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일 (토)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말씀 묵상 (로마 5,5-11) (이근상 신부)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로마5,7-11)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믿지도 않으며, 그저 비웃는 바로 죄인의 시간에 그가 우리에게 자신을 증명하기보다 오히려 비웃음의 철저한 내용이 되어버린 사태. 사랑은 산 자가 삶으로 하는 행위일텐데, 도대체 어떤 사랑이 삶을 버리고 죽음으로 사랑한다는 것일까? 죽는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스도 예수의 선택. 그가 선택한 죽음이 바른 길인지는 세월이 갈 수록 더 의문이다. 하지만 그 의문이 깊어질 수록 한가지는 점점 더 분명하다. 그의 길을 일부러 따라갈 수는 도저히 없겠는데, 그가 인간에게 만연한 한 가지 사태에 아주 가까이, 아주 깊게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더 또렷하다. 그가 신에게서 아주 멀리, 인간에게 아주 아주 가까이 다가 왔다는 사실. 죽음을 빼고 도대체 어찌 인간이 인간이 되랴.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가 인간의 삶을 살았다는 말의 반복. 하느님이 죽었다는 말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과 하느님이 결합되었다는 것, 하느님이 하느님됨을 버렸다는 것. 한편이 몰락해버린 화해... 그로써 모든 죽음이 거룩하게 축성되었다는 것. 죽음으로 하느님의 행위에 참여해 버렸으니.
위령의 날, 길. 모든 위령이 간 그 길이 아득하지만, 하느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결합된 길이라 믿는 이에게는 거룩하고 복된 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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