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31
7월27일[연중 제1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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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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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2x-qhO6AgZc
[서울대교구 배우석 리노(중앙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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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의 때를 기다립시다!>
젊은 시절을 돌아보니 혈기왕성했던 나머지 이리 충돌 저리 충돌, 사방으로 다니면서 좌충우돌하곤 했습니다. 돌아보니 참 부끄럽습니다. 나 자신의 심각한 결핍이나 죄 앞에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이웃의 작은 실수나 부족함 앞에는 엄청나게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습니다.
오랜 세월 주님께서 나를 무한한 인내로 참고 또 참아주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히 이웃의 부족함을 기꺼이 견뎌냈어야 마땅한데...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하면 우리의 주님은 분노에 더디시고 인내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수천 년간 거듭되어온 우리 인간의 배신과 반역에도 또다시 자비를 베푸시고, 새 계약을 맺으시며,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의 모습이 오늘 밀과 가라지의 비유 속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저 같으면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실이 없는 나무는 즉시 톱을 들고 나가 바로 잘라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 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 29-30)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당신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 모순되고 폭력적인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주 종들처럼 생각합니다. “저 악한 인간들을 지금 당장 모조리 쓸어버릴까요?” 인간의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최종 심판자이신 주님의 역할을 인간이 직접 수행해버리려는 유혹 앞에 서게 됩니다. 주님의 때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직접 판단하고 결정하고 복수하려고 합니다.
때로 주님께서 깊은 침묵 속에 계시는 것 같지만 사실 당신께서 직접 정한 계획에 따라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주님 홀로 한 인간에 대한, 이 세상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의 권리를 지니고 계십니다.
악의 세력들에 대한 최종적인 단죄와 보복은 주님께 맡겨드릴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계획과 섭리, 주님의 뜻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원수는 종종 우리를 찾아와 우리 마음의 밭에다가도 가라지를 뿌려놓고 갑니다. 공동체를 좀먹게 하는 불평불만의 가라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와해시키는 이단의 가라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심의 가라지...
우리를 짜증나게 하고 성가시게 하는 다양한 가라지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내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때, 주님의 뜻, 주님의 결정적인 개입을 기다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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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밀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법>
김지은씨는 북한에서 9년간 한의사로 일하면서 절망을 느꼈습니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엄마와 함께 울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맨몸으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 시골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중국 공안에 잡혔지만 마을 사람들의 사정으로 가까스로 풀려났습니다.
그녀는 더 안전한 북경으로 도망쳐 3년간 파출부와 도시락 판매원으로 일했습니다. 거기서도 불안을 느껴 미얀마로 피신했지만 또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러다 구사일생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처음에는 다단계 판매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정착금으로 받은 것을 몽땅 잃고 말았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한의사가 되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보건복지부를 찾아갔습니다.
담당 공무원은 무심하게 “북한에 가서 대학졸업증명서를 가져오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구나! 죽는 수밖에 ...’ 그녀는 유서를 써놓고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1분 후면 목숨이 끊어질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고요함이 밀려왔습니다. 시야가 매우 투명해지고 지나간 일들이 영화처럼 스쳐갔습니다.
‘지금보다 더 힘들 때가 많았구나! 그런데 왜 세 끼 밥을 다 먹을 수 있는 지금 죽으려 하는 것인가? 그렇다. 욕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한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조금씩 잘 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직장동료들은 한의대 진학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녀는 국회청원을 내서 지방 한의대 편입학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마침내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녀는 남북한의 한의사 자격증을 모두 가진 최초의 한의사가 되었고 지금은 잘 나가는 한의원 원장입니다.
주님의 씨는 밀이고 사탄이 뿌린 씨는 가라지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서로 비슷하여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나중에 심판 때 구분이 되기는 하겠지만 자기 자신이 먼저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해보지 않으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어떻게 구분이 될까요?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났으면 밀이고, 태어날 때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가라지입니다.
밀은 사랑할 줄 알고 가라지는 집착합니다. 사랑과 집착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사랑과 집착을 구분할 줄 알아야 밀인지 가라지인지도 구별이 가능해집니다.
사랑과 집착은 어떻게 다를까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으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으면 너무 좋아서 없으면 못 살 것 같다면 그건 집착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지옥 간다고 지옥까지 쫓아가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면 집착일 것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존중해줍니다.
그러나 자아의 집착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목숨까지 버립니다. 사업이 망해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고 자살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가라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품은 사람은 그런 것을 다 잃더라도 여전히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기에 삶을 포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로 김지은 원장은 자살하려고 할 때까지가 가라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집착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집착을 내려놓자 밀이 되었습니다. 자아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버렸다는 것은 다른 본성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미워하라!”는 말은 “사랑하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도 미워하고 가족도 미워하고 돈도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당신을 따르기 위해 장애가 되면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당신을 따르는데 장애가 되지 않으면 굳이 가난을 자랑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돈을 미워하라는 말은 일부러 거지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거지가 되더라도 상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랩퍼 중 가장 돈을 많이 번다는 도끼는 돈이 엄청 많습니다. 한 달에 수천 만원하는 백 평이 넘는 초호화 호텔 방에 백화점을 연상케 하는 명품 옷, 장신구, 운동화들을 갖춰놓고 살아갑니다. 고양이 방이 보통 집 안방보다 큽니다. 차고엔 초고가 외제차들이 즐비합니다. 진열장엔 5만 원짜리 돈다발이 수북이 놓여있습니다. 매달 한 뭉치씩 어머니에게 드린다고 합니다.
그는 밀일까요, 가라지일까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난을 아는 사람입니다. 2년 간 기획사 옥상 컨테이너에 살며 랩을 배울 땐 단 돈 5백 원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때를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술, 담배, 커피를 일절 하지 않습니다. 공연이 끝나도 뒤풀이를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말은 그가 돈 버는 것이 돈에 집착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돈으로 육체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돈이 없어도 잘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면을 볼 때 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밀은 사랑하고 가라지는 집착합니다. 가라지는 집착의 본성이고 밀은 사랑의 본성입니다.
내가 사람이나 세상 것들을 사랑하는지, 집착하는지 살펴야합니다.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매우 다른 심판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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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미는 매일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일꾼입니다. 베짱이는 놀면서 시간 나면 일하는 한량입니다.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오면 개미는 여름에 모아둔 먹이를 먹으며 겨울을 보냅니다. 그런데 베짱이는 추운 겨울이 오면 먹을 것이 없어서 개미에게 구걸하며 겨울을 보냅니다. 과학자들이 일개미를 연구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개미 중에도 30%는 아주 열심히 일하고, 30%는 대충 일하고, 30%는 다른 일개미가 열심히 만들어 놓은 걸 망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열심히 일하는 일개미만 모아서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마찬가지로 ‘3 : 3 ; 3’의 법칙은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세상에도 비슷합니다. 인재들이 모인 대학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들 자기가 속했던 고등학교에서는 최고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이 모인 대학에서는 모두가 최고의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합니다. 그중에서도 30%는 열심히 하고, 30%는 대충 하고, 30%는 포기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자연의 법칙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도전 골든 벨’이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모여서 문제를 맞히는 프로입니다. 학생들은 하얀 보드 판에 문제의 정답을 적습니다. 정답을 적은 학생은 남고, 오답을 적은 학생들은 밖으로 나갑니다. 이렇게 진행되다가, 진행자는 탈락자들을 위해서 ‘패자 부활전’을 합니다. 탈락자들에게 문제를 내서 맞히면 다시 골든 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패자 부활전에서 돌아온 학생이 마지막 문제를 맞히면서 우승하는 때도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패자 부활전’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의 골든 벨’에 참석하는 학생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알 수 있는 문제를 내십니다. 바로 ‘십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셔서 우리가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징을 믿고 따르면 누구나 구원의 골든 벨을 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은 자라면 열매를 맺고 양식이 되기 때문에 잘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자라도 열매를 맺지 않기에 뽑아야 합니다. 밀에도,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가라지를 뽑아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 때까지는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의 뿌리가 밀의 뿌리와 붙어 있다면 그것을 나누는 것이 절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밀의 열매이기 때문에 추수 때가 되면 밀의 열매는 거두고, 가라지는 버리면 된다고 하십니다. 류시화 작가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신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라는 책도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나쁜 것 같지만 나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과정인 경우가 있습니다. 잔잔한 파도는 유능한 항해사를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험한 파도를 겪어야만 유능한 항해사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초라하고 남루할지라도 나중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기는 것도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해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시편의 기도를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으니.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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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24-30: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함께 있으면서 악의 폐해가 있지만 결국에 악은 가려져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자연 식물로서의 가라지는 결코 밀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악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인간은 언제나 회개하면 선인이 될 수 있으므로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두라고 하신다.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이다. 그 좋은 씨를 뿌린 이는 말씀이신 하느님이시다. 말씀이신 하느님은 이 세상에 계속 말씀의 씨를 뿌리신다. 말씀의 씨앗은 우리 마음속에 뿌려진 좋은 씨앗이며 우리 인간은 저마다 영적인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는 삶은 항상 하느님의 자녀로서 깨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즉 주님의 계명을 잘 실천하지 못하는 때에, 악마는 좋은 씨들 사이에 악한 생각들이라는 가라지를 덧뿌린다. 사람의 아들은 좋은 씨를 뿌렸지만 악한 자가 깨어있지 못하는 그때 가라지를 뿌렸고, 악에서 돋아난 그것들은 악한 자의 자녀이다. 이렇게 세상이라는 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살고 있다. 밀과 가라지는 주님의 밭이라고 하는 교회에 언제나 함께 있다. 사람과 진짜 밀과 가라지는 다르다. 밭에 있던 밀은 가라지가 될 수 없고, 가라지는 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밀이었던 것이 가라지가 될 수도 있고, 가라지였던 것이 밀이 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내일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종들처럼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28절) 하면서 가라지를 뽑거나 잘라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한다.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29절) 다른 사람을 쉽게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오늘 악으로 타락하였다 해도, 내일 진리를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30절) 고 하신다. 또 가라지는 싹이 튼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대가 자라나지 않았을 때는 밀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확실하지 않은 것은 판단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세상 종말”(마태 13,39) 때, 심판 때에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나라 전체에서 가라지들을 모두 거두어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때야 그들은 자기들이 자는 동안에 받아들인 것이 악마의 씨앗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울부짖으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2). 그리고 의인들은 그저 빛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라고 하신다. 항상 깨어있는 삶으로 좋은 씨를 받고, 가꾸고 키워서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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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창세 3,7). 아담과 하와가 죄를 저지르고 난 뒤에 한 첫 행동은 ‘알몸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더 이상 알몸을 보여 주고 싶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누구에게 ‘알몸’을 보여 줄 수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몸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몸을 보여 주기 싫어졌다는 것은 이제 그 사람과 맺은 사랑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죄는 하느님과 우리가 맺은 사랑의 관계를 깨지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죄는 우리 마음 속에 착각을 일으킵니다. 죄 안에 있거나 그 죄를 계속해서 저질러도 ‘우리는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하는 착각, 하느님과 깨져 버린 관계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착각 속에 우리를 가둡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마지막 날까지 미루셨습니다. 모두 회개하여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느껴집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해소에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 우리의 알몸을 그분께 보여 드릴 수 있는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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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직은 모릅니다.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4ㄴ-30)
1) 여기서 ‘하늘나라’는 종말에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 세상 안에서 건설되고 있는 메시아의 나라, 또는 교회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이 세상에, 또는 교회에 왜 악인들과 의인들이 섞여 있는지를 나타내는 비유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말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는 악인의 멸망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신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에제 33,11)
2)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라는 말은, “사람들이 방심하고 있는 동안에” 라는 뜻일 수도 있고, 그냥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악’의 기원과 활동은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즉 ‘신비’ 속에 숨어 있는 일입니다.>
교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 비유를 생각하면, 악마는 교회 안까지 침투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됩니다. 이 말에서,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0ㄴ-41)
죄를 지은 다음에 악마가 유혹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악마 핑계를 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유혹한 악마는 하느님께서 따로 엄하게 심판하시겠지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지은 사람 자신도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불가항력에 끌려가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완전한 의인들만 모여 있는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고,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서 모두 함께 믿고 함께 회개하면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함께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 과정에서 악마의 유혹과 압박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람들 사이에 의견 차이와 갈등과 대립이 있을 수도 있고, 외부에서 오는 박해와 고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거나 신앙을 아예 잃어버리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서로 사랑하면서 끝까지 함께 가려고 노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남 탓’ 하지 말고, 우선 먼저 ‘나부터’ 노력해야 합니다.>
3)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는, 산상설교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1-2)
어떤 형제가 악인이 아닌데도 함부로 악인이라고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그런다고 해서 그 형제의 구원이 막히는 것은 아닌데, 그를 판단하고 단죄한 내 죄만 커지게 됩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을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는 용서의 권한에 대해서 사도들에게 다음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ㄴ-23)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또는 교회에) 모든 권한을 넘겨주신 말씀들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대행할 수 있도록 사목 직무와 권한을 ‘위임’해 주신 말씀들입니다.
사도들은(교회는) 아무나 마음대로 심판하고 단죄해도 되는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는 직무와 그 직무 수행에 필요한 권한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오직 용서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4)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는, “혹시 진짜 악인이라고 해도, 회개할 기회를 주어라.”입니다.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라는 말씀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악인들은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지금 악인이라도 회개해서 의인이 될 수 있고, 의인이라도 타락해서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될지는 ‘지금은’ 모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지 말고, 나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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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창세 3,7). 아담과 하와가 죄를 저지르고 난 뒤에 한 첫 행동은 ‘알몸을 가리는 것’ 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더 이상 알몸을 보여 주고 싶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누구에게 ‘알몸’을 보여 줄 수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몸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몸을 보여 주기 싫어졌다는 것은 이제 그 사람과 맺은 사랑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죄는 하느님과 우리가 맺은 사랑의 관계를 깨지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죄는 우리 마음 속에 착각을 일으킵니다. 죄 안에 있거나 그 죄를 계속해서 저질러도 ‘우리는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하는 착각, 하느님과 깨져 버린 관계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착각 속에 우리를 가둡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마지막 날까지 미루셨습니다. 모두 회개하여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느껴집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해소에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 우리의 알몸을 그분께 보여 드릴 수 있는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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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지금은 많이 달라지기는 했어도 그래도 우리의 주식은 쌀이지요. 어머니께서 묵은 쌀에서 벌레가 생긴다고 걱정하시는 말씀을 듣곤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부엌은 깨끗하고 유리로 된 창문이 있어서 들어 올 틈도 없는데 쌀을 넣어두는 단지에 쌀벌레가 기승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옛날 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을 자신도 하게 됩니다.‘아니, 쌀벌레는 어디서 생기는 거야?’
마태오가 전하는 주님의 비유 말씀 중에 ‘가라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가라지'라고 번역하였는데, 한자로는 '패자(稗子)'라고 번역하는데 돌피로 이해합니다. 영어로는 'Weed's라 번역하는데 뜻은 잡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보통 보리나 밀에서 섞여 사는 '잡초'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잡초를 다른 말로 '독보리(毒麥)'라고도 하는데 그 자체에는 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축 중에서 이것을 먹으면 중독을 일으킬 수 있어 꺼려하는 풀이기도 합니다. 가라지의 특징은 이삭이 패기 전까지는 생김새가 밀이나 보리와 분간이 어려운데 한 순간에 성장이 빨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라지가 추수전에는 한 뼘 정도 비쭉 더 나와서 눈에 띄게 됩니다. 그래서 일꾼들이 밀과 보리에 섞이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미리 뽑아 단을 만들어 태워버리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에서 밀과 가리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심을 때는 좋은 씨를 심었는데 추수를 앞두고 보니 가라지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가라지는 결실이 되어도 열매로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으므로 일일이 뽑아서 한데 모아 불에 태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선인과 악인의 차이를 적절하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며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천국에 속한 이들이며 가라지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몰래 가라지를 심는 원수는 마귀를 뜻하며 추수 때에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추수하는 자는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으로 농부가 좋은 땅에 뿌린 씨와 원수가 가라지를 덧 붙여 뿌린 비유 대해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가라지가 자라자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주인은 원수가 그랬다고 대답하자 종들이 다시 가라지를 거두어드리는지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주인이 대답합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 들이라고 하겠다.”(마태오 13,29-30)
주님께서 드시는 이 비유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납니다. 악인에 대해서 종말까지 기다리시겠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엄청한 일인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탄식의말을 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잘 되는 것 같아도 인간적으로도 불행해지고 또 하느님의 심판으로도 징벌을 몰아서 받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나의 잘못에 대해서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잊지 말고 회개하고 또 사회정의에 대해서도 기다릴 줄 아는 너그러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단번의 심판, 속전속결의 결과를 좋아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지루하게 느낄 정도로 악인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세상의 판단을 넘어서 추수할 때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사회도 가라지가 있다는 생각하며 여유롭게 살 수 있어야 하겠지요. 세상의 구조가 어떤 공동체이든간에 약 10%가 말썽을 일으키고 못되게 군다네요. 그러니 원수가 심은 가라지의 의미를 우리의 삶에서 새기며 인내와 너그러움,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잘못에 대한 성찰과 회개가 항상 뒤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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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마태오복음에서 세 번째 설교집인 13장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핵심 메시지인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일곱 가지의 비유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중 두 번째인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오 13,24)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밭으로 삼아 좋은 씨를 뿌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분명 좋은 씨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신의 밭'에 침입자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마태오 13,25)
그렇습니다. 가라지가 뿌려진 것은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벌어진 일입니다. 곧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밭에 뿌려진 '좋은 씨'를 방치한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자신 안에 심어진 말씀의 씨앗에 응답하지 않고 잠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가라지는 뿌려집니다.
그러기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먼저 '좋은 씨'의 존귀함을 깨닫고 깨어 지켜야 할 일입니다. 그 리고 가라지와 밀을 분별할 줄을 알아야 하고, 가라지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막고 '좋은 씨'가 잘 자라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오 13,28)라고 말하는 종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오 13,29-30)
사실 가라지는 밀의 뿌리와 서로 얽혀 있기에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히게 되기 때문에 수확 때에 뿌리를 함께 뽑아서 분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밀’인 사람들에게 수확 때까지 견뎌내는 성실함을 당부함이라 말하며, 한편 히에로니무스는 ‘가라지’인 사람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 둠을 시사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 베네딕투스는 그의 [수도규칙]에서 말합니다. “악습은 미워하되 형제들은 사랑할 것이다. 책벌함에 있어서는 현명하게 할 것이며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 것이니, 녹을 너무 지우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격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규칙서 64,12)
사실 공동체 안에도, 가정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오 6,14)라는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이나 악을 제거하거나 없애주거나 해결해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것으로부터 구해달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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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되게 하소서!
제 안에 하늘이 열리고 당신의 나라가 자라나 온갖 나쁜 것들을 도려내고
당신 형상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이 세상과 형제들과 공동체를 밭으로 주셨으니 제 손이 당신 사랑을 뿌리게 하소서.
오늘, 우리 안에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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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13,29~30)
예수님의 선포와 실천의 핵심은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 곧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에 있습니다. 이런 연유에서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하느님의 다스림과 그 나라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관한 가장 중요한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13,1~23)와 가라지의 비유(13,24~30)입니다. 이 두 가지 비유를 깊이 살펴보면 우리가 우리 시대의 악에 관해 어떤 처신을 해왔고, 해야 하는 가를 반면교사로 배울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 점은 선한 의도와 관계없이 선의 좌절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가 제자들과 확연히 구별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선행에 실패가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해서 꿋꿋이 자신이 해야 할 바(=하늘나라의 선포)를 실천해 가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리지 비유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삶과 의도와는 달리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단호히 선으로 악을 대처하는 대신 자기를 악에서 분리하려는 의도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밭에 좋은 씨(13,27)를 뿌린 주인이십니다. 밭에 뿌려진 좋은 씨인 밀은 선이며 선포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밭에 가라지는 덧뿌려진 악이며 배격해야 할 악의 가치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뿌린 그 실체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13,28)하고 지적하신 것은 이미 그 악의 실체를 인지하고 직시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분명 하느님의 뜻과 부합하고 적합하지 않은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밀과 가라지가 한 밭에 공존하듯이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진솔한 세상, 교회, 가정, 개인의 현실이며, 이러한 현실 상황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행동을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 역시 이런 현실 앞에서 당황스럽고 혼란을 겪을 수도 있으며 즉각, 가라지(=악)을 보고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13,28)라고 대응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기에 잠시라도 직시하고 직면하면서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단지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런 졸속한 해결책에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13,29.30)하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농사법은 세상의 농사법과 다름을 보여줍니다. 이런 성급함은 오히려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더 힘든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 신앙의 시선에서보다 신중히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 버려 두어라.”(13,30)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 먼저 악을 우리 가운데 두고 견디어 내자, 는 것입니다. 듣기에 따라서 예수님의 처신이 엄청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방안처럼 들릴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왜 예수님은 이런 방안을 제자들에게 제시하셨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어떤 누구도 시초에는 밀과 가라지를, 선과 악을 분명하게 알아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도 그리고 지금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목 현장에서 가리지(=악)를 뽑으려다 밀(=선)까지 뽑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밀과 가라지는 모양이 거의 비슷해서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보면 밀까지 뽑아버릴 수가 있으며(13,29참조),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밀과 가라지가 뿌리로부터 서로 얽혀 있어서 가라지를 뽑아내려다 오히려 밀까지 뽑아낼 십상입니다. 그래서 이를 아시는 예수님은 밀과 가라지를 그냥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확실히 초대 그리스도교인은 악, 개인이나, 집단을 자신들과 구분하고 구별 지으려고 했고, 함께 살기보다 배격하고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자신들의 약한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종교의 엘리트 의식, 선민의식,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관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태도는 무엇보다 먼저, 일단 타인에게 악의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악의 실체를 인지하면서도 꿋꿋이 선을 실행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선 하나만이 악에 대처하는 진정한 해결책이 됩니다. 악을 악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다 보면, 끊임없는 악순환만이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율법이 인간의 구원을 제약하는 곳이 어디든지 율법을 반박하였고, 오로지 하느님의 선으로만 하늘나라를 현실화하려고 묵묵히, 꿋꿋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기보다 현실 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실천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갑시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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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기 비하 개그로 유명한 정치인이 있습니다.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가 미국 상원의원을 준비하던 시절, 경쟁자는 유세장에서 링컨을 향해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링컨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다.”
이 말에 화내거나, 자기 역시 상대에 대한 비난의 말을 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링컨은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저에게 두 얼굴이 있다면, 중요한 이 자리에 굳이 못생긴 얼굴을 하고 오지 않았을 겁니다.”
평소 못생긴 외모로 놀림을 당해오던 그였기에 좌중은 폭소했고, 이런 그의 대응은 큰 호감을 샀고 결국 선거에서 당선되었습니다. 이렇게 상대를 대했던 링컨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자존감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누구보다 탄탄한 자존감에 어떤 말에도, 심지어 자기를 비난하는 말에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 자존감이라는 것이 뜻대로 높아지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말라고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선택하는 방법은 다른 이의 비난에 비난으로 맞대응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그 순간에는 적절한 방법처럼 보이지만, 금세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힘센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비난을 충분히 이겨낼 정도로의 커다란 힘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보십시오.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을 때, 종들은 이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끝까지 기다리면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끝까지 버티어 내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원수가 뿌린 가라지 때문에 힘든 삶을 지낼 수밖에 없지만, 마지막 심판 때에 가려내시는 정의로운 분이시기에 그때 가장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그리고 주님과 함께할 때만이 진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잘 살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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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이 좋아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원인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사람은 망하는 법입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거두어서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곡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서 만나야 합니다.
농사 일을 하는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뿌린 씨는 좋은 것이었는데 어찌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가라지를 거두어낼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말합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우리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뽑아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두어 기회를 주십니다. 결정적으로 알곡은 곳간에 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골라내려는 노력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의 계획을 간섭하는 일이 됩니다. 판단의 권리는 주인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 12,19). 하나를 거둘지 둘을 거둘지 결정하는 것은 주인의 몫입니다. 주인은 가라지와 그로 인한 피해를 참아주며 기다립니다. 우리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잘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가라지 같은 인생이라면 서둘러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꿔야 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과거에 안주하지 않으며 하늘을 보고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성경 인물 중에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도 한때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방탕한 삶을 끝내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선과 악은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 구분되듯이 세상 종말에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추수 때 따로 베어져 불태워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었던 밀과 같은 선한 사람들은 하늘의 곳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시련이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나를 견고케 하는 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 날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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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밀 가꾸는 사람>
마태오 13,24-30 (가라지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밀 가꾸는 사람>
밀
가운데에
가라지
눈살
찌푸리게
하여도
가라지에서
밀에게
고운 눈길을
밀
가운데에
가라지
손길
거칠게
뻗고 싶어도
가라지에서
밀에게
부드러운 손길을
가라지를
뽑는
사람이 아니라
밀을
가꾸는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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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밀이라는 자가 가라지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보면 가라지가 꼭 밀 가운데 섞여 있는데, 그 가라지들을 우리가 뽑으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가라지를 잘 솎아낼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오늘 저는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까 합니다.
지금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를 밀이라고 생각하는가? 가라지라고 생각하는가?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자기를 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라지입니다.
자기를 가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밀이고 다른 사람을 가라지라고 생각하고 솎아내려는 사람이 실은 가라지입니다.
오늘은 이 짧은 묵상 나누기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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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13,30)
<더 큰 선(善)을 위해!>
오늘 복음(마태13,24-30)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십니다.
밀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밀 가운데에서 가라지가 자라고 있습니다. 복음은 원수가 와서 덧뿌리고 갔다고 전합니다.
우리의 뜻은 밀 가운데에 있는 가라지를 얼른 뽑아버리는 것인데, 하느님의 뜻은 우리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겠다."(마태 13,29-30)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우리 안에 함께 공존하는 선과 악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분명한 뜻은 너의 악한 모습을 판단하거나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탈출 10,27)
"주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사울에게 내려왔다."(1사무 19,9)
이렇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빠져나올 때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 뽑힌 사울의 마음 안에 악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지만,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더 큰 능력을 드러내시려고, 그리고 악을 뛰어넘어 더 큰 선으로 나아가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너를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나의 길과 나의 행실을 고치려고 더 노력합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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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마태 13, 29)
겸손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내면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둘 다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그 어떤 것도
우리 힘으로
우리가 함부로
밀어낼 수 없는
가라지의 존재입니다.
가라지가 있기에
밀이 있습니다.
밀같은 가라지
가라지같은 밀입니다.
가라지를 잘 아시는
주님께 가라지와
밀을 모두 맡겨드립니다.
모두가 자랄수 있도록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가라지때문에
우리의 길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가라지와 어우러져
살아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수확의 주체
완성의 주체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가라지까지
뽑으려 한 욕심과
어리석음대신
믿음으로 가라지까지
맡겨드립시다.
분명 이유가 있어
함께 자라고 있는
가라지일 것입니다.
주님께 내 마음의
가라지와 밀을
온전히
의탁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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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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