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달려서 장흥읍에 닿은 시간은 12시 20분 경이었다. 예정보다 50여 분이나 늦었다. 본래는 환영식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는 것이었지만, 너무 늦어져서 먼저 점심을 먹고 나서 환영 행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하였다.
곧장 식당으로 안내가 되어서 들어간 곳은 '명희네 장흥 삽합집'이었다. 이곳 장흥 장터에는 이런 정육점 식당이 20여 곳이나 된다고 한다. 이곳에 이런 정육점 식당이 자리 잡게 된 것은 이 고장에서만 생산이 되는 한우가 그 주인공이기 때문이었다. 이 고장 장흥에서는 인구 4만2000여 명이 5만 여 마리의 소를 기르고 있어서 인구보다 소의 마릿수가 더 많은 고장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 한우가 군청과 농업센터 등에서 조작적으로 지도 육성하는 친환경 사육으로 전국에서 1등급 소의 생산율이 가장 높은 고장이기 때문이란다.
이런 1등급 소를 생산하게 된 것은 이 고장 장흥에서는 소의 사료의 약 80% 이상을 사료작물로 가꾼 사료작물인 호밀 등을 심어서 해결하기 때문에 다른 고장의 한우와는 우선 사료부터 다르다고 한다. 이렇게 풀을 먹고 자란 한우이기에 늘 1등급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런 한우를 도살하여 직송하여 온 고기를 부위별로 포장한 정육점에서 자신이 먹고 싶은 부위를 골라서 사 가지고 식당에 들어가면 채소 양념값만 내고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다. 이런 정육점 식당이 전국 곳곳에 있지만, 이렇게 직접 고장에서 기른 소를 도살하여서 이곳에서만 소비하는 식당은 정직하고 신선함이 보장되기에 늘 많은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본래 이 고장의 맛은 '장흥삼합'이다. 장흥에서 생산되는 식품재료로 만든 것으로 장흥삼합(장흥한우+ 키조개 + 표고버섯)인데 우리는 이 집에서 색다른 이 고장의 생산품인 바지락을 먹게 되었다. 여자만 또는 득량만이라 불리는 이 장흥과 고흥반도 사이의 바다는 세계해양기구에서 인정하는 청정바다라서 이 고장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은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이지만, 우리들이 이 청정바다의 바지락회 무침을 먹게 된 것이다. TV 프로그램 '1박 2일'에서도 소개된 적 있는 꽤나 유명한 집이었다.
우리의 식사는 한우불고기가 아니라 바지락 회무침으로 준비가 되었다. 바지락과 새조개가 함께 섞여서 씹히는 맛이 있고, 푸짐한 바지락 회는 4명이 다 먹을 수 없을만큼 수북하게 내어 나왔다. 물론 우리들의 상에 나온 음식이나 반찬이 모두 다 남도 음식답게 푸짐하고 종류도 다양하면서 맛도 좋았다. 모두들 "역시 남도 음식이야!"를 연발하면서 밥그릇을 싹싹 비워내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곳 장흥이 낯선 고장은 아니다. 아니 어쩜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대한제국시대에 오위장(五衛長)을 지내시던 고조부님께서 신식군대를 만들면서 구식군대를 해산하자 직위를 잃고 계시다가 신식군대와의 차별 때문에 일어난 '임오군란' 때에 구식군대의 대표이자 지휘자 이었던 분으로 자연스럽게 참여하였다. 고조부님은 대원군에게 직소를 하는 등 구식군대의 주장을 대신전하는 역할을 하다가 결국은 일본영사관을 공격한 주동자로 몰려서 기는 신세가 되셨고, 한양에서 숨어 지낼 수가 없어지시자 태어난 지 100일도 지나지 않은 할아버지를 품에 안고 멀리 정남진까지 엄동설한 정초의 길을 걸어서 피신을 하셨던 고장이다.
이때가 1884년 1월 초이었다. 이렇게 이곳에 정착하신 지 15년째인 1900년에 일본군의 밀정은 결국 고조할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고변을 하게 되었고, 일본군에게 끌려가신 고조부님(절충장군 오위장)과 증조부님(통훈사헌부 감찰)은 목숨을 잃으셨고, 18세의 할아버지께서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움집을 짓고 산을 개간하여서 부를 이루시었던 곳이다.
그러나 이 고장에서 동학운동의 최후 저항자들이 처형을 당하는 모습을 본 할아버지께서는 이곳이 살기 어려운 고장이라고 생각하여서 보성으로 식솔을 이끌고 떠나시고 말았으니 이 고장으로 피신을 하신 지 50여년 만이었다.
그후 내가 보성에서 태어났고, 자라서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약 4년 간 이 고장 유치면 송정리 공수평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모가와 이모가가 관산, 용산, 부신면에 사셨기에 자주 다니러 오기도 하였었다.
이런 인연으로 장흥은 낯설지 않은 곳이지만, 이번 여행지는 내가 가 보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실로 30여 년만 '1979년 경기도 전입으로 전남을 떠남'에 찾아온 셈이니 이제는 아주 낯설기만 하였다. 그래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옛 지명은 알만하고 옛 흔적을 보면 반갑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