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침묵
세월 따라 얼룩진 내 모습이 깨어진 달빛처럼 주름과 흰머리가 표상이 되었고, 지난시간 함께한 정든 공간은 은하수 물결 따라 속절없이 사라져갔다.
추억은 퇴색 됐고, 기억은 가물 하다 쇠퇴해 가는 생물학적 노쇠는 희망에 부푼 가슴을 도려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런 현상이 노인에게는 소리 없는 통곡이요, 가슴에 메아리치는 설음이며 석양의 눈물처럼 애달픔이 되었다.
노인에 이르게 되면 애잔함에 지쳐 눈은 침침하고 그리운 목소리에 사무쳐서 청각은 기운을 잃어가게 된다.
치아도 흔들거리고 밥맛과 입맛을 구별하기 어렵다. 흘러간 시절의 꿀맛이 사라졌다. 그 맛이 간절하게 그립다.
이 모든 현상들은 울부짖는 노인들의 소리 없는 절규였다.
추억은 아련하고 기억은 어두운데 뛰는 심장에 절절함이 묻어나는 생명력, 향기품은 가슴에 절실함이 용솟음치고 미련을 품은 수많은 흔적들, 마음을 달래려 감성 품은 옛 노래로 영혼을 달래본들, 아니 별빛잡고 길을 물어본들 어찌 달빛에 젖은 고향이 떠오르겠는가?
이것들이 허물어진 빈터에 쪼그려 앉은 우리선배 노인들의 구슬픈 목 메임이 아니던가?
황혼의 지평선에는 석양도 애달프고 두견화 피는 언덕에는 그리움도 아득하다.
개천에 버들향기 가슴에 안고 종이배 띄워 노래하던 옛 동무여!
꽃구름 산마루에 아롱거리는 모래 같은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채 어디에서 무엇 하는지?
나의 추억 속에는 어려서 오두막초가 마당에는 잿간에서 싸리문까지 산내끼로 이어놓은 빨랫줄을 장대로 바쳐 널어 논 광목빨래가 바람에 너풀거리며 말라가고, 초가부엌에는 솔가지 나무가 아궁이에서 불타오르며, 살강에는 설거지 마친 그릇들이 엎어져 있었다.
실겅에 올려놓고 아끼고 아껴둔 떡이 곰팡이가 설고, 고구마 퉁가리에서는 버리지 못한 고구마가 썩고 있었다. 못살다 보니 이 모두가 모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규였고 현실이었다.
장독에는 간장독 고추장독 된장독이 널따란 돌 위에 가지런히 올라서 세월을 이겨낸다.
이 수많은 전설들이 도대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삶은 이어가지만 시간은 정지된 듯 보였고 세월은 수많은 이들의 나이를 파먹고 흘러갔지만 이렇게 흘러간 한세상이 꿈길처럼 고달팠다.
내 나이 5~6세의 활동사진은 영롱하다. 일흔 넘은 나의 영혼은 아롱지고 애잔하다. 살만큼 산자가 서글프다는 말에 섭섭할 수도 있지만 황혼의 지평선에 석양도 애달프고 속절없이 흘러간 한세상이 야속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론이 형용사로 얼룩진 기나긴 넋두리이지만
이 나이에 한 많고 구슬픈 사정을 절절히 고백하기란 쉽지 않다. 내키지도 않는다.
달빛에 길을 묻던 물망초 언덕이 절절하듯 애절한 심정을 가눌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렇게 깨어진 달빛 속의 꿈길처럼 늙어가는 처지로 수족이 허락하는 한 경관 따라 심신을 위안코자 역마살을 동경했다.
그제는 신북온천을 부부와 같이 갔었다. 나이 들고 코로나에 우리에게는 이시기 가장 문화생활을 즐기는 유일한 곳이다. 집에서 한 시간 이십분 소요되고 온천욕을 마치면 전곡양평해장국집에서 아점을 하고 전곡 연천 철원방향으로 바람 씌러 달린다.
난 일흔둘 집사람은 육십 대인데 달리는 사차선 도로에는 50키로 30키로 속도 제한이 수시로 있다. 달리는 도로변 주변의 경관을 감상한다. 전곡 연천 철원지역은 군사지역이 많다. 이상야릇한 감정이 뒤섞이고 무채색으로 뒤 덮인 산천은 고요와 적막이다. 철원 고석정 잔도를 걷기로 했다. 이 잔도의 정식명칭은 강원도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 잔도길이다.
포성은 멈추고 70여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군인의 직분을 잊지 말자고 철통 방어 강조한 부대 전면에 굳센 맹서의 글이 힘이 있다. 원한 천리길과 검은 상처가 아롱진 철의 삼각지대 평강군 김화군 철원군을 말한다. 철원군에서는 고석정 부근을 뻐꺽지근 하고 야물차게 개발해서 관광객을 모시고 있다.
한탄강 주상절리 잔도길은 유네스코 세계무화유산지정을 브랜드로 선전한다. 아찔한 계곡협곡을 따라 데크길을 조성하고 소개 했는데 이곳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코스이고 60~70대가 주 관광객인데 편도 3.6km로 교량이 13개 전망쉼터 10곳 입장료는 만원이다. 내가보기에 4계절 풍광 좋고 걷기 운동에는 최적격 같았다.
하늘은 맑고 잔설은 남아있는데 오가는 이들이 즐겁다. 낙엽이 흩어지듯 꿈은 사라졌지만 고이 간직한 부부의 두터운 정을 안고 이 잔도 길을 걷는다. 왕복 7.2km를 완주하고 고석정을 만났는데 30년 전 그곳이 아니었다. 그 시절 덩그런히 정자만 외로이 옛 생각에 잠겼었는데 지금은 천지개벽이 되었다.
세월이 이렇게 변해간다. 흐르는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고 떠가는 구름은 다시 찾기 어렵다. 봄은 다하면 다시 오지만 늙음이 다하면 끝장이란다. 마음은 조석으로 변하고 사는 나이 백년인데 욕망은 천년이다. 우리목숨이 돌이 아니니 일 년의 목숨인들 어찌 기약한단 말인가?
흘러간 한세상이 꿈길처럼 애달픈데
노인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그저 영원히 침묵할 따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