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촌 / 신대식
겨울이 오면 홍천강변 뒤뜰마을,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했던 분지는 바람과 눈과 얼음의 나라가 된다.
화사했던 햇볕은 찬바람에 씻겨 허옇게 바래고 눈 덮인 산은 선 채로 굳어버린다. 북녘 산골짜기를 돌아내려오는 강줄기는 뒤뜰 분지를 가로질러 남녘 산골로 굽이지면서 거대한 빙하지대를 이룬다.
황량해진 동토의 산촌에는 생명의 숨결이 잦아들면서 온 세상은 싸늘한 은빛으로 반짝이는 죽음의 대지로 변해버린다. 죽음의 대지에서 살아있는 것이라곤, 무심한 자연도 몸서리치는 심술궂은 바람뿐이다.
날카로운 휘파람소리로 산을 울리고 죽은 듯 엎드린 빙하를 내리밟으며 질주하다가 꼿꼿이 선 채로 항거하는 갈대를 미치도록 괴롭힌다. 가사상태에 빠져 있던 강물도 견디다 못해 쩌엉~ 가슴 갈라지는 소리를 낸다.
대자연의 위세에 눌린 뭇 생명은 하찮은 존재가 되어 자취를 감추고 숨을 죽인다. 그 많던 산새와 물새 한 마리 날지 않고 천방지축 나대던 낚시, 캠핑 족들도 발길이 끊어진다. 심지어 이곳 주민들조차 해마다 놀란 가슴을 쓸어안고 일찌감치 어둠침침한 아랫목에 움츠리고 앉아 동면에 들어간다.
며칠때 두텁게 드리운 잿빛 구름이 뒤뜰 분지를 덮어씌운 것처럼 사방으로 둘어선 산봉우리 위로 내려앉아 있다. 북녘에서 흘러내린 산자락에 등을 대고 앉은 작은 산촌은 연무처럼 짙게 퍼져 있는 음습하고 어두운 기운에 짓눌려서 질식한 듯 엎드려 있다.
드디어 짓눌린 숨결이 소생하듯 잔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어제 잠시 그쳤던 눈이 다시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한다. 갈수록 세찬 바람소리와 더불어 눈발이 거세지면서 북으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산촌이 점점 흐릿해진다.
젊은이들이 떠난 마을에는 노인이 홀로 지키다 간 빈집이 많다. 더구나 사람이 거주하는 집도 노부부가 사는 일곱 가구를 제외하곤 독거노인만 산다. 혼자 살고 있는 집은 인기척이 없기는 빈집과 매한가지여서 독거노인 집에도 빈집 그림자가 스며 있다.
산책길에 빈집 앞을 지나다 보면 기울어진 대문 틈으로 발자국 한 점 없는 눈 쌓인 마당과 고양이가 졸다 가는 퇴색한 쪽마루, 무심히 잊힌 시각만을 멍하니 가리키고 있는 벽시계가 보인다. 빈집에는 벽시계가 정지된 세월만큼 무거운 정적이 쌓여 있다. 그래서 오늘처럼 눈이 오거나 흐린 날에는 으스스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독거노인과 빈집이 많은 마을은 언제 보아도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한낮에도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도 어쩌다, 겨울에도 어슬렁거리는 노인 한 사람쯤은 만나기도 한다.
어릴 적 내 고향에서는 어쩐 일인지 마을마다 정신이 살짝 나간 사람이 한 명씩은 있었다. 이 마을에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도 실성한 마을 노인이 눈바람 이는 강변에 나와 있다.
웃옷은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찬바람에 벌겋게 달아오른 몸을 드러내고선 무슨 말인지 연신 중얼거리고 있다. 그러다 허공을 질주하는 눈발을 향해 두 팔을 쳐들고서 고함을 지른다. 지르고 또 지르고, 우렁찬 고함소리가 심줄궂은 하늘을 크게 꾸짖는 것 같다. 마침내 두 팔을 날개처럼 벌리고서 발을 구르며 길길이 뛴다. 노인의 광기어린 고함이 눈바람소리와 어우러져 하늘을 울린다.
실성한 사람은 하늘과 상통하는가. 짙어가는 눈보라에 하늘도 산천도 노인과 하나가 되어 뿌옇게 흐려져 간다. 신들린 듯, 환희에 찬 듯 괴성을 지르는 노인의 아른거리는 실루엣이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신비스런 기운에 싸여 있다.
인간의 속된 성품을 잃어버린 사람은 세상사 잡다한 번뇌도 잊고서 자연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순수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죽음의 대지에서도 자연과 하나가 된 사람만이 홀로 숨쉬고 있다.
낮부터 내리던 눈이 쉬지 않고 하염없이 내린다. 어두워질수록 차가운 바람도 더욱 기승을 부린다. 눈이 내리는 밤은 하늘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희뿌옇기만 하다. 여렴풋이 보이는 눈 덮인 마을 지붕은 납작하게 엎드려서 마을이 아예 눈더미 위에 주저앉아버린 것 같다.
밤이 되어도 산촌에는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이 거의 없다. 노인들은 밤 어둠에도 불을 잘 밝히지 않는다. 눈을 감고도 세상 일이 빤히 보이는 것인지, 세상사 따윈 이제는 알 필요가 없다는 건지 아니면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 소멸될수록 어둠에 동화되어 가는지 나로선 모르겠다. 몸도 마음도 쇠잔해진 노인들의 가녀란 숨소리마저 잦아든 산골 마을에는 덧없는 인생의 허망한 세월이 저물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노인이 된 그들이 하나, 둘 떠나고 나면 이 산촌도 허전한 바람만 술렁이는 폐촌이 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눈보라치는 산촌의 밤은 하얗게 젖어가는데 앞산의 숲이 멀리 급류에 휩쓸려가는 소리를 내며 운다. 뒷산 숲도 메아리처럼 따라서 운다. 눈보라에 잠자리를 잃어버린 고라니들의 목쉰 울음소리가 산을 헤매고 있다. 이따금 찾아오는 부엉이 울음소리도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쇠락해가는 산촌에 음산한 기운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혼자 깨어 있는 심란한 이 밤, 오늘 밤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할 것만 같다.
밤새 뒤척이다 늦게야 일어나니 간밤의 눈바람은 이미 그쳤고, 창밖으로 보이는 태곳적 순백의 설원에는 반짝이는 햇살과 상큼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다. 눈 쌓인 뜰에는 깊게 파인 고라니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창문에 비치는 불빛에 이끌려 잠자리를 찾아왔다가 서운한 마음에 서성거리다 돌아갔나 보다.
햇살이 퍼지자 갈라진 빙하 사이로 얇게 얼었던 물골에서 얼음이 녹아내리며 물결이 인다. 비로소 강물에 숨통이 트이며 생기가 돈다.
갑자기 물골에서 보석처럼 맑은 빛 한 점이 번쩍 시선을 찌르다 사라진다. 이내 물골 위, 아래서도 별빛 같은 섬광이 반짝반짝 치솟다가 가라앉는다. 겨우내 얼음 아래서 숨 막히도록 갇혀 있던 피라미 떼인가. 가만히 보니, 햇볕에 녹아 떠내려가는 얼음 조각들이 한여름 석양 무렵 얕은 강에서 튀어오르는 피라미 떼처럼 햇빛에 반짝인다. 물결에 잠겼다 하며 감실감실 흘러간다.
눈보라치던 암울한 밤이 지나고, 뒤이어 강물을 타고 흐르는 맑은 섬광은 죽음의 대지에 비치는 한 줄기 서광처럼 신기하고도 매혹적이다. 산촌의 겨울이 아무리 혹독하다 해도 죽은 듯 엎드린 빙하 아래서 재 생명이 움트는 봄은 이미 태동하고 있었다. 영겁의 세월이 흘러도 자연은 변함없이 순환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눈 덮인 산과 강은 아직 조용한데, 모처럼 한숨 돌린 갈대밭에서 먼저 바람이 인다. 걱정스런 갈대가 수런거리기 시작한다. 갈수록 산과 강에서도 눈가루가 날리며 또다시 바람소리가 울린다. 마침내 내 가슴 속으로도 스산한 바람이 스며든다.
젊은 시절에 가슴에서 일던 바람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무언가를 기다리게 하는 벅찬 설렘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노년기에 이는 바람에는 가슴이 휑하니 시리기만 하다. 그 무언가를 기대하던 설렘도 이제는 모두가 무망하다는 것을 가슴이 먼저 알아챘는가 보다.
산촌 노인들처럼 밤 어둠이 찾아와도 불을 밝히지 않게 될 날이, 내게도 오고 있는 건 아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