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1848-1903)
1848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고갱의 아버지는 공화파 신문기자이고 어머니는 페루의 사회주의자 집안 출신이다.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공화주의자였던 고갱의 아버지는 페루로 망명하기로 한다. 처가가 페루 대통령의 친인척이었으므로 신문사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병으로 배에서 사망하자 고갱은 어머니와 함께 페루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유산문제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고갱은 유년시절을 즐겁게 회상한다.
1865(17세)에 상선의 선원이 되었다. 이때는 조금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1872년에는 주식 중개인 생활을 하면서 조금의 생활 여유도 생겼다. 1874년에 피사로를 알게 되면서 제 1회 인상파 미술전을 보고 여가 시간에 그림도 그리고, 미술품을 수집하기도 했다.
1876년에는 살롱전에서 그의 풍경화가 입선했다. 화가 생활을 했으나 수 년 간이나 그의 작품을 팔리지 않았다. 그는 가족 부양을 위해서 그의 소장품을 팔았다. 이때 피사로의 소개로 세잔과 기요맹 등을 사귀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1883년에는 가족 몰래 직장을 사직하고 그림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인상파 전시 후에 지방으로 가서 처음에는 퐁타벤에 다음에는 르폴되에 정착했다. 그의 새로운 양식의 회화에 매료된 화가들이 그룹을 만들면서 중심 인물이 되었다. 아를르에 가서 잠시 고호와 함께 있었으나 반 고호의 광기로 그곳 생활도 접었다.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자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고펜하겐으로 보내고 한 아이만 데리고 파리로 왔다. 가난했던 그는 덴마크, 파나마 등 이곳저곳으로 떠돌며서 생활했다.
고갱은 세기말적인 풍조에 물들어 자연 그대로의 단순한 삶을 추구했으며 프리미티브(원시주의)를 이상화 했다. 1891년에 프랑스를 떠나 원시지역으로 믿고 타히티로 갔다. 그는 그곳 생활을 자전적인 글 ‘노아 노아’를 썼다. 그는 고대인과 원시인의 예술에서 조형적인 영감을 찾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타히티에서 찬란한 색채와 관능적인 기쁨을 발견하지만, 어려운 육체 노동과 말라리아에 걸려서 돈도 벌지 못했다.
그는 미술에서 강렬한 색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졌고, 그가 도입한 윤곽선은 일본의 다색판화나 스테인글라스를 연상시키는 리드미컬한 패턴을 만들었다. 1887년부터 그는 자신의 기법을 상징주의적 종합주의라고 했다. 그는 원주민의 삶처럼 단순하면서도 새롭고 신비스러운 자기 그림에 무척 만족했다. 그래서 그림을 팔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너무 야만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림을 사지 않았다. 딸과 아들이 먼저 죽는 일까지 생기자 우울증에 빠져서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상징주의적이란 말은 그림 속의 볼륨과 패턴이 단순히 시각적 경험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이미지나 관념을 암시하는 의미라고 했다.(상징주의는 당시 유행하던 예술사조이기도 했다.) 1889년 이후로 고갱은 상징주의를 거부했지만 ‘나비파’와 상징주의 운동은 고갱의 이러한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얻어서 형성되었다. 유럽에서 그의 생활을 비참했다.
1895년에 다시 타히티로 돌아갔다. 타히티로 돌아온 그는 14세의 타히티 소녀와 10년 가까이 살면서 두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그는 매독과 고독에 시달려야 했다.
덴마크에서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제작했다. 작품을 완성하고 자실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동양화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가는 형식을 취하면서, 왼쪽 아래의 아기의 탄생부터 성장, 성숙, 노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1901년 9월에 마르케사스 제도의 도미니카 섬(지금의 히바오아섬)으로 옮겨가서 정착했다. 화상 볼라르가 작품 대금을 미리 보내주어서 경제적 빈곤에서는 벗어났다고 한다.
56세의 고갱은 타이티의 작은 오두막에서 ‘눈덮인 보르타뉴 마을’을 완성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고갱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나타나는데 근원적인 역할을 했다. 야수파와 피카소 미술의 모태가 되었다.
1903년에 살롱 도톤느에서는 고갱의 제 1회 회고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가 이후의 고갱 평가의 기초가 되었다. 1910년 11월부터 1911년 1월까지 런던에서 열린 후기 인상파 회고전에서 고갱의 작품은 41점이나 전시 되었다. 이때는 신문의 비평에서 혹평을 받았다.(고호와 마티스도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1936년에는 뉴욕에서 대규모 고갱 회고전이 열렸다.
서머셋 옴의 ‘달과 6펜스’는 그를 모델로 하여 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