌하면서 수도원을 봉사하는 여러분들은 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닮았습니다. 여러분은 참 자랑스런, 한결같은 자매들입니다. 한결같은 믿음, 한결같은 희망, 한결같은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듯 오랜동안 봉사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 요셉 수도원의 한결같은 정주의 수도자들을 닮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섬김의 삶에 전념해온 분들이라 사진의 모습도 나이에 상관없이 참 예쁘고 사랑스러워보였습니다. 오늘 복음과 묵시록 말씀이 ‘한결같이’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연중 마지막 시기 말씀은 종말의 험악한 분위기와 심판에 관한 내용이 주로 나옵니다. 지나고 보면 어느 때나 마지막 말세와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끝은 아니고 이 또한 지나갈 뿐이며 말세같은 현실은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화려한 성전의 외관에 놀라는 이들에게 이 또한 덧없이 허물어질 것이라 예언하셨고 사실 그대로 됩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니 외관의 변화에 흔들림없이, 제자리 정주의 삶에 한결같이 충실하여,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림이 평화의 첩경이자 구원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당대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그리스도다.’ ‘때가 가까웠다.’ 말해도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온갖 흉흉한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예나 이제나 언제나 반복되는 악순환이 현실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이요, 우리 삶은 죽어야 끝나는 치열한 영적전쟁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결코 부화뇌동하거나 경거망동하지 말고 깨어 침착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정주의 제자리에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변상황에 일희일비하거나 두려워하지도 불안해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루하루 날마다 최대한 충만하게 살고 우리 자신과 이웃을 위한 섬김의 삶에 충실함이 지혜요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묵시록은 ‘마지막 수확’이란 주제로 최후심판을 다룹니다. 전반부 땅의 곡식의 수확은 말씀에 충실했던 ‘의인들(the just)’에 해당되고 후반부 포도의 수확은 ‘불의한 이들(the unjust)’에 해당됩니다.
최후심판 주제는 연중 마지막 시기 계속됩니다. 목적은 우리를 두렵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준비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깨어 정주의 제자리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됩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해도 충분하니 내일 걱정을 앞당겨 하지 말고 오늘만 사십시오. 오늘 말씀은 다음 말마디로 요약됩니다.
“모든 시간이 하느님 손안에 있다.”(All time is in God’s hand)
그러니 걱정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주님을 향한 한결같은 믿음, 한결같은 희망, 한결같은 사랑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묵시2,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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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침내 끝은 그러하리니>
“그러한 일들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
가려도
눈뜨시게나
빛이 오시니
마침내 끝은 빛이리니
막아도
나아가시게나
길이 오시니
마침내 끝은 길이리니
속여도
진실하시게나
진리가 오시니
마침내 끝은 진리이리니
갈라도
이으시게나
화해가 오시니
마침내 끝은 화해이리니
흩어도
모이시게나
일치가 오시니
마침내 끝은 일치이리니
밟아도
일어나시게나
해방이 오시니
마침내 끝은 해방이리니
얽매도
벗어나시게나
자유가 오시니
마침내 끝은 자유이리니
꺾어도
곧으시게나
정의가 오시니
마침내 끝은 정의이리니
내쳐도
보듬으시게나
사랑이 오시니
마침내 끝은 사랑이리니
죽여도
살아나시게나
부활이 오시니
마침내 끝은 부활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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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하늘의 거처들
몇몇 사람이 그리스도께 성전의 대단한 돌들과 장엄한 아름다움을 가리켰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처럼 그분도 성전의 위용에 감탄하시리라 기대했지요. 하지만 그분은 하느님이시고 하늘이 그분의 옥좌입니다. 그래서 하찮은 지상의 건물 따위에 조금도 감탄하지 않으셨지요. 하늘의 거처들에 견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성전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주제를 돌려 그분은 그들에게 꼭 필요한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장엄한 모습을 뽐내고 있는 성전 건물이 때가 되면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미리 경고하셨지요. 로마의 세력이 성전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불태울 것이며 이스라엘은 주님을 살해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구원자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겪 어야했지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엑카르트는 본 설교에서 두 개의 성서 말씀, 곧 서간과 복음을 한데 엮는다. 서간 말씀은 맑게 비치는 하느님 이해를, 복음 말씀은 겸손을 통해 높임 받는 것을 묘사한다. 엑카르트는 두 개의 성서 말씀을 엮어 본 설교 처음부터 끝까지 들락날락한다. 그는 진정한 고양은 맑게 비치는 하느님, 곧 하나 됨올 특징으로 하는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하나 됨이야말로 하느님의 특징이다. 하느님이 하느님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은 하느님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한 분일 뿐만 아니라 하나 됨이기도 하다. 우리의 고양을 촉구하는 복음 말씀을 더 자세히 읽어 보자.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7-11). (285)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이 밤 제가 잘못한 모든 것을 깨닫고 인정합니다. 수많은 시간 동안 악이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여 그 악이 제 안에 쌓여 있나이다. 그로 인해 제 안에는 상처와 나쁜 의지가 남아 있습니다. 저는 종종 악에 협력했고, 제 마음은 불신과 분노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공격했나이다. 때때로 복수심과 자만심과 질투심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오늘 저녁 이 모든 것을 당신 앞에 드리며 당신 자비에 내맡깁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이때 저는 완전히 정화되어 자유롭게 모든 짐을 던져버리고 당신과 함께 걸어가겠나이다. 제 의지를 치유하여 기쁜 미옴으로 당신께 더욱 가끼어 걸어가게 하소서. 예수님, 당신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온전히 살고 싶나이다.
0 예수님, 당신을 흠숭하며 저의 과거 • 현제 • 미래를 당신께 드립니다. 저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임마누옐이신 하느님과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 부정적인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고 회심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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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오늘 복음의 성전 파괴를 들으면서, 예전 ‘남인수’ 선생이 불렀던 「황성 옛터」란 노래 가사의 일부분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어 있노라.』 참으로 인생과 역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노랫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언급한 예루살렘 성전은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장식된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이었으나 무너질 운명에 놓여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 견고함에 도취되어 안으로부터의 허물어짐을 감지하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내려다보시며 예수님은 눈물 흘리셨던 것입니다. (19,41~44참조) 예수님의 눈에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폐망이 훤히 보였으며, 그래서 그날을 준비하도록 알렸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예언한 대로, 70년경에 로마의 황제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무참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전의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21,6) 말았던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것은 로마 제국이지만,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백성들 내부로부터 이미 다 허물어진 예루살렘을 로마 제국이 발로 찼을 뿐이라고 봅니다. 예루살렘 함락은 외부 세력의 힘에 의해서 무너진 것일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내부에서부터 이미 붕괴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붕괴는 바로 그곳에 살고 있던 이들의 거짓과 욕심 그리고 독선과 오만으로 하느님의 회개를 향한 초대의 소리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욕망과 아집이 예루살렘을 함락당하고 붕괴시켰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분명 역사적인 비극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사건이 곧 세상 종말의 표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군가 자칭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21,8)라고 하더라도 속지 말라고 경고하셨으며,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21,9)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겉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누구보다 먼저 그것, 단지 예루살렘 성전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의 허무한 끝, 폐허를 보셨습니다. 이 세상에 아름답고 웅장하게 만들어진 모든 것, 그것들이 영원히 지속할 것 같았지만, 세상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언젠가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끝 날이 언제 올지는 아버지와 예수님만이 아시고, 우리가 ‘폐허를 보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오늘(!)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인 우리는 막연히 미래를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그날이 언제 어떻게 올지는 모르지만, 그때와 그날을 깨어 의식하면서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지난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배우고 깨달은 점은 사실 가장 무서운 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그 삶의 기초를 물질적인 것 위에 또는 자기 자신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20,17)라고 말씀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놓으려는 사람들입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 (묵2,10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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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종말이 올지라도 오직 예수님만을 /
박윤식 [big-llight] 241125. 19:00 ㅣNo.177925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진실은 숨겨지고 거짓이 판친다. 권력, 명예, 재물이 숭배 받을수록 진리, 사랑, 정의, 평화는 가려지고 가짜와 사기가 설친다.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종말을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그러므로 종말의 그리스도를 만나기에 앞서, 현재 곁에 계시는 그분을 만나야 한다. 작은 축복이라도 그분의 것으로 여길 때에야 가능해질 게다.
예수님께서는 웅장한 겉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그 내면을 들여다보신다. 화려한 성전을 지으면서도 그 내면에 불의함과 부정함이 가득 차 있던 유다인 지도자들을 향하여, 이 예루살렘 성전과 더불어 그들 모두가 파멸하게 되리라고 경고도 하셨다. 그날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늘 여기 계신다. 그러나 불만을 가진 우리는 가끔 가짜 그리스도의 그 목소리에 현혹된다. 애정을 갖고 살면 ‘짝퉁 그리스도’보다 세상 곳곳에 계시는 ‘참 그리스도’를 쉽게 뵈올 수가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성전에 대해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저것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허물어질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때에 어떤 표징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지 않도록 조심해라. 많은 이가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라고 말할 게다. 그들 뒤를 따르지를 마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그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신다. 성전은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표징이고 구원의 상징이지만, 외관만을 갖추고 내면이 비면,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결국 파괴로 당연히 이어질 수밖에. 성전이 파괴가 되고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며, 전쟁과 기근이 이어지는 것은, 이 세상이 붕괴되고 전통과 관습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할 게다.
그래서 죽음과 종말은 늘 우리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역사적 혼란의 시기에 늘 새로운 세상의 방향을 알려 주는 예언자들과 시대의 징표들이 있었지만,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새롭게 알게 된 이 종말은 어쩜 새로운 출발이며 동시에 구원으로 가는 완성이다. 그래서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희망이 되며, 그리스도인을 움츠러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게 한다. 우리가 고대하고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는 모두가 참 나를 찾고, 진정한 자아를 충만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완성인 종말, 그리스도인의 목표인 하느님 나라도,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첫걸음을 내딛는다. 왜 우리는 종말에 약해질까? 그리고 가짜 그리스도에게 속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분명한 것은 반목과 저주, 독선으로 차 있다면 어찌 성령과 함께한다 할 수가? 우리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다 안다. 성령께서는 일치와 평화, 사랑과 온유와 기쁨을 준다. 그렇지만 삶이 불안할수록 더욱 이상한 영이 접근한다. 성령이 떠나면 재난은 시작된다.
아무리 부유하고 힘이 세다 하더라도 영원한 것은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와 그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무궁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해 분명한 자세를 요구한다. 그분께서는 그때가 온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시며, 또한 그때가 왔음을 알린다고 하는 요란한 말과 기이한 표징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신다. 우리는 이러한 징후에도 그분만을 보아야 할 올바른 자세를 꼭 묵상해야만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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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루카 21,8).
성전 파괴가 일어나고 혼란스러운 틈에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성전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표지라면, 성전의 파괴는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과 같은 혼란을 겪게 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주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굳건하고 영원할 것 같은 신앙이 뿌리째 흔들리고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사이비와 이단 종교와 같은 거짓 예언자들은 이런 혼란한 시기에 상처받고 약해져 있는 우리를 찾아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이용하여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오류의 길로 끌어들입니다.
그들은 특히 임박한 종말론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부추기며 우리를 속입니다.
그리스도교든 사이비 종교든 다가올 종말을 말하며 회개와 새로운 삶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오늘을 어떻게 살게 하는지에 있습니다.
올바른 종말론은 희망을 주고 그 희망으로 ‘오늘’에 발붙이고 성실히 살게 하지만, 그릇된 종말론은 사람들을 불안하고 두렵게 하여 ‘오늘’을 떠나게 하고 존재하지 않을 ‘내일’ 속에서 헤매게 하면서 삶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평소에 주님과 깊은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삶의 고통이 올 때만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주님과 친밀하고 돈독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신뢰는 고통과 혼란의 시기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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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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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고하시면서
그 때에 일어날 표징들도 말씀하십니다.
그 표징들은 하나같이 무서운 것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영향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의 상황에서 누군가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말하면
그를 따라가기 쉽습니다.
'때가 가까웠다'는 말은
종말이 다가왔다는 것인데
종말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은
듣는 이들의 두려움을 더 크게 만듭니다.
두려움을 심어주는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조종하려는 마음이 그 안에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사랑을 주시려는 마음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을 따라가지 않으려면
우선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에 떨고 싶지 않아서
또는 두려움을 스스로 극복하려고 하는 행동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도망가게 만듭니다.
그러나 도망간다고해서
그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두려움은 더 커집니다.
두려움을 바라보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아니 두려움을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기에
그것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나 혼자의 힘이 아닌
하느님과 함께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울 때 혼자 극복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청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끌려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이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세상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은
종종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 함께해 주시기를 청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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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불멸의 성전을 건립합시다!
연중 시기 마지막을 향해 가는 즈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 우리 눈 앞에 펼쳐질 광경에 대해
가르치고 계십니다.
언뜻 보기에 공포스러운 분위기입니다.
사방에서 전쟁과 환난이 일어나고, 대재앙과 함께 그간 인간이 쌓아올린 높은 탑들이 산산이 허물어질 것을 예고 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무척이나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가르침 앞에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자지러지겠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그간 쌓아온 신앙의 내공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해석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성전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낡고 빈약한 성전을 허물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지상 성전의 덧없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아름다움, 청춘의 푸르름, 인생의 화려함은 절대 영원하지 않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보다 영속적이고 가치있는 대상, 불멸의 성전, 영적인 성전을 건설할 것을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전 파괴와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벌써 우리 한국 교회에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수십 수백억을 들여 정성껏 건립한 대성전, 신자들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성전들이 인구 절벽 시대에 진입하는 동시에 가톨릭 교회에 대한 호감도 급하락으로 인해 텅텅 비어가고 있습니다.
불과 십 년 뒤면,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밟을 것이 자명합니다.
사람들은 더이상 성전에 오지 않습니다.
그나마 서구 교회는 문화재에 등록되어 볼거리라도 있어 관광객들이 찾아오지만, 우리 본당들은 그런 요소도 없습니다.
무용지물의 성전들은 애물단지처럼 방치되다가 서구의 수많은 성전들처럼 매각되어 허물어지고,
다른 용도의 건물로 탈바꿈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는 불멸의 성전을 건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충만한 한 영혼이 곧 새로운 성전입니다.
지극정성으로 성체를 영한 한 그리스도인이 불멸의 성전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을 주님의 성전을 건립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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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이며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냐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그 표징들에 대해 일러 주시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오류에 빠져 참된 믿음을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심은 속죄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 오심은 더 많은 이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8절).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비밀리에 오시지 않고 무시무시하고 화려하게 오실 것이다.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실 것이다.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모든 말씀을 읽고 들었다.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오는지 우리 모두 들었다. 그때에는 전쟁과 지진과 환난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마르 13,7-8). 마지막 날에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보게 되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날 표징들을 알려주신다.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셨고 당신 백성들과 만나신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런데 그토록 파멸했다. 예루살렘처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하느님을 따른다고 할 때, 이러한 파멸을 우리 자신도 당하게 될 것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신다. 벌주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거부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분 안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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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을 때 종말이 오는 이유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기후 위기는 없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다만 해수면이 좀 높아져 오션뷰가 좋은 부동산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옳을까요?
저희가 살던 곳은 장마 때만 되면 물난리를 치러야 하는 시골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해에도 물난리가 나서 저는 포대기에 싸인 채 집 지붕을 뚫고 헬기로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비행기를 타 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른들은 장마 때는 초긴장을 하셨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피난을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어른들끼리 연락을 주고받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것보다도 냇가가 불어나서 그것이 제방을 무너뜨리면 큰일이었습니다.
동네에 비가 그쳤더라도 그 물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밤새 제방이 안전한지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자정이 넘었는데 제방이 무너지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누군가가 계속 그 제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엔 제방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징조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신과 세상이 어때야 하는지 명확한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 멸망 이전에 올 징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세상엔 전쟁과 반란, 자연재해와 전염병, 하늘의 무서운 표징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표징은 왜 미리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표징을 보고 우리가 회개하고 뒤로 돌려놓을 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준비하며 희망을 품고 주님을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완전히 망가지지 않도록 표징을 보여줍니다.
표징이 거의 없는 병들이 무섭습니다.
아프면 거의 말기인 췌장암 같은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아픈 것이 표징입니다.
그러면 미리 대처할 수 있습니다.
큰 사고가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거의 드뭅니다. 제방이 한 번에 터지는 일은 없습니다.
조금씩 물이 새어 나오다가 그것이 더 커지면서 제방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틈이 생겨 물이 새어 나올 때 재빨리 대피하지 않으면 큰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징후’라고 합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도 건물에서는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직원들은 그런 소리를 이미 여러 번 들었다고 합니다.
성수대교 사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다리가 갑자기 내려앉을 리는 없습니다.
누군가 작은 문제점이 있을 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면 큰 사고는 면했을 것입니다.
우리 죽음과 세상 마지막 때도 표징을 잘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21,34)
우리는 왜 표징에 무관심할까요?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몸이 망가지면서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아픈 것을 다시 술로 마취시키기 때문입니다. 돈을 버는 것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이들도 몸이 망가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과로로 사망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표징을 잘 인식하고 고칠 것은 고치고 준비할 것은 준비할 방법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란 새로 태어남입니다.
태어날 때 부모가 나에게 바란 몸과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세례는 그것을 알아채는 시간입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하느님께서 나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바라던 모습의 원형을 간직하기에
조금만 이상해지면 바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희생한 밀러 대위는 죽어가며 “잘 살아야 해!”(“James, earn this…. earn it.”)라는 말을 합니다.
자신들의 죽음의 가치를 삶에 이용하라는 뜻입니다.
라이언은 평생 자신을 위해 희생한 밀러 대위와 다른 대원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그들이 자신이 어떻게 살기를 바라며 죽었는지를 묵상해야 했습니다.
세례는 밀러 대위가 피로 라이언 일병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규정해 준 그 순간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면 라이언은 자주 자기 모습을 돌아보며 그 본래의 모습과 어긋나는 표징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이 들어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 경례를 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매일매일 당신이 그날 다리 위에서 나에게 했던 말을 생각합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당신의 눈에는 나는 여러분 모두가 나를 위해 해준 희생을 낭비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I hope that, at least in your eyes, I've earned what all of you have done for me.)”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린 피 값으로 하느님 모상을 회복하였습니다.
그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 자주 되돌아보며 주님 희생의 값을 허비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이들은 아주 작은 잘못되어 가는 표징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믿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과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실 때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끓는 물의 개구리처럼 자신과 세상이 어때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을 가진 이들이 거의 없어서 징조를 읽을 줄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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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진심으로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종말은 ‘기쁜 날’입니다.>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21,5-11)”
1)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영원한 것은 없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5-6).”
인간들이 자랑하는 온갖 업적들은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새 예루살렘’에는, 즉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는 성전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성전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인간 세상에 있는 모든 성전들은
임시 건물일 뿐입니다.
<특히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해버린 예루살렘 성전은(루카 19,46)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재난들은 ‘종말의 표징’이 아니라, ‘종말 전의 재난들’입니다.
9절의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그 재난들이 종말의 표징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거짓 메시아와 종말론자들의 등장,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등은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던 일들이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그 일들을, 종말이 오기 전에 회개하라는
경고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재난들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종말 전의 재난들’이라는 말과 ‘인류 역사에서 늘 있는 일’이라는 말을 합하면, “인류 역사는 종말을 준비하는 짧은 기간의 역사”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함을 생각하면, 인류 역사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역사입니다.
‘영원’이라는 시간과 비교한다면, 글자 그대로 ‘찰나’입니다.>
3) ‘거짓 메시아의 등장’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있었던 일이고, 예수님 승천 후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생기는 일입니다.
<마귀가 장난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리석은 인간들의 허영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거짓 메시아에 관한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6-39).”
‘테우다스’ 라는 사람과 ‘유다’ 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메시아라고 자처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했던 자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칭 메시아’들이 참 많고, 그 거짓 메시아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회개는 말하지 않고 복을 받는 방법만 말하면, 신자들이 바친 헌금이 ‘사랑 실천’에 사용되지 않고 자기들의 세력 확장과 부의 축적에만 사용된다면, 하느님 말씀은 전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한다면, 사이비 종교입니다.>
4)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진짜 재난이 남아 있다.”, 또는 “진짜 재난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뒤의 25절에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고, 26절에는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들은,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던 재난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재난들이 종말의 날에 닥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들은,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말씀도 아니고, 위협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회개하면, 종말의 날은 무서운 날이 아니라, 구원받는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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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21,5-11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물을 막는 역할을 하는 '제방'은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구멍이 생겨 거기로 물이 조금씩 새어나오다가, 그 구멍을 제 때 막지 않으면 점점 더 커지면서 나중에는 제방 전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예측 가능한 현상들을 가리켜 '징후'라고 부릅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기 전에 건물 여기저기에서 며칠에 걸쳐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직원들은 그런 소리들을 이미 여러 번 들었다고 합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멀쩡하던 다리가 갑자기 내려앉을 리는 없겠지요.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살펴보았다면, 작은 문제점들을 사전에 발견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런 큰 사고는 면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시고 나서,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어떤 표징이 일어날지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그리스도'임을 자처하는 많은 거짓 예언자들의 등장, 전쟁, 반란, 지진, 기근, 전염병, 커다란 자연재해들... 이런 일들이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즉 세상의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처럼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확인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분명한 '징후'들이 먼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들 각자가 늘 깨어있는 자세로 그런 '징후'들을 잘 살펴보면서 손바닥이나 팔로 막을 수 있는 작은 구멍일 때 미리미리 보수하고 조치를 취한다면 세상이라는 '제방'이 무너지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은 한 사람의 영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대죄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보통 처음에는 나태함과 게으름 같은 사소한 잘못부터 짓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잘못이라도 각자의 영혼에, 그리고 삶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칩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쁨과 평화를 사악한 세력에게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점을 소홀히 여기거나 간과한다면, 즉 하루를 마감할 때 자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점들이 부족했는지를 충분히 성찰한 후, 잘못을 바로잡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노력들을 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나의 영혼은 서서히 어둠의 구렁 속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나중에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가 되고 말지요.
혹시 지금 내가 힘들고 불편한 일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괴롭히시거나 벌을 주시기 위해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더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라고 예고해주시는 '표징'입니다. 신앙인은 막연히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말이 닥쳐올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그 종말을 날마다 성실히 준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신앙인인 것입니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잘 알고, 하루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일단 지나버리고 나면 영원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참으로 소중하고 가치있는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표징'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오늘 하루도 하느님 뜻에 맞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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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
종말에 대한 주님의 예고는 묵시문학의 위협적인 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이 세상 종말에 대한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으로도
이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그 아름다움과 씀씀이의 돌들을 보고
사람들이 감탄하자 예수님께서하신 성전 멸망의 예고의 말씀이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사실 바빌론 군대에 의해서 폐허된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염원으로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력 항전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허물어 지는 비운을 맞습니다.
전쟁의 결과가 그렇듯 예수님께서 예고하신대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있지 않고 허물어지고 맙니다.
미래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7절)
그런데 이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차원을
넘어서시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에서 가짜 메시아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말들 것이라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현혹되지 말고 정신을 차리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9절)
이어서 주님께서 종말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10-11절)
어쩌면 우주의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세상은 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런 상황에서도 어디에도 동요되지 않고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십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하느님의 심판이 다가 오면서 천사는 금관을 쓰신
메시아에게 외칩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그러자 구름 위에 앉은 분이 낫을 휘두르십니다.
채근담 후 29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아가는 곳에서 문득 물러날 것을 생각한다면 거의 울타리에 걸리는 재앙을 면할 수 있고,
손을 댈 때에 먼저 손을 놓을 것을 도모하면 곧 호랑이를 타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재앙과 위험을 대비하는 마음 가짐이지요. 지금은 아니겠지만 유럽의 한 왕국에서는
왕 즉위식 때에 볏짚을 태우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위식 도중에 이런 문구를 읽는다고 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지나간다.”
지금 왕이 즉위를 하지만 ‘언젠가 이 자리에서 떠난다.’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채근담 글의 내용도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맡고 어떤 일을 추진할 때, 떠날 것을 미리 생각한다면
더 겸손하고 좀더 자유로운 수 있는 것이지요.
내가 지금 있는 자리, 이 시간이 영원한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할 어느 것도 사실 없는데, 나는 영원히 이 자리에
있을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 같아요.
어쩌면 내일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바뀔 수도 있는데요.
그래서 사람들이 기억도 하지 않는 어쩌면 관심도 없는 말 “내가 옛날에...”라는
말을 반복하며 사는 나의 모습이 될까 걱정도 됩니다.
지금 당장 세상 종말의 징후가 없겠지만 언젠가는 다가오는 나의 죽음도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정신없이 바쁘고 여유가 없다하더라도 미래에 다가 올 일들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슬기로운 삶아야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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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허상에 현혹되지 않는 삶
기원전 19년 대 헤로데가 증개축에 들어간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 시대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성전은 건축 자재나 건물 장식물로 쓰일 ‘자원 예물’(2마카2,13)과 “아름다운 돌”(21,5)로 건축하였다. 예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헤로데 왕이 바친 황금포도나무였는데 포도송이만 해도 한 사람만큼의 부피였다(유다 전기 V 4,4). 돌 하나의 길이가 약 12.5미터, 높이 4미터, 폭이 5미터 정도였다(유다 고사 XV 11,3)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경탄하였다(21,5). 이에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21,6) 하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의 구심점’이었다. 이 성전이 파괴되어버릴 것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이다. 이 참변은 루카 복음사가의 관점으로 보면 종말의 전조가 아니라 역사적 비극이었다. 내 삶을 보자. 내가 이룬 성공적 결과들, 부와 권세, 명예, 튼튼한 인맥 등 우리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 그것은 나의 모든 것을 만족시켜주며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 같지만 그러한 것들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을 모르거늘 찰나에 스쳐가고 먼지에 지나지 않는 생의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에 집착하며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우리네 삶은 건강할 때가 있으면 아플 때가 있고,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가 있으며, 올 때가 있으면 갈 때가 있지 않은가? 화려한 성전이 파괴되듯 우리네 삶에서도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는 많은 것들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누구든 우리 존재의 뿌리요 모든 것이신 영원하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영이 아니고서는 영이신 하느님을 보지도 만날 수도 없으며,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면 내가 지닌 모든 것은 헛된 장식품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런 참변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묻자(21,7), 예수께서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하는 이들을 뒤 따라가지 말라고 하신다(21,8). 펠릭스 총독시대에도 이집트에서 온 한 열광가가 자기의 음성이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다고 자랑하며 약 3만명을 모았다(유다 전기 Ⅱ 13,5). 우리는 살아가면서 갑작스런 실패,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질병, 중대한 선택,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일 등을 겪는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당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아니 어디에 매달리는가?
기도생활을 꽤나 열심히 하는 사람, 오랫동안 성경공부를 하던 사람, 교회 안에서 각종 활동을 헌신적으로 하던 이들조차도 때로는 그런 일을 겪으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경우가 많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소리, 경험이 많다는 이들의 소리, 땀 흘리지 않고 단기간에 큰 수익을 올린다는 선전 등 허상을 찾아 매달리는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화려한 성전의 아름다움에 감탄만 하며 거짓 예언자를 따르고 우상을 좇고 있다면 그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 있을까?
예수께서는 이어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21,9) 하신다. 그렇다! 영원하신 분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네 삶은 영원성을 지닌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 어떤 일이 닥쳐와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적인 것들에 현혹되지 말고 마음의 중심을 영혼의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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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 세상 종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세상 종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
몇몇 사람이 성전 외양을 보면서 감탄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용을 충실히 보여주기 위해서 외형을 갖추는 것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내면에 있지요. 우리가 감탄하고 경외하며 찬양해야 할 존재는 성전 건물이 아니라 성전 안에 계신 분이십니다.
육적 감각에 의존해 사는 이들은 감각을 통해 들어온 겉모습에 묶여 그 안으로 들어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본질을 만나려면, 사물과 사건 표면에 그려진 정보에 매이지 않고 그 외피를 관통해 들어가서, 그 안에 새겨진 본질을 직면해야 합니다. 영적인 시각은 본질을 보면서 다듬어지고 향상되어 갑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 무서워하지 마라."(루카 21,8-9)
뭇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던 성전의 호화로운 장식들이 다 허물어진다고 하시니, 사람들이 놀라서 그때가 언제인지, 무슨 표징으로 알 수 있는지 여쭙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에 대한 즉답이 아니라, 그들이 그때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권고하십니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 증오와 폭력이 부른 전쟁, 그리고 생명과 관계를 파괴하는 전염병이 삶의 외연을 깨뜨릴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위험은 영혼을 속이고 기만하고 절망으로 이끌려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악입니다. 하느님께서 섭리 안에서 준비하신 일을 인간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평생을 사랑하고 믿어 온 주님께 충실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추수와 수확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묵시문학에서 곡식이나 열매의 추수와 수확은 종말에 이루어질 일을 뜻합니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묵시 14,18)
그때는 주님 보시기에 세상이 무르익은 때일 겁니다. 인간의 선업과 덕행의 열매도 익어가지만, 죄악과 탐욕도 함께 농익어 곪을 지경에 이르렀을 겁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낫을 대실 수밖에 없는 순간이 된 겁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 모두 기뻐 뛰어라. ... 모두 환호하여라. ... 그분이 오신다. ...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화답송) 그저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종말의 장면이 독서에서 펼쳐지는데, 그에 대한 시편저자의 응답은 이처럼 기쁘고 환희 넘칩니다. 독서와 화답송의 이 상반된 분위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의 화답송 시편은 종말이 파괴, 심판, 징벌과 함께 닥치리라는 글자들의 외피를 뚫고 들어가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마지막 날은 이 모든 것들로 분명 두렵고 혼란스럽겠지만,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서 껍질들은 허물어지고 무너지고 사라져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날은 우리가 지상 삶의 지난했던 마라톤을 마치고 사랑하는 주님을 해후하는 사랑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또 온갖 부조리와 불공정이 판을 치던 이 세상에 비로소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경사롭고 축복 가득한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겉꾸미던 모든 허세와 장식, 가면들은 벗겨지고 진정 알맹이만 남겠지요. 고이 간직하고 정성껏 닦아 매만지며 아름답게 피워온 영혼의 정수가 맑고 밝게 빛을 내면, 주님은 우리를 한눈에 알아보실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영혼의 본체이신 그분 안으로 익숙하게 잠겨 들겠지요.
기후변화, 코로나19 전염병, 차별과 폭력의 문화가 우리 문턱까지 들이닥친 요즘입니다. 그동안 미덕으로 알고 누리던 좋은 문화들을 잠시 멈추고 새 패러다임에 적응해야 하는 혼돈의 때이기도 하지요.
이 동요와 어둠을 틈타, 분열과 두려움을 조장하는 온갖 소문과 위협이 존재를 흔들려 다가오더라도 관심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어차피 오게 되어 있는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니까요. 악은 우리의 두려움을 먹고 커가니,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조심하여라, 따라가지 마라. 무서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 목소리를 기억하고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하실 일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면서 시편저자와 함께 기쁨과 설렘으로 주님을 기다리면 좋겠지요. 이렇게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우리의 한 해도 마무리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 새해를 기다리는 이 마지막 한주간이 내면을 정화하고 튼튼히 다지는 시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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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하나님만 의지하는 하나님 자녀로 사는 삶
<2024.11.26> 아침을 여는 묵상 (호 7장 1~16절)
❝하나님만 의지하는 하나님 자녀로 사는 삶❞
❚ 마음 속의 작은 죄 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과 신실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 하나님 자녀로서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마음을 갖는 삶이어야 합니다(1~7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선한 뜻을 늘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여전했는데,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1절). 심지어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모두 기억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2절).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신앙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악한 짓들을 통해 그들의 지도자를 기쁘게 해 주려 했고, 그 결과 지도자와 백성 모두가 타락하게 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죄악의 정욕에 불타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화덕 비유를 통해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즉, 빵 굽는 사람이 반죽이 발효될 때 말고는 늘 뜨겁게 달구어 놓은 화덕처럼 정욕이 달아올라 있다는 것(4절)입니다. 그들의 음모는 밤새도록 가라앉아 있다가 아침이 오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6절). 모든 백성이 화덕처럼 뜨겁게 달구어져 있어서 그들은 왕들을 엎드러지게 했고, 자기들을 거스르는 재판장들을 처형했습니다(7절). 이처럼 북 이스라엘의 지도층에 희망이 없음은 그들 중 아무도 권력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7절b)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허물을 깨달아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 스스로의 꾀에 넘어감으로써 파멸의 길로 접어든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죄의 여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어떠한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음속 깊은 곳에 어떤 의도가 자리 잡고 있는지 모두 판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을지라도 기회만 생기면 하나님을 배반하며 죄악을 자행하려는 악한 심령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자신의 마음 중심을 주님께 내어 드리고 주신께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 주시기를 날마다 간구해야 합니다. 겉모습뿐인 경건함과 거룩함으로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잠시 죄를 참는 듯한데 또 어느새 죄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죄악의 늪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결과들을 늘 반복하게 된 원인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과 신실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성령님께서 우리 자신을 맡기며,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마음 안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을 향한 겸손한 믿음을 갖는 삶이어야 합니다(8~12절).
호세아는 이어지는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상황을 ‘뒤집지 않은 전병’(8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뒤집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은 한쪽 면은 새까맣게 타고 다른 쪽은 밀가루 반죽이 그대로 남아 있는 떡 조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먹을 수 없는 쓸모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무가치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표면적으로는 한쪽이나마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뒤집지 않아 떡 조각 전체가 익지 않은 것과 같이 매우 조화롭지 못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이러한 비유는 에브라임은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못하고 이방에 눈을 돌리는 교만한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교만은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10절). 그들이 고난을 만났을 때 찾아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애굽을 찾아서 도움을 구했던 것입니다(11절). 그들은 자신들의 교만함으로 인해 징계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12절).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을 통해 성도로서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다른 것과 더불어 하나님도 섬기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다른 존재를 내 마음대로 찾아다녀도 어려움을 벗어나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고, 교만한 생각입니다. 그 결과는 평안과 풍요가 아니라 멸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 닥치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외면하지 말고 더욱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얼굴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온전한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고 여기는 교만을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앞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화를 자초할 선택을 하면서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교만하고 어리석은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전부를 주신 하나님께 인생을 맡길 수 있도록 하나님을 향한 겸손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신앙을 갖는 삶이어야 합니다(13~16절).
이스라엘이 패망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악이 그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13절).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기는 했지만, 내면으로는 하나님께 그들의 간절함을 전혀 표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알로 대변되는 우상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제사 의식을 치르고 그 제단 위에서 각종 성적 음행을 자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은혜를 주셨습니다. ‘팔을 연습시켜 힘 있게 하였다...’(15절)라는 말씀이 리를 나타냅니다. “그들을 훈련시켜 힘을 주었지만, 그들은 나를 해칠 악한 계획만 세웠다...”(15절,쉬운성경)..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징계받으며 도움을 얻으려던 애굽 땅에서 도리어 조롱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16절).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멸망하는 길로 가면서도 스스로 굉장히 지혜로운 줄 착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에서 다른 대상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을 빼앗을 만한 달콤한 유혹이 있어도 이겨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신앙은 늘 한결 같아야 합니다. 환난과 고난에 처했을 때는 뜨겁고 간절히 기도하는 듯하다가 고통 가운데서 건져 주시면 믿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원하던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면 도리어 하나님을 멀리하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실하지 못한 믿음은 결국 큰 화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목적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고 어려운 이들을 도우라고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 자신의 욕심을 위해 그 은혜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해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십자가를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신앙을 갖고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과 신실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를 주님의 보혈로 씻고, 오직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호 7:1~1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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