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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변 큰 고읍(古邑), 물산은 풍부하고 유산은 풍성하구나
2023년 12월 고을학교는 따뜻한 남도 <나주고을>에서 송년맞이
송구영신! 12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104강은 전라도 나주고을로 갑니다. 남아있는 답사의 읍성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나주읍성, 그 안에 남아있는 읍치구역의 유적, 성균관과 버금가는 규모의 나주향교, 다산 형제의 애절한 이별의 주막 율정점, 호남의 3대 명촌의 하나이면서 나주정씨의 유적이 많은 금안동, 풍산홍씨의 집성촌 도래 한옥마을, 그리고 영산강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정자를 둘러봅니다(12월 넷째 주가 성탄절 연휴라서 일주일 당겨 셋째 주인 12월 17일에 진행합니다).
▲영산강은 담양에서 발원해 광주와 나주를 거쳐 목포에서 바다와 만나는 큰 강이다. 강 유역에 형성된 나주평야는 호남 곡창지대를 상징한다.Ⓒ나주시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04강은 2023년 12월 1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04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나주IC-노안면 금안동(쌍계정/경렬사/설재서원/정렬사/경현서원/신숙주생가터)-율정점터-나주목관아(정수루/내아/금성관)-나주향교-나주읍성(서성문/남고문/동점문)-점심식사 겸 뒤풀이-동문밖석당간-미천서원-봉황면(만호정/철천리석불입상/철천리칠불석상)-도래한옥마을(홍기창/홍기헌/홍기응/홍기종가옥)-서울의 순입니다.
▲<나주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 독감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주고을의 서쪽 능선을 이루는 금성산은 평야와 낮은 구릉이 넓게 펼쳐진 나주의 진산이다. 예부터 금성산의 산세가 서울 삼각산과 같다고 하여 나주는 소경(小京)이라 불렸다.Ⓒ나주시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04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나주고을의 지형은 영산강 유역에 형성된 나주평야가 대부분이 구릉, 평야로 연속되어 남북으로 길게 펼쳐있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부하며 평탄한 구릉을 서로 연결하여 호남 곡창을 상징하고 있으며 진산인 금성산(451m)이 시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또한 나주는 광주에서 함평, 무안, 목포, 영암, 강진, 해남 등으로 나가는 관문으로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예부터 나주 금성산의 산세가 서울 삼각산과 같다고 소경(小京)이라 불렸습니다. 나주는 영산강이 시가지를 관통하며 남북으로 양분하고 있고 동으로 화순군, 서로는 함평군과 무안군, 남으로 영암군, 북으로는 광주광역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나주의 지리적 특징을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나주는 노령 아래에 있는 한 도회인데 북쪽에는 금성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영산강에 임했다. 고을 관아의 판세가 한양과 흡사하여 예부터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다. 영산강은 서쪽으로 무안, 목포에 이르고 강을 따라 내려가면 경치 좋은 마을이 많다. 강을 건너면 큰 들이 있는데 동쪽으로 광주와 경계가 닿았고 남쪽은 영암과 통했다. 기후가 화창하고 물자가 많으며 지역이 넓어서 마을이 별과 같이 깔려 있다. 또 서남쪽은 강과 바다를 통해 물자를 실어 들이는 이익이 있어서 광주와 함께 이름난 고을이라 일컫는다. 나주의 서쪽이 칠산바다이다.”
나주의 역사는 마한에서 시작됩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54개 소국에 속했고, 백제시대에는 발라, 통의라 칭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금성군(금산)이라 칭하다가 903년(효공왕 7)에 나주라 개칭되었고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의 영지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983년(성종 2) 전국 12목 중의 하나로 나주목이 설치되었고, 995년(성종 14)에 이르러 병마절도사를 두고 군대의 칭호를 진해군이라 하였으며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잠시 피난 왕도가 되었습니다(1011년 1월 13일~1월 31일까지). 1018년 전국 8목 중 하나로 나주목이 되어 189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57년(세조 2) 병영의 하부조직인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진장인 병마사는 목사가 겸임하였으며 1657년(효종 8) 나주 거진을 전라 우영으로 개편함으로써 우영장을 두어 2군 8현의 군비를 장악하였고, 1895년(고종 32) 5월 갑오경장 후 근대적인 지방행정제도 개혁에 따라 목사와 우영장을 없애고 나주 군수를 두고 나주 관찰부를 설치하였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남평군 일원과 함평군의 적량, 장본. 여황과 광산군 소지면 송록리, 송하리를 편입하였고 1931년 나주면이 나주읍으로 193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였습니다. 1981년 나주읍, 영산포읍이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으나 1986년 금성시를 나주시로 다시 변경하였고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을 통합하였습니다.
나주는 농업이 산업의 근간이었던 삼국시대 때부터 곡창지대로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고, 고려왕조부터 조선왕조까지 약 1,000년 동안 목(牧)으로서 지위를 유지한 전라도의 대표적 고을로,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도 그에 맞는 수준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어 중세 사회를 연구하는데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한 나주는 고려 초기부터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전라도에서는 전주부 다음으로 가장 큰 도시였으므로 나주에는 읍치의 규모에 맞게 관아와 향교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거의 훼철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건물로 남아있던 객사 정청과 내아, 정문 등은 일제강점기 이후 관공서와 관사 등으로 사용되면서 개조되었지만 최근 고증을 거쳐 원형대로 복원하였습니다.
영산강변 큰 고읍(古邑), 물산은 풍부하고 유산은 풍성하구나
2023년 12월 고을학교는 따뜻한 남도 <나주고을>에서 송년맞이
송구영신! 12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104강은 전라도 나주고을로 갑니다. 남아있는 답사의 읍성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나주읍성, 그 안에 남아있는 읍치구역의 유적, 성균관과 버금가는 규모의 나주향교, 다산 형제의 애절한 이별의 주막 율정점, 호남의 3대 명촌의 하나이면서 나주정씨의 유적이 많은 금안동, 풍산홍씨의 집성촌 도래 한옥마을, 그리고 영산강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정자를 둘러봅니다(12월 넷째 주가 성탄절 연휴라서 일주일 당겨 셋째 주인 12월 17일에 진행합니다).
▲영산강은 담양에서 발원해 광주와 나주를 거쳐 목포에서 바다와 만나는 큰 강이다. 강 유역에 형성된 나주평야는 호남 곡창지대를 상징한다.Ⓒ나주시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04강은 2023년 12월 1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04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나주IC-노안면 금안동(쌍계정/경렬사/설재서원/정렬사/경현서원/신숙주생가터)-율정점터-나주목관아(정수루/내아/금성관)-나주향교-나주읍성(서성문/남고문/동점문)-점심식사 겸 뒤풀이-동문밖석당간-미천서원-봉황면(만호정/철천리석불입상/철천리칠불석상)-도래한옥마을(홍기창/홍기헌/홍기응/홍기종가옥)-서울의 순입니다.
▲<나주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 독감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주고을의 서쪽 능선을 이루는 금성산은 평야와 낮은 구릉이 넓게 펼쳐진 나주의 진산이다. 예부터 금성산의 산세가 서울 삼각산과 같다고 하여 나주는 소경(小京)이라 불렸다.Ⓒ나주시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04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나주고을의 지형은 영산강 유역에 형성된 나주평야가 대부분이 구릉, 평야로 연속되어 남북으로 길게 펼쳐있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부하며 평탄한 구릉을 서로 연결하여 호남 곡창을 상징하고 있으며 진산인 금성산(451m)이 시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또한 나주는 광주에서 함평, 무안, 목포, 영암, 강진, 해남 등으로 나가는 관문으로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예부터 나주 금성산의 산세가 서울 삼각산과 같다고 소경(小京)이라 불렸습니다. 나주는 영산강이 시가지를 관통하며 남북으로 양분하고 있고 동으로 화순군, 서로는 함평군과 무안군, 남으로 영암군, 북으로는 광주광역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나주의 지리적 특징을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나주는 노령 아래에 있는 한 도회인데 북쪽에는 금성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영산강에 임했다. 고을 관아의 판세가 한양과 흡사하여 예부터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다. 영산강은 서쪽으로 무안, 목포에 이르고 강을 따라 내려가면 경치 좋은 마을이 많다. 강을 건너면 큰 들이 있는데 동쪽으로 광주와 경계가 닿았고 남쪽은 영암과 통했다. 기후가 화창하고 물자가 많으며 지역이 넓어서 마을이 별과 같이 깔려 있다. 또 서남쪽은 강과 바다를 통해 물자를 실어 들이는 이익이 있어서 광주와 함께 이름난 고을이라 일컫는다. 나주의 서쪽이 칠산바다이다.”
나주의 역사는 마한에서 시작됩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54개 소국에 속했고, 백제시대에는 발라, 통의라 칭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금성군(금산)이라 칭하다가 903년(효공왕 7)에 나주라 개칭되었고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의 영지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983년(성종 2) 전국 12목 중의 하나로 나주목이 설치되었고, 995년(성종 14)에 이르러 병마절도사를 두고 군대의 칭호를 진해군이라 하였으며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잠시 피난 왕도가 되었습니다(1011년 1월 13일~1월 31일까지). 1018년 전국 8목 중 하나로 나주목이 되어 189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57년(세조 2) 병영의 하부조직인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진장인 병마사는 목사가 겸임하였으며 1657년(효종 8) 나주 거진을 전라 우영으로 개편함으로써 우영장을 두어 2군 8현의 군비를 장악하였고, 1895년(고종 32) 5월 갑오경장 후 근대적인 지방행정제도 개혁에 따라 목사와 우영장을 없애고 나주 군수를 두고 나주 관찰부를 설치하였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남평군 일원과 함평군의 적량, 장본. 여황과 광산군 소지면 송록리, 송하리를 편입하였고 1931년 나주면이 나주읍으로 193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였습니다. 1981년 나주읍, 영산포읍이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으나 1986년 금성시를 나주시로 다시 변경하였고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을 통합하였습니다.
나주는 농업이 산업의 근간이었던 삼국시대 때부터 곡창지대로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고, 고려왕조부터 조선왕조까지 약 1,000년 동안 목(牧)으로서 지위를 유지한 전라도의 대표적 고을로,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도 그에 맞는 수준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어 중세 사회를 연구하는데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한 나주는 고려 초기부터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전라도에서는 전주부 다음으로 가장 큰 도시였으므로 나주에는 읍치의 규모에 맞게 관아와 향교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거의 훼철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건물로 남아있던 객사 정청과 내아, 정문 등은 일제강점기 이후 관공서와 관사 등으로 사용되면서 개조되었지만 최근 고증을 거쳐 원형대로 복원하였습니다.
영산강변 큰 고읍(古邑), 물산은 풍부하고 유산은 풍성하구나
2023년 12월 고을학교는 따뜻한 남도 <나주고을>에서 송년맞이
송구영신! 12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104강은 전라도 나주고을로 갑니다. 남아있는 답사의 읍성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나주읍성, 그 안에 남아있는 읍치구역의 유적, 성균관과 버금가는 규모의 나주향교, 다산 형제의 애절한 이별의 주막 율정점, 호남의 3대 명촌의 하나이면서 나주정씨의 유적이 많은 금안동, 풍산홍씨의 집성촌 도래 한옥마을, 그리고 영산강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정자를 둘러봅니다(12월 넷째 주가 성탄절 연휴라서 일주일 당겨 셋째 주인 12월 17일에 진행합니다).
▲영산강은 담양에서 발원해 광주와 나주를 거쳐 목포에서 바다와 만나는 큰 강이다. 강 유역에 형성된 나주평야는 호남 곡창지대를 상징한다.Ⓒ나주시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04강은 2023년 12월 1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04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나주IC-노안면 금안동(쌍계정/경렬사/설재서원/정렬사/경현서원/신숙주생가터)-율정점터-나주목관아(정수루/내아/금성관)-나주향교-나주읍성(서성문/남고문/동점문)-점심식사 겸 뒤풀이-동문밖석당간-미천서원-봉황면(만호정/철천리석불입상/철천리칠불석상)-도래한옥마을(홍기창/홍기헌/홍기응/홍기종가옥)-서울의 순입니다.
▲<나주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 독감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주고을의 서쪽 능선을 이루는 금성산은 평야와 낮은 구릉이 넓게 펼쳐진 나주의 진산이다. 예부터 금성산의 산세가 서울 삼각산과 같다고 하여 나주는 소경(小京)이라 불렸다.Ⓒ나주시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04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나주고을의 지형은 영산강 유역에 형성된 나주평야가 대부분이 구릉, 평야로 연속되어 남북으로 길게 펼쳐있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부하며 평탄한 구릉을 서로 연결하여 호남 곡창을 상징하고 있으며 진산인 금성산(451m)이 시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또한 나주는 광주에서 함평, 무안, 목포, 영암, 강진, 해남 등으로 나가는 관문으로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예부터 나주 금성산의 산세가 서울 삼각산과 같다고 소경(小京)이라 불렸습니다. 나주는 영산강이 시가지를 관통하며 남북으로 양분하고 있고 동으로 화순군, 서로는 함평군과 무안군, 남으로 영암군, 북으로는 광주광역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나주의 지리적 특징을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나주는 노령 아래에 있는 한 도회인데 북쪽에는 금성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영산강에 임했다. 고을 관아의 판세가 한양과 흡사하여 예부터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다. 영산강은 서쪽으로 무안, 목포에 이르고 강을 따라 내려가면 경치 좋은 마을이 많다. 강을 건너면 큰 들이 있는데 동쪽으로 광주와 경계가 닿았고 남쪽은 영암과 통했다. 기후가 화창하고 물자가 많으며 지역이 넓어서 마을이 별과 같이 깔려 있다. 또 서남쪽은 강과 바다를 통해 물자를 실어 들이는 이익이 있어서 광주와 함께 이름난 고을이라 일컫는다. 나주의 서쪽이 칠산바다이다.”
나주의 역사는 마한에서 시작됩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54개 소국에 속했고, 백제시대에는 발라, 통의라 칭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금성군(금산)이라 칭하다가 903년(효공왕 7)에 나주라 개칭되었고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의 영지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983년(성종 2) 전국 12목 중의 하나로 나주목이 설치되었고, 995년(성종 14)에 이르러 병마절도사를 두고 군대의 칭호를 진해군이라 하였으며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잠시 피난 왕도가 되었습니다(1011년 1월 13일~1월 31일까지). 1018년 전국 8목 중 하나로 나주목이 되어 189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57년(세조 2) 병영의 하부조직인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진장인 병마사는 목사가 겸임하였으며 1657년(효종 8) 나주 거진을 전라 우영으로 개편함으로써 우영장을 두어 2군 8현의 군비를 장악하였고, 1895년(고종 32) 5월 갑오경장 후 근대적인 지방행정제도 개혁에 따라 목사와 우영장을 없애고 나주 군수를 두고 나주 관찰부를 설치하였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남평군 일원과 함평군의 적량, 장본. 여황과 광산군 소지면 송록리, 송하리를 편입하였고 1931년 나주면이 나주읍으로 193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였습니다. 1981년 나주읍, 영산포읍이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으나 1986년 금성시를 나주시로 다시 변경하였고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을 통합하였습니다.
나주는 농업이 산업의 근간이었던 삼국시대 때부터 곡창지대로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고, 고려왕조부터 조선왕조까지 약 1,000년 동안 목(牧)으로서 지위를 유지한 전라도의 대표적 고을로,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도 그에 맞는 수준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어 중세 사회를 연구하는데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한 나주는 고려 초기부터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전라도에서는 전주부 다음으로 가장 큰 도시였으므로 나주에는 읍치의 규모에 맞게 관아와 향교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거의 훼철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건물로 남아있던 객사 정청과 내아, 정문 등은 일제강점기 이후 관공서와 관사 등으로 사용되면서 개조되었지만 최근 고증을 거쳐 원형대로 복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