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번 과제를 하러 용두산 공원에 다녀왔다. 용두산공원에는 충무공 동상 과 4*19혁명 위령탑과 안희제 흉상등 자기 주체성뿐만 아니라 민족 주체성을 알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시원한 저녁바람을 쐬고 그곳에서 보이는 바다를 보며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보았다.
살아 있는 인간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행복을 무엇으로 정의하는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행복한 삶을 잘사는 삶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물론 여기서 잘 산다는 말은 부유하게 살거나 부족함 없이 지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은 단지 현대산업사회에서 관용화 되어버린 특수한 의미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잘산다는 것은 화가가 그림을 잘 그리듯, 수영선수가 수영을 잘 하듯이 삶을 잘 풀어 나가는 것을 말한다. 풀어 나가야 할 삶의 방식은 동물이나 다른 존재자들이 그들의 생명을 단순하게 이어 나가는 방식과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단지 생명뿐 아니라 "삶"이라는 독특한 존재방식을 갖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래서 삶은 본래 그것을 사는 자 즉 인간의 주체성을 떠나서 논의 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인간만이 삶을 갖는다는 말과 인간은 주체적이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이 주체적일 수 없다면 그는 자신의 삶을 갖지 않는 것이고, 자신의 삶을 갖을 수 없는 한 행복해 질 수 없으며 행복해질 가능성이 없는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삶을 두 가지 태도의 것으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살아가는 삶" 이고 하나는 "살아 있는 삶"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자만이 인간적 삶이고 후자는 그저 생물학적 의미의 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는 삶의 본질인 주체성을 결하고 있어서 행불행의 문제를 고려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음식물을 먹으며 꼬리치는 강아지를 행복한 강아지라고 한다면 이때의 강아지의 행복은 일종의 유비적 추리를 통해서 인간에 의해 판단된 강아지의 존재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방식이 자신의 주체적 선택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타의에 의해 결정되는 인간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인간을 단지 생물학적 이유만으로 인간이라고 부르거나 그의 행불행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행복과 불행을 논하는 것은 오직 그가 인간다운 인간 즉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의미화 시켜 나갈 수 있는 주체적 인간에 한해서이다.
사랑은 철학,종교,예술이 인간회복을 위해서 내리는 궁극적 결론이자 유일한 처방이다. 따라서 주체성의 회복은 오직 인간의 자기본질에 대해 사랑과 그에 대한 복위에의 정열로써만 가능하다.
일찍이 공자도 인간이 하늘이 내려 준 선천적 본성[천명지위성]에 따르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할 도리[솔성지위도]라고 말하고 그를 위한 실천적 규범으로서 [극기복례]를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존재의 궁극적 목표인 행복은 그가 타고난 선천적 본질이 예를 떠나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소외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늘이 내려 준 인간의 선천적 본질이 오염됨으로써 예로부터 떠나는 자기부정의 한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공자는 자기부정에 의해 소외된 자아를 넘어서서 본래의 자기 즉 예로 돌아가는 것은 오직 사랑의 실천에 의해서 가능하다 하고 이를 통하여 비롯되는 인간소외를 극복하라고 말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말들은 시공을 뛰어넘고서 더욱 깊어지는 의미로 다가온다. 결국 인간회복은 인간의 선천적 본질에 대한 사랑과 그것에로 돌아가려는 의지의 결단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자기 중심성을 극복하고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는 넉넉한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리라 믿는다.
첫댓글 [2]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3] 살아가는 삶과 살아있는 삶. 우리는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지요, 좋은 의견에 감사합니다^^
(3) 살아가는 삶, 살아있는 삶... 좋은 의견입니다. ㄳ
[2] 수고하셨습니다.
[4]생의(生意)와 생(生)은 구별되지... 삶에의 의지라고 하는 부분은 아무래도 비엔나 제3학파를 떠 올리게 하는데, 두 사람이 공동작업한 흔적을 좀 더 드래낼 수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