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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트 토라
어울리지 않는 휴일
여기 뭔가 어긋난 점이 있습니다
유대교 명절들에는 분명 깔끔하고 직관적인 순서가 있습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 한 가지 수수께끼 같은 명절은 마치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로쉬 하샤나와 욤 키푸르는 엄밀히 말해 명절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명절들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명절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유월절, 샤부오트, 수코트.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세 가지 반입니다. 쉐미니 아쩨렛과 심하트 토라까지 포함한다면 말이죠.
하지만 이를 별도의 명절로 간주해야 할까요? 바로 그게 문제이자 역설입니다. 한편으로는 수코트의 여덟 번째 날일 뿐이라서 ‘쉐미니’(‘여덟 번째’라는 뜻)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고유한 이름과 의식을 갖춘 거대하고 중요한 축제이기도 합니다. 그 중요성과 규모가 워낙 커서, 유대인들은 다른 어떤 축제보다도 이 축제를 가장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우리는 이날 심하트 토라(Simchat Torah)도 기념합니다. 이스라엘 밖에서는 쉐미니 아쩨렛(Shemini Atzeret) 둘째 날에, -이스라엘에서는 하루만 기념합니다.- 심하트 토라는 토라 낭독의 연간 주기를 마치고 “태초에…”라는 구절부터 다시 시작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토라 두루마리를 꺼내 들고 그와 함께 춤을 춥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꽤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수코트 명절이나, 여전히 수수께끼에 싸인 쉐미니 아쩨렛과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토라를 기념하는 일은 우리가 토라를 받은 날인 샤부오트에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책을 들고 춤을 추는 문화를 여러분은 몇 개나 알고 계십니까?
이처럼 어울리지 않는 이 축제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이것이 사실 욤 키푸르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욤 키푸르는 모쉐가 두 번째 석판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온 날이었습니다.
첫 번째 석판은 신의 진노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었죠. 모쉐는 모든 사람이 들은 우상 숭배를 금하는 명령을 기록한 이 석판을 들고 있었는데, 백성들은 황금 송아지 주위를 맴돌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쉐는 그 석판을 부숴버렸습니다.
이제 80일이 더 지나고 새로운 석판이 주어지자,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셨음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쉐미니 아쩨렛에는 그 두 번째 석판을 받은 것을 기념합니다. 하지만 왜 그때일까요? 왜 욤 키푸르 직후가 아닌 걸까요? 왜 그 사이에 수코트가 끼어 있어야 할까요?
그리고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토라를 어느 날에 기념하시겠습니까? 번개와 천둥,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고 경외감과 경이로움이 가득했던, 토라가 처음 주어진 그날을 기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대체 석판이 도착한 날을 기념하시겠습니까?
땅을 경작하기
표면 아래를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명절들의 순서에 대해 더 잘 이해해야 합니다. 더 깊고 풍요로운 이해를 말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순서가 아주 타당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토라에서는 유월절을 “봄 달에” 지내는 명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명절이긴 하지만, 토라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봄은 만물이 싹트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가축 사료용 작물을 제외하면 아직 수확할 준비가 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 싹트는 것들 중에서 무엇이 자라날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50일 후에는 토라에서 “수확 축제”라고 부르는 샤부오트가 찾아옵니다. 이제 밀은 베어 묶여 있지만, 아직 밭에 남겨져 수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토라는 이때가 축하할 때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장과 고된 노동이 이어진 여름이 지나면 토라에서 “수확 축제”라고 부르는 수코트가 찾아옵니다. 모든 곡식은 창고에 저장되었고, 나무의 열매도 모두 수확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토라는 수코트에 세 번이나 축하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는 특정 상황에 국한된 의미입니다. 토라는 모든 장소, 시대,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보편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수확이라는 주제는 더 깊은 의미를 지니며,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또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수확철의 의미는 사실 모든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 내재된 의미를 반영한 것에 불과합니다.
더 깊은 의미는 하나님께서 농부이시며, 토라와 그 미쯔바들은 그분의 씨앗과 작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유대 민족—는 땅입니다.
결국 토라는 음식에 비유되는데, 단지 마음과 정신으로 소화·흡수된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미쯔바는 과일에 비유되는데, 바로 그 모든 배움과 소화·흡수 과정을 통해 맺어진 열매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갈망의 땅”이라 불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토라를 심으시고, 그곳에서 미쯔바들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시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가꾸기
우리가 이집트를 떠났을 때, 토라와 미쯔바를 심고 싹 틔우는 과정에서 세 단계를 거쳤는데, 각 단계는 모두 딱 알맞은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세상의 계절은 오직 하늘의 계절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계절은 우리가 이집트를 떠났던 그 해, 이 물질계에서 실제로 펼쳐졌던 것입니다.
먼저 유월절이 찾아왔고, 우리는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말 대담한 행동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하나님과 그분의 종 모쉐를 믿고, 그저 이집트를 나와 사막으로 걸어 나간 것이었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무언가가 싹트고 있구나!” 하지만 그저 싹이 트기 시작한 것뿐입니다. 땅은 비옥하고, 떠날 준비가 된 백성이 여기 있지만, 그들에게 정확히 무엇이 요구되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유월절은 순수한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인 단순함과 하나 되심 그 자체이시며, 오직 순수한 믿음만이 그분과 교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만 동시에 매우 위태롭기도 합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도둑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가 침입 절도를 저지르려 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하죠. 믿음은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지만, 그 토양에서 무엇이 자라날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샤부오트, 즉 하나님의 첫 수확의 계절이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는 시나이 산에 서서 열정적으로 외칩니다. “네! 우리는 주님의 모든 미쯔바를 지키겠습니다! 주님의 모든 토라를 배우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 되고 싶습니다!”
정말 설레는 순간입니다. 그 신실한 땅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열매는 아직 밭에 남아 있어, 집으로 가져오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코트(Sukkot)의 단계입니다. 수코트는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규칙을 내면화했고, 그것을 결실 있는 행동으로 싹 틔웠으며, 이제 토라가 정한 초막 안에 앉아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이 미쯔바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샴페인을 터뜨려라! 수확이 끝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우리는 토라를 받았지만, 그 후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정말 큰 실수였죠. 황금 송아지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하나님께서 “나는 주, 너희의 하느님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어김없이 또 다른 신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십계명이 새겨진 그 돌판들은, 우리가 이집트를 떠날 때 보였던 믿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풍성한 곡식 단들이 가득했던 그 들판은 순식간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현실 세계는 이상적인 세계와 맞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는 대개 그렇듯이 일이 진행되었을 뿐입니다. 이곳은 사람들이 실수를 저지르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명절의 순서도 이 세상에 맞지 않습니다.
단, 한 층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를 단순히 이상화된 수확의 과정으로 보는 대신,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바라보세요. 이는 우리가 토라를 흡수하고 그 대가로 열매를 거두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토라와, 나아가 토라를 주신 분과 융합하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는 어떤 이상적인 세계도 이룰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세계가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실패 덕분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궁극의 유대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들은 하나처럼 행동하고, 하나처럼 말하며, 심지어 하나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갈라놓아 보지 않고서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라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이별을 겪더라도 결국 다시 하나로 합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내면에서는 여전히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황금 송아지 사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고 우리가 합의하고 받아들였던 모든 것에서 스스로를 단절시켰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또한 당신의 백성과 결코 이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속죄일(욤 키푸르)에 우리는 다시 하나로 재결합했습니다.
자신의 뿌리로 돌아오는 모든 유대인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마이모니데스는 왜 비틀거리며 진흙탕에 빠졌다가 스스로 일어서서 돌아온 사람이 가장 순수하고 흠 없는 영혼보다 하나님께 더 소중히 여겨지는지 설명하고자 할 때,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죄의 맛을 경험했고, 그로부터 떠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가 단순히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더 애쓰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더 열심히 일한 대가로 그는 확실히 큰 급여 인상과 승진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순수하고 무고한 이들의 유대는 결코 확실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유혹에 빠진다면 어떨까요? 만약 이 영혼도 넘어진다면 어떨까요?
그러나 “죄를 맛보고 그로부터 떠난” 자, 바로 그 영혼이야말로 가장 탄탄한 유대를 보여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실패를 통해 가장 위대한 성공을 이루십니다.
따라서 명절들을 완벽한 결혼의 융합 과정으로 본다면, 쉐미니 아쩨렛은 그 유대감의 궁극적인 단계입니다. 위대한 카발리스트 이쯔학 루리아 랍비는 ‘아쩨렛’이 “흡수”를 의미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날은 그 이전의 모든 성스러운 날들이 지닌 에너지와 빛이 유대인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온전히 스며드는 날입니다. 이 날 우리는 서로와, 토라와, 그리고 하나님과 맺은, 이성을 초월하고 뗄 수 없는, 마치 핵융합과도 같은 유대감을 기념합니다.
그 유대감은 너무나 강렬하여, 두루마리 속 내용을 직접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좋아하거나 이해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토라 두루마리를 들어 올리고, 입맞추며, 미친 듯이 춤을 춥니다.
이사야 호로비츠 랍비는 그의 고전 저서 『슈네이 루호트 하브리트』(샬로)에서, 우리가 그 시기에 읽는 파라샤에는 모든 명절과 일 년 중 각 시기의 사건들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다고 기록합니다. 쉐미니 아쩨렛(그리고 심하트 토라) 시기에는 토라의 마지막 파라샤를 읽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날의 본질을 요약해 주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심하트 토라 때 우리가 자주 부르는, 매우 유명한 구절입니다. “모쉐가 우리에게 명령한 토라는 야아콥의 공동체의 유산이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고전 주석가 라시는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굳게 붙들고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글쎄요, 그 말을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그보다 더 깊습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굳게 붙잡는다’는 것이 유산과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붙잡다’라는 단어는 영어와 마찬가지로 부동산 소유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성경 법에 따르면 모든 시민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토지와 시민은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설령 자신의 재산을 팔았다 하더라도, 50년에 한 번 찾아오는 희년에는 그 재산이 다시 당신에게 돌아왔습니다. 당신에게 돌아오지 않더라도 자녀나 손자, 혹은 당신의 상속인으로 지정된 사람에게 돌아갔습니다.
라시는 토라가 바로 그런 종류의 유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설령 여러분의 부모—그리고 그 부모들까지—가 어떤 이유로든 토라에서 멀어졌다고 해도, 여러분은 여전히 토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모든 열쇠가 딸린 온전한 유산을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토라는 결코 떠나지 않았습니다.
라시가 이어 말하듯이, “우리는 그것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 유대감은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토라와 하나이고, 토라를 주신 분과 하나이며, 서로와 하나입니다. 영원히.
자, 이제 노래하고 춤추도록 합시다.
By Tzvi Freeman (the author of Bringing Heaven Down to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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