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내시가 왕을 우습게보고 월권을 자행했던 적은 단 두 번 있었다. 왕이 정도를 잃고 내시 단
속을 소홀히 했던 연산군 시절과, 왕이 너무 어려서 문정대비가 수렴청정을 실시했지만 상굿도 권력
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던 명종 시절이었다. 여느 왕조와 마찬가지로 조선에도 문재인의 ‘따까
리’ 탁현민이나 민정수석 조국처럼 권력에 빌붙어 간신배 노릇을 하고 불법으로 엄청난 재물을 취득
한 내시는 많았지만, 직접 권력을 휘두른 내시는 흔치 않았던 것이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탁현민은
원래부터 온사방 돌아다니며 인간쓰레기 짓을 저지르던 자였지만, 언제든지 돌아갈 곳이 있는 휴직
중의 서울대 교수 조국이 뭐가 아쉬워 SNS로 야당을 헐뜯으며 문재인과 집권여당에 잘 보이려고 아
첨을 떨어대는지 허우대가 아깝다.
19세에 즉위한 연산군은 초반 4년 동안 군왕으로서 국정을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
울였다. 그러나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무리한 요구를 지속하자 연산군의 뚜껑
이 확 열리고 말았다. 즉위 초 연산군이 역대 왕 가운데 경연에 가장 공들여 참석하자 사림파는 경연
의 자리를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설득의 자리로 변질시켰던 것이다. 올바른 어명도 받들지 않고 사
사건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았다. 심지어 관리 한 사람 쓰려 해도 대간들이 들고일어나 왕에게
딴지를 거는 판이었다. 개국 초의 정도전처럼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왕족들의 정치 참여를 일절 금
지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연산군이 처음으로 결기를 보인 것은 한 지방관의 제수에 반대하여 연좌시위를 벌이던 성균관 유생
157명 전원을 구금한 일이었다. 유생들은 왕의 통치행위에 반대하여 대궐 앞에서 왕의 비답을 기다
리며 연좌시위를 벌이다가, 비답이 내려오지 않거나 비답의 내용이 요구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수업
을 일체 거부하는 권당을 일으킨다. 그래도 왕이 승복하지 않으면 공관이라고 하여 일제히 보따리를
싸 들고 귀가한다. 이러한 관행에 넌더리를 내고 있던 연산군은 재위 10년 7월, 투옥된 유생들이 계속
시위를 벌이자 아예 성균관을 폐쇄하고 그 자리에 연회장을 겸한 활터를 만들어버렸다.
연산군을 업고 호가호위한 내시는 조선에서 가장 악명 높은 김자원이었다. 모든 상소는 김자원을 거
쳐 연산군에게 올라갔으며, 그가 승정원에 들어서면 모든 승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읍을 올려야 했다.
김자원이 호위무사를 거느리고 행차할 때면 양반들도 모두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춰야 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김자원은 연산군 10년 10월 6일 드디어 따끔한 맛을 봤다. 왕이 불렀는데도 이를 무시하
고 오지 않다가 곤장 100대를 맞은 것이다. 가뜩이나 억하심정이던 장리(杖吏)는 있는 힘껏 곤장을
쳐서 김자원의 골반뼈를 부수고 엉덩이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사극에 더 자주 등장하는 내시 김처선은 연산군 11년 4월 1일 만취하여 연산군에게 개기다가 연산군
이 휘두른 칼에 목이 잘렸다. 이 책에는 김처선 얘기가 이게 전부고 나도 더 보충할 생각이 없다. 반
란을 일으켜 연산군을 축출한 무리들이 중종에게 김처선의 충정을 기리는 정려문을 세우자고 진언했
지만, 반란군 덕분에 보위에 오른 중종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국害의원 탈을 쓴 빨갱이들도 김재
규를 열사로 추존하려다 미수에 그친 적이 있다.
‘조선의 서태후’로 불리는 문정대비는 재위 8년 명종이 20세에 달해 법적으로 수렴청정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사를 좌지우지했을 뿐만 아니라, 수틀리면 친아들인 왕의 종아리를 때리기도 했다.
제대로 된 신하가 있었더라면 능지처참 깜이었다. 악랄하고 부패한 권력자일수록 아랫것들이 기고만
장하는 법, 문정대비 展의 내시들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의정부와 6조를 주물렀다. 내시들
은 휴가 때 역마를 이용하는 파렴치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휴가 나온 내시를 잘 모시지 않았다는 이
유로 수령이 파직당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내시 박한종은 중종 말기부터 문정왕후의 심복으로 있었다. 중종에게는 3명의 왕후가 있었는데, 정
비인 단경왕후 민씨는 후사 없이 폐위되었고 제1계비 장경왕후는 중종의 장자(인종)를 낳고 산후병
으로 요절했다. 중종의 차남(명종)을 낳은 제2계비가 바로 희대의 악녀 문정왕후였다. 내시 박한종은
문정왕후에게 다양한 정보를 물어다주며 신임을 확보한 뒤, 문정왕후가 대비가 되어 명종의 수렴청
정을 시작하자 막강한 실세로 부상하여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박한종의 권세는 명종이 친정을 시작
한 후에도 변함없이 정승‧판서를 능가했다. 『명종실록』 재위 15년 4월 13일자 기록에는 문정대비
의 내시정치가 낱낱이 드러나 있다.
<대비는 수렴청정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내수사의 내시들을 이용하여 정치적 활동을 계속하고 있
으니, 온 나라에 두 개의 조정이 존재한다는 비난이 무성하다.>
명종 8년, 문정대비는 박한종을 경복궁의 각 전각 중건사업의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공사 도중 큰 화
재가 발생하여 10여명의 일꾼이 불에 타 죽고 엄청난 재산 피해를 냈지만, 문정대비는 공사 책임자인
박한종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1년 동안 끈질기게 올라와도 끝까지 그를 단죄하지 않았다. 『명종실
록』에는 이 밖에도 내시들이 만취하여 궐내에서 추태를 보인 사건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고 중종의 서손인 하성군이 보위(선조)에 추대되었는데, 이때도 내시들이 후사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 탓에 선조도 즉위 후 한동안 내시들에게 상
당히 휘둘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날씨 좋은 연휴가 되어 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허리,허벅지 통증으로 동네 산행을 중간에서 포기하였지만 걷는 곳 탄천변의 봄 풍경이 절경 이었습니다. 백 두루미 의 개체수도 무척 늘어 생태 의 활력도 안겨준 또다른 멋 이었습니다. 야탑역에서 태평역까지 다녀온 봄날 의 행보, 즐거움 가득 이었습니다. 오늘 역시도 좋은 날씨를 예보 합니다. 많이 걸으시고 즐거운 연휴 잘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