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매화
200424전라닷컴[한송주 괴나리봇짐] 윤회매
책벌레 이덕무 이번엔 看梅癡가 되다
윤회매(輪回梅)는 밀랍(蜜蠟)으로 만든 매화를 가리킨다. 조선후기 학자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이덕무는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癡)’라 부른 책벌레로 평생 2만여 권의 책을 읽고 2백여 권의 책을 필사(筆寫)했다. 매화사랑도 지극해서 제철 생화를 즐기는 것으로 부족해 벌집을 이용해 조화를 손수 빚어 곁에 두고 사시사철 보았다니 또한 간매치(看梅癡)라 부를 만했다.
우리 선인들의 매화 애호야 새삼 들먹일 나위가 없다. 빙등조빈연(氷燈照賓筵)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글 모임(文會 詩社)에서 얼음덩이를 잘라내어 그 속에 촛불을 두고 분매(盆梅)를 감상하는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이 정도면 풍류를 지나쳐 호사나 사치라 할 게다.
이덕무의 문집인 <청장관전서(靑裝館全書)> 10권에 ‘윤회매십전(輪回梅十戔)’이 있다. 이 책에 저자는 윤회매 만드는 10가지 과정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설명해 놓았다.
청장관은 이덕무가 간서치와 더불어 즐겨 사용했던 자호(自號)인데 해오라기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 해오라기는 물가에 가만히 서 있다가 옆에 오는 물고기만 간간이 잡아먹고 지내는 새인데 그 검렴함을 사서 호로 쓴 것이다. 이덕무의 자호는 그것 말고도 40여개가 되는데 아정(雅亭)으로 불리기도 좋아했다.
그는 서얼(庶孼) 출신이라 벼슬길이 열리지 않다가 박식하고 글솜씨가 뛰어난 게 드러나 39세에 정조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발탁되었는데 한 어전(御前) 경시(競詩)에서 최고 점수인 ‘아(雅)’를 받고 그 영예를 기려 아정이라 자호했다. 서얼 출신을 많이 등용한 정조는 이덕무를 특히 총애해서 그의 사후에 내탕금(內帑金) 5백냥을 내려 그의 유고를 간행케 하고 아들 광규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차하기도 했다.
이덕무는 20대부터 서얼 출신 글 모임인 백탑시사(白塔詩社) 활동을 주도하였고,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함께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쳐 1777년 청나라에서 이들의 시가 실린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 발간될 정도였다.
이덕무는 평생 청한한 삶을 이어갔는데 이런 일화가 전한다.
...이덕무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집안에서 제일 값비싼 것을 팔았는데, 그것이 열 권짜리 <맹자(孟子)>였다. 간서치가 책을 내다 판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전부를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덕무는 책을 팔아 밥을 해먹고는 유득공을 찾아가 자랑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유득공 또한 “그대가 옳다”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술을 샀다. 두 벗은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술잔을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며 박장대소했다. 두 사람은 밤새 술을 마시며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했다...
돌고 돌아 오늘에 재현한 윤회꽃 향기
지난번 윤회매 전시회에 갔다. 다음(茶愔)이 벌인 꽃잔치였다. 다음은 법명 범성(梵性) 속명 김창덕의 아호다. 다음은 동진출가에 산간에 오래 머물다가 중년에 세간으로 왔다. 아호에서도 알 수 있듯 잘 익은 차인(茶人)인 다음은 윤회매를 재현해 윤회매문화관을 광주 양림동 이장우 고택(광주민속자료 제1호)에 차렸다.
외모가 헌칠 수려한 작가는 재주도 팔방미인이다. 바라춤의 명인이고 지화(紙花)에 능한데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기자와는 30년 지기다.
“1998년인가, 이덕무 선생의 ‘윤회매십전’을 읽고 윤회매를 되살리고 싶어졌습니다. 차인이었던 선생의 삶이 저를 사로잡은 것이지요. 책에 나온 대로 밀랍과 노루털, 나뭇가지, 색소 등 천연재료들을 사용해 윤회매 재현 작업을 시작했어요. 홍매화는 분말로 된 붉은 매화로, 청매화는 분말로 된 쪽빛을 구해와 색을 냅니다. 물론 나뭇가지도 생것을 매화님에게 빌려서 쓰지요.”
가을에 전지한 매화 가지를 한 달 동안 말린 다음 좀이 생기지 않게 끓인 밀랍에 담근다. 대추나무로 만든 매화봉으로 녹인 밀랍을 찍어 물에 띄워 꽃잎 하나하나를 만든다. 꽃잎을 만드는 데만 사흘이 꼬박 걸린다. 꽃술은 끝을 염색한 노루털을 심어 표현한다. 만든 꽃잎들을 엮어 지져서 붙이고, 가지에 옮기면 홍매, 청매, 백매가 완성된다. 꽃잎을 만들 때면 향긋한 꿀향이 퍼져 실제로 벌이 날아들기도 한다.
그동안 물론 시행착오도 숱하게 겪었다. 처음에는 밀랍을 구할 수 없어 촛농으로 윤회매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담양 양봉농가에서 밀랍을 구해 본격적으로 윤회매 재현을 본격화 했다.
2015년 밀라노 트리엔날레에도 참여했던 그는 이제 영역을 확장시켜 ‘윤회도자화’를 창안하고 퍼포먼스를 통해 감상인들과 교감하기도 한다. 밀랍매를 항아리에 꽂아두면 먼지가 앉기도 하고 바스라지기도 하기 때문에 평면화해 말차 마시는 다완, 꽃 꽂는 화병 등 차와 어울리는 우리 도자기와 접목시킨 것이 윤회도자화다.
그는 6개월에 걸쳐 한글과 한자본으로 각각 필사하고 절첩식으로 이어붙인 윤회매 화첩을 이번에 공개했다. 펼치면 한자본은 10m30㎝, 한글본은 22m76㎝나 된다. 그의 대단한 이덕무사랑을 알게 한다.
글 한송주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