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가 없어서 몇자적었더니 ,.,,,,,,,,,,,,,, 제길 ㅡㅡ 그래서 올림니다 판단은여러분들꼐서,,
참 그리고 차범근선수는 피파가 선정한 우수선수에 100명에 홍명보 선수는 들어갔는대
차범근선수 못 들어감 10년간 100골도못넣고 어떻게 세계올스타에 들어가는가?
라고 누가 예기햇는대,, 아무리 윙이었다해도 쉐바를 능가하려면 100골은 넘겨야되겟다라는생각이 들어더구요......
첫번쨰의견
우리나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타이자, 박찬호와 박세리 이전에 우리나라가 조또 어디 쳐박혀 있는지 세계가 관심도 없던 시절 세계최정상 스포츠 무대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최초의 한국인...
바로 차범근이다.
그는 79년부터 89년까지 당시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였던 독일 분레스리가에서 308게임의 외국인 최다 출전기록과 98골의 외국인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고, 그 기록들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세계최고 스타들이 모두 세리에 A 무대에서 뛰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최고의 리그는 분데스리가였다.
그의 독일 무대 첫골은 세번째 경기만에 나왔고 그 골은 독일 키커지가 선정하는 골든볼로 선정되어 그 주간내내 독일 TV를 장식했다. 데뷔 첫 해에 세계 최고의 선수들 틈에서 바로 득점 7위에 올라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 분데스리가 MVP에 선정되기도 했고 88년에는 UEFA컵 결승 2차전서 극적인 3번째 골을 성공시켜 팀에 첫우승의 영광을 안겼다.
이를 기념, 명문 '레버쿠젠' 클럽은 당시 차범근의 사진을 영구보존하고 있다. 그는 소속팀을 두번이나 UEFA 정상에 올려놓았으며 그를 계기로 그는 독일뿐 아니라 전 유럽에 유명한 선수가 되었다...
느낌이 잘 안오신다..?
박찬호가 데뷔 첫해부터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뛰어 데뷔하자마자 메이저리그를 통털어 투수부문 7위의 성적을 거두고, 그 다음 해 동양인 최초의 사이영상을 수상하고, 얼마 후 동양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MVP를 먹고, 다저스를 월드시리즈 결승에 두번이나 진출시키고 그때마다 마지막 7차전에서 완벽한 투구로 승리투수가 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라.
그리고는 그가 마운드에 등장하면 관중들이 전부 찬호를 연호하며 박수를 치고,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유니폼이 영구전시되고 도대체 박찬호를 모르는 미국시민이란 없는 그런 상황...
차범근이 한게 바로 그런 것이었다.
레베쿠젠 클럽에서 발간한 책에 그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그는 뛰어난 운동선수다. 그리고 그는 팀의 어느 곳에나 세울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유일한 선수다..." 독일감독이 한 이야기다.
당시 분데스리가에는 차범근말고 또 한명의 동양인이 차범근보다 1년 앞서 진출해 있었는데, 일본의 오쿠데라였다.
당연히 이들은 라이벌이었다. 박찬호와 노모처럼... 차범근은 오쿠데라가 소속된 쾰론과의 경기에서는 언제나 펄펄 날았다. 반면 오쿠데라는 차범근이 독일에 진출한 이후 비실비실 힘을 잃고 주전자리를 잃었다.
독일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축구선수 마테우스... 그는 차범근 전담맨이었다. 허구헌날 차범근을 놓쳐 눈물을 삼키고 좌절하다 절치부심 노력해 오늘의 그 자리에 오른 선수다.
독일로 떠나기전에는 어떠했는가... 70년대 국민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던 노래 중에 이런게 있었다. '떴다 떴다 비행기' 장단에 맞춘 '떴다 떴다 차범근...'
국제대회가 끝나고 나면 어른들 사이에는 '차범근을 인간 문화재로!' 하는 구호가 유행했다.
그가 남긴 전설적인 게임기록... 77년 대통령배 국제축구에서 말레이시아와의 개막전 대결.. 당시는 우리는 경기 종료 7분전까지 4:1로 지고 있었다. 그런데 차범근이 날기 시작, 마지막 5분동안 혼자서 세골을 넣어 4:4로 만드는 우리 축구사에 길이 남을 기적을 연출하였다. 당시 차범근은 범아시아적인 스타로 동남아에 가면 지금도 중년의 택시기사들이 차범근 잘있냐고 물어올 정도란다.
그가 한국에서 독일로 떠나기 전 동대문운동장에서는 <차범근 서독진출 환송경기>가 열렸다. 차범근을 한번이라도 더 보러 3만 관중이 운집했다. 지금은 프로축구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올스타전이 열려도 이만큼 안 모인다...
=>우리는 차범근을 막연하게 '유럽에서 성공한 축구선수'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세계에서 보는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MBC에서 해설하는 차범근을 우린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지만, 해설하는 차범근을 인터뷰하려는
긴 줄의 외국기자들의 눈빛은 경외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다가 "그건 좀 오바다"라고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차범근의 일화 몇몇 말고,
구체적인 자료를 본다면 수긍할겁니다
차범근은 지금의 지단, 베컴, 피구였으며
이 말은 단 한치의 과장도 없는 말 그대로였습니다
우리는 영웅을 기다리지만 이미 우리에겐 영웅이 있었고,
프랑스의 한 시인은 자신의 시집에 차범근에 대한 시를
썼었고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차붐을 낳은 어머니와 그의 조국에 경의를 보낸다'.
외국인 선수로는 유일하게 차범근이 골을 넣으면
전광판엔 '차범근' 세글자가 한글로 번쩍였고 그걸
본 우리 교포들이 눈시울을 적셨다고 합니다
38세의 차범근이 19세 독일의 국가대표선수보다
체력이 월등했다는건 그가 얼마나 자기관리를
철저히 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밑의 글은 퍼온글이며,
98년도 우리의 냄비근성으로
차범근이 감독자리를 박탈당한 그 날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차범근 대신 송혜교라고?'
12월1일 열리는 2002 한일 월드컵 본선 조추첨자 13명이 결정됐다.
그러나 지금 수많은 축구팬들은 어이없는 한국의 조추첨자
결정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축구팬들은 대한축구협회와 월드컵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수많은 항의글을 올리며 조추첨자 결정에 항의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 ▶월드컵 조직위원회 //▶안티축구협회
항의하는 네티즌들이 가장 문제삼고 있는 것은 바로 차범근씨가
조추첨자로 선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이에 맞물려 탤런트 송혜교씨를
비롯해 비축구인들로 조추첨자를 구성한 것이 이들이 항의하는
주된 이유이다.
팬들은 차범근씨가 조추첨자로 결정되지 않은 것은 독일에서
월드컵이 열릴때 마테우스를 빼고 탤런트 한명을 집어 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이없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차범근은 누구인가
= 77년 대통령배 축구대회(박스컵). 말레이지아 전 1:5로 뒤지던 상황.
종료 5분 남겨놓고 3골의 소나기 골.
= 79년 프랑크 푸르트 입단 8월 당시 세계 최고 리그로 불리던
분데스리가 데뷔.데뷔전 상대는 도르트문트. 스타팅으로 75분까지 뜀.
어시스트 기록.
최고권위 축구전문지 'KICKER' 선정..주간 베스트11.
= 세번째 경기 슈투트가르트 전. 헤딩으로 승리결정 골.
KICKER 선정 이주일의 골.
= 네번째 경기 바이에른 뮌헨 전. 그라보스키 어시스트로 선취골.
= 다섯번째 경기 최강호 보루시아MG 전. 한가운데 돌파에 이어 찬 공,
왼쪽 포스트 맞고 골. 선취골. 세경기 연속 골.
이날 KICKER, 처음으로 차붐이라는 단어 씀.
= 9월 강호 함부르크 전. 페차이의 어시스트를 받아 강슛.
그라보스키 센터링, 헤딩 슛. 30M 중거리 슛. 첫 해트트릭 기록.
11월 일본의 오데쿠라가 소속된 쾰른 전. 두 동양인의 대결로
관심 집중.
차범근 선취골, 결승골로 두골 기록. 오쿠데라 헛발질 7번.
차붐 대승. 프랑크 푸르트 3:1로 승리.
= 일간스포츠 톱기사 이때 부터 MBC 차범근 경기 녹화방송 시작.
매주 월요일 밤. 최고 시청률.
= 12월 UEFA 컵 출전. 첫번째 경기 레알 마드리드를 맞아 차,
선취골을 넣었으나 1:1 무승부..
두번째 경기 AC밀란 전.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강슛.
포스트 맞고 튀어나왔으나,골대 5초이상 흔들림. 특종 기사실림.
3:2로 프랑크 푸르트 승리.
= 80년 3월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1차전.
당시 20세의 나이로 '게르만의 혼'이라 불리던 마테우스
(90년 월드컵 MVP), 갈색 폭격기 '차붐' 전담마크 특명.
신문 톱기사.
=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2차전.
역시 마테우스 차붐 전담 마크.
마테우스 속수 무책. 차붐 대활약.
우측사이드 마테우스 여유롭게 제치고 어시스트.
1:0 프랑크푸르트 승리. 차붐, 이날의 선수.
원정팀 득점 우선권으로 프랑크푸르트 창단이후 첫 UEFA컵 우승.
- 경기 후 마테우스 인터뷰
"나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차범근은 현재 세계 최고 공격수다"
= 79~80 시즌 득점 랭킹 7위 랭크. 세계 상승세 베스트 4 선정됨.
세계축구 베스트 11 선정됨. 연봉 독일에서 세번째 액수. 협상 타결.
독일 대표팀 감독 차붐 귀화 추진. 실패(차범근 거절).
81시즌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겔스도프에게 육탄공격 받아
심한 부상...
프랑크푸르트 팬들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프 살해 위협 소동.
경찰 출동.
= 83년 레버쿠젠으로 트레이드.프랑크푸르트 팬들 울음바다.
85~86시즌 분데스리가 MVP 및 득점 4위.86년 한국대표팀 선수로
멕시코 월드컵 출전
= 88년 다시 UEFA컵 출동. 차붐 스페인 에스파뇰을 맞아
극적인 3:3 동점골 터뜨림.5만 관중 기립, 차붐! 환호.
승부차기로 레버쿠젠 역시 팀 창단 이래 처음으로 UEFA컵 우승.
=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출장 최다골 기록 분데스리가
308경기 98골..
차범근 선수가 세운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골 기록은
스위스 출신 사퓌자 선수에 의해 지난 99년에 경신(106골/218경기...
<안티축구협회 홈페이지에서 발췌>
반면에 이번에 조추첨자로 결정된 송혜교 양은 어떠한가.중앙일보에서
조추첨자 송혜교 양을 소개한 글이다.
▶송혜교(19) 탤런트
"지난해 인기드라마 가을동화에서 비련의 여주인공 은서 역을 잘 소화해
단번에 스타가 됐다.대만·홍콩·중국·동남아 등에서도 큰 인기를 얻어
한류(韓流)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송혜교양의 자질문제이다.
그녀가 한 언론과 한 인터뷰 기사중 일부이다.
―추첨자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느낌은?
▲처음에는 이렇게 큰 행사인 줄 몰랐다.국제적인 행사인 것을 알게 된 뒤 깜짝 놀랐다.
축구팬들은 월드컵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탤런트는 추첨자가 되고
아시아 최고의 축구스타는 빠졌다며 개탄하고 있다.
월드컵조직위는 이번 조추첨인사의 선정기준에 대하여..
"한국인의 기상과 불굴의 의지를 나타낸 분,각 분야별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자랑스런 한국인과 축구발전에 크게 기여한 분,
이번 월드컵의 컨셉이 문화월드컵이므로 문화계 인사."라고 밝히고있다
필자가 하고 싶은 얘기는 비축구인들의 자질을 논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뽑혀도 별 문제가 될것은 없다.박영석씨는 8천m급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세계최고의 산악인이고 조훈현씨는 바둑으로 세계를 정복한
사람이 아닌가.
다만 한국인의 기상과 불굴의 의지를 나타내고 축구에 대해서 세계정상에
우뚝 서고 축구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한 차범근씨는
"왜" 조추첨자로 선정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차범근이 한 일에 대해서는 딴지일보에서 기막히게 묘사를 해놓았기에 이를 인용한다.
"느낌이 잘 안오신다..?
박찬호가 데뷔 첫해부터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뛰어 데뷔하자마자 메이저리그를
통털어 투수부문 7위의 성적을 거두고, 그 다음 해 동양인 최초의 사이영상을
수상하고, 얼마 후 동양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MVP를 먹고,
다저스를 월드시리즈 결승에 두번이나 진출시키고 그때마다 마지막 7차전에서
완벽한 투구로 승리투수가 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라.
그리고는 그가 마운드에 등장하면 관중들이 전부 찬호를 연호하며 박수를 치고,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유니폼이 영구전시되고 도대체 박찬호를 모르는
미국시민이란 없는 그런 상황... "
차범근이 한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가.조선일보에서조차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에 선정한 위인이다.1998년 독일 축구역사가협회에서는 20세기최고의 아시아선수로
차범근씨를 선정했다.1999년 축구잡지로는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월트사커지는 차범근씨를 잊을수 없는 100대 스타로 선정했다.
그가 차지했던 분데스리가 MVP 는 지금의 세리에 리그의 MVP나 다를바가 없다.
80년에는 세계축구 베스트 11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인 차범근인 것이다.그가 바로 변변한 홈페이지
하나 없이 매장당해버린 대한민국이 낳고 대한민국이 버린 차범근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국내 축구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내고
가장 위대한 선수인 차범근.
차범근 축구교실의 강태풍군은 한 인터넷까페에 차범근씨의 사진과 함께
이런글을 올려놓았다.
"저 뒤에 망치들고 계시는 저분 저분이 바로 우리 감독님 이시다.우리다칠까봐
망치들고 얼음 깨는 저분. 저분이 바로 세계속의 갈색 폭격기 우리 감독님이시다."
그리고 저기 작은 축구교실에서 아이들이 다칠까봐 묵묵히 얼음을 깨고 있는
허리숙인 저 사람이 바로 우리가 묻어버린 ..
그를 버린 한국축구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차범근인 것이다.
우리를 열광으로 몬 월드컵이 1주년이 되다갑니다... 우리가 1세기 안에 그런일이 다시일어나기는 쉽지는 않을겁니다...월드컵 4강을 보신 지금의 우리는 행운아 인것 같습니다..
그때의 그 함성을 다시 한번 듣고 싶네여....이만 포니여
두번째 (반론)
차범근이 과대포장된 이유는 한국축구의 부진과 삽질에 대한 현실도피의 이유때문
현재 유럽에 나가있는 한국선수들은 모조리 삽질중이니 20여년전에 차범근을 과대포장시켜 자위하고 있다
현재 차빠들의 행태는 예전 일본놈들이 미우라가 브라질리그 베스트11출신이라고 우기는 짓과 완전히 똑같다
(미우라의 브라질리그 베스트11은 브라질의 수많은 리그중의 한 리그에서의 베스트11으로 큰 권위는 없다)
마찬가지로 악질차빠들은 당시 분데스는 세계최고고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서 MVP를 받았다고 우기고 있다
(분데스가 최고리그가 아니란것은 밑에 자세하게 설명해놓았으며 차범근의 MVP는 아벤트포스트지라는 지방마이너지가 뽑은 MVP로 어떠한 권위도 없다.......상식적으로 득점4등 팀6등의 선수에게 MVP를 주는곳이 어디있겠는가?.......분데스리가는 아예 MVP제도자체가 없다)
현재 일본놈들의 미우라개날조행진은 나카타의 유럽에서의 활약으로 많이 줄어든상태
안타깝게도 차범근의 경우는 한국축구의 계속된 부진으로 앞으로도 날조,과대포장의 상태가 지속될것 같다..............
자그럼 이젠 차범근의 어디가 어떻게 과대포장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첫번째는 차범근은 과연 분데스리가에서 톱클래스의 선수인가?
두번째는 분데스리가는 과연 유럽최고의 리그라고 불릴수가 있는지를 살펴보자
일단 당시 톱클래스선수들과 차범근의 이적료를 비교해보자
차범근 이적료 83년 40만불
마라도나 이적료 84년 800만 달러
지코 이적료 83년 450만불 (차범근과 동갑이며 똑같은 시기에 이적)
마라도나는 예외적인 괴물로 인정하고
지코를 요즘의 지단과 거의 동급이라고 생각해보자
최전성기시절 이적료가 지단이적료의 10분의 1밖에 안되는 선수가 세계톱클래스의 선수로 불릴수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다
혹자는 차범근의 연봉이 분데스리가전체 3등이라는 소리를 하는데
차범근의 연봉순위는 알수없으나 차범근의 연봉액수는 알수있다
차범근의 연봉은 같은시기 네덜란드에서 뛰던 허정무와 같은 1억5천만원 수준
겨우 1억5천만원이 분데스연봉3위라니..........차빠들의 거짓말이거나 분데스가 워낙 돈이 없거나 둘중하나
그렇다면 분데스리가 내에서 차범근의 활약상을 보자
시즌 차범근득점 순위 소속팀득점 팀순위 팀내득점순위
79-80 12골 12위(5명) 65골 9위 1위
80-81 8골 47위(?명) 61골 5위 3위(2명)
81-82 11골 25위(3명) 83골 8위 1위(2명)
82-83 15골 10위(1명) 48골 10위 1위
83-84 12골 18위(8명) 50골 7위 2위
84-85 10골 27위(5명) 52골 13위 2위
85-86 17골 4위(1명) 63골 6위 1위
86-87 6골 ............. 56골 6위 3위(2명)
87-88 4골 ............. 53골 8위 6위
88-89 3골 ............. 45골 8위 7위
보다시피 분데스리가내에서도 중간정도의 활약을 보이는 공격수였다
득점7등했다고 설치는 79~80시즌에 차범근이 12골을 넣을때 득점1위 칼하인츠루메니게는 29골을 넣었다...............
분데스리가 공식사이트는 물론이고 차범근의 자서전에도 차범근의 포지션은 센터포워드로 나와있으니 포지션에 대한 반론은 사절한다
그렇다면 당시 분데스리가는 과연 독보적인 리그였는가?
결코 아니다
80년대 최강,최고리그는 세리에 A
차빠들은 분데스에서 함부르크가 83년에 챔스우승 한거 같고 독보적인 최고리그였다고 왕구라를 치는데 80년대 선수레벨로 보나, 이적료 규모로 보나, 챔스성적으로 보나 지금과 같은 프리미어, 라리가, 세리아가 빅리그였고 분데스리그는 확실한 2류리그였다.
UEFA 기술자문위원회가 지난해 선정한 챔피언스리그 역대 Dream Team 이다.
이것은 월드컵 기록은 배제된 것이다.
Goalkeeper:
Peter Schmeichel(덴마크) Manchester United
Defence :
Mauro Tassotti AC Milan
Marcel Desailly Chelsea, AC Milan, Olympique Marseille
Franco Baresi AC Milan
Paulo Maldini AC Milan
Midfield :
David Beckham Manchester United, Real Madrid
Frank Rijkaard Ajax, AC Milan
Zinedine Zidane Real Madrid, Juventus
Ryan Giggs Manchester United
Attack :
Marco van Basten AC Milan
Raul Gonzalez Real Madrid
대부분 알만한 이름인데 90년대에 등장한 선수 제외하고 가만 들여다보니
Paulo Maldini는 84년부터 AC밀란에서 20년간 뛰었고
Franco Baresi는 77년부터 AC밀란에서 20년간 뛰었고
Mauro Tassotti도 81년부터 AC밀란에서 17년간 뛰었고
Frank Rijkaard도 아약스에서 AC밀란으로 80년대 중반에 이적했고
Marco van Basten도 아약스에서 AC밀란으로 80년대 이적했다.
이외에도 이미 아시다시피
Ruud GULLIT도 아인트호벤에서 80년대 중반 AC밀란으로 이적했고
Michel PLATINI도 AS 생테티엔느에서 82년 200만불에 유벤투스로 이적했고
Artur Antunes ZICO도 83년 450만불에 우디네세로 이적했고
Diego MARADONA도 84년 FC바르셀로나에서 800만불에 나폴리로 이적했고
Karl-Heinz Rummenigge도 84년 바이에른뮌헨에서 300만불에 인터밀란으로 이적하였고
Lothar MATTHAUS도 바이에른 뮌헨에서 인터밀란으로 이적하였고
Johan Cruijff는 80년대초 라리가에서 뛰었고
Kevin Keegan은 79년에 사우스햄튼으로 이적하여 뉴캐슬에서 은퇴하였고
Paolo ROSSI는 82년부터 유벤투스에서 뛰기 시작했으며
Juergen Klinsmann은 Gingen이라는 분데스의 허접팀에서 데뷔했으나 80년대후반 인터밀란으로 이적하였고
Rudi Voeller도 80년대중반 인터밀란으로 이적하였다.
이뿐만 아니다.
87년 FC Porto를 챔스 우승으로 이끌며 유럽골든볼 2위에 올랐던
포르투칼의 Paulo FUTRE는 87년 라리가의 명문 애틀레티코 마드리도 이적했고
76년 프리미어의 레체스터에서 데뷔하여 빅리그에서만 169골을 기록하고
86년 유럽골든볼 2위에 올랐던 잉글랜드의 Gary Lineker도 에버튼을 거쳐 86년 FC바르셀로나로 이적했고
83년 유럽골든볼에서 2위에 올랐던 스코틀랜드의 Kenny Dalglish는 77년 리버풀에서 데뷔하여 리버풀을 챔스 2번의 우승으로 이끌고 172골을 넣었으며
80년 유럽골든볼에서 2위, 81년과 85년 유럽골든볼 3위에 올랐던 독일의
Bernd Schuster도 Augsburg라는 분데스의 허접팀에서 데뷔했으나 80년 FC바르셀로나로 이적했고 88년에는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였다.
또하나 당시 유럽골든볼 수상자들이다
1980 칼하인츠루메니게 바이에른뮌헨
1981 칼하인츠루메니게 바이에른뮌헨
1982 파울로 롯시 유벤투스
1983 미셸 플라티니 유벤투스
1984 미셸 플라티니 유벤투스
1985 미셸 플라티니 유벤투스
1986 이고르 베라노프 디나모 키에프
1987 루드 굴리트 AC밀란
1988 마르코 반바스텐 AC밀란
1989 마르코 반바스텐 AC밀란
분데스소속 수상자는 루메니게뿐인데 그도 결국 세리에A로 갔다.
차범근은 83년에 40만불에 레버쿠젠으로 이적하였는데 리그우승기록도 전무한 허접팀은 말할것도 없고 세리아와 프리미어, 라리가의 선수레벨과 이적료, 챔스성적, 역대챔스 드림팀의 면면을 봐도 분데스리그는 무슨 독보적 최고리그는 왕택도 없고 확실한 2류리그였다.
분데스가 그리도 최고리그였으면 분데스 팽하고 세리아로 간 마테우스, 루메니게, 클린스만, 루디펠러, 슈스터 빼고, 팽하고 프리미어로 간 키컨 빼고 은퇴 바로직전이던 베켄바워 쳐줄테니 그저 무조건 박박 우기지만 말고 슈퍼스타 한 10명이라도 대봐라. 스타없는 빅리그는 원숭이도 웃을 노릇이다.
말나온김에 80년대를 빛낸 선수들의 소속팀과 이적동향을 알아보자
한스피터 브리겔(Hans-Peter Briegel) / 1984년 베로나로 이적, 삼프도리아(1986-88) / B
(85년 세리아 시절 올해의 독일축구선수 선정. )
디노 조프(Dino Zoff) / 우디네세, 맨토바, 나폴리, 유벤투스(1972-83) / A
파울로 말디니(Paulo Maldini) / AC밀란(1984- ) / A
프랑코 바레시(Franco Baresi) / AC밀란(1977-97) / B+
마우로 타소티(Mauro Tassotti) / AC밀란(1981-98) / B
프랭크 레이카르트(Frank Rijkaard) / 1988년 아약스에서 AC밀란으로 이적 / A-
마르코 반바스텐(Marco van Basten) / 1987년 아약스에서 AC밀란으로 이적 / A-(부상때문에 감점)
루드 굴리트(Ruud GULLIT) / 1987년 아인트호벤에서 AC밀란으로 이적 / A-
미셸 플라티니(Michel PLATINI) / 1982년 AS 생테티엔느에서 유벤투스로 이적 / A+
아서 지코(Artur Antunes ZICO) / 1983년 브라질에서 우디네세로 이적 / B+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 / FC바르셀로나(1982-84), 나폴리(1984-91) / A+
칼하인츠 루메니게(Karl-Heinz Rummenigge) / 1984년 바이에른뮌헨에서 인터밀란으로 이적 / A-
로타르 마테우스(Lothar MATTHAUS) / 1987년 바이에른 뮌헨에서 인터밀란으로 이적 / A
파울로 롯시(Paolo ROSSI) / 유벤투스(1981-85), AC밀란(1985-86), 베로나(1986-87) / A-
위르겐 클린스만(Juergen Klinsmann) / 1989년 인터밀란으로 이적 / A
루디 펠러(Rudi Voeller) / 1987년 AS로마로 이적 / A
번드 슈스터(Bernd Schuster) / 1980년 FC바르셀로나로 이적, 88년에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 / B
(80년 유럽골든볼에서 2위, 81년과 85년 유럽골든볼 3위에 올랐음)
휴고 산체스 마퀴즈(Hugo Sánchez Márquez) / 에이 마드리드(1981-85), 레알마드리드(1985-92) / B
요한 크루이프(Johan Cruijff) / FC바르셀로나(1973-78), 레반떼(1981) / A+
로날도 코에맨(Ronald Koeman) / 1989년 FC바르셀로나로 이적 / B+
페르난도 이에로(Fernando Hierro) / 발라도리드(1987-89), 레알마드리드(1989년이적) / B+
칼하인츠 포스터(Karlheinz Förster) 1986년 올림피크로 이적 / B
파울로 푸트레(Paulo FUTRE) / 1987년 애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 / B+
(87년 FC Porto를 챔스 우승으로 이끌며 유럽골든볼 2위에 오름)
게리 리네커(Gary Lineker) / 에버튼(1985-86), FC바르셀로나(1986-89) / A
(76년 레체스터에서 데뷔하여 빅리그에서만 169골 기록, 86년 유럽골든볼 2위
케니 달글리시(Kenny Dalglish) / 리버풀(1977-90) / B+
(83년 유럽골든볼에서 2위에 올랐고 리버풀을 챔스 2번의 우승으로 이끌고 172골을 넣었음)
이안 제임스러쉬(Ian James Rush) / 리버풀(1980-96) / B (허접한 웨일즈팀 출신이므로 감점)
(프리미어리그 253골, 84년 올해의 선수)
아 가투소는 미드필더보다는 포워드 쪽에 가깝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