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이디스미스 일대 배치도
1899년 11월 2일, 레이디스미스의 전방의 펩워스 언덕의 전투에서 영국군을 도시 안으로 몰아 넣은 보어군은 곧바로 우세한 병력을 활용해 레이디스미스를 포위했다. 보어군이 더반으로 가는 철로를 봉쇄하기 전에 프렌치 소장과 그의 부관인 더글라스 헤이그 소장(1차대전 솜과 이프르 전투때 삽질로 유명한)은 이미 철도를 타고 포위를 빠져나간 뒤였다. 이제 이 공방전은 118일여간 계속된다. 그 사이 몇번의 구원 시도가 있었는데 첫번째 구원 시도는 1899년 12월 15일에 일어난 콜렌소 전투(Battle of Colenso)다.

▲ 콜렌소 전투를 하기전 보어군의 루이스 보타 장군.

▲ 코렌소 전투 당시의 양군 배치도 영국군은 콜렌소라는 마을에서 보어인들의 방어선을 뚫고 레이디스미스를 구원하려 했다.
영국군의 장군 레드버스 불러는 케이프 식민지에서 파견된 14,000명의 영국군을 거느리고 철로를 중심으로 보어군의 포위망을 공격하려 하였다. 영국군은 투겔라 강( Tugela River ) 에서 패주하여 레이디스미스로 밀렸지만 마페킹과 킴벌리에서 수비대의 선전으로 레이디스미스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투게라 강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보어군의 공세에 밀려 레이디스미스의 남쪽에 위치한 콜렌소라는 지역까지 후퇴했다. 한편 다른 방면으로 진출하던 영국군은 스톰버그와 마거스폰테인에서 패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오자 가능한 서둘러 레이디스미스의 영국군을 구원하여 남아프리카 전체 영국군을 정비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레이디스미스 영국군에게 포트지터 집단에 주의하라는 전문을 보냈으나 곧바로 함정에 빠져 고립되는 형편이 되었다. 결국 그는 12월 13일 부터 콜렌소 이틀간이나 포격을 퍼붓고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보어군 총사령관 피에트 쥘베르트는 낙마해서 부상을 당해 지휘할 수 없자 루이스 보타가 보어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보어군은 특공대를 이용하여 원거리에서 정확성 있는 집중사격으로 공격하는 전술이였다. 루이스 보타는 주력부대를 강변 북쪽에 배치하였고 영국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하면 공격을 가하겠다는 전술이였다. 우선 군대를 나누어 로빈슨 집단을 콜렌소에서 13km 떨어진 상류에 배치하였고 브리들 집단은 4.8km 떨어진 상류에 배치했다. 푼트 집단은 브리들 집단의 동쪽 고리모양의 강변 끝에 배치되었고 추가로 강변 제방의 저지대에 배치되었다.
영국군은 유능한 장교들이 많이 없다는 점이 약점이였고 그나마 있던 장교도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다. 또한 이곳 지리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으며 지도 또한 오류가 많아 포병장교로 하여금 이곳 기찻길 주변과 농촌 지형을 측량하고 대강 스케치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제 5 아일랜드 여단이 강을 건너 브리들 집단을 공격하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 여단은 피츠로이 하트 소장 지휘아래 왕립 인니스킬링 제 1 퓨질리어 연대와 콘노트 제 1 레인저 연대, 왕립 더블린 제 1 퓨질리어 연대, 국경 제 2 수비대로 구성되어 있다. 헨리 J.T. 하이드야드 소장이 이끄는 제 2 여단은 콜렌소 마을을 점거하며 이 여단은 데번셔 제 2 연대, 왕립 제 2 여왕의 연대, 웨스트 요크셔 제 2 연대, 이스트 서리 제 2 연대로 구성되었다. 공격 지원은 C.J 롱 대령이 지휘하며 제 16, 44 왕립 포병대와 12 파운드의 해군포가 지원하기로 했다. 나머지 기병 여단은 J.F 머도치 대령의 지휘아래 공격의 좌측을 엄호하며 하트와 하이드야드의 군대가 강둑에 도착하면 곧바로 후방의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2개의 여단은 예비대로 남았으며 제 4 경보병 여단은 네빌 리들턴 소장의 지휘아래 스코틀랜드 제 2 소총 연대, 콘서트 왕자의 여단 제 1, 3 대대, 더햄 제 1 경보병 여단으로 구성되며 제 6 퓨질리어 여단은 제프리 바튼 소장이 지휘하며 제 2 왕립 퓨질리어 연대, 스코틀랜드 제 2 왕립 퓨질리어 연대, 웨일즈 제 1 왕립 퓨질리어 연대, 아일랜드 제 2 왕립 퓨질리어 연대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제 7, 63, 64 포병대, 12파운드 포와 4.7인치 해군포는 기병 지원 또는 예비대로 남겨두었다.
▲ 콜렌소 전투의 배치도와 영국군 진격로
▲ 콜렌소의 영국군
▲ 콜렌소 여왕의 연대가 진군하는 모습을 그린 삽화
▲ 포를 구하려고 시도하는 영국군,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여기서 6명의 병사는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
12월 15일 아침 하트는 군대를 사열하고 강을 건너 브리들 집단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현지에서 고용된 안내인은 잘못된 지역으로 가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또 하트는 지침서대로 움직이려 했지만 푼트 집단을 브리들 집단으로 오해하여 결국 이것은 루프 모양에 위치한 (위 지도를 보면 U 자로 패인 부분) 지역으로 진군하게 되버렸다. 하지만 여기서 영국군은 큰 실책을 범했는데 보어군의 화력을 잘 몰랐던 원정대는 화기의 발전으로 화력의 위협을 경시하면 피해가 크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밀집 대형을 고수해 진군했다. 보타는 영국군이 강을 도하하려고 움직이자 곧바로 일제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트는 여울쪽을 건너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생각보다 여울은 깊었고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해메게 되어 결국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하트는 병력들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하이드야드또한 콜렌소로 움직였다. 찰스 제임스 롱 대령은 포대 구축해 영국군의 공격을 지원하고자 했는데 이 대령은 옴두르만에서 전투 경험이 있었다. 그곳은 탁 트인 사막지형이였고 보병의 진군에 포병이 지원사격을 해도 별다는 문제는 없었지만 문제는 여긴 수풀이 무성하고 험지였고 결정적인 것은 보어군이 매복해서 영국군을 공격했던 것이다. 또 포를 배치한 구역이 보어군 진지에 너무 가까워서 소총 사정거리내에 들었다는 점이다. 영국군 포병은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 공격으로 인해 포탄도 제대로 챙겨올 수 없었다. 또 해군포도 보어군 진지에서 1,500m에 배치된게 화근이 되어 운반하던 소가 죽어 운반조차 할 수 없었다. 불러는 기병대의 공격이 좌절되자 기병대를 뒤로 물렸고, 하이드야드 부대는 그대로 콜렌소를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또 지원자들을 모아 편성해서 전방에 방치된 포를 가져오게 했다. 이 과정에서 두팀이 편성되어 대포에 고리를 걸어 끌어 올려고 했지만 두번의 시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오후가 되어 영국군은 기지로 후퇴했고 이 과정에서 10개의 포와 부상자들, 하이드야드 부대 일부 병력이 방치되었다. 결국 이들은 밤에 포로로 붙잡히고 10문의 포는 포획되었다. 14,000명의 병력과 2,700명의 기병, 44문의 포중에서 143명이 전사하고 755명이 부상당했으며 240명이 전투중 실종 되었고 10문의 포를 잃어버렸다.
이 전투의 후폭풍은 상당했다. "암흑의 일주일"의 대미를 장식한 전투였고 영국군은 큰 충격에 빠졌으며 이후 스피온 고지 점령에 실패한 불러를 해임하고 지휘관을 프레드릭 로버츠 원수로 교체했다. 그리고 로버츠 원수는 다시 병력을 재정비 하여 영국군의 전술을 전반적으로 수정한다. 여담으로는 윈스턴 처칠은 더햄 경보병 소속으로 이 전투에 참전했는데 포로가 되어 트란스발 행 열차로 가는 도중 열차에서 간신히 탈출해 영국군에 귀환하였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영웅이 되었고 정치계에 입문할 수 있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