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John Doe
경상도 상남자 아버지께서는 하루종일 몇 마디 안 하신다. 오전에, 왔냐? 한밤에, 가냐? 두 마디만 하신다. 남동생이 평생 아버지랑 함께 말한 시간이 한 시간도 안된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입에 지퍼를 달고 태어나신 분이다. 식사할 때만 입을 연다. 팔순을 넘기시고도 수십 년째 역사공부 중이시다.
어린 시절, 과묵한 아버지께서 유독 애착을 갖고 자랑스럽게 언급한 인물이 <을지문덕 > 장군이다. 소가죽을 엮어서 강물을 막아 수나라군을 물리쳤다는 부분에서 젊은 아버지의 경상도 특유의 억양이 더욱 거세졌다.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 상당히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아버지는 왜 평생 역사를 공부할까? 궁금했는데 이제 나이를 먹고 보니 알 것 같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바로 과거였다. 역사는 파도 파도 신비롭다.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찾아내야 할 우리의 유산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셜록 홈스처럼 그를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역사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다. 정답이 수시로 바뀐다. 어린 시절 위인전에서는 을지문덕은 병든 노모를 모시고 사는데 나라가 위험에 빠졌을 때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고 했다.
을지문덕의 성이 을, 이름이 지, 문덕이 자일수도 있고 을지문덕이 직책일 수도 있다. 을지가 성 이름이 문덕일수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그를 평양 출신이라고 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출신지 미상이라고 했다. 그가 남에서 왔건 북에서 왔건 그는 멋진 남자였고 그가 수십만 대군을 물리친 명장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수나라를 혼자힘으로 물리쳤다는데 그에 관한 기록은 마치 신원미상의 남자를 가리키는 John Doe와 같다. 단재 신채호는 을지문덕과 고건무가 대립해서 가문이 몰락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했다. 영류왕에 의해서 연개소문에 의해서 그의 최후에 대한 기록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서 더욱 신비롭다. 전란중, 소실 가능성도 있다. 그의 묘도 후손도 없는 것을 보면 영웅의 말년이 평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수대첩당시 그는 최고위 직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었을 것 같다. 최고위직에 병든 노모라고 했으니 제발 효자인 그가 천수를 누렸기를 상상해 본다. 역사의 무대는 절대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역사상 영웅의 길은 3가지뿐이다. 1번 숙청당한다. 2번 소리 없이 사라진다. 3번 왕이 된다.
고대에 강의 흐름을 어찌 막았을까? 살 수는 황하 하류이다. 진흙뻘이다. 달고나 커피 같은 강 앞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과연 어떻게 30만 대군을 물리쳤을까? 정말 소가죽을 사용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전쟁사 중 최고의 명장인 그의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더욱 마음이 간다.
아름다운 나라 고구려 최고의 남자를 상상해 본다. 그는 무와 문에 통달한 자이다. 유교 불교 도교를 공부했다. 하늘을 이용할 줄 알고 적의 심리를 교묘히 사용한 협상의 대가였다.
을지가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한국 삼대 명장 중 한 명인 그는 전설 속 인물처럼 미스터리하다.
30만 대군이 순식간에 2700명만 남고 사라진다. 전쟁사 중 최고의 인물이다.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더 끌리는 게 인간이다. 수나라 최고의 적은 을지문덕이었을 것이다. 수나라 곳곳엔 현상금이 걸린 수묵화가 거리에 난무했다. 수나라에서 반드시 생포해야 하는 인물이 고구려의 영류왕과 을지문덕이었다. 고대 전쟁에서 백만 대군을 가진 것도 수나라가 처음이고 백만 대군을 물리친 것도 을지문덕이 처음이다.
을지문덕이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와 고구려 왕궁에서 축배를 들던 그 순간이 권력의 마지막 정점이었을 수도 있다. 큰 호랑이 두 마리가 함께 할 수 없는 법이다.
강원도 인제 육군 부대 12사단이 을지부대라는 것은 알고 있다. 서울 을지로에 가서 을지문덕을 물어봐도 그의 마지막을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정치가 혼동스러운 요즘 모두가 갈팡질팡한다. 최악의 경지인 무관심에 이르렀다. 역사를 상상 함으로 우리의 미래를 그려 본다.
전쟁에서 돌아온 영웅은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이순신 장군처럼 그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존 세력의 방어가 그를 지웠을 수도 있고 당나라가 고구려 기록을 태워버렸다는 설도 있다. 그는 환생해서 이순신이나 안중근으로 변신했을 수도 있다. 또다시 영웅의 환생이 기다려진다.
그가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전설이라도 있기를 기대해 본다. 죽으면 저승에서 을지문덕 장군 팬클럽 만들어야겠다. 그를 연모하는 아줌마 부대를 모을 것이다. 나이를 먹으니 죽음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난 오늘도 공부를 한다.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