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율곡과 충무공을 통해 들여다본 조선의 처가 상속
임관혁 검사장 (서울동부지방검찰청)
법률신문 기사 등록 : 2023-03-20 06:37
임관혁 서울동부지검장이 이번 호부터 ‘인문학 속의 법’을 연재합니다. 임 검사장이 그동안 수많은 국내의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문학·예술·역사를 탐구해 얻은 지식들을 법률가의 시각으로 풀어낸 글입니다. 인문과 법을 연결하는 독특한 시각과 유려한 필력에 많은 성원을 바랍니다.
[ 약 력 ]
1966년 충남 논산생 /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사시 36회, 연수원 26기 / 법무부 법조인력정책과 검사 / 서울중앙지검 특수1·2부장 /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장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은 한분 한분이 우리나라 역사에 빛나는 별과 같은 존재들이다. 이분들에게 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그건 이들 집안에서는 딸이 부모재산을, 그리고 사위가 처를 통하여 처가 재산을 상속하였다는 것이다.
퇴계 이황(1501~1570)은 20세에 김해 허씨와 결혼하였는데, 부인 허씨가 외동딸로서 친정의 많은 재산을 모두 상속받은 후, 결혼 6년 만에 죽는 바람에 모두 퇴계의 차지가 되었다. 그 재산이 1700석 규모에 달했다니 일약 ‘천석꾼’이 된 것이다.
허씨 집안은 조선 후기처럼 아들이 없다고 하여 양자를 들여 대를 잇지 않고 외동딸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하게 하였고, 그것이 전부 퇴계에게 귀속된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딸과 사위가 제사를 모시게 된다. 오늘날까지 상식처럼 알려진 ‘출가외인(出嫁外人)’이 아니었던 셈이다.
참고로, 퇴계는 29세에 정신질환이 있는 안동 권씨와 재혼하는데,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예안(안동)으로 유배 온 그녀의 아버지 권질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여 부인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
율곡 이이(1536~1584)는 외가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오죽헌은 그 소유자의 집안 성씨가 계속 바뀌었던 사실이 눈에 띈다.
차남 최응현이 아버지 최치운으로부터 오죽헌을 물려받은 이래, ① 최응현의 딸 강릉 최씨가 물려받아 이사온과 결혼하고, ②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용인 이씨가 물려받아 신명화와 결혼하고, ③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 평산 신씨(사임당의 동생)가 물려받아 권화와 결혼하고, ④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권처균이 물려받은 후로는 안동 권씨 집안에서 세습하였다. 그리고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을 거쳐 강릉시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이사온, 신명화, 권화와 이원수처럼 남자가 부인 집에 의탁한다는 의미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 흔했고, 아울러 딸과 사위가 재산을 상속받아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여기서 장인 집에 가서 산다는 의미로 ‘장가든다’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서울 건천동에 살다가 10세에 어머니 초계 변씨의 고향인 충청도 아산으로 이사했다. 할아버지가 평시서 봉사(종8품)로 재직 중 무뢰배들과 어울렸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아버지가 변변한 관직을 얻지 못하였으니, 외가의 형편이 괜찮았다고는 해도 한양에서 계속 살아가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20세인 1565년에 영의정 이준경으로부터 중매가 들어와 혼인을 하게 되는데, 상대는 무과에 급제하여 보성군수까지 지낸 방진의 딸 상주 방씨로 2세 연하였다. 방진의 집안은 온양지역 최고의 부자이고 외동딸이어서 이순신은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되었다.
원래 이순신은 집안 전통에 따라 문과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무관 출신의 장인 방진과 함께 살면서 무과로 진로를 바꾸었다. 방진은 당대에 알아주는 명궁이었으니, 당연히 그로부터 궁술과 병법 등을 전수받게 됐다. 방씨 부인도 조교처럼 이순신의 무예 연습을 옆에서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방진의 활솜씨와 방씨 부인의 지혜로움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이충무공전서』의 「방부인전」에 실려 있다.
“어느 날 방진의 집에 화적(火賊)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왔다. 방진이 화살로 도둑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딸에게 방 안에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나 도둑들이 이미 계집종과 내통해 화살을 몰래 훔쳐 갔으므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 영특한 딸이 베 짜는데 쓰는 대나무 다발을 화살인 양 다락에서 힘껏 내던지며 큰 소리로 ‘아버님, 화살 여기 있습니다.’라고 소리쳤다. 방진의 활 솜씨를 두려워했던 도둑들은 화살이 아직 많이 남은 것으로 알고 곧 놀라서 도망갔다.”
이순신은 이처럼 부유한 처가로부터 든든한 뒷받침을 받으면서 무과를 준비하여 27살이던 1572년 무과에 응시했으나 불행히도 말에서 떨어져 낙방했다가, 4년 뒤인 1576년 비로소 무과에 급제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이순신이 상주 방씨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무과로 돌리지 않고 계속 문과 응시를 고집하였다면, 조선의 운명은 또 어찌 달라졌을지 좀 아찔하다.
전남 해남에는 명품 고택 녹우당이, 완도 보길도에는 세연정, 낙서재, 곡수당과 동천석실 등이 있다. 모두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머물거나, 공부하거나, 풍류를 즐기던 공간이다. 윤선도가 이토록 부유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고조부 윤효정이 당대의 거부인 정호장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그 재산을 모두 물려받고 해남 윤씨 후손들이 이를 대대로 상속했기 때문이다.
윤선도가 이처럼 호화스런 집과 별장 등을 갖추어 놓고 평생 호사를 누렸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는 남인으로 성균관 유생 시절에 권신 이이첨에 대한 탄핵상소를 올리는 등 대쪽 같은 기질로 인하여 3회에 걸쳐 합계 약 15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했으니, 문신 관료로서는 파란과 곡절이 많은 생애였다.
뿐만 아니다. 경주의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모여사는 곳으로 고택과 자연 등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월성 손씨 손소가 양동마을에 사는 류복하의 딸과 결혼하면서 처가에 들어가 살다가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고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여강 이씨인 이번은 손소의 맏딸과 결혼하면서 처가에 들어가 살다가 회재 이언적 등을 낳고 역시 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이처럼 처가살이에 의해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집성촌이 형성된 것이다.
경기도 시흥에는 연꽃으로 유명한 관곡지(官谷池)와 고택이 있는데 이곳 주인인 강희맹이 명나라에 갔다가 희귀한 백련을 구하여 심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집은 강희맹의 양부(養父)가 이숙번의 사위가 되어 물려받은 것을 강희맹이 물려받고 다시 강희맹의 사위 권만형이 물려받은 후로 안동권씨 집안 후손들이 대대로 상속했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조선시대에는 시종 장자상속(長子相續)이 일반적이었을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남녀나 서열에 관계 없이 균분상속(均分相續)을 하였고, 제사도 장자봉사(長子奉祀) 외에 형제자매가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輪廻奉祀), 그리고 딸과 사위에 이어 외손자가 제사를 받드는 외손봉사(外孫奉祀)도 적지 않았다. 장남이든 차남이든 딸이든 제사를 지낼 경우에는 다른 형제자매보다 상속분의 20%를 더 받았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장자 위주의 유교적 예법 질서가 보편화되면서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였고, 윤회봉사 등에서 장자봉사로, 균분상속에서 장자 위주의 상속으로 변화한 것이다. 다만, 서자(庶子)에 대해서는 상속분이 적자의 1/7, 노비의 자식인 얼자(孽子)에 대하여는 1/10에 불과하여 줄곧 차별이 있어 왔다.
조선시대에는 장자상속이 일반적이었다고 알고 있지만,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남녀나
서열에 관계 없이 균분상속을 하였고,
제사도 딸과 사위에 이어
외손자가 지내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장자 위주의 상속은 조선 후기에
유교적 예법 질서가 보편화되면서 정착된 것으로
다시 남녀, 형제서열 등의 구분이 없이
균등하게 상속을 하게 된 건 1990년 민법개정 때부터다.
조선 후기에 정착된 장자 위주의 차별상속이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여 지속되다가, 오늘날과 같이 남녀, 형제서열, 출가여부, 적서 등의 구분이 없이 균등하게 상속을 하게 된 건 1990년 1월 13일 민법이 개정되면서부터다. 다만 배우자에 대하여는 직계비속에 비하여 1/2의 상속분이 더 주어졌다.
오늘날 상속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조선의 상속 제도가 생각나서 짚어본다.
임관혁 검사장 (서울동부지방검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