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미인곡(新思美人曲)
잠깐 동안 생각 말아 이 시름 잊자 하니,
마음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꿰쳤으니,
명의가 열이 와도 이 병을 어찌하리.
아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사라져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기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정 철 사미인곡(思美人曲)
임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좇으려 하노라. 송강 정철이 그토록 그리워한 임은 누구일까? 30년 전 고등학교 국어 시험 문제이다. 답은 <선조>였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에 취해 장강의 달그림자를 쫒다 죽었다는 전설처럼 정철의 인생도 술과 함께했다. 그는 당대 서인의 영수였다. 류성룡이 "정송강은 항상 술에 취해 있어서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라고 했다. 소탈하고 대범하다는 서인의 평가와 편협하고 옹졸하다는 동인의 정반대의 평이 함께했다.
천상세계의 풍류를 아는 남자 송강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수험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잔칫날, 막걸리 퍼오라는 할아버지 심부름을 하다 술단지에 거꾸로 빠져본 나로서는 그의 술을 향한 사랑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명문장은 세월이 흐를수록 색기를 뿜어댄다.
죽은 자들이 좋다. 지상에 왔다가 명언을 남기거나 멋진 퍼포먼스 날리고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 그들이 좋다. 전설 속에만 살다 간 사람들이 그립다. 고구려 보장왕 때 안시성에서 당나라 태종의 침공을 막아낸 전완근이 바위처럼 단단하고 광배근을 날개처럼 솟아 올리며 멋지게 활을쏜 그이가 양만춘이건 정만춘이건 상관없다. 그가 누구이건 그의 신념과 분노를 사랑한다. 그가 쏜 화살이 당나라군사의 눈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은 심장을 펄떡 이게 한다.
대퇴방형근이 물소의 엉덩이보다 튼실한 남자라면 그가 고주몽이건 공주몽이건 알바 아니다.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그냥 그 어느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남자를 사랑한다. 나에게 아무 시비도 걸지도 바라는 것도 없는 그들이 좋다. 한때 살아서 지구 위를 걸어 다녔겠지만 지금은 소명을 다하고 사라져서 불멸로 간 이제 더 이상 남자도 사람도 아닌 킹 코브라 같은 남자들에게 하루하루 맘 주고 살아간다.
수백 번 환생해서 돈 모아도 살 수 없는 3중 보호막 유리상자 속의 " 모나리자" 같은 남자가 탐난다. 가장 먼 별 129억 광년 거리 '에렌델"에 살 것 같은 남자가 좋다. 현실에서 술주정하고 여자를 여자로만 보는 그런 끈적이는 돼지표 본드 같은 눈을 가진 남자들이 세상에 많다. 애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플루토처럼 감자 긁던 반쪽짜리 놋쇠 숟가락으로 눈알을 파내버리고 싶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는 한때 나의 이상형의 남자였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철학을 가진 남자이다. 제인 콜트를 사랑해서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탈속했다. 수도원을 나와서도 거친속옷과 절제되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그의 본능에 솔직함이 좋다. 오로지 가족과 나라만 걱정했고 어떤 이의 반론에도 솔직하고 지적으로 막아낸 그의 소박하고도 시기적절한 언변이 감탄을 자아낸다. 죽음의 순간에도 유머와 해학을 잃지 않았다. 그는 진정 멋지게 원하는 대로 최선을 다해 살다 갔다.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됨이 드러난다.
탁월한 수완과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신랄한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뛰어난 명문장가이며 상대편의 허를 찌르는 논쟁가이다. 1935년 로마 교황은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순결한 영혼과 뛰어난 천재성과 엄격한 도덕성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리운 내 남자! 그는 아마 홀로 꿈꾸었던 유토피아에 가 있을 것이다.
영혼까지 투명할 것 같은 남자가 좋다. 가족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는 남자, 비단구렁이처럼 미끌미끌한 목소리와 끈적끈적한 접착력을 가진 민달팽이 같은 남자가 좋다. 따개비처럼 나한테 바짝 붙어만 있을 것 같은 남자가 좋다. 오로지 환상 속에서만 가질 수 있는 수많은 남자들이 좋다.
소파에서 잠든 알코올 중독자남편을 깨워 일용할 정신과 약을 타서 오늘 하루 밤을 버텨야 하는 난 뭘까? "나를 아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라고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가 말했다. 허블망원경을 반대로 돌려 나를 샅샅이 뒤져 보고 싶다. 내 몸 어디에 행성이 숨어있지 않을까? 현실에 발을 디디고 중력을 벗어버리고 싶은 순간들! 돌아보면 모든 게 고통이다. 난 약에 취해 쓴다. 쓰디쓴 약 덕분에 쓰디쓴 글을 쓰고 도 쓴다.
삶이 누군가의 돌팔매로 봉숭아 꽃잎처럼 으깨져 버렸다. 내미 친 심정을 알 것 같은 단 한 사람도 이지상엔 없다. 나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가장 많이 상처 주는 사람들과 1초도 이 땅 위에 머물고 싶지 않은 나와 다 파탄난 내 삶과 그럼에도 버텨야 하는 차액을 알 수 없는 남은 서러운 삶이여!! 글은 글일 뿐이다. 글은 나일수도 있고 나 아닐 수도 있다.
누나가 인조의 후궁이었던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송강정철 덕분에 국어를 포기한 수많은 학생들, 그리고 한때 선조를 그리며 글을 썼던 그가 동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그의 임이 황진이인지 기녀 진옥인지를 의심해 보았던 나도 한때 학생이었다는 사실이 이젠 가물가물 사라져 간다. 조선 역사상 가장 술을 좋아했던 자가 바로 정철이다. 취하지 않고는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격변하는 시세와 곤장을 맞고 죽은 친형과 기울어가는 가세를 그는 견뎌야 했다. 수많은 난과 참혹하게 죽어간 지인들, 제정신 붙잡고 살기 위해 그는 술에 기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량이었던 정철의 광기의 시들은 그의 취기가 만들어낸 명작이었다. 취권을 쓰는 자를 어찌 내가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던 한 남자, 옛사람의 품격이 그리워진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난 오늘도 공부를 한다.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