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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그가 손가락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넣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방으로 가서 시트로 몸을 가리고 있어요.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지 알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자 승주는 손가락을 들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셔츠 단추를 풀
고 바지 단추도 풀었다. 그녀가 방에서 뭔가를 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침대에 눕는 소리가 들리자 그가 사랑을 나
누다 막 옷을 입은 듯한 모습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민준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가 승주의 모습을 보고는 눈이
커졌다.
“형..”
“내가 바쁘다고 했잖아.. 설마. 확인하러 온 거야?”
“윤진이 어디 있어?”
“어디 있겠냐.”
민준이 그를 지나쳐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승주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장난해? 네가 감히 내 침실에 들어가게 둘 것 같아?”
“내가 찜한 여자를 형이 건드린 거잖아.”
“건드리긴 네가 건드렸지. 우린 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웃기지마. 내가 조금 거칠게 대했다고 이러는 거잖아~.”
“설마 내가 그런 이유로 상처입고 두려워하는 여자를 강제로 내 침대에 눕혔다고 생각하는 거야?”
“됐어. 내가 눈으로 보면 알겠지.”
민준이 그의 팔을 거칠게 떼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열자 침대에 앉아 있던 윤진이 화들짝 놀라며 시트로
몸을 가렸다. 바닥엔 그녀의 옷과 속옷이 아무데나 던져져 있었다. 얼굴과 볼, 드러난 어깨까지 붉은 빛을 띠고 있
는 윤진을 그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키스로 부풀어 오른 입술이 촉촉한 이슬을 머금은 꽃잎 같다고
생각했다.
“형이랑.. 아는 사이였어? 언제부터?”
승주가 들어와 민준의 팔을 잡아 당겼다.
“확인했으면 나 와. 얼마나 더 윤진씨를 괴롭힐 생각인 거냐? 부끄러워하는 거 안 보여?”
승주의 힘에 이끌려 거실로 나온 민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이러는 거지? 형이 아무 여자하고 자는 사람이 아니잖아.”
“윤진씨가 왜 아무 여자야? 여기로 윤진씨가 이사 오고 나서도 계속 눈으로만 쫓았어. 너도 알다시피 난 쉽게 여
자한테 다가가는 타입이 아니니까 바라만 보고 있었지. 나이도 어린 데 나 같은 늙은이를 마음에 들어 할까.. 생각
하면서. 하지만 네가 아프게 만든 사람이 바로 윤진씨라는 걸 알고는 내 마음을 고백한 거야. 오히려 너에게 고맙
게 생각하고 있어. 네가 우리 두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줬으니까. 너 때문에 상처받은 윤진씨를 위로
해 주다가 분위기가 그렇게 흘렀지만 윤진씨는 원래부터 그런 여자가 아니니까 내가 책임질 거야.”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못 할 거 있나? 하지만 그건 윤진씨가 원해야 할 수 있는 거야.”
“이모랑 이모부가 허락하실 것 같아? 윤진이는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라고. 엄마가 혼자 윤진이랑 동생을 키웠단 말이야. 출처도 불분명한 여자를 이모가 며느리로 받아들일 것 같아?”
승주의 턱에 힘이 들어가더니 민준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낮게 으르렁 거리듯 말했다.
“말조심해라. 장차 형수님이 되실 지도 모르는 분에게.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윤진씨는 홀로 두 아이를 키워내
신 훌륭한 어머니 아래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여성이야. 윤진씨를 제대로 보신다면 부모님도 허락해 주실 거야. 그
것도 어렵지 않게 말이지.”
“형. 내 여자란 말이야. 중간에 가로채는 게 어디 있어~.”
“너와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잖아. 네가 일방적으로 혼자 쫓아다닌 거지. 여자가 많으면 뭐하냐? 넌 여자를 몰라.
그렇게 해서 얻을 마음은 그저 싸구려 하룻밤뿐이야. 하지만 윤진씨는 아니지. 그리고 윤진씨는 너 싫대. 덕분에
나까지 미움 받게 될까봐.. 난 그게 걱정이거든. 내가 만나든, 윤진씨가 재벌은 싫다고 하니까 헤어지자고 해서 헤
어지든.. 네가 접근할 수 없어. 알아들어?”
싸늘한 승주의 눈을 바라보며 민준이 마른 침을 삼켰다. 멱살을 잡은 승주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민준은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그가 항복한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아.. 알았어. 쳇.. 여자 하나 갖고 사촌끼리 이러지 말자고.”
승주가 그의 멱살을 놓자 민준이 컥컥 기침과 함께 숨을 내쉬었다.
“난 몰랐어. 형이 관심 있어 하는 줄. 알았다면 이러지 않았을 거라고.”
“이제 알았으니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겠지?”
“알았다고.”
민준이 나가자 승주가 문을 잠그고 오른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셔츠 단추를 잠그고 바지 단추도 잠갔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그가 방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방문을 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옷.. 입었어요? 이제 괜찮을 겁니다. 집에 데려다 줄게요.”
“....”
그녀의 대답도 없고 방안이 조용하자 그가 떨리는 숨을 조용히 삼키고 고개를 기울여 방 안을 바라보았다. 시트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겨 방에 있는 소파 위에 있는 그의 재킷을 들
어 그녀의 벗은 등을 가려주었다.
“우리들 때문에.. 또 다시 고생하게 해서 미안해요.”
그녀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자 그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녀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나.. 이상하지 않아요?”
“전혀 안 이상해요.”
“저 사람에게서 벗어나려고 내 의지로 다 벗고 처음 보는 남자 침대에 앉아서 울고 있는데.. 이상하지 않아요?”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잖아요.”
그녀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울음을 터트리자 그가 손을 들어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두 사람은 승주의 소파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그가 빌려준 티셔츠와 바지는 모두 크고 길었지만 따뜻했다.
“들었잖아요. 우리 엄마가 저랑 제 동생을 홀로 키우셨어요. 그 사람 말이 맞아요. 난.. 아빠 없이 자랐거든요.”
“잘 컸잖아요. 그 녀석이 한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더 심한 말도 줄곧 들으면서 자랐어요. 같은 반 아이들에게, 혹은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또는.. 동네 어른들한테.. 상대방이 할 말이 없어지면 결국 아빠가 없다는 무기를 꺼내들었죠. 그건 저도 뭐라고 할 말이 없더라고요.”
승주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동생은 그런 말을 듣지 않길 바랬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더라고요. 그림이 너무 좋아서.. 엄마가 힘드셨을 때도 난.. 나만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비싸다는 미대에 들어갔죠.”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그림 연습하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 하고.. 참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나를 보면서 웃기거나 한심하게 보이지 않았어요? 그 쪽이 사는 세계에는 이렇게 하루하루를 버겁게,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잖아요.”
“처음부터 재벌이 어디 있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부모님이 재벌이라 좋은 교육을 받고, 먹고 살 걱정
을 하지 않은 건 감사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 외에도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교육받으며 자랐어요.
그래서 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요.”
그녀가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난 수학이 재미있었어요.”
“수학이요?”
“답이 있잖아요. 어느 길로 가든 답은 꼭 있으니까. 정답이 나오면 마치 보물찾기에 성공한 듯 짜릿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칩니다.”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요? 정말.. 수학선생님이시라고요?”
그가 와인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짓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난 미술엔 재능이 없거든요. 어려서 미술학원도 다녀봤는데 실력
은 영 늘지 않더라고요. 내 눈에 사과는 온통 빨간색으로 보였어요. 하지만 다른 친구들의 완성작을 보고는 놀랐
죠. 도대체 사과의 어느 부분이 검은 색이나 남색으로 보이는 지 궁금했어요.”
그녀가 풉.. 하고 웃음을 참았다.
“예술적인 감각은 타고나는 거라는 걸 그 때 깨달았죠. 언제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해요.”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
와인에 취해 바닥에 누워 잠들어 있는 그를 바라보며 윤진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사람.. 어른스러운 사람.. 하지만 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집을 나섰다.
늦게 일어난 그는 그녀가 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늦은 저녁 퇴근한 그녀가 그의 현관 벨을 눌렀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장국 먹었어요?”
“네.”
그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쇼핑백을 내밀었다.
“그.. 사람이랑 있었을 때 착용했던 것들이에요. 현관문에 걸어 놓으려다가 귀걸이랑 목걸이가 고가로 보여서요.”
그가 쇼핑백을 받아들자 그녀가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그가 신발을 신고 그녀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다시 이런 사이로 돌아가는 건가요?”
“네.”
“왜요? 난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남자랑 친구 안 해요.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그는 단호한 표정의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두려운 건가?”
“전혀요. 제가 그 쪽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잖아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가 엘리베이터 안에 올랐다. 4층 버튼을 누른 그녀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승주는 시선을 내렸다가 손을 들어 닫히려는 문을 잡았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김승주입니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내 이름이 김승주라고요.”
“아.. 네.”
“다음에 만나면 말을 놓을 겁니다. 내가 적어도 10살은 많아 보이니까.”
“죄송한데요.. 저는 사귀지 않는 남자와 편하게 대화하는 타입이 아니라서요.”
“두고 보죠.”
“그러세요.”
그가 손을 놓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승주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
려 집으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승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그를 도발하는 것도, 뒤로 빠
지는 것도 잘 했다. 그렇다고 연애 고수의 느낌이 아니라 진심으로 연애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민준이 저지른
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시작된 일이지만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은 부인할 수 없었다. 예쁜 외모 외에 그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돈으로 말고 자신을 유혹해 보라니.. 재미있는 아가씨네.”
그는 그녀를 언제 다시 만날지 살며시 기대가 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온 윤진은 피식 웃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향해 흔들리는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떨리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기는 데 그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와?”
그녀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나도 지금 들어오는 길이야. 저녁 먹었나?”
그녀는 조용히 손에 들고 있는 봉지를 들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나도.”
그도 손에 들고 있는 쇼핑백을 들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참으려고 해도 입가에 자꾸만 미소가 번지려고
했다.
“뭐 샀어?”
“안 가르쳐 드릴래요.”
“난 보여줄래. 초밥 좋아해?”
“아니요. 물컹거리는 날 것을 먹으면 배탈이 날 것 같아서 싫어요.”
“그래서 김밥이지~.”
그가 쇼핑백을 열어 김밥이 든 상자를 보여주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엘리베이터 문
이 열리자 그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그녀가 먼저 오르게 했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먼저 올랐다. 그도 안에
타서는 4층과 7층 버튼을 눌렀다.
“고마워요.”
그녀의 말에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국물 없어?”
“있어요.”
“그럼 같이 먹을래?”
“아뇨.”
“밖에서 먹으면 되잖아.”
“싫어요.”
“혼자 먹으면 맛있어?”
“네.”
“거짓말은. 이 건물 꼭대기 층에 가 봤어?”
“아니요.”
“여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스카이라운지 같이 커피숍도 있고, 도시락도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어.”
“그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거기에서 먹고 내려오지 않을래?”
“다음에요.”
“혼자 아무거나 먹지 마. 그러니까 몸이 그렇게 부실하지. 우리 고등학교 여학생들이 훨씬 건강해 보인다고. 아니면 겁이 많나? 내가 이런 식으로 어린 여자한테 작업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발끈 하지 마. 다 작업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바라보자 4층에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닫힘 버튼을 누르고 제일 꼭대기 층 버튼을 눌렀다.
“좋아요. 같이 먹어요.”
도도한 듯 턱을 든 그녀를 바라보며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쉬
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없고 분위기도 좋은 곳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들은 봉지와 쇼
핑백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컵라면은 몸에 안 좋아.”
“그럼 드시지 마세요.”
그녀는 설치되어 있는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부어 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김밥과 그녀의 도시락을 열어 놓고 젓가락을 그녀 자리에 놓아주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라면 먹어도 돼?”
그녀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조금만요.”
“응. 고마워.”
하지만 라면은 거의 그가 다 먹어버렸다.
“아.. 미안.”
“몸에 안 좋다면서요.”
“그래서 내가 먹은 거야. 윤진이 몸 상하지 말라고.”
“웃겨..”
“어? 그런 말도 해?”
“저 욕도 잘 해요.”
“듣고 싶은데?”
그의 말에 그녀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놀리지 말아요.”
그는 대답대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테이블을 정리했다.
“라면은 내가 다 먹었으니까 후식은 내가..”
그녀가 날카롭게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쏴.”
그가 말하고 쓰레기를 들고 걸어가자 그녀가 풉.. 하고 웃었다.
******
점점 그와 저녁 식사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그와 나누는 대화가 즐거웠다. 토요일 점심에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어서 퇴근시간이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트 있어?”
점장의 말에 윤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그럼 왜 자꾸 시계를 봐? 약속 있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에요.”
“참. 오늘 단체 예약 손님 있는 거 알지? 자기는 센터피스만 만들어주면 돼.”
“쉬는 시간에 엄마 꽃집에 다녀올게요.”
“그렇게 해. 무거울 테니까 정은이 데리고 가고.”
“네.”
“레스토랑을 전체로 빌렸으니까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자고.”
“네.”
윤진이 몸을 돌려 부르는 손님에게 가자 점장이 미소를 띠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후 쉬는 시간에 예약 손님들의
주문대로 테이블을 정리했다. 정은이와 함께 엄마 꽃집에서 꽃을 가져온 그녀는 다른 직원들이 테이블보도 새로
깔고 정리를 하는 동안 센터피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국, 핑크하트, 클레마티스, 스위티피, 서귀.. 재료들로 앙
증맞은 화기에 오아시스를 넣고 서귀라는 나뭇잎으로 숲을 만들 듯 자리를 잡아 꽂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 부
분을 꽃으로 풍성하게 꽂았다.
“진짜 예쁘다~.”
“언닌 못하는 게 뭐예요?”
“부럽다~.”
“엄마가 꽃집을 하시니까 옆에서 보고 배운 거야. 꽃집 딸이 이 정도도 못하면 곤란하지 않겠어?”
“꽃이랑 언니랑 어울려요.”
“고마워.”
“자리에 놓을까요?”
“부탁해.”
남은 재료로 점장이 있는 입구 쪽을 장식했다.
“예쁘네~. 고마워.”
“점장이 주신 돈으로 만든 건데요?”
“그래도. 역시 꽃은 사람을 참 행복하게, 설레게 하는 것 같아. 그치?”
“네.”
잠시 후에 예약손님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하자 직원들은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고개를 든 윤진은 조금 놀
란 표정으로 승주를 바라보았다. 평상시보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소재의 정장과 스타일리쉬한 헤어스타일에 고급
손목시계까지 하고 있었다. 승주가 그녀를 알아보고 부드럽게 미소를 짓자 윤진은 시선을 내렸다. 그가 자리에 앉
자 직원들은 주방에서 만든 음식을 코스대로 테이블로 옮겼다. 승주의 시선이 자꾸만 그녀에게 닿는 것이 느껴졌
지만 그녀는 철저히 외면했다. 본 요리가 나오기 전에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들과 친분이 있는 사이
인 듯 보이는 그 여자는 딱 보기에도 재벌 집 딸이었다. 그가 승주 옆자리에 앉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자 윤진은
턱에 힘이 들어갔다.
‘정신 차려. 너한테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저 남자가 정말 너와 뭘 어떻게 하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 결국 저런 여자와 결혼 할 거고, 네가 네 마음을 스스로 끊어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알잖아?’
윤진은 다른 손님에게 접시를 내려놓았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여기에서 오래 일하셨어요?”
남자가 윤진을 바라보며 묻자 윤진이 예의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요.”
“미인이신데.. 혹시 남자친구 있으십니까?”
“인마. 뭐하는 짓이냐?”
다른 남자가 말했지만 다들 쿡쿡 웃으며 궁금한 듯, 호기심 반, 재미있는 거리가 생겼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없습니다.”
“그럼.. 난 어때요?”
‘그럼 그렇지. 너희들이 뭐가 다르겠어.’
“취했어? 즐거운 모임을 갖자고 불렀으면 즐겁게 저녁식사나 하자. 이럴 줄 알았으면 난 안 왔어.”
승주가 친구에게 말하자 다들 승주를 바라보았다.
“야. 김승주. 넌 또 뭘 그렇게 화를 내냐? 누가 바른생활 사나이 아니랄까봐.”
여자의 말에 승주가 입을 다물자 윤진은 속으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를 무시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그럴 리가..”
“지금은 근무시간이고 여긴 제가 일하는 곳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를 무시하고 계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요.”
“그게 아니라 정말 보기드믄 미인이셔서. 제가 여기 단골인데 처음 뵙는 것 같아서 실례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나중에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제대로 말씀해 주세요. 그 땐 저도 제대로 대답해 드릴게요. 그럼.”
그녀가 인사를 하고 주방으로 걸음을 옮기자 승주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승주 말대로 취했냐? 뭐하는 짓이냐?”
“설마.. 첫눈에 반했냐?”
“정말 미인이지 않냐?”
“맞긴한데 너무 갑작스럽잖아. 다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승주는 조용히 와인을 들어 마셨고 옆자리 주희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다들 가고 나자 뒷정리를 마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힘들다.. 누군 돈 쓰고 가고 누군 뼈 빠지게 일해도 그 사람들 쓴 돈의 10분의 1이 하루 일당이고. 세상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
“그런데 윤진언니는 어쩔 거예요? 그 사람 **그룹 막내아들 박우진인데 다시 제대로 고백하면 사귈 거예요?”
“아니. 제대로 거절할 거야. 그렇게 사람들 많은 데서 창피하게 만든 사람이랑 만날 이유 없으니까.”
“하긴.. 그야 그렇지만요. 그래도 난 언니가 부러워요. 재벌이 대쉬도 하고 언닌 거절하고.. 저도 한 번만이라도 그런 일이 생겼음 좋겠는데..”
“아니지~.넌 윤진이처럼 거절 못할 거잖아.”
“아.. 그런가?”
다들 웃음을 터트렸지만 윤진은 조용히 한 숨을 내쉬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도 승주와 그 옆의 여자가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자 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올라가니 그녀 집 앞에 승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그가 보고 싶지
않았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현관문에 꽂았다.
“무슨 의미야? 그 녀석이 제대로 고백하면 사귈건가?”
“그러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세요?”
“윤진아.”
“승주씬 앉아서 편하게 즐겁게 식사하셨죠? 저는 서서 일했어요. 그래서 엄청 피곤하거든요? 피곤하면 성질나고 성질나면 막말 나올 수 있으니까 가세요.”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도 따라 들어왔다. 놀란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뭐 하시는 거예요?”
“말해. 정말 사귈거야?”
윤진이 턱에 힘을 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막말로 너랑 나랑 무슨 사인데? 이웃으로 가끔 저녁 같이 먹는 사이 아닌가? 그
쪽 사촌동생 때문에 나한테 미안한 감정을 설마 날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가? 나는 감정 혼돈할 정도
로 어리지도 않고 바보도 아니야. 이제 충분히 사과 받은 거 같으니까 저녁 같이 먹을 일도 친한 척 인사할 필요도
없어요. 알았어요? 그러니 나가주세요. 705호 이웃님.”
그가 그녀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어리지도 바보도 아니야? 그럼 알 텐데. 내가 무슨 마음으로 너와 저녁식사를 하고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안다고 한들 관심 없어요~. 돈 많은 사람들은 진짜 웃겨. 왜 상대방 기분은 아랑곳 안하면서 자기들 기분은 신경
쓰래? 서로 모르던 예전으로 돌아자가고요. 그러면 뭐 공 들인 게 아까우니까 한 번 잘래요? 그래야 대단한 자존
심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승주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함부로 말하지 마! 내내 날 그런 놈으로 생각했나? 너랑 한 번 자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개자식으로?”
“아니면 나랑 뭘 하고 싶은 건데? 삼류막장 드라마라도 찍어요? 미안한데 난 비련의 여주인공도 신데렐라도 싫
어. 혼자 살다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 안 산다고. 그러니까 내 집에서, 내 인생에서 발 빼시라고요. 그쪽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 내가 찐짜 붙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나랑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못할 거 있나?”
그녀가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내가 거절할게요. 나이 많은 남자랑 뭐가 맞아서 결혼하겠어요? 내가 30이면 아저씨는 40이잖아요. 돈 많으면 병수발하며 살아야 하는 거야?”
“뭐?”
“그러니까 왜 내 말 안 들어? 말 했잖아. 나 진짜 피곤하다고! 이렇게 힘들게 일해도 오늘 일당이 너희들이 쓰고
간 돈의 10분의 1도 안 돼. 내가 짜증이 안 나겠어? 내가 지금 그쪽 얼굴 보고 싶겠냐고! 왜요. 얼굴 좀 반반하게
생겼으니까 재벌 잡아서 편하게 살고 싶은 그런 여자로 보여요? 진짜 질린다. 당신은 그래도 조금은 다른 줄 알았
지. 아니지. 내가 착각 한 거지. 나도 여자는 여자인가 봐요. 위험에서 구해준 남자가 멋져 보였으니까. 이젠 현실
을 직시할 때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별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만 해요. 그쪽 신경 쓰는 거 피곤해. 나가요.
정 공들인 게 아까우면 들어와서 나랑 자던지.”
그녀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카락을 고정시킨 끈을 풀자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왔다.
“어떻게.. 같이 씻을래요?”
그녀가 블라우스 단추 하나를 풀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가에만 미소를 지었다.
“착각하지 마. 그러면 내가 나갈 것 같아? 너의 도발에 응하도록 하지. 그래. 자자. 자존심 상해서 못 살겠다. 내가 나이가 많긴 하지만 아직 병수발 할 정도는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졌거든.”
그가 구두를 벗고 들어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듯 안아 자신에게 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볼을 잡아
올려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는 조금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는 그를 밀어내려고 버둥거렸다.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 위에 뜨거운 입맞춤을 해 주는 그를 더 이상 밀어내지 못하고 그의 가슴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그녀
의 눈가게 눈물이 맺히자 그가 입술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떠서 그를 올려다보았
다.
“말 해. 네 마음. 사실은 나한테 흔들리고 있다고. 사랑까진 아니더라도 내가 신경 쓰인다고. 내 옆에 다른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이 싫었다고..”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디 내 앞에서 어른인 척 하려고 하고 있어.. 혼난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그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나는 내 친구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너를 보고 그 자리에서 네 손을 잡고 친구들 앞에서 내가 사랑하는 여자
다. 그러니까 쳐다보지도 말라고 경고를 하고 데리고 나오고 싶었어. 네가 일하는 곳이라.. 참느라 혼났는데 싸늘
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너를 보니까 화가 나서.. 그래서 그랬어.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지. 그리고 내가 너와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뜰 땐 네가 정말로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될 거야.”
“그런 날은.. 안 와요.”
“너보다 조금 더 오래 산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니까 새겨들어. 장담은.. 하는 게 아니야.”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 위에 쪽 입맞춤을 하고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고 현관으로 향했다.
“피곤할 텐데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자.”
그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 문을 닫자 그녀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표정으로는 분명 그는 그녀를 데리고 침실로
갈 것 같은 분위기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가 물러났다. 이런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
녀는 한 숨을 내쉬며 붉어진 얼굴을 감쌌다.
******
찬물로 샤워를 한 그가 맥주를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잘 참았다. 잘 했어.”
그가 피식 웃었다.
***************
토요일 저녁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내리는 승주를 만났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카메라 가방을 메고 차 문을 닫았다. 고개를 돌린 그는 그녀를 보고 피곤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어디 다녀오세요?”
“응. 동아리 활동.”
“네?”
“사진동아리 담당이거든. 일 년에 한 , 두 번? 정도 출사를 나가. 오늘이 그 날이었고.”
“피곤해 보여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저녁 먹었어? 나 라면 먹으려는데.”
“제가 끓일게요. 승주씨는 제 몫을 덜고 나서 계란 넣어 줄 테니까 드세요.”
“그럼.. 내 집으로 가지.”
“네. 옷 좀 갈아입고 갈게요.”
“응.”
안으로 들어가 그녀는 4층에서 내리고 그는 7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털썩 쓰러지듯 앉았는데 벨이 울렸다. 그가 문을 열자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들어와.”
“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집안이 엉망이었다.
“이게.. 뭐예요?”
“아.. 중간고사 기간이었거든. 정신이 없어서 잠만 자고, 출근하고 그랬지. 치울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아.”
“하지만 이런 데서 라면 먹고 싶지 않은데..”
“미안.. 그럼 네 집으로 갈까?”
“소파에 앉아 계세요. 간단히 치울 테니까.”
“아... 그럼 너무 미안한데.”
그가 대답을 하면서 소파에 털썩 앉자 그녀는 소매를 걷고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엔 제법 정리가 된 장소가 되었다.
“손이 빠르네.. 난 한 나절은 움직여야 하는데.”
“엄마는 바쁘셨고, 동생은 저보다 어려서요.”
“집안일은 네 차지였구나? 착한 언니네.”
“그렇지도 않아요. 라면 물 올릴게요.”
“응.”
그녀가 주방에 들어가 물이 담긴 냄비를 올렸다. 라면을 꺼내려고 손을 뻗었다. 그녀가 까치발을 띠자 그가 어느 새 다가와 라면을 3개 꺼내 내려주었다.
“고마워요.”
“뭘.”
그가 미소를 지으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조용히 움직이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고개를 돌려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다른 일을 하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보고 계시니까 행동하기가 불편한데..”
“윤진아.”
“네?”
“넌 태어날 때부터 예뻤지?”
“네?”
그녀가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예뻐서 불편하지 않았나? 남자들이 집착하고 그랬을 것 같은데.”
“예뻐서라기보다는 마음을 받아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승부욕을 발동시켰나 봐요. 누가 저와 사귀
나.. 뭐 그런 내기 같은 걸 하기도 하고..”
“여자 친구는 없어?”
“고등학교 때도 바빴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물이 끓고 있는 냄비에 라면을 넣었다. 젓가락으로 라면을 풀며 조그맣게 한 숨을 내쉬었다.
다 된 라면에 그녀의 몫을 덜고 그의 라면에 계란 하나를 깨서 풀어주었다. 그릇에 담긴 라면을 그의 앞에 내려놓
자 그는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냈다. 후룩후룩 맛있게 먹는 그를 그녀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맛있어. 너도 먹어.”
“네.”
그녀도 라면을 먹었다. 후식으로는 그가 냉장고에서 꺼낸 푸딩을 먹었다. 그녀가 숟가락을 입에 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응?”
“사실은 친구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의 남자친구가 저한테 고백을 하는 바람에..”
“친구 남자친구를 빼앗은 사람이 되었구나.”
그녀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 후론 없었어?”
“안 만들었어요. 피곤해서.”
그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너의 선생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문득 그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정장은 입은 그가 학교 교단에 서서 수학을 가르치고 그녀는 교복을 입고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듣는 모습을 말이다.
그가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음.. 안 되겠다.”
“왜요? 난 재미있을 것 같은데. 저 수학 좋아했어요.”
“아니. 교단에 서면서 세운 나의 금기사항을 내가 깰 것 같거든.”
그녀가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난 선생이 좋아. 그래서 여학생이랑 안 좋게 소문이 나서 그만 두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거든.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 일 없이 이 일을 하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네가 내 학생이고 네가 힘들어 하는 것이 보이면..”
“도와주고 싶을 것 같아요? 그러다 소문이 이상하게 날 것 같아서 그만 두시게 될 것 같고요?”
“널 사랑하게 되어서 널 망치게 할까봐. 그랬다면 지금처럼 네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대학생이 되는 길이 조금 더 어려워졌겠지?”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시 바람둥이 아니에요? 어떻게 그렇게 오그라드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요?”
“사랑한다.”
그녀가 피식 웃고 있다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농담도 아니고 장난도 아닌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다시 말했다.
“내가 고윤진 양을 정말.. 많이 사랑해.”
“승주씨..”
그녀가 시선을 내렸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건 아니야. 그냥 내 마음을 제대로 고백하고 싶었어. 알고 있으라고.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걸. 언제가 네가 뒤를 돌아보면 그 자리엔 내가 서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할 거야.”
그녀의 눈가가 붉어지자 그녀는 남은 푸딩을 입에 넣고 싱크대로 가서 쓰레기를 정리하고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저 가 볼게요. 주무세요.”
그가 일어나 그녀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다음엔 시간 내서 소풍가자. 사진 찍으러 다니면서 예쁜 곳 많이 알아 놓았거든.”
“그래요.”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턱에 입맞춤을 하고 엘
리베이터에 올라 4층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하자 그녀가 시선을 돌려 그를 바
라보았다. 그가 정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그녀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문이 닫히자
그녀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
“오늘 학생 생일 파티에 초대되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린 아이들 노는 곳에 뭐하러 가. 너랑 있는 게 훨씬 더 좋은데.”
그의 노골적인 표현에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못 살아..”
그가 피식 웃었다. 그의 핸드폰에 사진이 전송되자 그녀가 고개를 기울여 바라보았다.
“누구에요? 이 예쁜 아이는?”
“아~. 있어. 선생님을 동경하는 평범한 학생.”
“예쁜데.. 눈에 안 들어오세요?”
그가 눈썹을 조금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질투하는 거야?”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한 숨을 내쉬었다.
“좀 하지.”
그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쿡쿡 웃었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
“여름 방학에도 아르바이트 할 거야?”
“가을 작품 전시회 때문에 주중엔 못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내가 우리 동아리 아이들이랑 1박 2일로 여행갔다 오면 주중에 소풍가자. 물론 네 작품 전시회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그래요. 대신.. 도시락은 안 싸요. 그냥 맛있는 거 먹어요.”
“그래. 걱정하지 마. 내가..”
그가 그녀를 바라보다가 방긋 웃었다.
“정확하게 계산 할 거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그녀가 피식 웃었다.
*****
학교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가 불렀다.
“저녁 먹자. 나 배고파.”
“이제 왔어요?”
“응. 2박 3일이었는데 공기가 좋더라고. 하지만 아이들 보호자로 간 거라 피곤해. 맛있는 거 먹으면 기운이 날 것 같은데. 혼자 먹기 싫어.”
“그냥 저녁 먹자고 하면 돼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도 미소를 지으며 그의 차에 올랐다. 가까운 음식점에 들어가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깐만요. 엄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너 어디야?>
“아.. 학교죠.”
그녀가 승주를 슬며시 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외할머니 댁으로 갈 수 있어?>
“왜요? 아프시대요?”
<아니.. 민영이가.. 거기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자꾸 울고 아무것도 안 먹는다고..>
핸드폰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내려가는 교통편 알아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미안해.. 내가 가야 하는데...>
“아니에요. 제가 가 볼게요.”
<그럼 무슨 일인지 물어 봐. 다른 사람한테는 말 안 해도 너한테는 하잖아.>
“네.”
전화를 끊은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저 먼저 갈게요.”
그녀가 일어나자 승주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게를 나가자 그도 일어나 가게를 나갔다. 승주가 다가가 윤진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 가?”
“외갓집에요. 동생이 아프대서.”
“외갓집이라며. 그럼 어르신들이 알아서 봐 주시겠지.”
“제가 가야 해요. 민영이가 아프다고 하면 정말 큰 일이 난 거거든요.”
승주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동생이.. 고민영이야?”
“네. 손 좀 놓아 주세요. 저 가야 해요.”
“짧은 머리에 눈 동그랗고.. 그 고민영?”
그녀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동생을.. 어떻게 알아요? 내 뒷조사 하고 다녀요?”
승주가 인상을 찡그렸다.
“날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야? 제자야. 나 ***고에서 수학 가르친다고.”
윤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직 외갓집에 있구나. 왜 아프지?”
“어떻게.. 알아요?”
“내가 맡고 있는 동아리에서 2박 3일로 사진도 찍고 별도 보려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다가 장소 변경해서 그리
로 갔거든. 거기에 별장이 있는 녀석이 있기도 했고, 민영이가 외갓집으로 갔다기에 거기로 다녀왔지. 민영이는
조금 더 있다가 온다고 했는데. 많이 아픈 거야?”
“그런 것 같아요. 감기도 안 걸리는 아이예요. 딱 한 번.. 아픈 적이 있었는데..”
윤진이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손목을 놓고 승주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 윤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승주를 바라보았다.
“내 차로 가는 게 빨라.”
승주가 나가려고 하자 윤진이 그의 팔을 잡았다.
“같이 가자고요?”
“응.”
“왜요?”
“네 동생이면서 내 제자니까.”
“그러니까 안 되죠. 민영이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아요.”
승주가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창피해?”
“그런 건 아니지만요. 저 혼자 가요.”
“내 도움이 받기 싫은 거야? 이것도 불편해?”
“승주씨..”
그가 그녀에게 잡힌 손을 들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럼 내 차타고 가. 그것도 싫어?”
“왜 말을 그렇게 해요?”
“좋아.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뭘 타고 갈 건가? 이 늦은 시간에.”
“왜 화를 내요?”
“아무것도 못하게 하니까.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동생이 아프다는데, 내 제자가 아프다는데. 그리고 내가 사랑하
는 여자가 마음을 아파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그 여자가 나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니까 화가 나지! 민영이
안 만나. 태워다만 줄게. 그 근처에서 내려서 걸어가.”
윤진이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그를 지나쳐 조수석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탔다. 승주가 몸을 돌려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병원에 있다고 하니까 너무 밟지 마세요.”
“응.”
“고마워요.”
“뭐가.”
“다요.”
승주가 윤진을 바라보자 윤진이 미소를 지었다.
“마녀인 것 같아.”
승주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출발하자 윤진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
병원 근처에서 그가 차를 세웠다.
“고마워요. 피곤할 텐데..”
“기다린다고 하면 안 되겠지?”
“네. 오늘 못 올라갈 거예요.”
“그럼.. 조심해서 올라와. 그 녀석 잘 보살펴 주고, 너.. 몸 상하지 말고.”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가 미소를 짓고는 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그가 병원 이름을 바라보았다.
“이건.. 재현이 당숙부이신 차동희 원장님이 계신 곳이 아닌가? 시골에 병원을 세우셨다더니 여기였구나.. 다행이네. 실력 좋은 분이 있는 병원이라..”
그는 한동안 있다가 차를 출발시켰다.
“입원해 있는 고민영 보호자입니다.”
“아.. 저쪽에 보이는 105호실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병실 문을 열고 퉁퉁 부은 눈과 얼굴로 생각에 잠긴 듯 앉아 있는 민영을 바라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민영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니.. 여긴 어떻게 왔어?”
“괜찮아? 누가 그랬어? 누구 때문에 이래?”
윤진이 민영의 얼굴과 몸을 살피며 말하자 민영이 피식 웃었다.
“열병인 것 같아.”
“열병?”
“자세히 말하면 또 울 것 같으니까 짧게 말할게. 물론 엄마한텐 비밀이고.”
“응.”
“중학교 때 여기에서 지냈잖아. 그 때.. 만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게 되었어.”
윤진이 놀란 숨을 멈추었다.
“원인이 나한테 있는 것 같아서.. 그게 좀 힘들었어.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
“괜찮아?”
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니까 그 사랑이 헛되지 않게 열심히, 건강하게.. 지내야 할 것 같아.”
“민영아..”
“하지만 언니야.. 평생.. 다른 사랑은 못할 것 같아.”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민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자 윤진이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고 토닥였다.
“하필 그런 아픈 사랑을 하고 그래? 힘들어도 널 여기로 보내는 게 아니었어. 난 반대했었는데.. 형편 때문에.. 그게 내가 대학을 가야 해서.. 그러니까 네가 아픈 건.. 나 때문이야.”
“언니야~. 그건 아니다.”
“늘 미안했어. 어린 널 여기로 보내고 내 욕심만 채워서. 잘 해주지도 못하고..”
“바쁘잖아. 난 세상에서 우리 엄마랑 우리 언니가 제일 바쁘고, 제일 열심히 사는 것 같더라. 하나도 안 서운한데?”
“미안해.”
“와 줘서 고마워.”
병실 밖에 서 있던 재현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
마음을 추스른 그녀는 퇴원을 해서 외할머니 댁에서 하룻밤 더 머무르기로 했다.
“천천히 올라가도 돼.”
“아니야. 더 있다간 할아버지 머리가 더 하얗게 될 것 같아.”
두 사람이 쿡쿡 웃었다. 민영이 고개를 기울여 윤진의 팔에 기대자 윤진도 그녀의 머리에 살짝 기대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래.”
“누가 그래?”
“김광석 아저씨가.”
“뭔 소리야~~.”
“너무 마음에 담지 말라는 뜻이겠지. 생각할수록 더 아파지게 되니까.”
“언닌 그런 사랑을 해 본 적 있어?”
“음.. 없는 것 같아. 날 겉모습이 아닌 속까지 보고나면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까?”
“언니가 어디가 어때서? 다른 여자들 다 데리고 오라고 해. 재벌이라 돈 많아 명품으로 휘둘러 장식해도 언니만
못 할걸? 얼굴만 예뻐? 그림은 또 얼마나 잘 그리는데. 그리고 또 요리 솜씨도 할머니 닮아 좋지~, 마음도 얼마나
착한데.”
“내가 착해?”
“그럼.. 동생 아프다고 이렇게 달려와 주는 언니가 흔하나? 물론 마음으로야 달려오고 싶어도 사정이 안 되면 전
화로 대신하고 그러는 거지. 와 줘서 고마워. 언니가 있으니까 조금 더 마음이 든든해 진 것 같아.”
윤진이 그녀를 슬쩍 밀며 피식 웃었다.
“하여간 애늙은이..”
민영이 배시시 웃으며 윤진을 바라보았다. 윤진이 조금 생각에 잠겼다가 민영에게 말했다.
“너희 학교에 수학선생님으로 계신.. 김.. 뭐라고 하던데..”
“김승주 쌤?”
“응. 맞는 것 같아. 과 친구가 그 사람이 좋은가 보더라고. 그래서 알아봐 준다고 했거든.”
“그래? 음.. 친구언니보고 마음 접으라고 해.”
윤진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쌤이 정말 사랑하는 여자가 있거든.”
윤진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녀의 표정을 읽지 못한 민영은 마당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나한테 고민 상담을 다 했다니까? 좀.. 멋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말인데.. 쌤이 그 사람이랑 잘 안 되면 내가 언니 소개시켜 주려고.”
“뭐?”
“쌤 집이 부자야. 물론 그 이유가 언니의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쌤은 재벌인 듯 재벌 아닌 재벌 같은 사람이랄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민영이 쿡쿡 웃었다.
“부드럽고 매너 있고.. 정장도 잘 어울리는 것이 영국 신사 같아. 언니가 그런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쌤 같은 남자라면 분명히 언니의 속마음까지 알아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해 줄 것 같거든.”
“바람둥이 아니고?”
“어허. 무슨 소리. 학교에서 얼마나 철벽을 두른다고. 여학생들이 오히려 쌤에게 미움 받을 까봐 고백도 못하는구만.”
“음..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해줘야겠다.”
“아니지~. 포기를 시켜. 그리고 언니가 잡으라니까? 내가 다리를 놓아줄 테니까~.”
“됐거든? 넌 네 일만 신경 쓰도록 해. 더 이상 아프지 말고.”
“응.”
두 사람은 다시 서로에게 기대었다.
“쌤 미남이야.”
“그만 해.”
“응..”
두 사람이 쿡쿡 웃었다.
***************
서은준범입니다. 번외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기네요. 내일 마무리 될것 같아요.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네요.
안전하고 건강한 하루 보내세요.
행복하고 즐겁게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2.2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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