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 - 133. 쿠빌라이의 마지막 전투는? ①
▶ 사소한 불신에서 갈등 증폭
[사진 = 동방 3가 통치령]
동방 3왕가(칭기스칸 세 동생의 왕가)가 쿠빌라이 정권에 대해 불만을 품기 시작한 것은 사소한 일에서 비롯됐다.
동방 3왕가는 출범 때부터 쿠빌라이 정권의 중요한 기반이었다.
아릭 부케와의 대권 경쟁 때 동방 3왕가는 쿠빌라이 쪽에 합류함으로써 대세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에 대한 2차 원정 후 동방 3왕가가 자리 잡은 만주 지역에서 일본에 대한 3차 원정을 준비하는 동안
중앙에서 파견된 인사와 현지 세력 사이에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그 것은 별 것이 아니었으나 그 것을 기화로 점차 양편 사이에 불신의 골이 깊어지면서 긴장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1285년 요양(遼陽)에 동경행성(東京行省)이라는 지방관청을 설치했다.
바로 그 것이 불만을 극대화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충분히 그러한 관청을 동방 3왕가 지역에 설치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서로의 불신이 팽배돼 있는 상황에서 그 것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된 것이다.
▶ 동경행성 설치가 기폭제
[사진 = 알탄 톱치(황금사)]
원나라가 일본에 대한 원정을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했던 것처럼 행성은 최고등급을 지방관청을 말한다.
행성은 중앙의 중서성(中書省)에 속하는 지방의 행정 관청이다.
중서성은 장관인 중서령(中書令)이 사실상 관료 가운데 최고의 우두머리로 통상 황태자가
이 자리를 겸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지닌 관청이었다.
고려에 설치됐던 정동행성은 일본 원정 후에도 존속되면서 고려 행정을 통제하기 위한 역할을 하기도 하고
몽골에 충성하던 부원세력들의 전횡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고려가 첫 번째 조치가 바로 이 기관의 폐지일 정도로 현지인에게는 배척당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니 동방 3왕가가 동경행성의 설치의도에 의심스러운 생각을 가진 것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 당연했을 것이다.
이들의 반발에 당황한 쿠빌라이 정권은 동경행성을 선위사(宣慰司)로 바꾸면서 한 등급 아래 관청으로 내렸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 나얀 중심 동방 3왕가 반기
[사진 = 옷치긴(칭기스칸 동생) 추정도]
1287년 4월, 동방 3왕가는 옷치긴가의 왕자 나얀(乃顔)을 중심으로 궐기했다.
나얀의 부대를 본대로 해서 나머지 두 왕가가 합류해 요하까지 내려왔다.
요하(遼河)는 길림과 요령을 통과하는 중국 동북지방의 강이다.
여기에 중앙아시아 지역의 카이두가 동방 3왕가의 반란을 지지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몽골 본토에 있던 쿨겐족까지 여기에 호응하고 나섰다.
[사진 = 요하 지방]
쿨겐족은 북몽골 지역에 근거지를 둔 칭기스칸의 애첩 쿨란의 자손들이었다.
쿠빌라이 정권은 최대의 위기상황을 맞은 것이다.
이미 아들들이 모두 죽고 없는 쿠빌라이는 노구를 이끌고 직접 전선에 뛰어들었다.
쿠빌라이의 옆에는 칭기스칸의 충실한 안다였던 보르추의 손자, 이수 테무르 장군이 보좌하고 있었다.
쿠빌라이가 공들여 키워 놓은 특수 친위부대도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동안 몽골제국의 함대는 장강 하류의 강남지역에서 싣고 온 막대한 양의 군수품을 요하 하구에 부려 놓고 있었다.
▶ 전선에 뛰어 든 노인 황제
[사진 = 쿠빌라이 초상화]
일단 전선에 뛰어든 쿠빌라이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과감했다.
코끼리 등에 수레를 매단 쿠빌라이의 본대는 쉬지 않고 냐얀의 진영으로 돌진해 갔다.
냐얀의 군대는 요하 근처에 수레로 방어벽을 치고 야영하고 있었다.
나얀은 방심하고 있었다.
설마 노인인 쿠빌라이가 직접 부대를 이끌고 빠른 속도로 공격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진 = 칸의 옥좌]
신속하게 냐얀군의 진영에 접근한 쿠빌라이 부대는 지체 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방심하고 있던 나얀군의 진영이 무너진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같은 몽골인으로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이 많았던 쿠빌라이군과 나얀군 사이에 전투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타개를 위해 쿠빌라이는 친위부대를 이끌고 직접 전장의 중심부로 밀고 들어갔다.
▶ 야차처럼 전선 누빈 친위부대
친위부대는 몽골인이 아니라 주로 투르크인들로 구성돼 있었다.
몽골인들 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던 이들에게는 평소 몽골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그 빚을 갚아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그들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게다가 같은 종족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서슴지 않고 상대방에게 칼과 활을 겨눌 수 있었다.
[사진 = 나얀 언급 동방견문록]
야차(野叉)처럼 전선을 누비면서 적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친위부대의 활약으로 전투의 승부가 쉽게 갈렸다.
이미 대세가 결정 났다고 판단한 나얀군은 항전을 멈추고 항복했다.
쿠빌라이는 우두머리인 나얀 단 한사람만 처형했다.
그것도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이는 귀인(貴人)에게 적용되는 처형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살려주었다.
반란군의 상징인 나얀을 처치한 것으로 충분하며 같은 종족을 죽여 또 다른 불씨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 쿠빌라이의 자질 재 입증
본군이 무너져버린 뒤 나머지 반란군들이 속속 항복해오면서 반란은 생각보다 빨리 진정이 됐다.
다만 카치운가의 카디운이 북만주에서 상당기간 저항하다 한반도까지 난입하기도 했지만
몽골군과 고려군에 의해 압록강 변에서 완전 제압됐다.
기회를 봐가며 동쪽을 공격하려던 중앙아시아의 카이두 정권은 조금씩 동진(東進)을 시도하던 중
동방 3왕가를 제압한 쿠빌라이가 직접 서쪽으로 진주해 오자 퇴각해 버렸다.
[사진 = 쿠빌라이의 전투]
나얀은 결코 노회 하고 경험 많은 쿠빌라이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만년에 찾아온 위기를 스스로 나서서 극복한 쿠빌라이는 대제국의 제왕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까지나 자신의 손으로 제국을 지킬 수는 없었다.
죽음이 이미 그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