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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묵상글 (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 제자다운 행복 오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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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27 05:15
- 제자다운 행복 오기
오늘 주님께서는 박해의 때에 제자들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려갈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라면 박해를 피할 수 없다는 말씀이고,
제자라면 이런 일들을 피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오히려 각오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뒤집으면 박해 때 내가 박해를 피하거나
박해받는 일이 내게 없다면 나는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아닌 셈입니다.
그러므로 꼭 박해 때가 아니더라도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되길 원한다면
우리도 주님 때문에 임금들이나 사람들 앞에 끌려갈 각오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오히려 주님을 증거 할 기회로 그 상황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상황 반전,
제자의 상황 반전입니다.
제자라면 역경을 순경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역경을 기회로 바꾸는 것,
이것이 진정 주님의 제자답게 상황을 반전시키는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상황이 이래서 어쩔 수 없었어!’라고 하는 것은
참 제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핑계이고 무기력한 자세이며,
어떤 상황에도 자기의 행복과 구원을 일구어가는 적극적인 자세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주님의 제자다운 오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의 가르침대로 ‘행복 오기’와 ‘구원 오기’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라고 하는 오기 말입니다.
가난해도 행복하고 부유해도 행복합니다.
울지라도 행복하고 웃을지라도 행복합니다.
박해받아도 행복하고 평화로워도 행복합니다.
나의 행복과 구원에 조건이 없다는 것이 무조건 행복의 오기이고,
이렇게 반전시키는 것이 제자다운 상황 반전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어제 많은 분이 저의 축일을 축하애주셨는데
제가 일일이 감사의 답장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며,
이렇게 감사 드림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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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한 친구가 쉬는 시간에 지우개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칼로 지우개를 깎아내면서 도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지우개 도장에 사인펜으로 까맣게 칠한 뒤, 자기 공책에 힘껏 누르니 자기 이름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친구들 모두 감탄했습니다. 사실 초등학생인 우리 중에 자기 도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도장이 있으면 마치 어른이 될 것 같았습니다. 친구에게 도장 만드는 법을 배운 뒤, 반 친구 거의 모두가 지우개 도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 생겼지만 처음 만들어 보는 것이라 아주 허접했습니다. 더군다나 실패를 반복해서, 큼지막했던 지우개는 조그마한 지우개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엄청나게 혼났습니다. 쓸데없는 행동을 했다고 말이지요.
도장 파는 곳에 가면 더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비용이야 지우개 도장이 훨씬 싸겠지만, 질적인 면에서 비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의 도장을 직접 만들었다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과 제가 하는 일을 비교해 보았으면 합니다. 일의 결과는 당연히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 뛰어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직접 하길 원하십니다. 일의 결과보다는 그 과정 안에서의 기쁨과 그 부족한 결과도 큰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우리의 적극적인 삶임을 깨닫습니다. 미루는 삶, 포기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박해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임금들과 총독들을 포함한 적대자들뿐이 아닙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박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분명히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스스로 당신의 일을 하시면 어떨까요? 적대자들도 그 힘에 눌려서 꼼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역할을 강조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일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바라보는 바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사랑만을 바라보고 있고, 세상의 일은 욕심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지만, 그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어떤가요? 세상의 일과 충돌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하느님의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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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청렴은 백성을 이끄는 자의 본질적 임무요, 모든 선행의 원천이요, 모든 덕행의 근본이다(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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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담화, 곧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켜줍니다.
먼저, 박해와 박해 가운데에 있게 될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그러나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루카 21,12-15)
박해가 오히려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깨우치십니다. 곧 박해를 당하게 되면,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눌변인 모세의 입과 함께 계셨듯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탈출 4,11-12.15-16). 그러니 박해를 통하여, 오히려 우리는 신앙이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기의 순간은 가장 좋은 기회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8)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보호해주고 지켜주실 것이니,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움 받거나 배척받게 되면 힘들어 합니다. 고난과 시련, 어려움이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힘든 것은 피하고, 편하고 좋고 즐거운 것, 듣기 좋은 말에 더 맞들이고 쉽게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19)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성 베네딕도 역시, ‘인내’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수도규칙 머리말 50)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다.”(필립 3,10;로마 8,17).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루카 21,17)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도 배척도 당신과 함께 받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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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야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부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21,12-15참조).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 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1-12).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소신을 지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10절에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6,15).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 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9).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우리가 지닌 삶의 십자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 안에서 삶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모든 수고와 땀을 그분은 아십니다. 그러니 삶의 여정에서 오는 시련과 고통을 은총의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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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마존에 수건을 주문했습니다. 꼼꼼히 따지지 않고, 덜컥 주문했습니다. 3장이 왔는데 꺼내 보니 너무 컸습니다. 수건이 제 키만 했습니다. 반품할 수 있지만, 잘 모르고 귀찮기도 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다 수건을 반으로 잘랐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았던 수건 3장이 제가 원하던 수건 6장이 되었습니다. 수건에 골이 있어서 잘라도 별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나누어 주셨는데 5,000명이 먹고도 남았다고 했습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2024년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지나온 자리가 나눔과 사랑의 실천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나온 자리가 욕심과 원망으로 채워졌다면 남은 시간이라도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며 보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비를 청하던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싸움의 기술’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이 싸움의 고수에게 싸움의 기술을 배워서 괴롭히는 나쁜 친구에게 더 이상 괴롭힘당하지 않고 싸움에서 이기게 됩니다. 싸움의 고수는 학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많이 맞아봐서 눈썰미가 좋다.” 권투든, 격투기든 한 번도 맞지 않고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맞는 요령도 있어야 하고, 맞고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맷집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에는 나쁜 세균과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이길 수 있는 면역체계가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면역체계가 잘 작동하기에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이겨냅니다. 약한 사람은 면역체계가 잘 작동하지 않아서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쉽게 병에 걸리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감기에 걸렸어도 금세 회복되는데 약한 사람은 감기에 걸리면 오래가고, 합병증으로 고생하기도 합니다.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적당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균형 잡힌 식사가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좋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면역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악의 세력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의 기술’을 알려 주셨습니다. 첫 번째 기술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질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도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물은 유연하기에 그릇의 상태에 담기지, 그릇을 거스르는 경우가 없습니다. 물은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물은 내면에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이 급류를 만나면 큰 바위도 밀쳐낼 수 있습니다. 물의 유연함, 물의 겸허함, 물의 강인함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기술은 ‘겸손’입니다.
두 번째 기술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은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우리가 미사 때 고백하는 ‘신경’은 믿어야 할 교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도 ‘믿음’입니다. 현대사회의 시스템은 ‘믿음’이라는 토대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세 번째 기술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율법 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마음과 오 힘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같은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우리가 겸손, 믿음, 사랑으로 면역체계를 구축한다면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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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삶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그만 아기로 태어나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되고 이제는 중장년을 지나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잠시 돌아보세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이 변했는지요. 추억이 단어들을 잠시 나열해 보겠습니다.
동전 공중전화기, 흑백 텔레비전, 삼륜차, 까치담배, 잔술, 포장마차, 연탄, 시발택시, 이주일, 라면땅, 단발령, 무궁화호, 고무신, 학력고사….
수많은 것들이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비슷한 것은 다시 나타나겠지만 그 시절 그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은 변합니다. 우리 자신도 이렇게 변해왔습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변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간부터 지금까지 주님의 말씀은 변한적이 없습니다. 특히 사랑에 관한 말씀, 용서에 관한 말씀과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은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때문에 누군가의 미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내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인내로써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 말씀은 우리 선조들의 시대 그리고 그 이전 사도들의 시대에도 있었던 말씀입니다. 인내로써, 즉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용서하는 모습으로 하느님을 알리고 증언한 사람들이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갔음을 교회는 고백합니다.
변하는 것은 흘러가도록 두고 추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늘 우리 가슴에 새겨져 있기를 희망합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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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만에 20년 젊어지는 방법
1979년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엘렌 랭어교수는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대상은 70대 후반에서 80대 초반 남성으로 정했습니다.
실험 규칙은 이렇게 정했습니다.
1. 20년 전인 1959년이 마치 현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것.
2. 청소, 빨래, 설거지 등의 집안일을 직접 할 것.
실험 대상자들에게는 매일 밤 1959년에 개봉한 영화와 뉴스가 방영되었고 느리지만 청소와 빨래 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색하지만 점차 현재가 진짜 1959년처럼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후, 검사해보니 놀랍게도 시력, 청력, 기억력, 지능, 악력 등의 신체 나이가 50대 수준으로 향상되었습니다.
교수는 실험의 결론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음을 젊은 시절로 되돌리면 신체도 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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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영적 승리의 삶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
만추가 아니라 초겨울입니다. 11월7일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이 지났고, 11월22일 소설도 지났는데 여전한 단풍이라 만추인줄 알았는데 지난밤 소리없이 첫눈이 내렸습니다. 전쟁으로 점철된 세상에 평화로운 세상 살라고 온누리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오래전 첫눈 내릴 때 쓴 “님의 편지”란 시가 생각납니다.
“계속 쏟아지는
흰 눈발들
님 보내시는
천상 편지
하얀 그리움
가득 담겨 있는
님의 편지
잔잔히 물결치는 마음
글씨
보이지 않아도
다 알아 보겠네.”<2001.1.28.>
누구나 꿈꾸고 희구하는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희눈 덮인 온 세상, 모두가 원래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여 평화로운 세상을 살라는 교훈을 줍니다. 이렇게 눈이 온 날은 모든 안팎의 전쟁도 멈추고 하느님의 사랑을 관상하며 지내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치열히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세계나 국내 상황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흡사 치열한 내전상태를 방불케하는 국내 현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좌우의 대결이기 보다는 상식과 비상식, 정의와 불의의 대결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평화를 추구하나 역설적으로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인간 무지의 적나라한 표현이 전쟁이 아닌가 싶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 모토가 되는 성구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의 전사로 궁극의 승리를 상징하는 분입니다. 오늘 말씀 역시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God,s final victory)가 그 핵심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운동회 시절, 청군-백군이 치열히 싸울 때 “브이아시티오알와’(VICTORY) 응원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전쟁의 현실을 피할 수 없습니다. 평화를 희구하나 엄연한 전쟁의 현실입니다.
참으로 불멸의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영적전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늘 강조해온, 죽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강조해야할 영적전쟁입니다. 수도자는 물론이고 믿는 모든 이가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그날까지 끝까지 싸워야 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인 우리들입니다.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 바로 평생 주님의 전사는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박해 상황은 그대로 영적전투 치열한 현실을 상징한다 싶습니다. 복음과 같은 박해상황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 맞게 이해하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떤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겠다.”
영적전투중 최고의 배경이 되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모든 기회를 깨어 지혜롭게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증언할 기회로 삼을 수도 있고, 겸손과 비움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대로 당하면 치명적 상처로 남을 수 있지만 이런 증언이나 겸손, 비움의 계기로 삼는다면 영적성장으로 이어져 노련한 주님의 전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초연한 자유를 주기도 할 것입니다. 옛 어른의 지혜입니다.
“인생 또한 음악이 그러하듯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가 어우러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라.”<다산>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투에서 패배해도 궁극의 전쟁에서 이기면 됩니다. 일승일패 병가상사(一勝一敗 兵家常事)라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는 것은 병가에서 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함으로 영적전투에 임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좋은 영적탄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니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오니 즐거움은 괴로움의 씨앗이다.”<다산의 여유당전서>
새삼 즐거움과 괴로움은 하나의 실재이자 삶의 리듬임을 깨닫습니다. 역시 전쟁과 평화역시 하나의 실재이자 삶의 리듬이요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며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제 지론중 하나는 유혹에 빠져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며, 태풍은 즉시 미풍으로 전환시키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은총이자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그 누구도 삶의 중심인 주님께 깊이 뿌리내린 영혼은 추호도 다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에서 순교의 죽음까지 가능했음을 봅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인내입니다. 영적전쟁에서 인내하는 자가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인내의 믿음, 인내의 정주요 유불리의 모든 상황을 겸손과 비움의 계기로 삼는 자가 인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에 희망을 둔 자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인내의 믿음은 하느님의 승리에 대한 희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고는 인내의 믿음도 얼마 못가 무너져 내립니다.
희망도, 인내의 믿음 역시 훈련입니다. 부단한 훈련을 통한 습과화로 알게 모르게 희망을, 인내의 믿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단한 노력의 훈련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바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은 제1독서 묵시록이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갈대 바다를 건넌 뒤에 모세가 이집트인들에게서 구원된 백성을 대신하여 감사노래를 부르는 것처럼(탈출15), 짐승을 눌러 이긴 신도들도 ‘유리바다’에 서서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노래합니다. 이는 바로 ‘어린양의 노래’이니 우리의 승리가 어린양이 거둔 승리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묵시록 15장 3-4절,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는 우리 가톨릭교회가 매주 금요일 저녁성무일도시 바치는 찬미감사가입니다. 어린양이신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의 훈련과 습관이 우리의 희망과 인내의 믿음을 키우면서 영적승리를 담보하는 최상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이 우리 모두의 영적승리의 대한 희망과 인내의 믿음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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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렇지 않으니>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3)
어둠에
덮이지 않으니
빛이다
배신에
물들지 않으니
믿음이다
절망에
시들지 않으니
희망이다
탐욕에
먹히지 않으니
사랑이다
허위에
묻히지 않으니
진리이다
압제에
굴하지 않으니
자유이다
저주에
맞서지 않으니
축복이다
군림에
밟히지 않으니
섬김이다
폭력에
겁내지 않으니
평화다
죽임에
죽지 않으니
살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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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당신의 순교지들을 안심시켜 주시는 그리스도
죽음은 영혼에 오거나 육신에 옵니다. 영혼은 죽을 수 없지만 그런데도 죽을 수 있습니다. 영혼이 죽을수 없는 까닭은 그 의식이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하느님을 잃으면, 죽을 수 있습니다. 영혼이 육신의 생명이듯이 하느님은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명인 영혼이 육신을 버리면 육신이 죽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영혼을 버리시면 그 영혼은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절대 그 영혼을 버리지 않으시도록 하려면 하느님을 위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따라서 그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그래도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남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순교자들을 안심시켜 주십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주님께서 보장해 주시는데 어떻게 온전한 육신을 보존하지 못할까봐 불안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30-31; 루카 12,7).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진리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약한 마음들이여, 무엇을 주저합니까?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엑카르트는 “높임을 받는 것” 혹은 “윗자리에 올라앉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는 데 본 설교를 할애한다. 그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주인의 초대는 하느님이 각 사람을 초대한 것을 의미하고, “윗자리에 올라앉는 것”은 하느님께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엑카르트의 사유에서 ‘더 높은”이라는 말은 ‘더 깊은’ 내지는 더 충분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위쪽은 안쪽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신성 안으로 더 충분히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위쪽으로 오르시지요”라는 말은 하느님이 영혼에게 하는 말이다. (286)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9절: 인노첸시오 3세부터 보니파시오 8세까지의 교황직
인노첸시오 3세:
그러나 인노첸시오는 유럽의 국가 건설에 대한 고유한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세속적인 것에 대한 성직의 우위에 상응하여 교황의 지도 아래 있는 더 높은 질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서구의 그리스도교 민족들에 대한 교황의 상급 봉건 통치 이념은, 중세의 봉건사상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직자 정치의 설립은 아니었다. 교황이 우두머리인 그리스도교계는 국가는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본연의 사회는 아니고, 당시의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교황권의 시대 조건적인 관계”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교황의 지도권 요구가 간접적인 성격만을 띠고 있었던 한에서, 이 질서의 일치 안에서 세속 지배l들의 주권을 결코 배척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최고의 규범과 교황직의 도덕적 권위의 인정만을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이원론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인노첸시오는 교황의 최고 봉건 통치룰 완성하는 데 조직적으로 임하였다. 논쟁거리였던 시철리아가 그 시작이었다. 이미 1198년에 여황제 콘스탄츠는 교황의 봉건 통치권을 인정하였다. 그후 영국, 아라곤, 포르투갈, 덴마크, 폴란드, 보해미아, 헝가리, 달마치야, 그밖의 작은 영토틀도 자신들의 국토를 교황으로부터 봉토로 받았다. 이로써 옛 황제의 임무이던 법과 평화의 유지가 교횡권으로 옮아갔고, 또한 완전히 강력한 도덕적 권위에 근거를 둔 교황에 대한 복종제도가 탄생하였다.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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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2.13)
잘 알려진 것처럼 열심한 힌두교 신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그리스도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특히 신약성경의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간디는 “예수께서 설한 산상수훈은 종교 중의 종교다. 모든 종교의 다이아몬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로 나아가는 길이며, 이 땅에서 하느님 앞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취해야 할 삶의 자세와 태도를 여덟 가지 말씀으로 집약했었습니다. 그런데 여덟 가지 참 복을 말씀하시면서 ‘의로움(=히브리어로 ‘체다카’로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다’란 뜻)을 두 번 반복해서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덟 번째 복에서는,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면,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5, 10~11)하고 부언하셨습니다. 결국 박해와 의로움은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박해와 의로움은 서로 꼭 들어맞기 때문인데 그 근저는 바로 사랑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박해의 고통이 우리를 순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에서 기인한 사랑이 박해로 인한 순교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이고,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의로움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받으면 행복한 까닭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선포하고 증거했습니다. 이 역설적인 행복의 신비를 이미 욥을 통해 알려졌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욥은 인간적인 측면에서나 현실적인 관점에서도 분명 불행했지만, 신앙적으로나 영적으로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전제하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예전이나 현재도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삶과 신앙의 여정에선 필연적으로 시련과 박해를 만나게 됩니다. 다만 ‘이미’와 ‘아직’의 시차가 있을 뿐, 우리 모두에게는 여러 가지 박해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박해의 때는 지나가게 마련이고, 그 박해의 때가 바로 진정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신앙을 증거할 때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21,12.13) 그 시련의 때가 생명을 위한 인내의 때이기에,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21,19)하고 격려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누구도 박해의 때가 아니면 자기 신앙의 깊이와 높이를 알 수가 없으며, 이런 환난을 맞아 비로소 신앙인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에 의거해서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박해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은총도 아니며, 더욱 순교란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받은 은총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위기危機는 글자 그대로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이며, 위기는 칼의 양날처럼 위험의 순간이지만 동시에 기회의 순간입니다.
그러기에 위험의 순간,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0,28)하고 위로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받고”(21,15) 주님을 증거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자신들의 순교를 통해 주님을 증거하신 분들이 바로 우리의 자랑스런 순교 선열들이십니다. 순교는 애덕의 절정이며 신앙고백의 정점입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겪은 박해와 순교의 때를 맞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때론 회유를 거부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고 하느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5,3~4)라고 말씀하셨고, 히브리서에서는 “여러분은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훈육하시어 우리가 당신의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12,7.10) 시련과 환난의 때를 맞아 주어진 모든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견디어 이겨내면 언제가 시련의 때는 마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사라지고 마침내 생명의 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는 영광의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해와 시련의 때일수록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 달려 나갑시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12,12~13)라는 권고에 힘입어 굳건히 신앙을 간직하며 살아갑시다. “주님,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 앞에 닥친 모든 시련과 환난을 믿음으로 이겨내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광주 수도원으로 귀원 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습니다. 잘 적응하고 있으며, 오늘은 형제들과 함께 김장김치를 담갔습니다. 조금 피곤했지만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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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잊을만한 그 많은 일들을 /
박윤식 [big-llight] 2024-11-26 ㅣNo.177958
하느님 자녀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어떤 의미에서는 먼저 세상을 거꾸로 산다는 뜻이 포함될 수도. 그런 관점에서 하느님 말씀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게 바로 박해와 순교이다. 사실 교회는 어떠한 순간에도 그것이 무서워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이를 하느님의 선물이요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디서든지 하느님 증언을 할 좋은 기회이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반대의 것을 추구하기에, 때로는 오해와 비방과 미움도 산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은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끌려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받고 하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믿음의 신앙이 강한 많은 이들은 목숨을 바쳐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그들이 증언한 그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오랜 교회의 역사가 잘 증언한다. 이렇게 교회는 이런 순교자들의 피를 통한 숭고한 증언들을 바탕으로 자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마지막 순간에도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적인 보호를 기대하거나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그건 지금 이 고통을 결국은 하늘 나라에서 보상받고, 머리카락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알기에. 믿다보면 가끔 노심초사, 근심 등이 두루 쌓일 게다.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다보면 세상살이와의 괴리에 종종 걱정도 오해도 사고 부득이 변명도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신 이름 때문에 미움 받고 심지어 박해 받더라도 걱정하지 말라신다. 그저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란다. ‘때가 오면’ 당신께서 적대자에게 맞서거나 반박할 언변과 지혜를 주시겠단다. 바오로 사도도 감옥에서도 이 점을 권고한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에든 감사하고 기도로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아뢰십시오.” 그의 이 기쁨은 오직 예수님께만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옴을 일깨운다.
그래서 거듭거듭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란다. 주님 안에서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감사하는 마음이라면, 하느님께서 우리 소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들어 주신다나. 예수님께서도 이 인내를 동반한 그 기구한 기다림을 정말 정확하게 언급하셨다. “부모와 형제,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이에게 미움 받을 게다. 그러나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는다. 너희는 인내로 생명을 얻어라.”
사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진면목이 확실히 드러난다. 그 순간 그 사람이 평소에 생각하고 추구하던 가치가 어떤 것인지 드러나고 그가 하느님 사람인지 세상 사람인지 여러모로 들추어진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박해의 그 순간에도 세상의 헛된 인연이나, 재물이나 무기에 의지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이, 우리를 지키려는 무한한 힘의 원동력이니까.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하면 감사드릴 수 있는 영광을 누리는 참 기쁨을 얻을 게다. 잊어버림으로 새로움을 만나자. 잊어도 좋을 그 많은 것을 하느님께 남겨두자. 박해가 주어져도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하느님께서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게 하실 것이기에. 때가 오면 그분께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반박할 수 있는 언변과 지혜를 주시리라. 그러니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면서 세속의 어떠한 불만도 죄다 잊도록 하자. 교회의 한 해가 서서히 저무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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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나중에 실제로 행하게 될 일을 예언하십니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2-13)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도행전에서 글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5,32; 26,22 참조).
사도들은 임금이나 총독 앞에 잡혀가지만, 그것을 기회 삼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며 복음을 선포합니다.
박해는 복음 선포의 위기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 위기를 통하여 복음은 더 분명하고 더 멀리 선포됩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은 위기를 ‘통하여’ 실현되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위기에 ‘그럼에도’ 주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위기가 기회가 되어 주님의 말씀이 실현됩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위협하는 박해가 있습니다.
낙태, 안락사, 배아 복제 등 생명권에 대한 교회 입장에 대한 경멸과, 정결, 순명, 포기와 같은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대한 냉소, 그리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물신주의적 비웃음 등 교회가 부딪치게 되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위기는 진리를 증언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루카의 신학대로라면, 이러한 위기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위기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이 퍼져 나갑니다. 이러한 박해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믿음을 증명하며, 세상에 복음을 증언할 기회가 됩니다.
세상의 반대에 낙담하고 좌절하기보다 이 반대가 복음을 선포할 기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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