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스님은 중국에서 10년이 넘도록 특별한 스승을 찾지못하다가 12년째 종남산 지상사에 들어가는 행운을 얻었다.
거기에는 당대 최고의 고승 지엄대사가 화엄경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그 스님 밑에서 중국불교의 거성이라 할 만큼 대단한 현수대사와 함께 8년간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신라로 들어와 문무왕의 후원 아래 부석사를 시작으로 전국에 10개의 대 화엄사찰을 건립하였다.
그러니까 의상대사는 신라에 정식으로 화엄사상을 전해 준 화엄종의 초조가 된 셈이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 까지 화엄경 신앙은 그 어떤 경전보다도 승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의상스님은 진골출신이고 원효스님은 육두품출신이다. 진골은 왕족이고 육두품은 귀족이다. 그 바람에 의상은 왕의 비호와 국가의 재정으로 화엄종의 대찰들을 전국에 고루 건립할 수 있었지만 원효는 신라인들이 그렇게 존경했는데도 국가가 세운 사찰은 단 한 군데도 보이지 않는다.
의상스님은 귀국해서 원효스님을 찾은 적이 없다. 한 번씩 화엄의 대찰이 건립되고 성대한 낙성식을 올릴 때마다 수많은 귀족과 대덕스님들을 초청하였어도 원효만은 초청하지를 않았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마는 의상이 지엄대사 문하에서 공부할 때 아주 걸출한 도반 한 명을 사귀었다. 그 도반은 의상보다 18살이나 아래인 법장이라는 일반인이었다. 지엄대사가 죽기 전 이 법장에게 화엄의 법을 전수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고작 26살이었다.
지엄대사는 자타가 공인한 화엄종파의 대 종장이었다.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의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몰려든 눈밝은 제자가 천 명을 넘어갔다고 한다. 그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유독 그의 정법을 이 유발승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때 대중들이 얼마나 놀라고 기가 막혔겠는가. 이것은 꼭 5조 홍인대사가 23살짜리 6조 혜능에게 부처님의 법맥을 비밀리에 전수해 준 것과 같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법장은 스승인 지엄대사가 죽고 난 뒤 대중을 멀리하고 오로지 화엄경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측천무후가 그를 불수기사로 초청하여 80권 화엄경을 강설하게 하였다. 비록 젊고 머리를 깎진 않았지만 그의 해박하고 명쾌한 강설에 무후는 감탄과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정식으로 출가를 하여 화엄경을 펴라면서 황명을 내렸다. 그러면서 직접 법호를 지어 올렸는데 그 이름이 현수다. 현수는 스승과 황후의 염원대로 28살에 정식으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화엄경을 최고의 경전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화엄의 교리를 크게 밝히고 화엄종의 조직적 체계를 이루어 스승 지엄의 맥을 손색없이 이었다. 그 맥은 징관에게 넘겨졌고 다시 규봉에게 전해져 중국 천지에 화엄경의 세계를 찬란하게 꽃피우도록 했다.
그런 현수대사가 고국으로 귀국한 의상대사에게 안부편지를 보냈다. 의상은 감동을 받았고 그의 문하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것은 정말 큰 기쁨이고 영광이었다. 중국 최고의 고승이 신라 유학생이었던 의상에게 직접 안부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정말 예사로운 일이 아닌 매우 특별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영예를 완전히 무색케 만들어 버린 일이 일어났다.
현수가 대승기신론을 보고 하도 좋아서 대승기신론의기 7권과 별기를 썼는데 화엄경의 종장이라서 그런지 기신론의 뜻에는 두루 박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기신론이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부분마다 신라 원효의 해설을 몇 군데나 인용해 풀이를 한 것이다.
이것은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중국에 기라성같은 고성들이 즐비했는데 현수는 유독 중국을 가지 않았던 원효의 저술로 기신론의 매끄럽게 풀리지 않는 부분을 참고서로 보완했던 것이다. 현수가 원효의 저술에 얼마나 큰 감명을 받았는지 확실히 이해가 가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이 현수의 대범한 마음 씀에 원효는 중국에까지 해동보살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 이래로 불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해동의 신라로 1,000여명이나 되는 중국의 스님들이 원효를 찾아 역유학을 오게 만들었던 것이다.
첫댓글 나무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여자로서 스스로 황제에 오른 중국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여황제.
그 무시무시한 측천무후가 감탄했다고 하니 현수 법장대사도 어마무시했나봅니다.^^
그런 분이 신라의 의상대사에게 편지를 보내고 원효대사의 해동소를 인용했다니 그 시절 한반도 불교지성의 토대는 가히 최고 수준.
반짝반짝 눈이 부신 선지식,원효와 의상의 대화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