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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삿짜까 경(Mahaasaccaka Sutta, 삿짜까에게, M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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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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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6. "악기웨사나여, 그런 나는 나중에 젊은 나이에 머리칼은 검고 축복받은 젊음을 두루 갖춘 인생의 초년에 부모님은 원치 않아서 눈물흘리며 우셨지만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染衣]을 입고 집 을 떠나 출가했다. … (이하 알라라 깔라마와 웃따라 라마뿟따를 참예하여 수행하는 부분은 M26 聖求經(성스러운 참구)의 14-17번까지와 동일함)"
M026. 성구경(聖求經)
§4. 알라라 깔라마
15-1. "그런 나는 이와 같이 출가하여 무엇이 유익함[善]인가를 추구하고 위없는 평화로운 경지를 참구하여 알라라 깔라마를 만나러 갔다. 만나러 가서 알라라 깔라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알라라 깔라마 존자시여, 이 법과 율에서 청정범행을 닦고자 합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알라라 깔라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는 머무르시오. 이 법은 이러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래지 않아 자기 스승에게 속하는 것을 자신이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무를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즉시에 그 법을 증득하였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입술이 떨어지자 말자, 말을 하자말자 지혜로운 말과 확신에 찬 말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나는 알고 본다'라고 공언을 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 자들이 있었다.
15-2.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라라 깔라마는 이 법을 단순히 믿음만으로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널리 알리지는 않는다. 참으로 알라라 깔라마는 이 법을 알고 보면서 머문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자 나는 알라라 깔라마를 만나러 가서 이렇게 말했다. '깔라마 존자시여, 어떻게 해서 이 법을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공언하십니까?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알라라 깔라마는 무소유처를 공언하였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역시 믿음이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정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역시 정진이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마음챙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역시 마음챙김이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삼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역시 삼매가 있다.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통찰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역시 통찰지가 있다. 참으로 나는 알라라 깔라마가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공언하는 그 법을 실현하기 위해서 정진하리라.'라고.
15-3.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머지 않아서 즉시에 그 법을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물렀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나는 알라라 깔라마를 만나러 갔다. 만나러 가서 알라라 깔라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깔라마 존자시여, 당신은 이렇게 하여 이 법을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서 공언하십니다.'
[깔라마는 말했다], '존자여, 나는 이렇게 하여 이 법을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공언합니다.'
'깔라마 존자시여, 저도 이렇게 하여 이 법을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공언합니다.'
'존자여, 우리는 이득이 큽니다. 존자여, 우리는 큰 이득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존자와 같은 그러한 동료 수행자를 보다니요. 이처럼 내가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서 공언하는 법을 그대도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뭅니다. 그대가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무는 법을 나도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서 공언합니다. 이처럼 내가 아는 법을 그대도 압니다. 그대가 아는 법을 나도 압니다. 이와 같이 내가 그런 것처럼 그대도 그렇고 그대가 그런 것처럼 나도 그러합니다. 오시오, 존자여. 둘이 같이 머물면서 이 무리를 이끌어갑시다.'
15-4.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의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는 제자인 나를 자신과 같은 위치에 놓고 나를 크게 공경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법은 [속된 것들을] 염오하도록, 욕망을 빛바래도록, 그치도록, 고요에로, 초범지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어 주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무소유처에 다시 태어남에 이바지할 뿐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그 법을 장엄하지 않고 그 법을 버리고서 떠나갔다."
§5. 웃다까 라마뿟따
16.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무엇이 유익함[善]인가를 추구하고 위없는 평화로운 경지를 참구하여 웃다까 라마뿟따를 만나러 갔다. 만나러 가서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웃다까 라마뿟따 존자시여, 이 법과 율에서 청정범행을 닦고자 합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웃다까 라마뿟따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는 머무르시오. 이 법은 이러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래지 않아 자기 스승에게 속하는 것을 자신이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무를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오래지 않아 즉시에 그 법을 증득하였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입술이 떨어지자 말자, 말을 하자말자 지혜로운 말과 확신에 찬 말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나는 알고 본다'라고 공언을 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 자들이 있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웃다까 라마뿟따는 이 법을 단순히 믿음만으로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공언하지는 않는다. 참으로 웃다까 라마뿟따는 이 법을 알고 보면서 머문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러자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를 만나러 가서 이렇게 말했다.
'라마뿟따 존자시여, 어떻게 해서 이 법을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공언하십니까?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웃다까 라마뿟따는 비상비비상처를 공언하였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웃다까 라마뿟따에게만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도 역시 믿음이 있다. 웃다까 라마뿟따에게만 정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역시 정진이 있다. 웃 다까 라마뿟따에게만 마음챙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역시 마음챙김이 있다. 웃다까 라마뿟따에 게만 삼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역시 삼매가 있다. 웃다까 라마뿟따에게만 통찰지가 있는 것이 아 니라 나에게도 역시 통찰지가 있다. 참으로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가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공언하는 그 법을 실현하기 위해서 정진하리라.'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머지 않아서 즉시에 그 법을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물렀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를 만나러 갔다. 만나러 가서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라마뿟따 존자시여, 당신은 이렇게 하여 이 법을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서 공언하십니다.'
[라마뿟따는 말했다], '존자여, 나는 이렇게 하여 이 법을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공언합니다.'
'라마뿟따 존자시여, 저도 이렇게 하여 이 법을 스스로 초범하여 알 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문다고 공언합니다.'
'존자여, 우리는 이득이 큽니다. 존자여, 우리는 큰 이득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존자와 같은 그러한 동 료 수행자를 보다니요. 이처럼 내가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서 공언하는 법을 그대도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뭅니다. 그대가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무는 법을 나도 스스로 초범하여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서 공언합니다. 이처럼 내가 아는 법을 그대도 압니다. 그대가 아는 법을 나도 압니다. 이와 같이 내가 그런 것처럼 그대도 그렇고 그대가 그런 것처럼 나도 그러합니다. 오시오, 존자여. 둘이 같이 머물면서 이 무리를 이끌어갑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의 스승이었던 웃다까 라마뿟따는 제자인 나를 자신과 같은 위치에 놓고 나를 크게 공경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법은 [속된 것들을] 염오하도록, 욕망을 빛바래도록, 그치도록, 고요에로, 초범지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어 주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비상비비상처에 다시 태어남에 이바지할 뿐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그 법을 장엄하지 않고 그 법을 버리고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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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유년시절의 좌선을 회상함 - 중요!!
30. "악기웨사나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어떤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느꼈던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 중에서 이것을 능가하는 다른 것이 더 있지 않았다. 미래의 어떤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느낄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 중에서 이것을 능가하는 다른 것이 더 있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어떤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느끼는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 중에서 이것을 능가하는 다른 것이 더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 극심한 고행으로도 인간의 법을 능가하는 성자에게 어울리는 특별한 지와 견을 증득하지 못했다. 깨달음을 위한 다른 길이 없을까?'라고."
31. "악기웨사나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아버님이 삭까족의 [농경제의] 의식을 거행하실 때(kammante) 시원한 잠부 나무 그늘에 앉아서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喜, piiti]과 행복[樂, sukha]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던 것을 기억한다(abhijaanaami). 그런데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 될까(siyaa nu kho eso maggo bodhaaya)?'라고. 악기웨사나여, 그런 나에게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가 생겨났다(sataanusaarivin$n$aan*am* ahosi). '이것은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라고."
32. "악기웨사나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런 행복을 두려워하는가? 그런 행복은 감각적 욕망들과도 다르고 해로운[불선] 법들과도 다르지 않은가?'라고. 악기웨사나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각적 욕망들과도 다르고 해로운 법들과도 다른 그런 행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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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드립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8선정은 차제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기 마하삿짜까 경(M36)과 성구경(M026)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처음에 알라라 깔라마에게 무소유처정을 배우시고, 또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비상비비상처정을 배우신뒤, 이러한 법들은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고 간파하시고, 유년시절 초선을 기억하시고,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라고 간파하셨다고 합니다.
1.그렇다면 알라라 깔라마의 무소유처정과 웃다까 라마뿟따의 비상비비상처정은 차제정이 아닌지요? 차제정이 아니라면 곧바로 이러한 무색계정을 성취하는 방법이 있는지요?
2.만약 차제정이라면 굳이 부처님께서 유년시절의 초선정을 기억하실필요가 있으셨을까요? 아니면 외도 차제정과 부처님 차제정이 어떠한 특별한 차이점이 있는 것인가요?
이점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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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질문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답변드리고자 합니다.
올려주신 질문은 전에도 저희 까페에 몇 차례 올라온 질문이기도 하고
M26이나 M36을 정독하신 법우님들은 거의 대부분이 가지는 의문일 것입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기에 나타나는 두 삼매의 경지는
4선-4처의 차제정으로 볼 수도 없고 볼 필요도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인도에서 공부할 때 관심을 가지고 베다 문헌들과 자이나 문헌들을 나름대로 자세히 검색해본 적이 있는데
불교 외의 인도 사상이나 수행전통, 특히 불교이전의 베다나 브라흐마나(제의서)나 아란냐까(산림서)나
우빠니샤드 등의 문헌에는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라는 술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M26과 M36에서 부처님의 성도과정에서 체험하신 것으로 언급되는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가 제시한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는
그 당시 즉 불교 이전 시대에 인도에서 행해지던 여러 가지 삼매를 닦는 수행방법들에 속하는 것으로 볼수밖에 없을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 두 가지 경지를 불교의 무색계 삼매인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에 해당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계실 뿐이라고 받아들이면 무난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찬도갸 우빠니샤드나 브르하다란냐까 우빠니샤드 등의
부처님 이전이거나 부처님과 비슷한 시대에 있었던 우빠니샤드에 나타나는 그들의 가르침에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에 배대할 수 있는 부분이 나타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깨달으시기 이전에 체험하신 삼매의 경지를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에 해당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면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초기불교에서도 이 두 경지는 삼매의 경지일 뿐 결코 깨달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그들을 버리고 떠나신 것입니다.
M26과 M36에서 언급되는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에 대해서는
이 이상의 의미부여를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당연히 주석서에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습니다. ^^
늘 청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각묵 합장
네 스님 친절한 답변 항상 감사합니다.()
스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