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3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다.
어서 돌아가 보아라.
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
(마르7,24-30)
“Lord, even the dogs under the table
eat the children’s scraps.” Then he said to her,
“For saying this,
you may go. The demon has gone out of your daughter.”
말씀의 초대
지혜로웠던 솔로몬도 나이가 들자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며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진노하시어 장차 닥칠 나라의 분열을 예고하신다(제1독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인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께 와서 더러운 영이 들린 자기 딸을 고쳐 주십사고 엎드려 애원한다. 여인의 믿음과 예수님의 사랑이 만나서 기적이 일어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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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시리아 페니키아 지방은 그 옛날에는 가나안 지방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리아 페니키아인들을 적대시하며 이교도들인 그들을 개라고 부를 정도로 멸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여인한테서 그의 딸에게 든 마귀를 쫓아내 달라는 청을 받으십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이 어떠한지 알아보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식사가 끝나면 빵 부스러기로 손을 비벼 씻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때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는 식탁 아래에 있던 강아지 차지가 되었습니다. 여인은 이 점을 들어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예수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이교도 여인의 믿음과 겸손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십니다. 믿음은 그 사람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그를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믿음으로 굳세어지면 다른 사람들이 주는 상처와 모욕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의 아픈 말씀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확고한 사람은 이 세상 것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삶의 위로와 살아갈 힘을 이 세상에서 받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받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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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여인은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시기를 청합니다. 오직 그 생각뿐입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는 선뜻 나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방인을 차별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여인은 개의치 않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평소 생각 그대로의 답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칭찬하시며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여인을 시험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우선권을 두신다는 표현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토록 생각하셨던’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모른 척합니다. 반면에, 이방인 여인은 온몸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숨은 교훈입니다. 조건 없는 믿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욕심 없는 기도는 마침내 은총을 모셔 옵니다. 모르는 새 조건을 달고 욕심을 지니기에, 신앙이 즐겁지 못하고 기도가 겉돕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상처를 받고 있다면 이방인 여인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만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힘을 받아 극복해야 합니다. 기분 나쁜 소리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습니다. 작은 모욕은 어디에서나 만나게 됩니다. 성당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따져야 하고 번잡한 세상일에서도 신앙과 연관되었다면 참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늘 훈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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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페니키아’는 갈릴래아에 인접한 지중해의 해안 지대입니다. 이곳에 살고 있던 이교도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딸을 괴롭히는 ‘더러운 영’을 몰아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답변하십니다. 느낌이 묘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당시 어법’이라고 해도 상대에겐 아픈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을 강아지로 표현한 자체가 유다인들의 오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겸손하게 답합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답변이었습니다. 그녀의 말은 재치가 아닙니다. 평소 생각하고 있던 마음의 답변입니다. 그러기에 즉석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에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크고 작고는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것이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모두가 은총이며, 모두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인과 딸은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평생 그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어떤 난관에서도 힘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능력은 한 번에 끝나는 ‘일회성’이 아닙니다. 기억을 붙잡고 살아가면 사람의 앞날을 바꾸어 주는 은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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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없고 뻔뻔한 여인들을 ‘개’로 표현하였고, 유다인들도 이교도들을 경멸할 때에 자주 ‘개’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교도 부인에게 ‘개’를 예로 들어 말씀하신 것은 그녀를 경멸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이교도들, 그중에 ‘개’로 표현될 만큼 사회적으로 가장 멸시의 대상이 되는 이교도 여인이라 할지라도 주님에 대한 믿음이 충실하다면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이유는, 구원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과 그 구원을 정말로 애타게 찾는 사람만이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음을 가르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통해 자신들의 구원을 약속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은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애써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거저 주어지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교도 부인은 이 은총의 소중함을 제대로 인식하고 또 그것을 얻어 누리려는 열망이 간절했습니다. 거저 주어지는 은총이 아니었기에 이 부인은 정성을 다 바쳐 주님의 은총을 갈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교도 부인처럼, 구원의 약속과는 별개로 그 구원의 가치를 진정으로 깨닫고 그것을 얻으려는 열망이 간절해야 구원의 은총을 내려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부터 인천 대신학교에서 사제 연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한 이곳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이 자리가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아마 새벽님들이 많이 기도해주셔서 이러한 행복을 체험하며 기쁘게 피정에 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피정을 마치는 금요일까지 이러한 행복 체험 많이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피정을 위해 신학교로 들어오는 월요일, 저는 신학교 교수 신부님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수 신부님께서는 이번에 새롭게 뚫린 길이라면서 신학교로 가는 새 길을 가르쳐주시더군요. 이정표도 없는 아주 낯선 길이었지만, 이 길은 다른 길보다 훨씬 빠르며 또 넓고 편한 길이었습니다.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교수 신부님께서 이 길을 안내해주시지 않았으면, 과연 이 길로 갈 수 있을까요? 분명히 이 길이 아닌, 예전에 항상 다니던 길을 통해서만 신학교에 갔을 것입니다.
목적지에 잘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를 이끌어 주는 사람이나 거리의 이정표, 차 안의 내비게이션, 지도 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안내를 잘 따르는 나의 선택입니다. 아무리 좋은 안내라 할지라도 내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엉뚱한 곳으로 갈 확률이 그만큼 높아질 테니까요.
‘하늘나라’라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까지 잘 갈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는 많은 안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안내를 얼마나 잘 따르고 있을까요? 나의 쓸데없는 고집과 욕심으로 인해서 이러한 안내보다는 내 뜻을 앞세워서 하늘나라에만 가겠다고 우기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후회 없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편하지 않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올바른 것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편하고 쉬운 길만 선택하려 하기 때문에, 결국 후회 가득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인 이교도 부인과 예수님의 만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더러운 영이 들린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보여주셨던 사랑의 모습과 달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순간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고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선택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딸을 위해 스스로 강아지라고 칭하면서, 보통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까지도 모두 내려놓는 아주 어려운 선택을 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택이 그녀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 정말로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있는지요?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앙드레 말로).
부스러기이지만 너무 충분한...
-김찬선신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나는 강아지로소이다. 개새끼라는 말이외다. 주인집 상 밑을 어슬렁거리다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강아지외다. 남들은 나를 주인집 아들과 비교하며 딱하다지만 그래도 나는 어미의 사랑을 듬뿍 받는 행복한 강아지외다.
하느님의 은총 중에 어미의 사랑만한 은총이 어디 있습디까? 그것도 저의 어미 같은 사랑은 보기 드문 사랑이외다.
제 어미의 저에 대한 사랑은 어떤 모욕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으니. 불가마 속에 던져진 세 소년에게 어느 불꽃도 범접치 못한 것처럼, 아니 범접했을지라도 자유로웠던 그들처럼 모욕은 사랑을 모욕할 수 없고 사랑은 모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제 어미에게서 저는 넉넉히 봤소이다.
사실 저는 주님께서 부스러기를 던져주기도 전에 어미의 이 사랑을 보고 그 지긋지긋한 마귀에게서 벗어났소이다. 저는 사랑을 믿지 못하고 고통을 두려워한 강아지였지요. 사랑을 믿지 못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마귀의 밥이잖아요? 그래서 어미의 사랑 안에 있지 못하고 마귀의 수하가 되었잖아요? 그러다 마귀보다 더 강한 어미의 사랑을 보고 고통보다 강한 사랑을 믿게 되었소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어미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부스러기였소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 사랑을 고루 나눠주시니 제게는 제 어미가 당신 사랑의 일부, 아니 당신의 사랑의 부스러기였소이다. 부스러기이지만 너무도 충분한.....
삶의 모든 것을 주님 발 앞으로 가져가자
- 김미자 수녀-
인생 여정을 가다 보면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 기회를 통해 한 단계 도약하는 은총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좌절하며 힘겨운 순간순간을 원망으로 지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부인은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맞닥뜨린 한계 상황 앞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찾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한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상황 한가운데 서 있는 이 여인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좌절하며 포기하거나 원망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우상을 찾아 위안을 받거나 요행을 바라지 않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겸허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절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마귀가 들렸다는 것은 양심과 자유의지로 자신의 삶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지 못하고, 나쁜 힘에 얽매여 이끌려 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이방인이든 유다인이든 모든 인간이 구원되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믿음을 갖고 예수님 발 앞으로 가져가도록 합시다. 절박한 상황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문제를 그분 발 앞으로 가지고 가서 그분의 자비를 청하는 믿음을 가지도록 합시다.
어떤 형제님께서 길에서 우연히 전에 알고 지내던 할머니 한 분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자주 뵙지 못했던 터라 안부를 물었지요.
“할머니, 오랜만입니다. 건강하시죠?”
할머니께서 아주 환한 얼굴로 대답하셨습니다.
“그럼, 아주 건강해. 말기 위암인 거 말고는 다 건강해.”
이 대화를 통해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하고 계신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할머니께서는 어떠한 순간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할머니는 불행할까요? 행복할까요?
미국의 심리학자 쉐드 헴스테더는 “사람은 하루에 5-6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생각이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생각 중 85퍼센트가 부정적인 것이며 단 15퍼센트만이 행복하고 긍정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력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생각하면 어느새 결론은 부정적인 쪽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불행해지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앞선 그 할머니는 행복해지기 위해 스스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복음말씀을 통해 그렇게 노력하는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모욕감을 느낄만한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매달리지요. 즉, 딸의 치유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스스로 노력하는 자는 하늘도 알아주는 법이지요.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미국의 한 도시에서 식당을 하던 사람이 돈이 벌리면 조금 구멍을 내놓은 벽 속에 집어넣어 두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생각에는 이보다 더 좋은 금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 돈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벽을 헐어버리는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돈이 많이 모아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벽을 허물어 돈을 계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벽 속에 있어야 할 돈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즉, 돈은 흔적도 없고 종이 부스러기만 잔뜩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곳은 쥐들의 은신처였습니다. 주인이 돈을 넣으면 쥐들이 돈을 갉아먹고 조각조각 내어버려 돈은 모양도 없고 종이 부스러기만 남게 된 것이지요.
지금 나는 어떤 것들을 가장 소중한 것들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했으면 합니다. 만약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돈을 갉아먹어 부스러기만 남기는 쥐들이 있는 곳에 넣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면, 그 순간에는 느낄 수 없을지 몰라도, 주님께서는 가장 큰 선물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인생에서 힘든 시기는 나쁜 날씨가 계속될 때가 아니라 구름 한 점 없는 날들만 계속될 때이다.(칼 힐티)
믿음의 어둔 밤
-김성웅신부-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과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만남은 ‘하느님께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면 왜 침묵하실까?’라는 삶의 원초적인 의문에 한 가닥 실마리를 줍니다. 비록 복음에서 예수님과 여인의 만남은 짧은 시간 안에 전개되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여정을 함축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반응은 언뜻 여인의 간절한 청원에 맞서 침묵과 거부도 모자라 심지어 여인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십니다. 이러한 체험은 하느님의 부재감을 느끼게 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침묵과 부재와 수치와 같은 온갖 믿음의 어둔 밤의 단계들을 견뎌내며 끝까지 예수님께 머무릅니다. 결국 여인은 딸이 치유받게 되는 선물과 더불어 자신의 믿음이 더욱 정화되는 선물을 받습니다. 시련의 체험이나 하느님의 부재 체험은 그 의미를 해명하기 힘든 신비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만 페니키아 여인의 체험에서처럼, 우리가 시련을 겪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고 정화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어둔 밤의 끝자락은 아무런 힘도 없는 무력한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적으로 무엇 하나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이러한 무력함 속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릴 때 그분 현존의 힘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믿음의 시험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복음사가들의 시각차를 극명하게 드러내줍니다.
왜 그러시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방 여인에 대한 차별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십니다. 유대인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이방인은 강아지라고 대놓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인지 유대인을 위해 쓴 마태오 복음은 여기서 한 술 더 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지만 이방인을 위한 복음인 루카 복음은 이 내용을 아예 빼버립니다. 루카는 이 복음 말씀이 꽤나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루카 복음사가를 불편하게 하고 시로페니키아의 여인을 당황스럽게 할 뿐 아니라 저도 적지 아니 불편하게 하고 당황스럽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러실 수가 있나? 이것이 예수님의 진심인가? 여인에 대한 시험인가? 이러실 분이 아니라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 왜 이러시느냐고 묻기 전에 이러실 분이 아니라고 믿는지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선 민족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선 남녀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선 빈부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똑 같이 비를 내려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가?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이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지 궁구해야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물론 좋은 뜻일 것입니다. 믿음의 시험을 통해서 여인의 믿음을 강화하고, 믿음의 시험을 통해서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시기 위함 아닐까요? 시험은 현재 실력에 대한 평가입니다. 시험은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것도 드러내지만 공부를 잘하면 잘하는 것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시험이 싫겠지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시험이 싫을 이유가 없습니다.
시험은 또한 실력을 강화하고 증진시킵니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공부를 더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험의 더 큰 목적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의 겸손과 겸손에서 비롯된 굳은 믿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이방인인 백인대장에게도 사랑을 베푸시고 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신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그렇게 모질게 시험하심은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훌륭한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처럼 제자들에게 그리고 믿는다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더 훌륭한 믿음의 전범을 드러내 보이시고 배우게 하심일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여인의 믿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믿음의 시험을 받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은 어떻든 모질고 가혹합니다. 이사악을 바쳐야하는 아브라함의 시험은 너무도 가혹한 것처럼 시험은 어떻든지 가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더욱 힘을 내라고. 주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믿으라고.
주님을 위로하는 사람들
-전삼용신부-
아씨시 옆의 Montefalco 라는 동네엔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가 800년 전 모습 그대로 썩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의 심장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모습과 수난도구들이 근육으로 뭉쳐져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장에서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모양과 무게가 같은 조각도 나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시신 자체로 희한한 기적이 많은 성인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수도생활을 했고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기도 중에 탈혼 하시어 그냥 성당에 앉아서 돌아가셨습니다. 동료 수녀들은 이 수녀의 심장을 열어보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수녀님이 살아계실 때 이런 체험 이야기를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수녀님이 어느 날 기도하는 중 예수님께서 슬픈 얼굴로 십자가를 지고 지나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수녀님은 예수님께 왜 그리 슬픈 얼굴을 하고 계시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요즘 시대에 내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다.”하셨습니다. 성녀는 그 의미를 깨닫고 “당신의 십자가를 제 심장에 꽂으십시오.”라고 청했고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그녀의 심장에 꽂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 분의 심장은 그리스도 수난의 증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다고 하신 이유는 요즘 세상에 아무도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여 믿음을 증거 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고 성녀는 그 고통을 자신이 받겠다고 한 것입니다.
수녀들은 이 이야기를 생각하며 성녀의 심장을 열어보았고 정말로 성녀의 심장에서는 심장 근육이 응고되어 만들어진 십자가와 가시관, 채찍, 창 등의 수난도구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특별히 십자가와 채찍은 지금도 그때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성지를 여러 번 가면서, ‘주님도 위로받고 싶어 하시는 구나!’를 느낍니다.
오늘 나쁜 영에 시달리는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한 이방인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시며 그 청을 물리치십니다. 이방인으로서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는데 “나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을 찾으러 왔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시며 사람들 앞에서 청을 드리는 이방인 여인에게 창피를 줍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굽히지 않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감탄하시며 그녀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일부러 청을 들어주시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그녀의 믿음을 드러내 보이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까지 이렇게 믿는데 이스라엘인들은 믿지 못하는 것을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이 이방인 여인은 예수님의 매몰참으로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지만 그 믿음이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앙으로 상처받은 예수님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녀는 멸시에 가까운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습니다. 그만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보이는 믿음이야말로 참 믿음인 것입니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주어집니다. 아무 어려움도 없는데 어떻게 신앙의 힘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저조차도 고통을 청하기가 두렵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주시는 고통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청하기는 합니다. 일상에서 주어지는 우리의 십자가만이라도 잘 지고 나갈 수 있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신앙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집에 불이 나서 아내를 잃은 형제님이 성당에 나와 그래도 웃어주며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내를 잃었다면 하느님도 원망스럽고 사람도 원망스러울 텐데 그런 고통 가운데서도 성당에 나오고 사람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하느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아프게 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강호순에게 희생된 자신의 딸로 인한 슬픔 안에서도, 어머니는, “만약, 제 딸이 실종된 직후 시신을 보았다면 저는 미쳐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저를 생각하시어 마음의 준비를 위해 2년 뒤에 발견하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하셨고, 아버님은, “저의 딸은 그리스도 수난에 참여하였습니다.”라고 하시며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시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오늘 복음의 이방인 여인처럼 매몰찬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도 믿음을 간직하여 하느님까지도 위로해주는 분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위로만 받기보다는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해 괴로워하시는 하느님을 조금씩이라도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벼랑 끝에 서서>
-양승국신부-
하루가 다르게 점점 야위어가는 아이의 몰골에 가슴이 찢어지던 한 어머니를 알고 있습니다. 같은 병실에서 같은 병명으로 함께 치료받던 아이가 먼저 "너무 짧아서 서러운 이 세상"을 하직했을 때만 해도 "우리 애는 절대 아닐거야.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 하며 하루에 수 백 번도 넘게 자신을 추스르던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어떻게 더 이상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는 의사의 판정을 들은 어머니는 그야말로 세상의 벼랑 끝에 선 듯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표현에 따르면 "뚜껑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꼭지가 돌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이성을 잃고 만 것입니다.
신자였던 어머니는 병원 부속 성당으로 달려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이 방음이 잘 된 성당이었고 밤늦은 시간이어서 성당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느님, 이거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저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하느님, 당신은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찌 이런 일이 제 눈앞에 벌어지게 하십니까?" 하며 대성통곡을 터트렸습니다.
울다 지친 어머니는 아예 성당 바닥에 드러누웠습니다. "하느님 당신이 주신 아들이니 당신이 살려내십시오.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이거 너무 하지 않습니까?"
어느덧 시간은 흘러 새벽녘에 이르렀는데, 그때 어머니의 기도는 이렇게 바뀌어있었습니다. "하느님, 데려가시려면 차라리 저를 데려가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하느님, 저를 데려가 주세요. 만일 아이를 살려주시면 꼭 당신 나라의 일꾼이 되도록 인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울다 지친 어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한 청소부 아주머니에 의해 잠이 깬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분하고 원통하던 마음이 깨끗이 사라지고 왠지 모를 평화가 마음에 찾아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큰일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병실로 뛰어온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기력이 소진되어 제대로 앉지도 못하던 아이, 물도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던 아이가 침대에 똑바로 앉아 바나나를 먹고 있었습니다. 말짱한 얼굴로 말입니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엄마, 어디 갔다 왔어? 나 배고픈데"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너무도 기쁘고 또 한편으로 아이 때문에 속상했던 지난 일들이 생각나 "너, 왜 이렇게 엄마 속을 태우는거니?"하면서 뺨을 한대 세게 때렸답니다. 영문도 모르고 세게 뺨을 한대 맞은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엄마도 아이를 품에 안고 아이를 따라 크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정말 실화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로페키니아 출신의 이방인 어머니는 악령 들린 딸의 치유를 예수님께 부탁드렸습니다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합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모욕적인 일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더욱 여인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자신을 강아지 취급하는 예수님이 한없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내가 차라리 그냥 가고 말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체면불구하고 끈질기게 예수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딸의 치유를 부탁드립니다. 자신을 강아지라고 말하면서, 강아지도 바닥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지 않느냐면서 집요하리만치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머리를 땅에 대고 온몸으로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가지고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 단 한번이라도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밤새워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예수님께 매달려 본 적이 있는지요?
간절한 기도는 하늘까지 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기적의 주인공
- 이재학 신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연보다 조연들이 빛날 때가 많다. 사실 조연이 없다면 영화나 드라마의 재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로는 잘생긴 주연보다 연기력이 뛰어난 조연이 돋보일 때가 있다. 복음서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다. 복음 자체가 하느님의 아들이신 구원자 예수님이고, 그분이 전해 주시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복음의 주인공은 당연히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가끔 주인공이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다.
사랑이 넘치시는 예수님이 평소와 다르게 매정하다. 딸을 위한 어머니의 사랑을 모욕하신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듣기만 해도 낯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모두를 감수하는 믿음의 말을 한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소원을 들어주신다. 딸에게 일어난 기적은 어머니의 겸손한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믿음의 여인이요, 어머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복음의 주인공,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 어머니와 같은 믿음이 있다면 말이다. 사랑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용기가 있다면 말이다.
-박영진신부-
오늘 마르코복음은 띠로 지역에서 있었던 일, 곧 예수님께서 이교도 여인의 마귀 들린 딸을 구마하시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 여인이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교도이고 더군다나 남자인 예수님을 찾게 합니다. 무엇이 그녀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게 하였을까요?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법을 초월하고 수치심마저도 버리고 매달리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마귀 들린 딸, 고통 중에 있는 딸을 고치고자하는 어머니의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그 마음이 어머니로 하여금 용기 내게 만든 것입니다. 이교도 여인에게서 아들 예수님께 대한 성모님의 모습까지도 묵상하게 합니다.
오늘 창세기의 독서는 사람과 창조물과의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남자의 협력자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남자와 여자는 ‘둘이 결합하여 한 몸이 된다.’(24절)고 말합니다. 자신의 반쪽을 만나기 전에는, 그리고 자신의 영원한 반쪽과 진정으로 하나되기 전에는 완전한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남녀가 상호 협력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창조주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 여정의 영원한 동반자요 협력자인 배우자를 위해 기도합시다. 배우자는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또 다른 거울입니다. 그래서 배우자의 얼굴에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해 봅시다. 또한 두 분의 사랑의 결실인 자녀들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자녀들은 어느 한 쪽의 희생과 배려로 양육되는 것이 아니라, 양쪽 부모 모두의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내 배우자는, 나의 자녀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아멘.
산에 오르고 싶은 개구리가 열 마리 있었습니다. 그 개구리들이 마침내 등산을 떠난다는 소문을 듣고 짐승들이 모여들었지요. 하지만 여기저기서 빈정대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다들 성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절대로 산꼭대기까지는 못 갈걸! 너희들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런데도 개구리 열 마리는 종종걸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도중에 토끼들과 마주친 개구리들이 자신들의 원대한 포부를 털어놓자 토끼들은 크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산에 올라간다고! 그 조그만 발로는 어림도 없을걸! 그곳은 너무 멀단 말이야!”
그러자 피곤에 지쳐 있던 개구리 다섯 마리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남은 다섯 마리는 묵묵히 길을 갔지요. 좀 더 올라가자 전나무 숲이 나왔고 숲 한복판에서 개구리들은 들쥐들과 마주쳐서 들쥐들의 이런 합창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높은 데까지 가기는 힘들걸! 개구리들이 험한 산길을 가다니 한 마디로 정신 나간 짓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러자 개구리 두 마리가 단념했습니다. 남은 세 마리는 부지런히 종종걸음으로 전진했지요. 그 모습을 본 염소들이 이기죽거리며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려가는 게 좋을 거다. 그런 걸음으로는 한 달 걸려도 닿을까 말까라고.”
마침내 개구리는 달랑 한 마리만 남았습니다. 이 개구리는 길을 계속 가서 결국 산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정상에 오른 개구리가 다시 산을 내려오자 호기심 많은 짐승들이 몰려와 묻기 시작했습니다. “대체 그 비결이 뭐였니?”
개구리는 말했습니다. “뭐라고?”
다른 짐승들이 목청껏 또 물었습니다. “성공의 비결이 뭐냐니까?”
개구리가 또 말했습니다. “뭐라고?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그 개구리는 귀머거리였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들은 개구리는 정상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대신 부정적인 말을 듣지 않은 개구리만이 정상에 도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요? 부정적인 말만을 듣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을 듣지 않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분명하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에게 아픔을 가져다주는 부정적인 말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 말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겸손한 자세를 취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으로부터 긍정적인 말,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으며,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그 부정적인 말에 좌절하지 않을 때, 우리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긍정적인 말, 힘이 되는 말을 듣게되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운명에 불평하지 마라. 자유는 정신에서 비롯된다.(데카르트)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양승국신부-
<강아지라니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마르코 복음은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교육용임이 확실시됩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는 사랑의 공동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지만 이 공동체 역시 부족한 인간들의 집단이었습니다.
부족한 인간들이 모이다보니 초대교회 때부터 여러 가지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심각할 정도의 트러블이 있었다는 것은 여러 성서구절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지요. "구원의 우선권" 문제로 인한 갈등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제 1순위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이며, 마침내 우리 동족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이 약속된 민족이다"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염병할! 머릿속에 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들이 잘난 체 하기는. 다들 똑같은 하느님자녀들인데…"
이런 갈등 상황 앞에서 예수님의 태도를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정통 유다인으로서 자신의 동족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고, 구원사업의 제1차 대상자로 선정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한 복음화 및 구원이었습니다. 유다인 이방인 할 것 없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있어 구원의 보편성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딸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한 이방 여인의 간청을 즉시 들어주시지 않고 뜸을 들이셨겠습니까? 그리고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는 "자녀들"이란 애정 어린 표현을 사용하셨는가 하면,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강아지"라는 표현, 상당한 수치심과 모멸감이 드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상황을 교육적으로 활용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자신 앞에 털썩 무릎 끓고 간절히 청하는 그 가련한 여인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오로지 한 마음뿐입니다. "즉각적인 응답", "간절한 소원에 대한 즉각적인 성취"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템포 늦추십니다. 여인의 신앙을 자극하십니다. 여인의 신앙을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리십니다. 더욱 강렬한 것으로 만드십니다.
그 결과 여인을 간절함과 절박함에서 우러나온 확고한 신앙고백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 쌍날칼처럼 날카로워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아프게 하지만 결국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보다 한 차원 높은 신앙에로 인도하십니다.
기적의 주인공
- 이재학 신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연보다 조연들이 빛날 때가 많다. 사실 조연이 없다면 영화나 드라마의 재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로는 잘생긴 주연보다 연기력이 뛰어난 조연이 돋보일 때가 있다. 복음서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다. 복음 자체가 하느님의 아들이신 구원자 예수님이고, 그분이 전해 주시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복음의 주인공은 당연히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가끔 주인공이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다.
사랑이 넘치시는 예수님이 평소와 다르게 매정하다. 딸을 위한 어머니의 사랑을 모욕하신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듣기만 해도 낯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모두를 감수하는 믿음의 말을 한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소원을 들어주신다. 딸에게 일어난 기적은 어머니의 겸손한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믿음의 여인이요, 어머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복음의 주인공,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 어머니와 같은 믿음이 있다면 말이다. 사랑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용기가 있다면 말이다.
이 믿음을 보라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심사로 이리도 우작스러운 말씀을 하셨을까?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니! 이교도의 자식은 강아지라는 말인데! 우리말의 개XX와 똑같은 말이고 험한 욕이 아닌가? 모욕을 주는 욕을 주님께서는 하신 것인가? 당시의 유대인들과 똑같이 이교도를 차별하시는 말씀을 하신 것인가?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그럴 분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좋은 뜻으로 그리 하신 것이라고 믿는다면 도대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 지 궁금합니다. 얼마나 겸손한지 여인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을까? 얼마나 믿음이 굳건한지 시험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러셨을 수도 있습니다. 겸손을 시험함으로 겸손을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믿음을 시험함으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왠지, 제가 너무 좋게 보려는 것은 아닌지 모르지만, 그 이상일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겸손을 이미 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믿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해도 괜찮을 거라는 이 여인에 대한 믿음이 있으셨습니다. 믿지 않고는 이리 심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주님의 그 모질고 우작스런 말씀은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들이라고 자부하는 유다인들에게 이 겸손과 믿음을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실로 여인의 겸손은 빵부스러기 사랑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실로 여인의 믿음은 빵부스러기 정도의 은총으로도 충분히 치유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너희 배부르고 교만한 불신자들아, 이 여인을 보아라!” 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
-전삼용신부-
저와 함께 공부하는 한국의 한 부제님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부제입니다. 그러나 그것 이외에 어떤 다른 면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겨울을 지나며 그 부제님의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교구 사제와 신학생들은 대부분 겨울에 한 곳에 모여서 연말연시를 함께 보냅니다. 그 부제님 교구도 오스트리아의 한 도시에서 함께 모였고 저희 교구는 독일에서 모임을 했습니다.
독일에서 모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교구 신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 부제님이 다쳐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가 다쳤느냐고 했더니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않고 광대뼈가 함몰되었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걱정을 하며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역시 그 부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일주일 넘게 로마에 오지 못했습니다. 일주일이 넘어서 수업시간에 모습을 나타냈는데 눈은 시퍼렇게 부어있었고 눈 밑과 볼에 수술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아직 실도 못 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안타까워서 어찌 된 것이냐고 물었는데 그 부제님은 웃으며 광대뼈를 고정시키기 위해 티타늄을 세 개 박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쪽 얼굴엔 감각이 없다고 했고 몇 달 감각이 돌아올지 지켜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말했습니다. 만약 저의 얼굴이 그렇게 되었다면 크게 상심하였겠지만 그 부제님은 너무나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교구 신부에게 물어보니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남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사실은 눈썰매를 타다가 앞 사람의 머리에 얼굴을 부딪쳐 얼굴이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독일어 한 마디도 못하는데 우선 한 병원에 입원시켜놓고 교구 식구들은 잠이라도 제대로 자려나 하며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날 찾아가니 웃으며 “켄터키 프라이드 안 사오셨어요?”하며 농담을 했고 이어서는 “이번에 수술하는 김에 맘에 들게 얼굴도 좀 같이 고치면 안 될까요?”하며 선배 신부님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얼굴이 그렇게 되었으면서도 그렇게 여유 있게 농담을 할 수 있는 여유는 누구나가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 부제님은 우리 모두에게 참신앙의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었고 우리 모두는 우리의 작은 믿음을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나쁜 영에 시달리는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한 이방인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시며 그 청을 물리치십니다. 이방인으로서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는데 “나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을 찾으러 왔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시며 사람들 앞에서 청을 드리는 이방인 여인에게 창피를 줍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굽히지 않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감탄하시며 그녀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일부러 청을 들어주시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그녀의 믿음을 드러내 보이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까지 이렇게 믿는데 이스라엘인들은 믿지 못하는 것을 질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녀는 멸시에 가까운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보이는 믿음이야말로 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주어집니다. 아무 어려움도 없는데 어떻게 신앙의 힘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아씨시 옆의 Montefalco 라는 동네엔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가 800년 전 모습 그대로 썩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수도생활을 했고 젊은 나이에 기도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녀의 심장에선 예수님의 형상이 새겨진 십자가와 채찍 등 수난 도구 등이 근육이 응고되어 형성되었고 지금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수녀님이 어느 날 기도하는 중 예수님께서 슬픈 얼굴로 십자가를 지고 지나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수녀님은 예수님께 왜 그리 슬픈 얼굴을 하고 계시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요즘 시대에 내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다.”하셨습니다. 성녀는 그 의미를 깨닫고 “당신의 십자가를 제 심장에 꽂으십시오.”라고 청했고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그녀의 심장에 꽂았습니다. 그렇게 그 성녀의 심장에 수난도구들이 새겨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다고 하신 이유는 요즘 세상에 아무도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여 믿음을 증거 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고 성녀는 그 고통을 자신이 받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성녀는 그 고통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그 심장에서 나온 것들과 썩지 않는 성녀를 보며 믿음을 갖고 혹은 더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에 말한 부제님처럼, 오늘 복음의 이방인 여인처럼, 또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와 같은 이들을 통해 세상에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저조차도 고통을 청하기가 두렵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주시는 고통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청하기는 합니다. 일상에서 주어지는 우리의 십자가만이라도 잘 지고 나갈 수 있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신앙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가시는 예수님께 작은 위로가 되어드리도록 합시다.
새벽을 열며
피정 중 주교님께서 미사 강론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성당 옆에 큰 교회가 들어섰는데, 글쎄 그 교회를 단 한 명이 직접 지어서 봉헌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봉헌하신 분의 딸이 많이 아팠는데 그 교회의 목사와 신도들이 자주 찾아와서 기도를 해주었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너무 고마워서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서 멋진 교회를 지었고 이렇게 봉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교님께서는 우리 역시 특별히 아픈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큰 교회를 봉헌받기 위해서 관심과 사랑을 보이라는 것은 아니지요. 그보다는 지금 위로가 필요하신 분들에게 예수님처럼 따뜻한 힘과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서는 이렇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조금 안 좋게 받아들이네요.
‘혹시 내 주위에는 저런 봉헌자가 없나?’
즉,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보이는 내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그 이유가 내 자신에 대한 물질적 이익 때문이 아니라 하루 빨리 본당 부지 마련을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던 지요. 아무리 답답하다고 할지라도 주님께 더욱 더 의지하면서 굳은 믿음을 보여야 할 사제가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있음에 한심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기도의 중요성과 사랑과 믿음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금까지 저의 삶 안에서 많은 체험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 물질적인 유혹에 그 중요한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이렇게 쉽게 무너지고 마네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한 이교도 부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시 유다인들이 이교도들을 경멸할 때 자주 ‘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강아지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 이교도 부인의 딸을 가리킨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모멸감을 주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사랑의 모습을 통해서 이 여인에 대한 시험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얼마나 절박하게 당신께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 여인은 예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이 여인의 딸은 마귀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라고 말을 들으면서도 자주 주님께 강한 믿음을 보이지 못했던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늘도 주님께 청합니다.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믿음을 주십시오.”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지 맙시다.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이곳이 아닙니다.
빠다킹신부
어머니
-이정호신부-
오늘 복음은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사랑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어느 어머니가 그러지 않겠습니까마는 특별히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는 순간에도 자식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그 사랑을 위대한 성인의 모범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지안나 베레따 몰라는 이태리 밀라노에서 1922년 10월 4일에 열세 자녀 중 열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 안에서 훌륭한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생명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선물로 체험했고 하느님의 섭리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의사로서 특별히 아이들과 어머니들, 노인들에게 인술을 베풀었으며 1955년 결혼하여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1961년 네 번째 아이를 임신하였으나 아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에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아이의 생명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와 산모를 살리려는 의료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딸을 이 세상에 낳은 후 극심한 고통 가운데 3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생명의 존엄과 신비를 널리 선포하기 위해 교회는 2004년 5월 이분을 시성하였습니다. 사랑의 고통과 희생을 통해 우리가 태어났음을 생각하면서 생명을 소중히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꾀
-윤인규 신부-
강남종귤 강북위지(江南種橘 江北爲枳)는 강남에 심은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춘추전국시대 고사다. 사람한테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사람은 누구와 사느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명운이 바뀔 수 있다. 탱자가 되어 끝날 수도 있었던 이교도,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귤이 된다.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은 그녀의 믿음이었다. 그녀의 믿음은 ‘기다림’에서 숙성된 것이었다. 마치 성전의 시메온과 한나의 그것과 같다(루카 2,25-38).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기다림과 믿음의 관계를 발견한다. 인생의 대부분은 기다림이다. 좋은 때, 반가운 사람, 평화, 사랑, 해방 등 삶이 갈망하는 것들은 모두 기다림 끝에 오는 것이다. 믿음은 불행이나 고통이나 절망을 기다리지 않는다. 믿는 것이나 기다리는 것은 하나로 통한다. 물론 도둑은 밤을 기다리고 나막신 장수는 비를, 짚신 장수는 볕 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것은 때를 이용하는 것이지 기다림은 아니다. 기다림은 사람을 지혜롭고 겸손하게 만들어 삶이 익어가게 한다. 지혜와 겸손은 물과 불 같은 것이지만 둘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기다림이다. 예수님을 감동시킨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꾀 넘치는 말은 성전의 시메온과 한나처럼 오랜 세월 하느님을 기다림으로써 삶이 익은 이의 지혜와 겸손이 드러난 것이다.
연중 제5주간 목요일
- 박기흠 신부-
배부른 사람과 헛배가 불러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음식을 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불신과 시기로 배척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배부른 자녀들과 기쁜 소식의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굶주린 강아지, 다시 말해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한 이방 여인의 모습이 대조되어 있다.
예수님은 공생활동안 당신 반대편의 사람들과 갈등이 점점 고조되어 간다. 마침내 당신의 신변에 심각한 위험을 느낄 지경에 이르게 되시자 스스로 숨어 보호하시려 한다. 하지만 결국 알려지게 되는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숨어 계실 수 없었던 이유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개’라고 멸시를 하던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한 여인의 방문, 그리고 그 여인의 주님에 대한 충실한 믿음과 구원의 은총을 바라는 간절한 희망 때문이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그 어떤 유형의 소외나 노예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언제나 해방시켜 준다. 그리고 ‘마귀 들린 상태’란 인간을 소외시키고 얽어매는 그 어떤 힘에 붙들린 상태이며, 예수님은 지금 마귀의 권세를 빼내는 일과 직접 관련된 사건에 봉착해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상스러운 행동으로 그 여인을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넣는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7, 27)라고 하시면서 평상시와 다르게 행동하신다. 그런데 ‘숨는다’는 행위는 박해를 받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는데, 다름 아니라 예수님은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처럼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는 상황에서 숨어 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에게서 발견되는 놀라운 일은 강아지들이 땅에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고 힘을 얻는 것보다 유대인들에게 경멸과 박해를 당하시고 계신 예수님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겸손한 신앙고백과 태도이다.
특히,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 이방인 여인의 신앙고백에 유념해야 한다. 스승에게 대한 제자들의 동요, 사람들의 악한 표양, 정신병자로 취급하면서 보여준 가족과 친지들의 비겁함, 예수님의 활동을 마귀의 사주를 받아 행한다는 모함들을 비교해 볼 때, 비록 ‘개’라고 조롱과 멸시를 받지만 신앙고백만큼은 그 누구보다 진실했던 그 여인과 그런 신앙고백에 주님께서 어떤 구원의 결과를 주시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마침내 그 여인의 고백 앞에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7,30)라고 표현되어지는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된다. 결국 자신을 강하게 맡긴 여인의 친밀하고 인격적인 신뢰가 구원의 은총과 당신 사랑을 일으키셨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예수님처럼 멸시와 박해를 받거나, 이 여인처럼 우리 자신 능력 밖의 일로 시련과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결코 그 어떤 운명에 맡길 것이 아니라 믿음을 다시 회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참 믿음은 결코 좌절하지 않는 믿음이다. 참 믿음은 주님께서 아무런 응답도 안 해주시는 것 같은 침묵 속에서도 십자가의 사랑을 읽는다. 그래서 하느님께 믿음을 두는 행위는 결코 냉소적이거나 체념이 아니다. 수동적 체념이 ‘운명론’이라고 한다면, 믿음은 수동적 체념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는 희망찬 의지이다. 그 어떤 죄의 힘보다, 그 어떤 고통의 무게보다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선하심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을 우리도 이 여인처럼 가지게 되길 바란다.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이회진신부-
오늘 복음에는 꽤 흥미로운 설명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지내시려고
이스라엘을 벗어난 외딴 지방에 들어가 숨어계시려고 했는데
결국 숨어 계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은총의 여정이 그분 자체의 삶으로 남아있지 않고
그분을 둘러싼 모든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복음적 삶의 공명(共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명(共鳴)이란 같이 울리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복음적 삶의 공명이란 내 가슴에서 일어나는
복음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다른 이의 가슴에서도
같이 울릴 수 있도록 전달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당신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이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어떻게 함께 울리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가슴이 뛰듯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자리는 복음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생동하겠죠.
그 살아있음의 생동감을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당신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우리 자신을 가슴 뛰게 만들고 있나요?
예수님이 심장 박동이 우리 안에서 울리게 하고
우리 자신의 심장 박동이 다른 사람들 안에서 울리게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길을 함께 걷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며, 어떤 기쁨을 주고,
어떻게 고통을 즐겁게 이겨낼 수 있는 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이 삶의 의미가 살아나고
하느님을 향한 기쁨과 사는 동안 겪는 고통을
즐겁게 받아 겪는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길 바랄 수 있겠습니까?
먼저 신앙을 사는 우리 자신이 이 복음의 삶이 참된 것임을 알고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그 복음의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를 같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울리지 않는 복음의 소리는 다른 이들에게도 울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우리 자신 안에서 먼저
하느님의 복음과 사랑이 먼저 일어나게 해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 사랑이 감출 수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당신 사랑으로, 그리고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소서. 아멘.”
사랑의 관계, 믿음의 탄력
-이수철신부-
공동체의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감히 ‘인간은 관계다’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고립 단절된 혼자가 지옥입니다.
삶의 탄력도 떨어져 우울증을 비롯한 온갖 심신의 질환이 뒤따릅니다.
직감적으로도 함께 할 때가 보기도 좋고 안정감도 있어 보입니다.
날아다니는 새들도 혼자가 아닙니다. 최소한 암수 한 쌍이 함께 다닙니다.
저희 수도원에도 정기적으로 도움을 청하러 오는 행려자 한 분이 있었는데
언젠가 부터는 여자 행려자 한 분과 함께 옵니다.
혼자 할 때 보다 함께하니 훨씬 단정하고 정리된 모습이 우선 보기도 좋습니다.
그저께 강론 제목이 “제자리에서 제 모습으로”였는데
이 또한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함께의 공동체 내에서 제자리, 제 모습, 제 색깔이지,
고립 단절된 혼자라면 제자리, 제 모습, 제 색깔도 알 수 없으려니와
논하는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함께하는 공동체의 형제들, 바로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창세기의 독서,
창조하실 때 마다 매번 “보시니 좋았다.” 반응하시던
주 하느님의 다음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함께 안에 혼자는 축복일 수 있어도, 말 그대로 혼자는 재앙입니다.
반드시 사람의 협력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아담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했다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이나 사랑스런 짐승도
결코 사람의 협력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남녀의 부부만이 아니라,
마음과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도 좋은 협력자들입니다.
이런 협력자들 순전히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담에게 하와가 선물이자 협력자였듯이,
여기 공동체의 자매들 역시
서로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들이자 협력자들입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아담의 탄성, 지극한 일치감의 표현입니다.
공동체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라는 자각도 깊어질 것입니다.
관계는 힘입니다.
믿음의 힘, 사랑의 힘, 희망의 힘입니다.
함께 사랑을 주고받으며 관계가 깊어질 때 믿음의 탄력도 좋아집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 부인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혼자였다면 그렇게 끈질기게 주님께 도움을 청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랑스런 딸의 어머니였기에
놀라운 믿음의 탄력을 발휘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어머니의 탄력 좋은 믿음에 구마 이적으로 응답하신 주님이십니다.
사랑의 관계와 함께 가는 믿음의 탄력입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주님은
우리 공동체의 일치를 깊게 하시며
우리 모두에게 탄력 좋은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시로페니키아 여인
-강영구신부-
사랑하는 예수님, 딸을 살리려는 애틋한 모정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은 시험이라도 하듯이 모욕적인 언사로 이방인인 그녀를 강아지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딸을 악령의 굴레에서 해방시킬 수만 있다면, 강아지가 아니라 돼지라도 될 각오였습니다. 딸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어떤 모욕도 감수하게 합니다. 복음사가 요한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1요한5,18)라고 노래합니다. 사랑보다 강한 힘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시로페니키아 여인 위에 당신의 모습이 겹쳐(오버랩 overlap)집니다. 당신은 부족하고 죄 많은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늘을 버리고 땅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가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되게 했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정든 고향과 집과 가족을 버리고 출가出家하게 했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떠돌이 랍비가 되게 했고,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의 벗이 되게 했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산으로 오르게 했습니다. 당신은 십자가에 매달려서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다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이렇게 조롱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27,40) 그러나 당신은 그 모든 조롱과 모욕을 고스란히 받아 안고 처참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습니다. 알량한 자존심이 사랑을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그 한량없는 큰 사랑(大慈大悲)으로 저희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저희들도 당신을 닮아서 사랑하게 하소서.(一明)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양승국신부-
<나는 그저 그들 옆에 있고 싶었다>
현재 일본에서 ‘밤의 선생님’으로 유명한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님의 체험을 다룬 책 ‘애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를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던지시는 한 말씀 한 말씀?제게는 너무나 감명 깊고 소중해서, 마치 살아있는 돈보스코를 뵙는 듯합니다.
“교사 생활 21년 동안 꼭 한 가지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한 번도 학생을 야단치거나, 때린 일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학생들을 절대 야단치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꽃을 피우는 씨앗’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처 꽃피우지 못한 씨앗들을 만나기 위해 나는 오랫동안 밤거리에서 살았다. 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들 옆에 있고 싶었다.”
고된 하루 일과를 끝내고 피곤한 몸을 겨우 가누며 또 다시 밤거리로 나서는 이유에 대해서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내가 보기에 밤거리를 헤매는 아이들도 역시 사랑스런 아이들이다. 따스한 태양빛이 비추는 밝은 세계에 사는 어른들이 매정하게도 그 아이들을 더더욱 어두운 밤의 세계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를 입고 슬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 밤거리로 들어서고 그들과 만나고 싶다.”
수십 번도 더 ‘배신을 때린’ 아이, 그래서 엄청 속을 썩인 아이가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이 망가진 다음 최후의 수단으로 선생님을 찾아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얄밉기 짝이 없습니다.
“선생님, 이번에도 절 도와주실 거죠? 절 버리지 않으실 거죠?”
선생님의 답변은 언제나 한결 같습니다.
“그럼, 우리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다음의 글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의 사무소에서 학교로 연락이 왔다. 지난번에 두 번 다시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서 기웃거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겨우 구해낸 한 소년이 다시 자신들의 세력권에 들어왔기 때문에 붙잡고 있다고.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소년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고 소년이 잡혀있는 조직 사무소를 방문했다. 소년은 소파에 앉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었다. 그의 양 옆을 여러 명의 조직원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건너편에서 험악한 얼굴로 앉아있던 우두머리가 몹시 불쾌한 듯 말했다.
“미즈타니씨, 우리도 체면이란 것이 있는데, 약속을 어겼으면, 뭔가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들은 나의 손가락 하나를 요구했다.
그 후 소년은 고등학교로 돌아갔고, 일본의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도쿄의 중국음식점에서 언젠가 자기 가게를 갖게 되기를 꿈꾸며 성실하게 일을 배우고 있다.
손가락 하나를 잃은 아픔은 매우 컸다. 그러나 소년의 미래를 위해서 손가락 하나쯤은 희생할 수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의 치유를 청하는 한 가련한 이방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딸이 너무나 불쌍했던 나머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간절히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다가가는 딸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여인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모라도 감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집요하게 졸라대는 여인의 자세가 돋보입니다.
딸을 위해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여인을 바라보며 미즈타니 선생님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거리에서, 조직폭력배들의 세계에서 비틀비틀 휘청거리며 방황하는 한 아이의 마음을 잡아보고자 자신의 손가락까지 내어놓으신 선생님.
예수님의 침묵과 거부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겸손과 믿음, 신뢰와 끈기로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청한 결과 여인은 기쁨으로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부모님들, 자식 때문에 고생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문제아들과 씨름하고 계시는 선생님들 정말 수고들이 많으십니다. 때로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순간도 맞이할 것입니다. 지옥 같은 나날이 계속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간절히 주님께 매달릴 때, 언젠가 반드시 환한 희망의 등불을 만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유다인의 머릿속을 뒤집는 작업
-박상대신부-
지난 이틀간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말 그대로 지키고 따르며 소중히 여기던 조상들의 전통을 ’사람이 만든 계명’으로 단언하시고, 이를 과감히 폐기하심으로써 정결에 대한 새로운 계명을 세우신 것을 보았다. 이제 세상에서 사람과 또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를 더럽히는 것은 모두가 사람의 마음에서 밖으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이다. 예수께서 유다인들의 전통과 관습을 폐기하신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어 예수께 대한 유다인 지도계층을 적대감은 계속 커져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중은 전통이나 관습 따위의 외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머릿속에 든 생각까지 바꾸는데 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일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만이 하느님 야훼로부터 간택된 백성이며 자기들만이 구원 받으리라는 배타적인 선민사상(選民思想)과 구원관에 사로 잡혀있었다. 비참했던 바빌론 유배 생활을 몸소 체험한 것을 시작으로 주변 강대국의 끊임없는 침략과 지배, 그리고 문화적인 압박을 통하여 그들의 선민사상과 구원관은 메시아사상과 함께 더욱 고조되어갔다.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 그들의 메시아사상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해방과 메시아의 직접적 통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메시아는 비천한 마구간 출신의 나자렛 평민으로 등장한다. 그분은 백성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상의 왕국을 선포하시며, 로마제국의 세력을 내어 몰기는커녕 가난하고 구박받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억압받는 이들에게 지상의 행복보다는 천상의 행복을 약속하신다. 이것이 곧 예수께서 의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구원관을 보편화시키는 작업이다. 비록 이러한 메시아의 참된 정체를 유다인들이 외면하더라도 이 작업이 관철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이방인 지역의 선교를 떠나신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 찾아가신 ’띠로’는 시리아의 페니키아(시로페니키아) 지방에 속한 도시로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서쪽으로 약 5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현재 레바논에 속하는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이다. 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곳에 도착하여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집에 계시려 했으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한 여인 때문에 들키게 되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 머물러 잠시 생각해 보면, 몇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이 생긴다. 첫째, 예수께서 혼자 띠로까지 먼길을 가셨을 리는 없다. 오늘 복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보도하는 마태오복음(15,21-28)을 보면 분명히 제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띠로와 시돈의 이방인지역 선교여행에 제자들이 함께 있었고, 군중도 대거 동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 따라서 예수께서 ’조용히 계시려 했으나 들키게 된 일’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메시아의 정체성이 점점 밝혀지고 있음을 예고하는 마르코복음사가 특유의 편집기법으로 풀이된다. 이 의도가 악령이 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여인은 선민(選民)도 아니고, 선민들로부터 비난받던 한 이방인이다. 그런데 이 여인이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를 찾아와 딸에 대한 치유의 간청과 함께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27절)는 예수님의 말씀과 이에 대한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28절)라는 여인의 대답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구원관이 메아리치지만 여인의 대답으로 그 메아리가 즉시 멈춘다.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에 주위의 이스라엘 군중은 처음에 사뭇 기뻐하였을 것이나, 여인의 대답을 알아들은 사람은 즉시 안색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행동은 곧 이방인 여인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제 이방인들도 구원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방인 여인의 탄복할 믿음을 바탕으로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의 머릿속 생각까지 엎어버리셨다. 이스라엘 백성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아로 모시고 그 분께 믿음을 두는 자는 다 하느님의 백성이다. 이들이 곧 신약의 새로운 하느님백성이며 이를 우리는 교회라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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