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신론에서 이 마음은 원래부터 자성이 청정하지만 무명이 있다 보니 그 무명에 물들어 오염된 마음이 있게 되었다고 하셨다.
중생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어휘가 이것이다. 이 문장은 이해하기가 정말 쉬운 것 같지마는 또한 매우 어려운 뜻을 내포하고 있다.
원래부터 자성이 청정하다면 무명이 없어야 한다. 그 무명 때문에 오염된 마음이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이치상 앞 뒤 문장이 맞지가 않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이런 형식의 언어 전개 외에는 딱히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언제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상대적 논리로 판별하다보니 이것이면서도 저것이라고 하는 이론에는 즉각 거부감이 일어난다.
사실 세상 모든 이치는 바로 위와 같은 말씀에 부합하고 있다. 동이지마는 서가 되고 남이지마는 북이 된다. 동쪽에서 계속 나아가면 서쪽에 다다르고 남쪽으로 계속해 나아가면 북쪽이 되므로 우리의 마음을 딱히 꼭 집어서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
이런 말씀은 언뜻 보기에는 대단한 모순이나 궤변 같아 보이지만 이 속에는 엄청난 본연의 이치가 들어 있다. 이런 논리를 빼어나게 설명한 경전이 금강삼매경이고 그것을 가장 멋지게 풀이하신 분이 원효성사다.
성사는 이 금강삼매경을 풀이하면서 중생의 마음을 연기법으로 열고 중관법으로 닫으며 이론으로 세우고 空으로 부수었다. 그리고 연역법으로 풀이하고 귀납법으로 거두며 상대적으로 대립시키고 통합적으로 융해하는 방법을 썼다.
그분은 언어와 문자로 할 수 있는 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일심의 세계를 걸림없이 구사하고 능숙하게 표현하셨다. 거기서 금강삼매경론이 불후의 명작으로 찬란하게 태어난 것이다.
아무래도 이 금강삼매경론을 이쯤에서 한번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려면 중국불교의 창시자라 할 만한 道安법사부터 먼저 소개할 필요가 있다.
도안법사는 대승불교가 중국에 안착되도록 한 중국불교의 위대한 개척자다. 그분에 의해 인도불교가 중국불교화 되었다. 즉 대승불교의 주도권을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완전 탈바꿈시킨 분이 이 분이다.
이분은 서기 314년에 상산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의 조자룡과 같은 지역 출신이다. 12살에 출가하였고 서기 385년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71년 동안 이 지상에 머물렀다.
인도에서 일어난 대승불교지만 그의 피나는 노력에 중국불교화가 되었다. 그 결실로 200여 년이 지난 후에 보리달마가 인도에서 부처님 법을 갖고 중국으로 건너와 직접 선법禪法을 전해 주었다. 그 선법이 조사불교의 시초가 된다. 그로부터 다시 200여 년이 흐른 후에
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는 슬로건을 내 건 백장스님이 나타나 중국불교의 사찰 규칙과 제도, 그리고 선원 조직과 체계를 정비하였다. 그것이 바로 현재 한국불교가 따르고 있는 사찰규범의 시원이다.
도안법사는 추남 중 추남이었다. 불교 역사상 공식적으로 가장 잘생긴 스님은 아난다존자고 가장 못생긴 스님은 도안법사라 할 만큼 대단히 못생긴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자신이 정말 못생겼다는 것을 잘 알고 가급적 스승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스승에 대한 기본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3년 동안이나 논밭을 가꾸는 농감 소임을 자처해 사원 밖을 외로이 떠돌았다.
그렇게 그는 스승의 눈 밖에서 대중의 곡식을 만들어 내는 일만 충실히 이행했다. 육조대사가 곡식을 빻는 방아를 열심히 찧어서 5조의 인가를 얻은 것처럼 도안법사도 스승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논밭을 다니면서 주경야독으로 자기 수행에 열중했다.
스승은 한마디 불평도 없이 묵묵히 자기의 소임을 다하는 그를 가상히 여겨 경전공부를 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경전을 보고 느끼는 그 비범함이 상당히 남달랐다. 스승은 그의 총명함과 진실함에 반해 그를 인도로 유학을 보내주었다.
거기서 그는 신통술에 능하고 덕망이 높은 불도징대사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그가 얼마나 불도징스님을 존경해 마지않았는지 중국에 올 때 부복하듯이 그분을 모시고 돌아왔다.
그 불도징대사가 중국에 와 주위 왕들의 귀의를 받아 직접 건립한 사찰이 893개나 된다. 거기다가 거의 1만 명 가까운 제자를 두었다. 그러다 117세에 열반에 들었다.
이 시기가 삼국을 통일한 진晉나라가 망한 후 5호16국이 난립하던 시대였다. 딱히 누가 더 강대국이라고 할 만한 나라가 없어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못 잡아먹어 으르렁거리던 때였다.
그러다 보니 서로 학덕이 있고 명망이 높은 큰 스승을 모셔서 자국민의 정신함양과 국위선양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거기에 제격인 스승이 바로 도안법사였다. 그래서 그분을 모셔가려고 서로 간에 전쟁을 세 번이나 일으켰다.
결국 전진국의 왕 부견이 그 전쟁에서 이겨 도안법사를 그들의 수도 장안으로 모셔가는 데 성공했다.
도안법사는 그 전진국에서 불교를 크게 일으켰고 그 밖의 나라들에게도 불법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그 덕분에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순도스님이 파견되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불법이 들어오게 되었다.
전진국의 부견이 죽고 난 뒤 불교를 돈독하게 믿던 요흥이 후진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는 국빈으로 인도승인 구마라지바를 장안으로 모시고 와 불경을 대대적으로 번역하도록 했다.
요흥의 후원으로 그가 번역한 경전은 380권이 넘는다. 그때 번역한 것 중에 하나가 우리가 잘 아는 금강경이다. 그래서 譯者를 요진 삼장 구마라습이라고 부른다. 요진은 요흥이 세운 진나라라는 뜻이다.
그로부터 또 300년이 지난 후 신라에 원효가 나타났고 또 100여 년이 지난 후에 연꽃에서 태어났다는 인도스님 연화생비구가 티베트의 왕 거률썅뎨찬의 초청으로 티베트에 들어가 밀교불교를 완성했다.
부견왕은 도안법사의 씨를 받기 위해 전방위로 노력했다. 가히 눈물겨운 읍소로 그분의 씨를 남겨줄 것을 애원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뿐만이 아니다.
요흥왕은 구마라습을, 걸률썅뎨찬은 연화생을, 문무왕은 원효의 씨를 받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 기대만큼 사실 그분들은 모두 다 인류를 위해 적정한 후손을 남기고 떠나셨다.
도안법사가 남긴 특이한 법칙은 부처님께 귀의한 우리 모두의 성씨를 釋氏석씨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세속의 성은 중생의 성씨이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고 석가모니의 석씨를 성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통으로 중국에는 아직도 스님들 모두가 다 법명 앞에 석을 붙인다. 물론 일반불자들도 계를 받으면 전부 석자를 붙인다. 한국승들도 그런 전통을 따라가는 스님들도 있기는 하지만 전부 다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ㅡ계속ㅡ
출처: 대승기신론 해동소 혈맥기 5_공파스님 역해_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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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금강삼매경을 어떤 학자들은 가짜 경전이라고 하는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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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금강삼매경을 누가 만들었고 어떻게 전해졌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시시비비가 저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삼매에 들 수조차 없는데
금강삼매경이라니요?
그런데 여기서는 글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지금도 위경논란이 분분한 금강삼매경을 언급하신 의도가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_()_
전개되는 글이 마치 대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놀랍고 흥미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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