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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을 향한 신부의 노래 (1) (아5:7-10절)
한 성자에게 제자들이 ‘새롭다’ 라는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성자는 대답하기를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 내가 새로워졌다는 뜻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고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환조건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주머니를 보고 사랑하는 것은 일 년쯤 간다고 합니다. 얼굴을 보고 사랑하는 것은 이 년쯤 갑니다. 마음을 보고, 영혼을 보고 사랑하는 것은 오래 오래 갑니다. 이제 술람미 여인에게 고통이 왔습니다. 그 고통은 사랑의 병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이별은 슬프고 괴로운 일인가 봅니다.
시인 박기원씨의 “낙화” 라는 시가 있습니다.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손 저어 보내기엔 아직도 먼 하늘이 있습니다. 정으로 못 막을 떠나는 발길이며 뿌리친 소매 깃엔 분명 눈물이 아롱졌나 봅니다. 살다가 싫으면 헤어지는 허전함보다 차라리 눈 뜨고 돌아서기에는 가슴 찢는 계절입니다.
이 노래는 자연과 인간과의 이별의 아픔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눈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사랑하는 연인은 언제나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서로가 같이 있지 못할 때 ‘작은 여우’ 나 ‘밤의 두려움’ 이 엄습하여 연인의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게으름과 나태에 빠진 것도 솔로몬이 집을 비웠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이별은 또 다른 사랑의 고통을 가져옵니다. 신랑의 사랑을 거절한 신부는 호된 징계를 받게 됩니다. 신부는 밤새껏 긴 여행을 하느라고 팔레스틴의 굵은 이슬에 흠뻑 젖어있는 남편의 음성을 거절하고 자신의 평안함만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징계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징계는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고 신랑의 사랑을 사모하게 해 주기 때문에 가장 귀한 은혜의 수단인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사랑의 깊은 병을 앓고 난 후에 부르는 신부의 사랑의 노래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사랑의 병이 든 신부
a. 사랑의 경책입니다.
*아5:7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것,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 양심이 있다는 것, 웃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끄러움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부끄러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것입니다. 유대인의 랍비들은 부끄러움에는 몇 단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하와는 아담에 대해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낮은 차원의 수치심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느끼는 부끄러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수치심을 랍비들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이러한 수치가 바로 부끄러움의 시작이며 이 수치심이 강해짐으로 보다 더 높은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차원이 높은 수치심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느끼는 수치입니다. 즉 자신이 삐뚤어진 인간이라든가, 자신이 거짓말쟁이라든가 하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느낄 수 있는 부끄러움을 말합니다. 마지막을 가장 차원이 높은 수치심은 하나님에 대하여 느끼는 부끄러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는 그들의 마음에 의심이나 두려움이 가득하게 되었고 죄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떠나 가버린 신랑을 찾아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자신의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신랑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거리와 성벽을 누비고 다닌 것입니다. 그 때 길에서 만난 순찰하는 자들이 그녀를 때리고 상처를 입히고 겉옷을 벗겨 취하기에 이릅니다. 사랑의 이별의 대가는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사람들로부터 질책과 희롱과 구타를 당한 것입니다. 성중에 순행하는 순찰자들이 술람미 여인을 보고 마구 때리고 상처를 입혔습니다. 한밤에 잠옷 바람으로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사람은 실성한 사람 외에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알더르스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순찰하는 자들이 그녀를 치고 겉옷을 벗긴 것은 그녀를 단순히 밤거리를 찾아 나온 불나비로 취급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버린 성도는 징계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는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갖가지 희롱과 모욕을 참으면서 길거리를 누볐으나 신랑을 찾지 못한 신부는 이제 높은 성벽 위로 올라갑니다.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술람미 여인의 겉옷을 벗겨 취합니다. 여기서 겉옷이라는 히브리어는 ‘라디드’ 로서 속이 훤히 비칠 정도의 얇은 겉옷을 말합니다. 그나마 걸치고 있었던 옷도 빼앗긴 것입니다. 얼마나 심한 부끄러움을 당한 것입니까. 어쩌면 이러한 파수꾼의 경책이 가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의 경책입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님 나라의 파수꾼들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 지도자들입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비행을 책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잠20:30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b. 사랑의 병입니다.
*아5:8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술람미 여자는 자신의 사랑하는 연인 솔로몬 왕을 자신의 노력과 의지대로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이제는 자신의 딱한 처지를 예루살렘 딸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방심과 안일주의, 무사주의, 기회상실에서 오는 수많은 경책과 징계를 받고 난 후에 이제는 사랑의 회복, 은혜의 회복을 위해 불타는 연모의 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제 그녀의 심중 깊은 곳에서 다시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자신의 불타는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낫다.” 고 하는 말은 70인 역에서 “내가 사랑하므로 상하였다.” 라고 하였고 제롬은 말하기를 “내가 사랑 때문에 원기를 잃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는 전에도 사랑의 병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아2: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사랑의 초기에 솔로몬 왕이 그녀를 지극히 사랑함으로 그 사랑에 겨워 행복한 사랑의 병이 난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연인을 잃어버림으로 인한 고뇌에 싸인 몸부림치는 사랑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사람은 사랑에 의해 살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죽음의 시작이고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사랑은 삶의 시작이라.’고 하였습니다.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는 말하기를 ‘사랑은 죽음과 악 대신 삶과 선을 선택하게 하는 긍정적인 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는 이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동료들의 도움의 손길을 간절하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c. 사랑의 우월성입니다.
*아5:9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이것은 술람미 여자의 제의에 대한 예루살렘 여인들의 질문입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사랑의 우월성을 질문한 것입니다.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실로 그러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질문에 자주 부딪치곤 합니다. “네가 믿는 예수가 다른 사람이 믿는 것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가.”
폴란드의 조그만 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독일 군인이 학교에 들어와 유대인 학생들을 강제로 잡아갑니다. 가슴에 별을 단 유대인 어린아이들은 무서워서 선생님에게 달려갑니다. 코르쟈크 라는 선생님은 아이들을 두 팔로 껴안고 말합니다. ‘무서워할 것 없다.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린다면 마음이 좀 편해질거야.’ ‘자 우리 함께 가자 선생님과 함께 가면 무섭지 않지.’ 독일군은 선생님에게서 아이들을 떼 내려 하였지만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트럭에 올랐습니다. 결국 선생님은 크레물렌카 가스실 앞에 도착하여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앞장서서 가스실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자신은 유대인이 아닌데도 사랑하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함께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신부의 노래
술람미 여자는 지체하지 않고 자기의 사랑 솔로몬의 우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아5:10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술람미 여자는 그의 신랑에 대해 떳떳하게 말하기를 ‘내 사랑하는 자’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쓸모 있거나 편리해서가 아니라 그 대상에게 아무 조건 없이 헌신적으로 관심을 둘 때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인끼리는 자연히 그 대상을 자랑하고 지켜주고 상대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는 여인들의 질문에 간단하게 요점만 세 가지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a. 무죄 성결하신 주님을 노래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다.” 라고 하였습니다. “희고도” 에 해당하는 “차흐” 는 ‘눈부시게 희다’ 는 뜻으로 솔로몬 왕의 피부가 햇볕에 그을리지 않아 귀족적인 풍모를 나타낸 것을 가리킵니다. 고대 사회에서 피부가 하얀 것은 그 사람의 고결성이 뛰어난 혈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귀족들의 얼굴이 하얀 것은 눈과 우유로, 몸의 붉음은 산호에 비유되었습니다. 야곱이 유언으로 유다를 축복할 때 ‘희고 붉은 것’을 말했습니다.
*창49: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민족의 멸망을 바라보며 애가를 지어 노래하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애4: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이 흰색은 창백한 백색도 아니고 주검과 같은 싸늘한 백색도 아닙니다. 반대로 생명력이 넘치는 성결의 광채를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 성결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히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이러한 성결의 광채가 변화 산에서 변모하신 주님의 모습에서 나타났습니다.
*마17: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또 밧모섬에서도 사도 요한에게 나타났습니다.
*계1: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b. 속죄의 주님을 노래합니다.
“희고도 붉어” 라고 하였습니다. “붉어” 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아둠’ 인데 이 말은 “담” 즉 “피” 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혈색을 의미합니다. 혈색이 젊은이처럼 건강하고 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다윗 왕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부음을 받을 당시 그의 얼굴빛이 붉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삼상16: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구약의 다윗은 이러한 주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표적 인물입니다. 이 말의 영적 의미는 피 흘리신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요일5:5-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무죄하신 인성의 주님이 죄인을 대신하여 피 흘리셨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인 것입니다.
c. 승리의 주님을 노래합니다.
“만 사람에 뛰어난다.” 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이 용모나 지혜의 면에서 걸출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왕상3:12-13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뛰어난다’ 라는 히브리어는 ‘다굴’ 인데 이는 ‘기를 세운다.’ ‘구별된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의 영적 의미는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려 승리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보좌에 앉으신 왕 중의 왕이요 만 왕의 왕이신 것을 말합니다. 과연 주님은 만 사람 위에 뛰어납니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빌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국의 시인이며 화가이기도 한 블레이크는 어느 날 해안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해가 막 수평선 위로 얼굴을 내미는 순간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황홀해져서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보세요. 저 아름다운 모습을, 당신은 저 태양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옆에 있던 남자도 놀라운 듯이 대답하기를 ‘예 마치 황금 덩어리 같군요. 당신은 어떻게 보십니까.’ ‘예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수많은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라고 찬양하고 있는 소리를 듣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도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도 솔로몬 왕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솔로몬 왕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는 예루살렘 여인들의 빈정대면서 하는 질문에 대하여 명쾌하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사랑한 솔로몬 왕은 무죄 성결하신 깨끗한 분이요, 죄인을 위해 피 흘려 속죄의 은총을 주신 분이요,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원히 승리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랑이기에 핍박도 불사하고 조롱과 야유도 무시하고 사랑할 수 있었고 찾아다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술람미 여자와 같은 사랑의 고백을 드리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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