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84]신간 『찬샘별곡』의 갈피 갈피에는……
어제 오전 11시, 대문 앞에 택배차가 멈추더니, 택배원이 두툼한 책박스 2개를 끙끙거리며 툇마루에 놓고 간다. ‘아 내 책이 드디어 왔구나’ 반가운 마음에 얼른 나가 책을 꺼내 살핀다. 정말 우리나라 좋은 나라. 그제 오후 책을 보낸다는 말을 듣고 오늘이나 올까 생각했었다. 출판사에서 저자에게 무상으로 주는 10권과 저자가 지인들에게 선물하고자 30% 할인한 값으로 구입한 저자 인수본 80권, 총 90권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 못해도 50kg는 될 듯. 책처럼 무거운 게 있을까? 도시에서 이사를 몇 번 다녀봤지만, 진짜 힘든 것은 책을 싸는 것. 전문업체에 맡기지만, 그들에게 미안한 적이 많았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 틀림없지만, 쌓이다보면 감당하기가 힘들다. 지지난해에도 서재에 쌓인 1500여권의 책을 처분했지만(다행히 헌책방에서 트럭을 가져와 해결됐고, 그 책들의 가치와 종류에 상관없이 20만원을 놓고 갔다), 2년도 안돼 다시 쌓인 책들을 어찌할꼬? 책을 좋아하는 자의 ‘숙명’이겠지만, 어느 때에는 '계륵(鷄肋)같다'고 느낄 때가 많다.
아무튼, 책 표지 디자인이 수수한 게 마음에 들었다(눈 밝은 기획자가 디자이너 전공이다). 제목 ‘찬샘별곡’이 새삼 새로웠다. 찬샘은 고향 ‘냉천(冷泉)’의 순우리말 이름(저자 작명)이고, 별곡은 42년만에 귀향하여 '나 홀로 부르는 노래'라고 스스로 정의했다. 그러니까, 소설, 에세이, 시도 아닌 것이 ‘생활글’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신변잡기(身邊雜記)’의 글모음집인 것이다. 엊그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어느 ‘눈 밝은 출판편집자’를 만나면 틀림없이 ‘(나의 졸문이) 빛을 볼 날’ 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하하.
교정지를 볼 때 재독(再讀)했지만, 막상 책으로 만들어져 손에 잡히는대로 페이지를 뒤적거리는데, 이 ‘그립감(grip感)’이 장난이 아니게 좋다. 지금이야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막 배달된 잉크냄새나는 신문을 들고 변기에 앉아 읽던 그 익숙한 장면이 아주 오래된 풍경이 되고 말았지만, 우리같은 아날로그 세대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해 향수(鄕愁)에 잠기곤 하지 않던가. 그것도 일종의 그립감(grip感)인 것을. 그동안 개인과 가족문집 그리고 에세이집을 책이랍시고 몇 권 냈지만, 이 책은 『나는 휴머니스트다』와 함께 남다른 게 있다. 『나는 휴머니스트다』는 2008년 성균관대출판부의 공모전에
뽑혀 선인세(先印稅) 500만원을 받았을 뿐이지만(교수와 교직원 49명이 지원, 교직원으로는 7대1의 경쟁률을 뚫고 내가 유일하게 선정됐다. 아마도 지금껏 유일할 듯), 기분이 짱이었다. 그해 108명을 초대해 출판기념회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이 책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느 신생 출판사에서 기획해 세상에 빛을 보게 돼 더욱 의미가 있다하겠다. 그런데, 무명의 작가인만큼 그 출판사가 내 책으로 인해 손해를 보면 안된다는 우려가 앞섰다. 아, 나야 1쇄가 매진되고 3, 4쇄를 펴낸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말년에 인세(정가의 10%?)로 술값이 서너 번이라도 해결된다면야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하여, 아는 100여명의 지인들에게 “민폐를 무릅쓰고 부탁드린다”는 민원(民願)을 카톡으로 보냈는데, 불과 이틀만에 100권이 소진되었다고 한다. ‘저자 인수본’이라는 이름으로 저자와 동등하게 30% 할인된 값으로 보내주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도서정가제’의 규정을 어기는 편법이라고 한다.
아무튼, 뜨거운 호응에 감사드린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다. 엎드려 절한다. 하여, 그 책의 갈피 갈피를 뒤적거리며, 그래도 기억해도 좋은 구절을 몇 개 부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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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오늘’의 시점을, 그는 ‘난세’라고 확실하게 규정했다. 우리는 전대미문의 난세에 살고 있다. 6학년인 우리야 살 만큼 살았다고 해도 우리 아들과 손자 세대는 어찌할 것인가? 통일은 요원하고 정치는 ‘개똥’이지 않은가. 이승만도, 박정희도, 전두환도, 노태우도 겪어 봤지만, 검찰 독재, 검찰 공화국은 웬 말인가? 그 끝은 과연 어디일까? 두 달 14일 치의 일기를 보라. 그가 왜 난세라고 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거의 모든 게 담겨 있다. (「지금, 들려주고 싶은 이름」 23쪽)
무기수가 되어 한 평짜리 아득한 감옥 독방에 던져졌을 때도 ‘한 걸음 두 걸음 반이면 눈앞에 쇠창살, 돌아서 한 걸음 두 걸음 반이면 코앞에 벽’이었어도 ‘걷는 독서’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자유의 몸이 되고 국경 너머 눈물 흐르는 지구의 골목길에서도 ‘걷는 독서’를 계속했다는 그의 길이 오직 ‘Reading while walking along.’(걷는 독서, 그 자체)였음을 알게 됐다. (「지금, 들려주고 싶은 이름」 56쪽)
문득,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마음의 힘을 채워주는 옛사람들의 좌우명을 되짚어보자. 그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삶을 대했고, 어떻게 삶의 파도를 헤쳐 나갔을까? 궁금하지 않으신가. 저자는 말한다. “삶은 외롭고 가련한 것”이라고. 나도 그 명제에 늘 동의하는 사람이기에, 삶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성현들의 삶의 철학이 녹아 있고 묻어나는 좋은 글들이 나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되곤 한다. ‘아항, 이분들의 삶도 내 삶과 별반 다를 게 없구나. 나와 다른 것은 이분들은 끊임없이 수양(마음의 도를 닦음)하면서 노력하고, 경건하게 산 게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옛 책 읽기의 즐거움」 94쪽)
작가는 냉정히 말한다. 아버지의 ‘죽음일지’는 자신이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라고. 그리고 아버지의 ‘십팔번 말씀’을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너무 아름답더라고 고백한다. 어찌 섬진강변의 벚꽃길, 반야봉의 낙조, 노고단의 운해만 아름다울 것인가. 고향에 돌아와 보니 서울에서는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이 천지삐까리’인 것을. 작가에게 감정이입이나 된 듯 몰입한 소설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책에서 흔들린 마음」 141쪽)
책 읽는 걸 아무리 싫어해도 『강아지똥』과 『몽실언니』만큼은 봐야 할 것같다. 『강아지똥』은 전우익 선생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가 떠오르고, 『몽실언니』는 가난했던 화가 박수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가난하고 아프고 힘든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도 진행되고, 앞으로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을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선생이라고 부르고 싶은 권정생 작가가 ‘랑랑별’에서 건강한 남자로 다시 태어나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했으면 좋겠다. 그분의 말처럼 그때는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을 믿는다. (「책에서 흔들린 마음」 151쪽)
아무튼, 나는 시를, 시 세계를 아예 모르므로, 순전히 내 마음대로 시라는 것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집에 없는 <오늘 햇살은 순금>이라는 시집 제목이 지극히 마음에 든다. 오늘(지금)의 오월 햇살이 황금도, 다이아몬드도, 억만금도 아니고, 다른 금속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금이란다. 언젠가 친구의 보석 상점 이름이 <포나인(four nine)>이어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순도(純度) 99.99를 이른다고 해 웃은 게 기억났다. 그렇다. 햇살에 무슨 오염이 있겠는가? 햇살이야말로 황금보다 더 좋은 ‘지금(只今)’이자 ‘순금(純金. 100% 금)’인 것을. (「책에서 찾은 아름다운 길」 216쪽)
김 대표(한길사 김언호)는 머리말에서 “책 읽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 마음이 아름답고, 그 행동이 아름답다. 책을 읽으니, 우리는 이미 친구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미 친구,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 공자님도 일찍이 ‘이문회우(以文會友)’라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히 맞는 말이건만, 이날 이때껏 나는 책을 좋아하고 즐겨 읽었으면서도, 『서재 탐험』을 읽으며 왜 계속 부끄럽다고 느낀 것일까? 우물 안 개구리. 남다른 성취, 예를 들면 유명한 소설가나 시인, 수필가가 못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교수나 유명한 학자와 저술가가 못된 까닭일까? 잘 모르겠지만, 도란도란 바로 옆에서 듣는 듯한 그들의 책(독서력)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서재를 구경하면서도 어쩐지 낯선 듯한 이 느낌은 무엇인가? (「책에서 찾은 아름다운 길」 246쪽)
우리는 ‘너와 나’라는 좁은 의미의 단어가 아니다. 공동체, 커뮤니티, 집단을 뜻하는 광의의 개념인 것을.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장 당황한 말이 ‘우리 마누라’라고 한다. ‘my wife’가 아니고 ‘our wife’ 이게 말이 되는가? 아버지도, 어머니도, 집도, 나라도, 말과 글도 모두 ‘나의’가 아닌 ‘우리’이다. ‘우리’를 떠나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우리에게 ‘우리’는 대체 무엇인가? 오죽하면 ‘우리나라’ ‘우리집’ ‘우리말’ ‘우리글’ 등 네 단어는 붙여 쓰는 걸로 사전에 올라와 있을까? (「책에서 지금, 우리를 만나다」 273쪽)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적으로 꿰뚫는, 이런 ‘통시적(通時的) 학자’의 저술을 통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항상 의식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오랜 지론이다. 수도 없이 많은 깨어 있는 ‘깨시민’ 덕분에 비록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으나 6년 전 촛불혁명을 낳았고, 최근 무혈(無血)의 ‘빛의 혁명’을 이룩하여, 드디어 마침내 완성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책에서 지금, 우리를 만나다」 3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